« Previous : 1 : 2 : 3 : 4 : 5 : 6 : Next »

새벽 1시 12분.
마이클은 이번에도 손톱을 세워 손목시계의 유리판을 톡톡 건드렸다. 자질구레한 흠집이 지나치게 많이 생긴 까닭이 아무래도 이 독특한 손버릇 때문일 듯하다. 그래봤자 본인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니 상관없다. 어차피 시계는 상표도 없는 싸구려였고, 애초부터 그는 남들과 달리 정밀한 고가 시계나 신형 자동차 같은 물건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건전지가 닳아 초침의 움직임이 둔해지면 휴지통에 버릴 것이고, 대형마트에 들려 이를 대신할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을 하나 고르면 되었다.

『졸려 미치겠네...』
산책 나온 기분으로 천천히 걷다 머리가 띵한 느낌에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서서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이 변함없이 찾아올 내일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 어디서 길고양이가 먹이를 구하는 중인지 쓰레기통 쇠붙이가 텅 소리를 내며 울려 짙게 가라앉은 공기를 흔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올리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다한들 밤눈이 어두운 마이클의 시야엔 고양이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양철 뚜껑을 밟았다가 지레 놀라 멀리 도망간 건지도 모르겠다.

『으아함~』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 채 호주머니로 두 손을 끼워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살고 있는 아파트와는 정 반대방향이었지만 순찰을 하느라 여러 번 돌아다녔기에 부근의 지리에 대해선 대략적으로 꿰고 있는 상태다. 조금만 더 걸으면 이 앞으로 문을 닫은 슈퍼마켓이 있다. 굳게 내려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 녹슨 셔터 위에는 스프레이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다. 하트와 번개무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림이다. 낙서가 뜻하는 바는 분명하지 않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심장을 100만 볼트로 튀겨버린다? 그보다 랭.KK 라는 이니셜이 눈에 익다. 도시 곳곳에 불법 페인팅을 남기는 자다. 최근에 작품 활동을 한답시고 고가 전철 위에 기어 올라갔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저 슈퍼마켓 셔터 위의 흔적은 그의 유작이다.

곁눈질도 하지 않고 지나쳐 약 빨은 보안등이 레이저 포인트처럼 점멸하는 작은 2층 건물로 향했다.
몇 년간 도색 공사를 하지 않아 헐벗은 콘크리트 표면을 드러낸 건물에는 골동품 가게가 하나 세 들어 있다.
옛날에는 전당포라고 했었지, 아마.
노트북이나 금목걸이, 반지, 명품가방 등을 헐값에 사들이고 인터넷을 통해 중고물품으로 팔아치우는 가게다.
당장 돈이 궁한 사람들이 주요 고객들인데 문제는 뒷손님이었다.
이 가게에서 판매되는 물건의 10~12%는 비정상적으로 거래된 장물이었다.

『이봐, 트랭키. 문 열어. 지금 가게 영업 아직 안 끝났다는 거 다 알거든?!』
「닫혔음」이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을 무시하고 입구를 두드렸다.
『트랭키이이~ 안 나오면 쳐들어 간다아~!』
입구를 감시하는 보안 카메라가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자 렌즈를 향해 뭔가를 쓱 내밀었다.
만능 출입증인 경찰 배지는 아니고 - 엉뚱하게도 포장을 뜯지 않은 츄파춥스 캔디였다.
『나도 온 동네 시끄럽게 만들기 싫거든? 좋게 얘기할 적에 빨리 문 여시지?』
안에서 CCTV로 전부 보고 있었는지 삑, 소리가 나면서 출입구의 잠금 장치가 해제되었다.
『착하구먼.』
츄파춥스를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뒤, 마이클은 손이 아닌 발을 사용해 출입문을 밀었다.

『제기랄, 무슨 일이쇼.』
카메라와 핸드폰, 노트북 같은 전자제품이 빼곡히 들어찬 유리 진열장 앞에서 털 복숭이 사내가 인상을 썼다.
우호의 의미로 그의 두꺼운 손바닥이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그거야 눈속임이고 - 여차하면 진열장 안쪽에서 장전된 산탄총을 꺼내 단 0.3초만에 방아쇠를 당길 거라는 걸 마이클은 잘 알고 있었다.
트랭키는 숙련된 사격수였다.
여기서 숙련되었다는 의미는 사물을 잘 맞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에게 총알을 날림에 있어 전혀 망설임이 없음을 가리킨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은 적이 있는 방향이 아닌 엉뚱한 방향을 향해 상당수의 총알을 낭비하게 되는데 전체에서 70%가 그렇고 나머지 30%는 참호를 노리고 똑바로 사격한다. 그리고 이들 30%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 단 0.2%만이 적의 머리를 정 조준하는데 트랭키는 이 0.2%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남성 호르몬 분비의 과다로 머리 정수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금발의 사내가 불만에 가득 차 마이클을 쏘아보았다.
『물건을 팔러 왔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일단 장사꾼 멘트를 날리고 보았다.
어랍쇼, 그런데 의외로 마이클은 거기에 호응했다.
『이거, 손목시계 팔면 얼마 줄 수 있어?』
트랭키는 코웃음 쳤다. 걸레를 가져와 뭘 어쩌겠다고. 솔직히 공짜로 준다고 해도 받기 싫었다.
『40센트?』
『오케이... 그럼 전화 통화 정도는 가능하겠네?』
망설임 없이 시곗줄을 푸른 마이클은 낡고 흠집 난 싸구려를 유리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위협하듯 체중을 앞으로 기울였다.

『시계를 내놓겠어. 그러니 40센트의 값을 하라고, 트랭키. 장물아비인 루카스 모드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줬음 좋겠어. 설마,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루모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래도 명색이 자네 동업자인데.』
같지도 않은 요구에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이보쇼. 공중전화가 필요한 거라면 가게 밖에서...』
『STOP, 트랭키.』

마이클 윈저의 키는 174cm다. 체격은 보통. 셔츠를 가슴꼭지 부근까지 걷어 올리면 단단한 근육 대신 물렁거리는 뱃살이 드러난다. 게으른 성격의 그는 땀 흘리는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체력단련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남들 허리 굵기의 팔뚝을 가진 트랭키에겐 말 그대로 한 방 꺼리였고, 주먹 대신 손바닥으로 후려쳐도 골로 가고도 남았다. 그런 주제에 남이 하는 말을 싹둑 자른다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는 행위다.
「걍 쏴버릴까.」
트랭키의 눈썹이 실룩 움직였다.
손을 진열장 아래로 내려 산탄총을 움켜쥐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1초.
하지만 의외다 싶게도 트랭키는 마이클의 머리를 쪼개버리는 대신 모토로라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거로는 내가 손해를 보는 기분인데.』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두꺼운 엄지손가락으로 열 개의 숫자를 눌렀다.
예의 익숙한 뚜루르 신호음이 뒤를 따랐고 마이클과 트랭키 두 사람은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루모에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 같으니 내가 먼저 얘기를 해보겠소.』
『이미 관 뚜껑 열고 다리 하나 집어넣었는데 마음의 준비랄 게 왜 필요하나.』
『남은 다리까지 관속으로 집어넣을지, 아니면 다리를 뺄지, 녀석이 아직 결정 못 했을 수도 있잖소.』
『됐어. 결정 장애가 핑계가 되어주지는 않는 법이지.』
핸드폰을 낚아챈 마이클은 악마처럼 미소 지었다. 그리고 외쳤다.
『헤이, 루모! 지금 거울을 보고「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다섯 번만 말해볼래?』
상대방이 헉 소리를 내고는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아니, 들리는 잡음으로 보자면 정상적으로 종료 버튼을 누른게 아니고 깜짝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것 같았다.
『그것 봐요. 녀석에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라고 했잖소.』
트랭키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마이클은 리듬에 맞춰 발을 까딱거렸다.

사탕을 입에 문 채로 거울을 보고.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다섯 번 말해요.
그럼 죽었던 망령이 되살아나 당신 뒤에 까꿍 인사하며 서 있을 거에요.
붉게 흐르는 건 크랜베리.
찐득거리는 건 허니 라즈베리.
안녕, 안녕, 미스터 츕스.

Posted by 미야

2016/06/17 11:13 2016/06/17 11:1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22

Leave a comment

이상조짐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고담의 범죄율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납치, 마약거래, 살인과 같은 심각한 범죄가 아니라 소매치기나 편의점 도둑, 지하철 성추행과 같은 자질구레한 범죄들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 심각성을 몰랐다.
서서히 데워져가는 들통 속의 개구리는 자신이 삶아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죽는다고 했던가, 깊어지는 치안 악화에 사람들은 패스트푸드의 트랜스지방 탓을 하거나 배기가스로 오염된 공기 탓을 했다. 그리고 이 미쳐 날뛰는 모든 악행이 종말에 이를 즈음에 시장 선거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범죄와의 전쟁은 때로 정치 선전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싸이렌 소리가 아무리 자주 들려도 그걸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운동 전략으로 여겼다.

「범죄 관련 뉴스를 잔뜩 때린 뒤에 여론이 악화되면 시장 후보가 선언하는 겁니다. 이 모든 잘못을 제가 반드시 바로 잡겠습니다~!! 그럼 순진한 유권자들은 기립박수를 치는 거죠.」
「그런데 이걸 어쩌죠. 우린 너무 익숙해졌어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고담은 항상 범죄가 들끓었습니다.」
토크쇼를 진행하는 루이 시켈이 카메라 앞에서 신랄하게 공화당 선거 전략을 까고 나섰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이 모든 건 얄팍한 눈속임이 아니었다.
컴퓨터 통계자료에 의하면 크고 작은 범죄율이 12%나 상승했다.
배트맨이 이 사실을 고든에게 귀띔을 해줬을 적에 두꺼운 안경을 쓴 반백의 GCPD 경찰국장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구치소가 항상 미어터질 지경이라 좀 이상하다 생각은 했소만... 그 정도였다고?」
「조커나 펭귄, 투페이스 같은 빌런만 염두에 두니까 사소한 디테일을 놓치는 걸세, 지미.」

그리고 거기에는 미묘한 패턴이 있었다.
흡사 도시 전반으로 범죄 투어라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배트맨이 파악한 바에 따르자면 잡범들은 외지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 무슨 백화점 쇼핑이라도 하듯 범죄를 저지른 뒤, 뒷골목에서 탈취한 자가용을 몰고 고담을 떠났다. 운이 나쁜 몇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나머지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관광하듯 고담으로 돌아와 편의점 금고를 강탈하거나 귀가하는 여성을 덮쳤다.
「자, 잠깐만 기다려보게, 배트맨.」
「여기 내가 분석한 데이터가 있네. 자네에게 주지.」
「도시 바깥으로부터 범죄자들이 유입되고 있다고?!」
「그들 한명 한명은 별 대수롭지 않지만 가랑비가 모여 강물이 되는 법이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걸세, 짐. 누군가 뒤에서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게 분명해.」

팀 드레이크 - 레드로빈은「못된 장난」이라는 표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 아세요? 배트맨. 난공불락의 큰 요새를 몰락시키려면 병든 쥐 세 마리면 충분하다는 걸.」
실제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도시를 점령한 정복자가 있었다.
「자니베크 칸은 병으로 죽은 쥐를 투석기를 사용해서 도시 성벽 안으로 집어 던졌죠. 나중엔 새카맣게 썩은 병사들의 시체도 던졌고요. 덕분에 페오도시아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어요. 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폐허가 되었죠. 그 뒤의 중세 유럽의 역사는 우리가 배운 그대로에요.」
「누군가 우리에게 병든 쥐를 떼로 보내고 있다는 거군.」
「비유하자면 그래요. 누군지 몰라도 무척 악랄한 수를 쓰고 있는 것 같네요.」
「배후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내야겠다.」

그런 까닭으로 운 나쁜 소매치기가 밧줄에 발목을 묶인 채 3층 건물 높이에서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꺄아아악~!!」
배트맨은 경고도 하지 않고 소매치기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물론 그는 불살주의자다. 줄의 길이가 짧았기에 소매치기의 머리는 지면에는 닿지 않았다. 하지만 체중과 가속도 탓에 밧줄에 꽁꽁 묶인 발목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탈구되었다.
「누가 너를 이리로 보냈지.」
「크아악, 크아앗~!! 아프다고, 아파! 제발, 제발!」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를 배트맨은 다시 공중에 매달았다.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 또한 밤새도록 이러고 싶지 않아. 누가 너를 이리로 보냈지?」
「고문은 불법이야, 불법이라고~!! 아악, 내 발! 내 발이 뜯겨져 나갈 것 같아~!!」
「그 자의 이름을 대면 널 당장 병원에 보내주겠다.」
「개새끼!!」
「그 자의 이름이 개새끼인가.」
「멍청이! 그럴 리 없잖아~!!」
「그럼 누구지.」
「이이잇!」
배트맨은 침착하게 줄을 조정했다.
「알았어.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죽을 거 같다고 생각한 소매치기가 새파랗게 질린 채 한 이름을 외쳤다.
「미스터 춥스! 미스터 츄파춥스야! 춥스가 날 고담으로 보냈어!」

어쩐지 비만과 당뇨병에 걸릴 듯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철거 예정이던 공장에 불을 지르려 했던 방화범을 붙잡아 심문하고 성추행범의 손가락을 분질러서 미스터 츄파춥스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어냈다.

- 스타 시티에 주소지가 있음.
- 단독 행동을 좋아함. 아니면 내부 조직에 명령체계가 없음.

불장난을 하려다 붙들려 호되게 경을 치게 된 방화범이 미스터 츄파춥스의 몽타주를 만드는데 기꺼이 협력했다.
하지만 그다지 도움은 안됐다. 완성된 몽타주 속의 얼굴은 싸구려 냄새가 풀풀 나는 할로인 가면이었다. 한쪽 눈은 햇빛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리고, 뺨이 찢어져 너덜거리고, 벗겨진 피부 아래로 치아와 턱뼈가 드러난 외모였다. 투페이스는 얼굴 반쪽까진 정상이었는데 이쪽은 전부가 망가졌다.
「너, 마약을 하나.」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에... 또. 가끔 합니다만. 그래도 어젠 하이를 안 했지라요.」
「정말로 이런 외모였다고?」
「그러니까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한 뒤, 방화범은 턱짓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배경으로 오렌지 빛깔의 화염을 그려줄 것을 당부했다.
「이왕이면 머리카락도 훨훨 타는 모습으로 그려주쇼. 내 진짜 드러워서... 퉷.」
「이상하군. 왜 그렇게 싫어하지. 네놈의 두목이잖아.」
「그런 끔찍한 소리 마세요. 그럴 바엔 차라리 바퀴벌레를 제 형제 삼겠어요.」

왜 그가 미스터 츄파춥스를 그렇게나 혐오하는지 짐작을 못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이유가 나왔다.
GCPD에 체포된 날치기 하나가 춥스의 비밀을 지켜줄 의리 따윈 없다며 이실직고를 해버린 것이다.
「경찰이라고?」
「정확하게는 부패 경찰이에요, 배트맨. 이름과 소속은 아직 불명이지만 불법 거래를 눈감아주고 현장에서 붙잡혀도 체포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여러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하더군요. 포주를 협박해서 한 번에 만 달러 이상의 돈을 요구한 적도 있었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쇠지레나 야구 방망이를 써서 폭행을 했다더군요.」
레드로빈은 세 명의 용의자를 추려 나이트윙과 배트맨에게 보여줬다.

「어떻게 용의자를 확정했지, 레드로빈?」
침착하게 내려앉은 배트맨의 목소리는 흡사 어려운 과제를 검사하는 선생님 같았다.
그리고 레드로빈은 실제로 숙제 검사를 받는 기분을 느꼈다.
「불법 거래를 눈감아주고 현장에서 범인을 붙잡아도 체포를 하지 않음 - 이게 키워드에요. 다시 말해 부패 경찰의 근무 실적은 바닥이고 검거률이 평균치 이하겠죠. 실제와는 달리 눈가리개 효과로 그 사람이 근무하는 시간에는 마치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것을 전제로 최근 1년간 스타 시티의 잡다한 사건 사고 기록을 수집하여 분류해봤어요. 살인사건이나 마약거래, 조직폭력과 같은 굵직한 건은 미스터 츄파춥스가 터치하기 곤란했을테니 일단 2순위로 밀어뒀고... 도둑질, 단순폭행, 성매매 같은 사건의 검거 시간대를 각 구역별로 정리해서... 쨘.」
컴퓨터 화면으로 수백, 수천의 붉은 점들이 빠르게 찍혀나가자 확실히 점이 덜 찍힌 흰색 바탕이 눈에 보였다.

「소개합니다, 미스터 츄파춥스입니다. 아니, 그의 근무 시간이랄까. 아무튼.」
레드로빈이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하며 코를 으쓱였다.
물론 배트맨이 잘 했다 소년탐정을 칭찬하는 일은 없었다.
허나 딱딱하게 굳은 배트맨의 입매가 잠시나마 부드럽게 변하는 걸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었다.

『...... 그때는 이미 다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라며 쉽게 생각했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던 딕 그레이슨은 쓰게 웃었 - 아니, 지금은 히어로 코스튬을 입고 있으니 나이트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 뼘 너비의 담장 위를 전력질주 하듯 빠르게 뛰어가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소방용 비상계단 위로 착지했다.
주의는 했다만 소음이 전혀 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잠시 귀를 뾰족 세우고 숨을 고른 뒤, 그제야 안전하다 판단한 그는 잔뜩 눌렸다 튕겨 오르는 스프링처럼 팔을 움직여 소방계단 맨 윗단으로 줄을 걸었다. 길게 늘어났던 줄은 언제 그랬냐며 줄어들었고, 79kg의 체중이 잡아당겨지며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웃한 골목 아래로는 한밤중의 차가운 기운을 뒤집어쓴 자가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느리게 걷고 있었다.
집에 가서 이빨 닦고 자겠다던 마이클 윈저였다.
피곤하고 졸린지 간혹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어쨌든 문제는 여기가 그의 집과는 완전히 정 반대 방향이라는 거였다.

Posted by 미야

2016/06/14 16:23 2016/06/14 16:2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21

Leave a comment

매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참 좋았을 거라 안타까워하며 저 멀리 보이는 인영을 주시했다.
별 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싶었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에 고담 시에서 한 정신병자가 경찰서장을 노리고 소형 미사일을 날린 적도 있었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따지고 보자면 도심 한 복판에서 로켓포를 쏜다는 건 온갖 미친놈들이 다 모였다는 고담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이쯤해서 마이클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난간 앞으로 상체를 바짝 붙였다. 저격용 라이플 정도라면 이곳 스타 시티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둠 속에서 붉게 타들어가는 담뱃불은 완전한 목표물 조준점이었으니까.
깨닫고 나자 우라질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옥상에는 마이클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그들 전부가 흡연자다.
물고 있던 츄파춥스 사탕을 입에서 빼낸 채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몇 명은 이미 자리를 떴고, 채 꺼지지 않은 불빛 두 개가 남아 있었는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냉각탑의 구조물 위치 탓에 반대편 건물에서 저격하기엔 각도가 나빴다. 순전히 우연이었겠지만 명줄이 긴 것이 분명한 행운의 흡연자 두 명은 콘크리트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자기네들끼리 잡담 중이었다. 보나마나 이혼한 마누라 욕에 재혼한 마누라 욕일 거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등지고 선 콘크리트 벽이 충분히 엄폐물 역할을 해준다는 거였다.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빛을 내며 점등하던 LED 경광등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한숨 돌린 마이클은 다시 전면을 주시했다.
붉은 헬멧의 사내는 선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그건 대단히 좋은 신호였다.
조금 더 안도한 그는 무거워 보이는 금속성 물건이나 부피가 있는 터틀 백의 그림자를 찾았다.
「틀렸어. 거리가 멀어서 전혀 안 보여.」
이쯤해서 마이클은 슬슬 게.을.러.지.기.로. 했다.

처음부터 별 거 아니었다. 그저 오해였다. 아무렴 저격범이 나 지금 여기 있어요~ 이러고 사방이 트인 자리에서 15분씩이나 가만 서있을 리 없잖는가. 그렇다. 저 사람은 그냥 야경을 구경 중인 거다. 그렇게 믿도록 하자. 배경이 생뚱맞은 고가수조 위라는 문제가 양심에 걸렸지만 - 무릇 사내는 여자와 달리 분위기니 낭만이니 하는 종류를 잘 모르는 법이다. 별을 더 가깝게 보려고 무작정 높은 곳에 올라간 것일 수도 있다.
뭉친 어깨의 통증이 작아지면서 긴장이 탁 풀리려 했다.
헬멧 남자는 이따금씩 오른손을 세로 방향으로 흔들었는데 마이클이 보기엔 참으로 익숙한 몸동작이었다. 소위 말하는 삿대질이었다. 어쩌면 누군가와 전화 통화 중인 건지도 모르겠다. 동료 경관이 아홉 살짜리 아들을 자동차로 학교에 데려다주는 문제로 아내와 말다툼을 벌일 적에 저런 식으로 팔을 움직이곤 했다. 기분 탓이겠으나 어쩐지 그가 내뱉는 성마른 짜증과 욕설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별안간 붉은 헬멧의 사내가 훔쳐보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마이클은 이크, 소리를 내며 난간 아래로 몸을 수그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를 봤을까? 봤을지도.
3초 정도 헤아리고 조심스럽게 목만 길게 뺐다.
『어?』
그런데 없었다. 사라졌다. 말끔하게 지워졌다.
『그새 어디 갔어? 설마. 하늘로 날아갔을 리는 없고.』
그럴 리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투신한 건가 싶어 근심하며 난간에서 몸을 내밀고 아래를 쳐다봤다.

『우왓?! 위험해요~!! 선배!』
리처드 그레이슨은 순발력을 발휘, 난간에 절반 정도 걸쳐 있던 마이크의 몸을 안전하게 잡아챘다.
하지만 그거야 딕의 주장이었고, 뒤로 끌어당겨진 쪽은 오히려 앞으로 확 떠밀리는 느낌에 격한 비명을 질러댔다.
5층 건물에서 추락하면 목숨을 건질 확률은 정확히 50%다. 그 정도의 확률을 가지고 장난치기엔 질이 안 좋았다.

『씨발! 간 떨어지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마이클은 주먹으로 그레이슨을 후려쳤다.
그리고 그 즉시 후회했다. 활활한 통증이 손목을 타고 단숨에 팔뚝까지 올라갔는데 두꺼운 철판을 주먹으로 때렸을 적과 흡사한 고통이었다. 입으로만 비명이 터진 게 아니라 손가락 관절도 똑같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우웃! 속에 방탄 조끼 입고 있었냐?!』
『아뇨.』
『그랴, 내 주먹은 솜 방망이다!』
아픈 주먹을 움켜쥐고 입으로 후후 불었다. 그래도 아팠다. 좀 나아질까 싶어 허공에 대고 손을 털어봤지만 화끈거리는 감각은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 뭘로 만들어진 뭐냐고, 저 가슴 근육은!

『선배가 추락할 거 같아서...』
도와줬는데 얻어맞았다.
짐 들어줬다가 뺨 맞는다던가, 억울한 표정을 지은 그레이슨은 오른손에 폴더형 휴대폰을 쥔 채로 항복의 자세를 취해보였다.
그리고 솜방망이 주먹으로 맞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가슴이 쓰렸다.

《이 피할 수 없는 개짜증 덩어리야, 이젠 경찰관을 본업삼고 히어로는 휴업하기로 했냐?》
불량 가출 폭력 청소년이 되어버린 동생은 통화가 연결되기가 무섭게 다짜고짜 윽박질렀다.
『제이, 안녕. 형은 잘 지냈단다.』
매번 모욕과 무시를 당하면서도 상냥한 목소리로 대꾸를 하는 건 그를 사랑해서다. 그 동생이라는 망할 놈은 애정이라는 감정에 대한 보답으로 혐오감을 철철 드러내곤 했지만... 어쩌겠는가, 좋아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는데.
피가 통하지 않아도「웨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동생이다. 비아냥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제이슨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는 점이 마냥 기뻤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스스로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목소리에서 꿀이 떨어졌다. 붙어있지도 않은 강아지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는 건 덤이다.
《닥쳐. 닭살 돋아.》
『거... 말투 엄청 살벌하네.』
《시끄럽대도. 나 지금 한가롭게 안부 인사나 하려 전화한 거 아니거든?》
『그러지 말고 자주 안부전화 하고 그래라, 제이. 새벽이든 대낮이든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짜증이 나려 하니까 그 입 좀 닥치지?》
핸드폰 너머로 어금니를 깨무는 으득,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못 말린다.
사람이 아직 안에 있음에도 건물에 설치한 폭탄을 멋대로 터뜨리거나 앞뒤 가리지 않고 기관총을 갈기는 등, 평소 생활 자체가 폭력으로 점철된 녀석이다. 형에게 입 닥치라고 소리 지르는 건 제이슨에겐 평범한 일상이었다.

《다시 질문하지. 나이트윙은 휴업이냐? 그. 남.자.가. 오늘 네 하는 짓거리를 두 눈으로 봤다면 엄청 실망했을 거야. 네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우면 옴짝달싹 못하는 널 대신해 아스널이 뛰어줬더군. 나 참... 한심해서. 코앞 거리에서 은행 강도가 날뛰고 있는데 넌 경찰서에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고작 민원 전화나 받고 있더라? 지금도 마찬가지. 도주한 놈들을 때려잡을 생각은 안 하고 컴퓨터 모니터나 들여다보고 있음 안 되지.》
제이슨이 말하는「그 남자」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모르는 바 아니다.
따라서「그 남자」가 누굴 말하는 거냐 굳지 확인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어라, 제이슨. 비난 내용이 너무 상세한데. 혹시 지금 고담이 아니라 스타 시티에 와있는 거야?』
제이슨은 단칼에 부정했다.
《텔레비전 뉴스를 봤을 뿐이야. 내가 미쳤다고 스타 시티에 왜 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그렇군.』
딕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인마, 건너편 건물 꼭대기에서 나에게 삿대질하고 있는 거 여기서 전부 다 보이거든?』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에스키모인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시력은 그럭저럭 좋은 편이다.
뭣보다 제이슨은 일부러 그랬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게끔, 그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도 아니라고 잡아떼다니.
『듣는 귀가 있으니 자리를 바꿀게. 기다려.』
창문 블라인드 틈새로 밖을 쳐다보던 그레이슨은 탁 소리가 나게끔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무거운 게 잔뜩 얹힌 상태에서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밟고 있는데 문자가 도착했다.
《더 얘기할 것도 없어. 네놈이 계속 미적거리면 내가 해결한다.》
자꾸 이마에 주름이 잡히려 한다. 딕 그레이슨은 양손을 사용해 버튼을 꾹꾹 눌러 답장했다.
《여기까지 와서 은행 강도를 잡겠다고? :) 우리 동생 너무 부지런한 거 아냐?》
제이슨은 간결하게 대꾸했다.
《ㅋ》
이 시건방진...
울컥한 딕이 초 집중하며 답장을 작성하고 있는데 제이슨 쪽이 더 버튼 조작이 빨랐다.
《은행 강도 얘기가 아님. 알고 있잖아?》
그리고 마무리로 엿을 날렸다.
《凸》
그가 대인배여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개념을 물 말아 잡순 동생을 붙잡아 그 잘난 머리 가죽을 벗겨버리겠다며 나이트윙 히어로 코스튬으로 갈아입은 뒤, 스타 시티 뒷골목을 이 잡듯이 온통 휘젓고 돌아다녔을 테니까.

비상문을 박차고 옥상에 도착한 그레이슨은 얼굴색이 변한 채 미친 듯이 단축 번호 5번을 눌러댔다.
신호는 끈질기게 갔지만 동생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만 받지 않은 게 아니다. 어느새 고가수조 위에서 모습을 감추고 어둠에 스며들어 사라져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6/06/12 18:00 2016/06/12 18:00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19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1639
Today:
317
Yesterday:
215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