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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야간 근로를 하기 위해 경찰서로 돌아왔을 적에 그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광경은 접수계의 클라라 래이번과 수작질 중인 딕 그레이슨의 뒷태였다.

두 명의 미취학 자녀를 두고 있는 래이번은 아이돌 가수를 영접한 19세 소녀처럼 뺨을 붉힌 채 미소를 짓고 있었고, 가끔씩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가 탄산이 들어간 음료수를 마신 뒤 만장하신 가운데 꺼억 소리 내어 트림을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 리처드 D 앤더슨은 영문도 모른 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래이번의 립스틱 색이 붉어졌다. 곱게 눈썹도 정리했다. 깨닫고 나자 다시 빡치는 기분이 들었다.
「배반자!」
「체리섬」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신입 여경 앞에서 하루 두 번만 하던 양치질을 다섯 번씩 했다는 과거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래이번을 노려봤다.

그 앞에서 딕 그레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는데 들려오는 단어들로 유추해보자면 화젯거리는 그다지 영양가 없었다. 어느 가게에서 파는 컵케이크가 맛있다느니, 어느 가판대에서 파는 핫도그가 최고라느니, 소스는 케첩보다는 마스타드가 최고라느니, 순찰 돌 적에 지나치면 큰일이 나는 테이크아웃 커피 점포 이름 같은 게 튀어나왔다.

잘 들 논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깽판치고 싶다는 욕구와, 모르는 척하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하는 가운데 앤더슨은 어중간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좋은 저녁.』
래이번은 동료가 보낸 인사에 대한 답례로 보일락 말락 턱짓을 했고, 그레이슨은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샴페인 잔처럼 들어보였다. 처음에는 볼펜인가 싶었는데 실눈을 가늘게 뜬 채로 보니 포장을 뜯지 않은 츄파춥스 캔디였다.
『오셨어요? 좋은 저녁이에요, 선배님들.』

트로피처럼 들어 보인 캔디를 본 두 사람은 미묘하게 뒤틀렸다.
마이클은 신 포도를 껍질 째 씹은 얼굴이었고, 앤더슨은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만들어내며 대놓고 짜증을 냈다.
저녁에 그런 사탕을 먹으면 이가 썩어요 - 물론 자녀를 야단치는 엄마의 마음으로 눈총을 주는 것일 수도 있다. 허나 단순히 그렇다고 하기엔 묘한 껄끄러움이 덧발라져 있었다. 딕 그레이슨의 눈은 매의 그것처럼 두 사람이 흘려보내는 복잡한 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송두리째 핥았다.

「이거, 예상했던 것과는 살짝 다른데.」
특이하다면 마이클보다 그다지 상관없을 것처럼 여겼던 앤더슨 쪽의 반응이 한층 더 격렬했다는 거다.
마이클이 시큰둥하게 감정 반응 스위치를 OFF로 내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앤더슨은 보다 더 불편해했고, 보다 더 발끈한 상태였다. 누이동생에 대한 몹쓸 험담을 듣고 화가 난 나머지 당장에라도 주먹으로 칠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불법 텐트를 철거당한 노숙자들로부터 돼지, 대머리, 토끼 조루, 불능 등등으로 비난을 당할 적의 반응과도 흡사했다.
「앤더슨 쪽도 제대로 엮여있었던 모양이군.」
어쩌면 처음부터 둘이 한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딕은 두 사람을 향해 넉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오신 건가요? 질투나네요. 듣자하니 글리블링 다이너 단골이라면서요. 그 가게 음식은 맛이 어떻던가요. 괜찮다면 다음에 저도 끼워주세요.』
마이클 윈저가 퉁명스럽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맛없어. 그리고 인테리어도 구려. 절대로 단골 아니야.』
접시 바닥까지 싹싹 핥아먹은 주제에 할 말이 아닌 듯하다만, 마이클은 3주 전 자신의 파트너가 된 이 신입 경관과 친목을 다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궁금한 걸 물어보면 적당히 대답해준다, 필요하다 싶으면 업무 요령을 가르쳐 준다, 딱 거기까지였다.
게다가.
어쩐지 웃는 낯에 속내가 따로 있는 듯한 놈이라.
마이클은 독 발린 화살처럼 겨누어진 츄파춥스 캔디를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별로에요? 그럼 다른 가게로 가죠. 래이번이 방금 전에 꽤 괜찮은 가게를 소개시켜줬는데...』
『잘 됐군. 그럼 래이번과 같이 가면 되겠네.』
『와아. 단칼에 거절은 너무하다고요, 사람 민망하게. 제가 데이트를 신청한 건 선배님이라고요.』
『뭐?! 데이트?! 돌았냐. 너랑 내가~아?!』
『엇흠!』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든 딕 앤더슨이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걸 신호라고 여겼던지 마이클이 잰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앤더슨 또한 뒷목을 벅벅 긁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반대방향으로 헤어져 각자의 용무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딕 그레이슨은 흠, 하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만 결정했다며 앤더슨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뭐야. 왜 따라와.』
사탄아 물럿거라, 십자가 목걸이가 여기 있다. 용변을 보려던 리처드 D 앤더슨은 대놓고 질색했다.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그러니까... 마이클 선배랑은 친한 사이죠?』
『인석아. 그런 걸 화장실에까지 따라와서 물어야겠냐?!』
결국 소변을 보는 건 미뤄야했다.
바지 지퍼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비록 순서가 거꾸로였지만 소변기에 가 서는 대신 손부터 씻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오른쪽 방향으로 돌리면서 앤더슨이 툴툴거렸다.
『절친은 아니야. 그냥 어쩌다보니... 내가 꼬맹이였던 시절에 잠깐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단지 그뿐이고, 마이클과 다시 만난 것도 이곳 경찰서에서 근무하고부터야. 겨우 그 정도 관계라고.』

오, 별 거 아니야. 종업원을 부르는 단추인 줄 알고 눌렀는데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발사되더군. 아무 일 아냐. 그러니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가서 하던 일이나 계속 하자고.

이 사람들은 반어법을 너무 자주 사용해서 진짜를 가짜처럼 말하는 경향이 컸다.
『어린 시절에 같은 학교 다녔어요? 진짜 친했나 봐요. 혹시 같은 반이었어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비누 없이 흐르는 물에 손을 문질러 씻으면서 앤더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반어법인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면, 단순히 이력 내용만 보았을 때 두 사람의 접점이 전혀 없었다는 거였다.
리처드 D 앤더슨은 어렸을 적에 중서부 지역인 홈필드에서 살았다. 마이클은 남부에 가까운 클로버랜드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매넘이나 오르피나처럼 주로 동부와 남부지역이었다. 홈필드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없었다. 물론 사정에 의해 몇 개월만 머물렀기 때문에 기록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배트 케이브의 슈퍼 컴퓨터가 이런 정보를 체크하지 못 했다는 걸 인정하기도 어려웠다.
『몇 살 때였는데요?』
『여덟 살... 아니, 아홉 살.』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답은 꼬박꼬박 하긴 했으나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눈빛이었다.
『한창 장난이 심할 나이네요. 혹시 두 사람이 이웃집 현관에 개똥 놓고 도망가고 그랬어요?』
『나는 그런 유치한 장난은 하지 않았다.』
그는「우리」라는 단어가 아닌「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짝뚱 씨는 그랬나보지? 남의 집에 개똥 투척하고?』
『저는 소문난 장난꾸러기였죠. 마당에 널어놓은 남의 세탁물을 훔쳐서 달아나곤 했어요.』
그런 일은 없었지만 즉석에서 이야기 하나를 지어냈다. 다행히 먹혀 들어가는 눈치다. 경계심이 약간 풀렸다.

『있잖아요... 딕이 보기에 마이클은 어떤 사람 같나요?』
『게으른 사람.』
손수건 없이 물기를 툭툭 털면서 앤더슨이 꿍얼거렸다.
『되먹지 못한 사람이거나 심성이 나쁜 건 아니야. 그냥 천성이 게을러.』
『게을러요?』
『무지 게을러. 오죽하면 귀찮다는 이유로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지... 그러니까 신참?』
이 정도면 궁금해 하는 부분에 대한 답이 되었느냐며 화장실 출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형님, 오줌 좀 싸자.』
앤더슨이 쓴 웃음을 지으며 그레이슨을 화장실 밖으로 내쫓았다.

Posted by 미야

2016/06/27 15:03 2016/06/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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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의 평온한 나날이 며칠 이어졌다.

크레이지 덤프는 수색망을 뚫고 여전히 도주 중으로, 긴급 체포 작전이 두 번씩이나 이어졌음에도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가 지휘부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랬다는 점에서 내부 정보가 새고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이 이어졌는데 모르긴 몰라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부패경찰과 범죄조직과의 커넥션은 예전부터 골칫거리였고 좀처럼 그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하나를 잘라내면 옆에서 다른 뿌리가 자랐다. 머리 하나를 자르면 잘린 부위에서 새로운 머리 두 개가 자라난다는 전설의 괴수 히드라 같았다. 그래서인지 청문감사반에서는 25%의 경찰이 상습적으로 뇌물을 받는다는 현실을 외면한 채 설령 조직이 괴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반에 걸쳐 맹독성 농약을 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번에 회람 도는 거 봤어? 마이클. 새로 차를 바꾸거나 고가의 시계나 명품 구두를 구입한 녀석들을 찾아 무작정 분풀이로 조지는 것 같더라고. 아무나 일단 걸려라 식이라서 옆에서 보기가 좀 그렇던데. 음... 그러고 보니 너도 못 보던 시계를 새로 샀네. 얼마짜리야?』
우물거리며 음식을 씹던 걸 멈추고 조신하게 대답했다.
『25달러.』
대답을 들은 딕 앤더슨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짠돌이... 보나마나 알람 기능도 없겠군.』
『그런 거 필요 없어. 시간만 잘 맞으면 되지.』
『내가 봤을 적엔 이미 5분 이상 틀어진 것 같은데...』
『오! 잘 됐네. 늦잠 자서 지각을 해도 변명꺼리가 있는 거잖아.』
『잘도 변명이 되겠다!』

리처드 D 앤더슨이 입안의 내용물을 밖으로 튀게 만들며 언성을 높였다.
식사 예절이 영 아니었지만 마이클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종이 냅킨을 들어 총알처럼 날아와 얼굴에 붙은 미세한 시금치 조각을 떼어냈고, 내친 김에 입가에 묻은 크림소스를 닦았다.
그들이 애용하는 글리블링 다이너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수요일 만찬」이라는 메뉴를 선보였는데. 메인은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큼직한 생선이었다. 푸짐한데다 싸고 맛도 좋았지만 곁들여서 나오는 소스가 매우 기름지고 묽었다. 그래서인지 먹고 나면 입술과 턱이 번들거려 미관상 보기가 나빴다.

앤더슨도 냅킨을 들어 기름 자국이 남은 얼굴을 수습했다.
『하여간 시계를 고르는 요령이 잘못되었어. 잘 들어, 마이클. 무릇 괜찮은 시계라는 것은...』
그러면서 자신이 찬 시계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앤더슨의 시계도 그다지 이름 있는 고급 제품은 아니었다. 두껍고 무거워 유행에 뒤쳐졌고 메탈 재질의 밴드는 색이 바랬다. 그래서인지 그 첫 느낌은 장롱에서 30년 묵힌 할아버지의 골동품 예물시계 같았다. 하지만 예물시계라고 볼 수 없는 게 시곗줄이 온통 긁힌 자국 천지라 실수로 자동차 바퀴에 깔린 적이 있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바로 이런 거야. 바로 이런 거.』

하얀 생선살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며가던 마이클이 기가 막힌다며 눈동자를 데구르 굴렸다.
뭐가 괜찮은 시계라는 건가. 트랭크의 가게에 맡기면 이것 또한 알짤 없이 40센트짜리다.

설득이 영 먹히지 않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앤더슨은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 본격적으로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예의 무용담이 튀어나올 순서였다. 자세히 보라며 왼팔을 내밀었는데 시곗줄 안으로 보이는 피부에 시곗줄과 마찬가지 방향으로 길게 그어진 상흔이 보였다. 흉으로 남은 꿰맨 자국은 강도와의 격투로 생겼으며, 금속 재질의 단단한 시곗줄이 없었다면 분명 힘줄까지 잘렸을 거라나. 그렇게 손목의 칼자국을 보여주며 자신의 용맹함과 선견지명을 자랑하는 것이 앤더슨의 버릇이었다.

허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다.
앤더슨의 상처는 강도를 제압하다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거다.
마이클이 알기로 저 치명적이었을 베인 자국은 앤더슨이 열여섯 살 때 생겼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의 신분은 경찰이 아니었고, 당연히 칼을 든 강도를 맨손으로 제압할 일도 없었다.
흉기 - 아마도 식칼이었을 무기를 휘둘러 방어하던 앤더슨의 왼손을 거의 잘라낼 뻔했던 이는 그와 혈연관계인 사람이었다. 그가 입 밖으로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마이클은 그 사람이 앤더슨의 친모일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이는 무덤으로 가지고 갈 음습한 비밀이었다.

소매 단추를 도로 채운 앤더슨은 건방지게도 손가락으로 마이클을 가리켰다. 재수 없는 손가락질이었다.
『25달러는 날렸다고 셈치고 다른 시계를 사게, 마이클. 그 물건은 영 틀렸어.』
『날리긴 뭘 날려. 25달러는 돈이 아니냐?! 그 돈이면 핫도그를 몇 개 사먹을 수 있는지 알아?! 양파와 피클이 없는 걸로 여덟 개나 먹을 수 있단 말이야!』
『그걸 꼭 일일이 세어봐야겠어?! 네가 최 빈민국가 걸식아동이냐고, 망할 핫도그... 월급 받아 뭐에 쓰냐. 처자식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구질구질해!』
눈을 흘기던 딕 앤더슨은 탁 소리가 나게끔 물 컵을 내려놓았다.
『그냥 사. 칼로 내리쳐도 안 끊어지는 튼튼한 걸로 사라고. 신용카드 들고 백화점 가서 사!』
이렇게 외칠 적에 그의 굳은 표정은 지난 사흘 내내 또 다른 리처드인 그레이슨이 지어보였던 표정과 판박이어서 마이클은 이제 두 사람이 혹시 배다른 형제는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생김새부터가 완전 달랐다.
원조 딕은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머리고 짝퉁 딕의 머리카락은 검었다.
체격도 차이가 크다. 내사부 접수계에서 일하는 클라라 래이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처드 2번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남신처럼 근사하기 짝이 없었고, 리처드 1번은 햄버거 가게 입간판 같다는 거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군살이 제법 붙었으나 다이어트를 고려해야 할 심각한 과체중까지는 아닌데 아무래도 비교 대상이 딕 그레이슨이다 보니 평가가 형편없었다. 평범한 민간인을 모델 옆에 세워두면 원치 않아도 오징어가 되는 법이라서 마찬가지로 새우, 광어, 우럭, 낙지 등등의 비슷한 수산물 취급을 받는 입장에선 입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똥을 시원하게 누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저 표정은 그리스 남신이나 햄버거 가게 입간판이나 똑같았다.
할 말이 있는데 - 꼭 해야 하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꺼낼 수가 없어서 답답해 미치겠다는 얼굴이다.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놔도 되는데.
지금도 그렇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강제로 집어삼키고 있다. 뺨 안쪽의 살을 안으로 빨아들여서 어금니로 물고 있는 건 또 어떻고. 약혼 6개월 만에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약혼녀를 옆에 두고 아무래도 결혼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을 적에도 저런 식으로 뺨 안쪽을 지그시 물고 있었다.

『있잖아, 마이클.』
오오, 드디어 결심했나 보다.
그는 신자의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으로 차분히 손가락 깍지를 꼈다.
『듣고 있네, 딕.』
계산서 종이를 움켜쥔 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침통한 눈빛으로 마이클을 쳐다봤다.
그리고서 하는 말,
『나에게 뭐 털어놓을 거 없어?』

아니 이보시오, 리처드 D  앤더슨 양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고해성사가 아니라 자아비판의 시간이었소?

이쪽에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딕은 자기 혀를 깨물려 했다.
허둥대는 그 모습이 마이클을 한층 더 자극시켰다.
『새끼야. 내가 뭘 털어놔야 하는데. 누가 일러바치길, 내가 몰래 여자 속옷 입는다고 하든?』
『그게 아니라.』
『됐어!』
테이블 아래서 요란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Posted by 미야

2016/06/23 16:44 2016/06/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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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도시괴담 중「블러드 메리」라는 것이 있다.
자정 12시에 촛불을 하나 켜고 거울처럼 비치는 물건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블러드 메리 이름을 열세 번을 읊조리면 피투성이의 메리가 나타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유령을 불러내는 조건이나 세부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가지각색이지만 큰 줄거리는 대략 비슷하다.
자칫하다가 목숨을 빼앗길 걸 알면서 왜 블러드 메리를 불러내려 하는가 - 운이 좋으면 블러드 메리가 커다란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준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미래의 남편 이름... 혹은 시험 점수, 혹은 애인이 바람을 피운 상대의 이름 같은 거 말이다.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같잖은 비밀을 알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냐 - 부연 설명하자면 이렇다. 10대들, 특히 10대 소녀들은 솔직히 이런 도시괴담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그저 장난이었고, 치기에서 비롯된 담력 테스트였다. 학부모들이 블러드 메리 소환 의식을 금지시킨 까닭도 지극히 현실적이었는데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거울을 깨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주에 잔뜩 취한 상태인데다 촛불 하나만 켜진 화장실에선 세수수건도 으스스해 보이는 법, 흔들리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고 거울을 향해 물건을 던져 나중에까지 창피스러워 할 흑역사 하나가 남게 되는 것이다.

이 블러드 메리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캔디맨이다.
메리의 정체가 여성이라 그런지 이쪽은 남성 버전이다. 머리가 단순한 남자애들은 열세 번 이름 세는 것도 어려워하기 때문에 불러내는 법도 보다 간단해졌다. 블러드 메리는 열세 번 불러야 하지만 여기선 다섯 번으로 봐준다.
그리고 꽤 터프하다. 캔디맨은 소원이니 비밀이니 이런 거 절대 안 들어준다. 첫 번째 섹스 상대 알려주기 이런 거 없다. 캔디맨은 그저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려 든다. 소환자가 공격을 피하려면 캔디맨의 본명을 알아야 한다.
- 당장 지옥으로 돌아가, ○○○○○!
그러면 캔디맨은 흐릿한 안개가 되어 흩어진다.

「이름... 제기랄, 알고 있는데!」
루모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휘저어 미스터 츄파춥스의 본명을 생각해내려 애를 썼다.
제법 흔한 이름이었고 그다지 특색도 없었다. 분명... 음, 그러니까. 모자를 쓰고 흰색 장갑을 낀 팝의 황제가 문워크를 선보였다.
「생각났다. 마이클! 그래, 마이클이었어.」
그런데 크레이지 덤프가 영양가 없이 흘렸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놈 이름은 가짜야.》
핏기가 가신 손가락이 점차 하얗게 변해갔다. 더하여 마그네슘 부족이라며 바들바들 떨렸다.
이름을 모르니 거울 밖으로 튀어나온 악령을 돌려보낼 방법이 없었다!

『씨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일단 무고를 주장해보자.
『당신이 뭔데!』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고 본다.
뉴스 채널을 통해 내셔널 밴코프 은행에 무장 강도가 들었다는 속보를 듣자마자 자신의 알리바이부터 점검해봤던 그다. 추적이 어려운 선불 폰은 망치로 때려 부수고 유심 칩은 화장실 변기로 흘려보냈다. 흘려보내는 김에 피우다 남은 마리화나도 정리했다. 지난 밤, 심야 극장에 갔다는 영수증을 지갑에 잘 모셔뒀고, 그간의 행적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정리했다. 경찰이 심문하러 와도 답변이 완벽할 수 있도록 연습도 했다.

- 최근 크레이지 덤프와 연락을 한 적이 있습니까?
- 전혀요.
- 집안을 잠시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 얼마든지요.
- 어제나 오늘, 집으로 찾아온 손님은 없었습니까?
- 청소가 귀찮아 손님은 초대하지 않아요.

완벽, 완벽.
그는 무고했다.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게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루모는 오래된 격언 하나를 곱씹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

『괜히 엄한 곳에 아무렇게나 찔러대고 그러지 마쇼. 가석방 중이라 얌전히 있었던 말이오.』
그런다고 해봤자 상대는 미스터 츄파춥스였다.
뭔가를 쪽쪽 빨면서 - 보나마나 사탕일 게다 - 상대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새끼가 뭘 억울하다고 지랄이야. 크레이지 덤프에게「당신이 감옥에서 썩는 동안 마누라가 바람났어요.」일러바친 게 바로 너잖아.》
『흐억.』
《열 받아 탈옥하게 만들어놓고, 한 술 더 떠서 크레이지 덤프가 은행 강도까지 저질렀는데「난 몰라요~ 아무 죄 없어요~ 난 선량한 시민이에요~」우기면 쓰나.》
『우, 우, 우기는 게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크레이지 덤프가 탈옥한 게 왜 내 탓이에요?! 게다가 그가 은행을 털었다는 건 나도 뉴스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고요. 나와 상관없다고요.』
《뭐가 상관이 없니. 자기 마누라와 오입질한 놈 이름을 대라며 잔뜩 화를 내고 있는 크레이지 덤프에게 선심 쓰듯 일련번호가 지워진 자동소총 두 자루를 헐값으로 팔았잖아!》
『팔긴 누가 팔아욧! 얼떨결에 빼앗긴 거지! 돈 한 푼 못 받았는데!』
《어쭈? 너 방금 시인했어. 새끼야... 그럴 적엔 증거 있느냐고 오리발을 내밀어야지.》
『헙.』
아무래도 망한 거다. 분명히 망했다.

《아무튼 너, 유죄.》
미스터 츄파춥스의 말투는 여전히 마트에 가서 직원에게 우유의 유통기한 얼마 남았냐 묻는 식이었다.
그러나 듣는 입장에선 피가 말랐다.
『그런게 어딨어요?!!!』
《어딨긴, 요깄지. 오늘부터 너, 고담으로 이사 가라. 앞으로 딱 24시간 줄게. 기왕이면 크레이지 덤프에게 연락해서 둘이서 손 붙잡고 같이 가. 그 인간이 긴급 수배 중이라는 건 난 모르는 얘기고... 아. 잠깐만? 최근 들어 고담으로 너무 많이 보낸 것 같아. 아무리 범죄의 도시라지만 나도 양심이 있지. 이번엔 고담 말고 메트로폴리스가 좋겠어.》

아니 될 소리다. 루모는 필사적으로 도리질했다. 메트로폴리스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슈퍼맨이 있다.
슈퍼맨이 누구던가. 우주선을 타고 온 외계인 침략자와 혼자서 맞장을 뜨고, 추락하는 보잉747 비행기를 한손으로 번쩍 들고, 마그마를 내뿜는 화산의 분화를 눈빛만으로 멈추게 만들고, 땅속 맨틀의 뒤틀림을 발 구름으로 바로잡아 지진을 멈추게 하는 이다. 그런 존재 앞에서 일개 장물아비는 너무나 그 존재가 미약해서 피크닉 테이블 위를 기어가는 개미보다 더 형편없었다. 슈퍼맨이 마음만 먹는다면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버리리라.
『너무해요!』
거기다 그는 보호관찰 대상이라서 마음대로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미스터 츄파춥스의 요구에 따라 메트로폴리스행 시외버스 티켓을 끊었다간 도주를 의심받아 가석방이 취소되어 버린다. 끔찍한 감옥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양반이. 나더러 지금 죽으라는 거에욧?! 게다가 크레이지 덤프랑 날 묶어?! 안 돼. 싫어. 못 떠나!』
《못 떠나?》
『못 떠나!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는데? 당신이 내 두목이야? 아니잖아.』

혈압이 떨어지는지 속이 울렁거렸다.
불편함으로 가득한 무언의 시간이 잠시나마 이어졌다.
이윽고 츄파춥스가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어쩐지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비웃음을 바탕에다 광기를 양념으로 버무려 대단히 듣기 기분 나쁜 웃음 소리였다.

《하긴, 자네가 내 말을 들을 이유는 없지.》
『그, 그렇고 말고..(요)』
자신감이 통째로 사라져 느낌표 대신 슬그머니「요」자를 작게 덧붙였다.

《좋아. 마음대로 해.》
상대방은 오히려 싱글벙글이다.
《대신 나도 마음대로 할 거야. 이의 없지?》
클클,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지다 매끄러운 칼날에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별안간 뚝 끊어졌다.

Posted by 미야

2016/06/20 16:13 2016/06/2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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