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참 좋았을 거라 안타까워하며 저 멀리 보이는 인영을 주시했다.
별 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싶었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에 고담 시에서 한 정신병자가 경찰서장을 노리고 소형 미사일을 날린 적도 있었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따지고 보자면 도심 한 복판에서 로켓포를 쏜다는 건 온갖 미친놈들이 다 모였다는 고담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이쯤해서 마이클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난간 앞으로 상체를 바짝 붙였다. 저격용 라이플 정도라면 이곳 스타 시티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둠 속에서 붉게 타들어가는 담뱃불은 완전한 목표물 조준점이었으니까.
깨닫고 나자 우라질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옥상에는 마이클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그들 전부가 흡연자다.
물고 있던 츄파춥스 사탕을 입에서 빼낸 채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몇 명은 이미 자리를 떴고, 채 꺼지지 않은 불빛 두 개가 남아 있었는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냉각탑의 구조물 위치 탓에 반대편 건물에서 저격하기엔 각도가 나빴다. 순전히 우연이었겠지만 명줄이 긴 것이 분명한 행운의 흡연자 두 명은 콘크리트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자기네들끼리 잡담 중이었다. 보나마나 이혼한 마누라 욕에 재혼한 마누라 욕일 거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등지고 선 콘크리트 벽이 충분히 엄폐물 역할을 해준다는 거였다.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빛을 내며 점등하던 LED 경광등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한숨 돌린 마이클은 다시 전면을 주시했다.
붉은 헬멧의 사내는 선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그건 대단히 좋은 신호였다.
조금 더 안도한 그는 무거워 보이는 금속성 물건이나 부피가 있는 터틀 백의 그림자를 찾았다.
「틀렸어. 거리가 멀어서 전혀 안 보여.」
이쯤해서 마이클은 슬슬 게.을.러.지.기.로. 했다.

처음부터 별 거 아니었다. 그저 오해였다. 아무렴 저격범이 나 지금 여기 있어요~ 이러고 사방이 트인 자리에서 15분씩이나 가만 서있을 리 없잖는가. 그렇다. 저 사람은 그냥 야경을 구경 중인 거다. 그렇게 믿도록 하자. 배경이 생뚱맞은 고가수조 위라는 문제가 양심에 걸렸지만 - 무릇 사내는 여자와 달리 분위기니 낭만이니 하는 종류를 잘 모르는 법이다. 별을 더 가깝게 보려고 무작정 높은 곳에 올라간 것일 수도 있다.
뭉친 어깨의 통증이 작아지면서 긴장이 탁 풀리려 했다.
헬멧 남자는 이따금씩 오른손을 세로 방향으로 흔들었는데 마이클이 보기엔 참으로 익숙한 몸동작이었다. 소위 말하는 삿대질이었다. 어쩌면 누군가와 전화 통화 중인 건지도 모르겠다. 동료 경관이 아홉 살짜리 아들을 자동차로 학교에 데려다주는 문제로 아내와 말다툼을 벌일 적에 저런 식으로 팔을 움직이곤 했다. 기분 탓이겠으나 어쩐지 그가 내뱉는 성마른 짜증과 욕설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별안간 붉은 헬멧의 사내가 훔쳐보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마이클은 이크, 소리를 내며 난간 아래로 몸을 수그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를 봤을까? 봤을지도.
3초 정도 헤아리고 조심스럽게 목만 길게 뺐다.
『어?』
그런데 없었다. 사라졌다. 말끔하게 지워졌다.
『그새 어디 갔어? 설마. 하늘로 날아갔을 리는 없고.』
그럴 리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투신한 건가 싶어 근심하며 난간에서 몸을 내밀고 아래를 쳐다봤다.

『우왓?! 위험해요~!! 선배!』
리처드 그레이슨은 순발력을 발휘, 난간에 절반 정도 걸쳐 있던 마이크의 몸을 안전하게 잡아챘다.
하지만 그거야 딕의 주장이었고, 뒤로 끌어당겨진 쪽은 오히려 앞으로 확 떠밀리는 느낌에 격한 비명을 질러댔다.
5층 건물에서 추락하면 목숨을 건질 확률은 정확히 50%다. 그 정도의 확률을 가지고 장난치기엔 질이 안 좋았다.

『씨발! 간 떨어지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마이클은 주먹으로 그레이슨을 후려쳤다.
그리고 그 즉시 후회했다. 활활한 통증이 손목을 타고 단숨에 팔뚝까지 올라갔는데 두꺼운 철판을 주먹으로 때렸을 적과 흡사한 고통이었다. 입으로만 비명이 터진 게 아니라 손가락 관절도 똑같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우웃! 속에 방탄 조끼 입고 있었냐?!』
『아뇨.』
『그랴, 내 주먹은 솜 방망이다!』
아픈 주먹을 움켜쥐고 입으로 후후 불었다. 그래도 아팠다. 좀 나아질까 싶어 허공에 대고 손을 털어봤지만 화끈거리는 감각은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 뭘로 만들어진 뭐냐고, 저 가슴 근육은!

『선배가 추락할 거 같아서...』
도와줬는데 얻어맞았다.
짐 들어줬다가 뺨 맞는다던가, 억울한 표정을 지은 그레이슨은 오른손에 폴더형 휴대폰을 쥔 채로 항복의 자세를 취해보였다.
그리고 솜방망이 주먹으로 맞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가슴이 쓰렸다.

《이 피할 수 없는 개짜증 덩어리야, 이젠 경찰관을 본업삼고 히어로는 휴업하기로 했냐?》
불량 가출 폭력 청소년이 되어버린 동생은 통화가 연결되기가 무섭게 다짜고짜 윽박질렀다.
『제이, 안녕. 형은 잘 지냈단다.』
매번 모욕과 무시를 당하면서도 상냥한 목소리로 대꾸를 하는 건 그를 사랑해서다. 그 동생이라는 망할 놈은 애정이라는 감정에 대한 보답으로 혐오감을 철철 드러내곤 했지만... 어쩌겠는가, 좋아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는데.
피가 통하지 않아도「웨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동생이다. 비아냥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제이슨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는 점이 마냥 기뻤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스스로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목소리에서 꿀이 떨어졌다. 붙어있지도 않은 강아지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는 건 덤이다.
《닥쳐. 닭살 돋아.》
『거... 말투 엄청 살벌하네.』
《시끄럽대도. 나 지금 한가롭게 안부 인사나 하려 전화한 거 아니거든?》
『그러지 말고 자주 안부전화 하고 그래라, 제이. 새벽이든 대낮이든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짜증이 나려 하니까 그 입 좀 닥치지?》
핸드폰 너머로 어금니를 깨무는 으득,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못 말린다.
사람이 아직 안에 있음에도 건물에 설치한 폭탄을 멋대로 터뜨리거나 앞뒤 가리지 않고 기관총을 갈기는 등, 평소 생활 자체가 폭력으로 점철된 녀석이다. 형에게 입 닥치라고 소리 지르는 건 제이슨에겐 평범한 일상이었다.

《다시 질문하지. 나이트윙은 휴업이냐? 그. 남.자.가. 오늘 네 하는 짓거리를 두 눈으로 봤다면 엄청 실망했을 거야. 네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우면 옴짝달싹 못하는 널 대신해 아스널이 뛰어줬더군. 나 참... 한심해서. 코앞 거리에서 은행 강도가 날뛰고 있는데 넌 경찰서에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고작 민원 전화나 받고 있더라? 지금도 마찬가지. 도주한 놈들을 때려잡을 생각은 안 하고 컴퓨터 모니터나 들여다보고 있음 안 되지.》
제이슨이 말하는「그 남자」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모르는 바 아니다.
따라서「그 남자」가 누굴 말하는 거냐 굳지 확인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어라, 제이슨. 비난 내용이 너무 상세한데. 혹시 지금 고담이 아니라 스타 시티에 와있는 거야?』
제이슨은 단칼에 부정했다.
《텔레비전 뉴스를 봤을 뿐이야. 내가 미쳤다고 스타 시티에 왜 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그렇군.』
딕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인마, 건너편 건물 꼭대기에서 나에게 삿대질하고 있는 거 여기서 전부 다 보이거든?』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에스키모인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시력은 그럭저럭 좋은 편이다.
뭣보다 제이슨은 일부러 그랬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게끔, 그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도 아니라고 잡아떼다니.
『듣는 귀가 있으니 자리를 바꿀게. 기다려.』
창문 블라인드 틈새로 밖을 쳐다보던 그레이슨은 탁 소리가 나게끔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무거운 게 잔뜩 얹힌 상태에서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밟고 있는데 문자가 도착했다.
《더 얘기할 것도 없어. 네놈이 계속 미적거리면 내가 해결한다.》
자꾸 이마에 주름이 잡히려 한다. 딕 그레이슨은 양손을 사용해 버튼을 꾹꾹 눌러 답장했다.
《여기까지 와서 은행 강도를 잡겠다고? :) 우리 동생 너무 부지런한 거 아냐?》
제이슨은 간결하게 대꾸했다.
《ㅋ》
이 시건방진...
울컥한 딕이 초 집중하며 답장을 작성하고 있는데 제이슨 쪽이 더 버튼 조작이 빨랐다.
《은행 강도 얘기가 아님. 알고 있잖아?》
그리고 마무리로 엿을 날렸다.
《凸》
그가 대인배여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개념을 물 말아 잡순 동생을 붙잡아 그 잘난 머리 가죽을 벗겨버리겠다며 나이트윙 히어로 코스튬으로 갈아입은 뒤, 스타 시티 뒷골목을 이 잡듯이 온통 휘젓고 돌아다녔을 테니까.

비상문을 박차고 옥상에 도착한 그레이슨은 얼굴색이 변한 채 미친 듯이 단축 번호 5번을 눌러댔다.
신호는 끈질기게 갔지만 동생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만 받지 않은 게 아니다. 어느새 고가수조 위에서 모습을 감추고 어둠에 스며들어 사라져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6/06/12 18:00 2016/06/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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