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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 입문은 약간의 애니 감상이 전부라서 설정이 엉망입니다. 이야기 전개 매우 느립니다. 감안하고 감상 부탁함요. 외부로의 유출은 사절합니다. 지속적으로 본문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브로맨스 있을 예정입니다. ※

그간 잘 쌓여져 있던 뭔가가 뿌리째 흔들려 붕괴되었다.
『무슨 짓이야---!!』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짐승처럼 포효하며 애정하던 이를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경악해하는 그의 얼굴이 둥글고 매끄러운 헬멧에 반사되어 기이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곧장 수평 찌르기로 들어간 곤봉이 헬멧의 표면을 움푹 파이게 만들면서 거울처럼 비추던 슬픈 얼굴 표정을 지웠다.
레드후드는 딱히 맞받아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얻어맞고 있지만도 않았다. 딕 그레이슨의 손목을 움켜쥐고 안쪽으로 비틀어 회전시키는 것으로 곤봉을 놓치게 만들었다. 동시에 무릎올려치기로 배를 노렸다. 다만 어디까지나 노리기만 했을 뿐으로 직접적인 카운트가 들어가지는 않았다. 레드후드가 원했던 건 그저 흥분한 딕 그레이슨과의 간격을 벌리는 것뿐이었지,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넌 그래선 안 되었어!』
곤봉을 떨어뜨린 딕은 주먹을 뻗어 재차 레드후드의 어깨와 아래턱을 타격하려 했다.
하지만 감정이 너무 많이 섞여서인지, 아니면 이를 피하는 레드후드의 움직임이 훌륭해서인지 주먹은 계속해서 애꿎은 허공만 훑었다. 덕분에 더욱 격앙된 딕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찍으려 들었다. 그래봤자 이번에도 레드후드는 구부린 팔을 몸통에 바짝 붙이는 것으로 손쉽게 방어했다.
『진정해.』
『그래선 안 되었다고---!!』
『딕, 그만하라고.』
원망하는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똑바로 바라보며 레드후드가 날아오는 주먹을 간단히 잡아챘다.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대량의 붉은 피는 그 날을 떠오르게 만든다.
끊어져버린 서커스의 공중그네. 관중들의 비명.
아무런 안전장치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목덜미까지 하얀 분칠을 하고 코에 빨간색 공을 붙인 피에로가 고무줄이 늘어진 호박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뛰었다. 그리고 절규하며 무대 중앙으로 달려 나가려던 어린 소년을 도중에 낚아챘다.
보면 안 돼. 가까이 가면 안 돼. 보아선 안 돼.
높은 곳에서 추락한 어머니는 두 눈을 부릅뜨고 누워있었다. 머리부터 지면에 닿았기에 피의 양이 상당했다.
그런 어머니와 팔과 다리가 얽힌 채 떨어져 척추가 두 동강이 난 아버지의 몸은 기괴한 자세로 뒤틀려 있었다. 하체는 위로, 상체와 얼굴은 바닥을 향한 채였다.
덜덜 떨며 죽은 어머니의 파란 눈동자로부터 못 박힌 소년을 피에로가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눈물은 아주 한참 뒤에야 터져 나왔고, 소년의 눈을 가린 피에로의 장갑은 속수무책으로 젖어들어 갔다.

『하느님 맙소사.』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직접적인 뇌의 손상으로 심장의 펌프질은 진작에 멎었으나 상처를 통해 계속해서 혈액이 흘러나왔다.
얻어맞은 탓에 이미 부어오르기 시작한 마이클의 눈은 거의 감긴 상태였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재차 마른세수를 했다. 늘 피곤해하고 졸려하던 사내는 총에 맞으면서도 나사가 두어 개 빠진 듯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끝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차라리 그랬다면 좋을 것이다.

『다리만 맞췄어도 충분했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고.』
『과연 그럴까.』
『이미 증거는 수집해놨어. 곧 익명으로 고발할 예정이었고.』
『맞아. 넌 뒤로는 증거를 모으면서 앞에선 선배님, 후배님 이러고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었지.』
레드후드의 말투가 날카롭게 변했다.
『씨발. 저 남자는 일부러 고담에 범죄자를 유입시켰어. 그들은 어둠을 틈타 누군가를 칼로 찌르거나, 강간하거나, 무차별 폭행을 저질렀지. 그런데도 너는 가슴 아파하는 표정을 짓고 있군. 좋아, 딕 그레이슨. 가서 강간당한 피해자를 앞에 두고「저 남자는 죽을죄까진 저지르지 않았어요. 그저 다리에 구멍만 뚫리면 충분했죠.」라고 지껄여. 그리고 애도의 시간을 가지라고. 하! 그거 무지 우스꽝스럽겠다.』
『제발... 제이슨.』
『정신 차려. 세상엔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는 법이야.』
『제이슨!』
연거푸 본명으로 이름이 불린 레드후드는 불쾌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알량한 동정심! 그놈의 연민! 증거를 수집해서 감옥으로 보내면 된다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이거 왜 이래. 너도 이미 경험해봤잖아. 너 또한 범죄 피해자였잖아! 저 남자로 인해 소중한 가족을 잃었을 사람들이 어떤 심정인지 모르지 않잖아!』
그러자 딕 그레이슨의 눈매가 금방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일그러졌다.
『네 말대로야. 잘 알고 있어, 제이슨. 아끼는 사람을 잃는다는 거, 그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난 지금 더 어쩔 줄 모르겠어... 그거 알고 있니? 제이슨. 마이클의 집에는 스스럼없이 냉장고를 열고 음식을 꺼내먹는 어린 소녀가 있어.』

그럴 리 없다. 레드후드는 의심의 눈으로 딕을 쳐다봤다. 마이클 윈저는 지금껏 독신이었고, 혼외 자녀가 있다는 기록 따윈 없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너도 빈민가 출신이니까 잘 알겠지, 제이슨.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키우는 아이가 있어. 원색적으로 욕을 하고 싸우지만 음식을 챙겨줘. 학교를 빼먹는 날에는 꿀밤을 먹이고. 나는 봤어, 제이슨. 애 아버지가 술에 취해 나타나면 그 어린 여자애는 슬리퍼를 양손에 쥐고 마이클 집으로 허둥지둥 도망을 쳐. 그러면 마이클은 그녀를 투명 인간 취급을 하지. 그는 어떠한 위로도 하지 않아. 본 척도 하지 않아. 하지만 여자애는 눈에 띄게 안도해하며 구석에다 여러 장의 담요를 구겨 자기 이부자리를 만들어... 그렇게 구석에서 시아라가 등을 구부리고 잠이 들면 마이클은 켜뒀던 TV를 꺼. 평범하게 자란 사람들은 몰라도 뒷골목에서 태어나고 자란 너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거야.』
딕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애에게 가서 유감이라고 말을 해야 해. 오, 젠장...!! 시아라는 울겠지. 그런 그녀 앞에서 범죄자를 처단하는 고담의 안티히어로인 네가 마이클을 죽였다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왜냐하면, 왜냐하면...』
『......』
『시아라가 뼛속까지 네 녀석을 증오하게 될 테니까. 네가 조커를 증오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슈퍼맨과 같은 투시 능력 없이 헬멧 속의 제이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래도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찡그리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저지른 폭력행위를 후회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딕은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
크게 한숨을 내쉰 딕 그레이슨은 레드후드로부터 시선을 돌렸고, 이는 레드후드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굳게 다문 레드후드는 마찬가지로 딕을 외면한 채 출입구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걸레를 빤 물을 한 바가지 들이마신 것처럼 아주 더러웠다. 찝찝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흡사 시커먼 뻘에 두 다리가 전부 빠진 느낌이었다. 힘을 주어 허리를 비틀어도 질퍽거릴 뿐이고, 조금이라도 공간이 생길라치면 거기로 진흙이 빈틈없이 채워지고 있는 듯한...
다리가 무거워진 그는 결국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이 감각은「후회」라고 불리는 놈이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다 한들 미안하다 말할 것도 아니면서.
무언가에게 끌어당겨진 것처럼 온기를 잃고 있을 마이클 윈저를 향해 돌아섰다.

「어?」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오로지 붉고 붉은 피 웅덩이 뿐.
시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야.」
흠칫 놀라 몸을 경직시키고 있노라니 갑자기 경찰용 곤봉이 레드후드를 노리고 똑바로 날아들었다.



전격 좀비물 스타트...

Posted by 미야

2016/07/13 14:40 2016/07/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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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딕 그레이슨은 현재 난처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거리는 제대로 표시가 되었다. 점멸하는 빨간 점은 300미터 바깥에 위치했다.
『망했네.』
하지만 그 높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빨간 점을 따라잡아 지하 2층, 지상 5층짜리 빌딩 - 용도 폐기된 흉물 - 에 도착한 그는 욱씬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러야만 했다.
『돌아가면 위치추적기 성능부터 개량해야겠어.』

한때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을 정문 출입구는 굵은 쇠사슬로 막혀있었다. 그렇다면 창문으로 - 당연하다며 2층으로 날아오르려던 그는 허리를 더듬거리다가 그래플링 훅이 수중에 없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코스튬을 입지 않은 그는 나이트윙이 아니다. 일개 순찰경찰인 리처드 그레이슨이었다.
『아이구야... 오로지 두 다리로 뛰어야 하는 건가.』
아무런 도구 없이 벽면을 기어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늘어진 전선 가닥을 밧줄처럼 사용하기엔 강도가 약해 보였다. 시험하듯 잡아당겼더니 몇 가닥은 쉽게 끊어졌다.

포기하고 접근이 용이한 지하주차장 쪽으로 접근했다. 경사로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가는데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곰팡내와 썩은 물 냄새가 진동했다. 아래에서 침수가 진행 중인 듯했다. 그 영향으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온통 곰팡이 천지였다. 두리번거리며 계단의 위치를 찾노라니 이번엔 운이 따라줘 곳곳에 찍힌 사람 발자국만 따라가면 되었다.
발자국 숫자는 모두 다섯. 그 중 하나는 넘어지고 끌려갔다.
누구의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소량의 혈흔도 떨어져 있었다. 불행하게도 폭행 행위가 있었던 것 같다. 공기 중에 노출된 피는 원래 빠르게 굳기 때문에 색은 이미 갈색으로 변했다. 그래도 문지르자 위아래 방향으로 약간 번졌다. 이것으로 폭행이 이루어졌을 시간을 짐작하며 머리 위로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마이클이 가해자인 걸까? 아님 피해자인 걸까.
그를 찾으려면 어디까지 올라가면 되는 걸까.

바로 그때 총성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벽으로 몸을 붙였다. 소리가 제법 가까웠다.
문제는 사방으로 반향되어 울렸기에 어느 쪽에서 들린 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간격을 두고 두 번째 총성이 들리자 침착함이 송두리 채 고갈되는 기분이 들었다.
마피아 식으로 따지자면 한 발의 총성은「경고」, 그리고 두 발의 총성은「처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들끓어 곤봉으로 벽을 후려쳤다.
나이트윙이라면 계속해서 올라가야 했고, 순찰 경관 딕 그레이슨은 근무 수칙에 따라 더 이상의 독단적인 행동을 멈추고 지원이 오길 기다리며 그 즉시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만약 배트맨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상상하는 건 여기선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상속의 배트맨은 단호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밟아 올라갔고, 정장 차림새의 부르스 웨인 또한 거침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배트맨과 부르스 웨인 두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딕 그레이슨을 - 돌을 깎아 만든 듯한 무표정으로 -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와 다르다, 나이트윙. 너에게는 너만의 방식이 있지.》
그래서 배트맨이라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는 걸 그 즉시 관뒀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계단을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딕은 긴장했다. 좋은 점이라면 당장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할 필요가 싹 사라졌다는 거고, 나쁜 점이라면 단신으로 여러 명과 대적하게 생겼다는 거였다. 게다가 위치는 각개격파가 까다로운 좁은 계단. 그것도 상대적으로 유리한 계단 위쪽이 아니라 불리하기 짝이 없는 아래쪽이었다.
일사불란과는 거리가 먼 구둣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세를 낮췄다. 그렇다면 왼손에 든 곤봉은 일종의 미끼용으로 집어던지고, 적들이 움찔하면 재빨리 오른손에 든 곤봉으로 정강이를 들입다 후려쳐서...
『911을 불러주세요!』
제복 차림새의 자신을 보자마자 구급차를 불러달라는 작자들을 보자 지금까지 경계했던 게 무지하게 억울할 지경이었지만, 아무튼.

한명은 손을 다쳤다. 관통상이었다. 부축을 받고 있는 다른 사내는 허벅지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지 구멍의 위치로 봐서는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고 단순히 스친 모양이다. 그래도 겁을 먹은 사내는 전쟁 영화에서 봤던 장면을 더듬어 셔츠를 찢은 천으로 상처 윗부분을 졸라매었다. 그 영화의 배경은 분명 1차 대전이었을 것이다.

『마이클 윈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네 명의 사내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저마다 창백하게 안색이 질려갔다.
한 명은 뭍으로 올라온 금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렸고, 두 명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이라도 하듯 풀죽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머지 하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911을 불러...』
『다시 묻습니다. 마이클 윈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리 중 주먹을 꽉 쥐었던 자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우리 탓이 아니야.』
이래서는 동문서답이었다.
『계획한 대로가 아니었다고. 내 말 알겠어?! 우린 그저 적당히 손을 봐서 3층 아래로 던질 작정이었다고. 재수가 없음 목이 부러지겠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 아냐? 운이 따르면 반신불구로 살아남을 수도 있었겠지.』
뜬금없는 내용이었어도 딕 그레이슨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대략 알 것만 같았다.

패잔병과도 같은 무리를 내버려두고 서둘러 3층으로 올라갔다.
이젠 발자국이 아닌 핏자국을 따라가면 되었다.
그리고 그 흔적의 끝자락에서.
그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두 눈으로 목도해야만 했다.
『레드후드.』
붉은 헬멧을 쓴 자가 무릎이 꺾인 모습으로 주저앉은 마이클 윈저를 향해 시커먼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늦었네.』
『지루해서 담배 한 개피 땡겨볼까 했어. 담배를 줄이라는 네 충고가 생각나서 관뒀지만.』
『그간 훈련을 게을리 한 거 아냐? 너, 이곳까지 오는데 10분 넘었다. 그 남자가 알면 굉장히 실망하겠어.』
『표정을 보니 놀란 모양이군. 어째서? 이렇게 되리라고 속으로 짐작은 했을 거면서.』
『내가 미리 말했지, 네놈이 미적거리면 내가 직접 나설 거라고.』

입을 꽉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딕 그레이슨을 주시하며 붉은 헬멧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리고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린치는 내가 하지 않았어. 전부 딴 놈들 작품이야.』
비록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딕은 헬멧 속으로 감추어진 그의 입가가 한쪽으로 당겨진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 여겼다. 마치 배트맨처럼 말이다.
『더운 여름날 상한 먹이를 눈앞에 둔 개처럼 아둥바둥 싸우더라고.』
레드후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았다.
『정말 눈 뜨고는 보기 힘들었어. 선술집에서 술주정뱅이들끼리 싸움이 나도 그보다는 더 괜찮게 싸웠을 거야.』

스스로의 힘으로 가까스로 매듭을 풀고 두건을 벗어던진 마이클의 얼굴은 벌써부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해 그 모습이 엉망이었다.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 표현 그대로였다. 눈 한쪽은 완전히 감겼다. 그래서인지 레드후드가 말을 걸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못 알아보는 듯했다. 아니, 그게 누구이든 마이클에겐 아무 상관없었다. 설령 그 자가 미국의 대통령이었어도, 가수 비욘세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완전히 녹초가 된 그는 무릎을 세웠다가 도로 주저앉았고, 끙 소리를 내뱉었다.
아까부터 붉은 헬멧을 쓴 남자가 무어라 떠들고 있는데 솔직히 그게 영어가 아닌 제3세계 언어로 들렸다. 괜찮다면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세상이 두 쪽 나도 쉬어야 했다. 넌더리를 내며 망할 놈의 두건을 멀리 던졌는데 마음만 굴뚝이었고 코앞으로 툭 떨어졌다.

『오, 아니지.』
붉은 헬멧이 말했다.
마이클은 혹시 자신에게 말을 걸었는가 싶어 얼굴을 들었다. 그래봤자 상이 뚜렷하지 않았고 앞이 흐릿했다.
『거기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라고, 나이트윙.』
내 이름은 나이트윙이 아닌데... 마이클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혀를 움직여 혼잣말을 했다.
『그는 네 동료가 아니다. 파트너가 아니야. 죄과에 따라 처단할 자야.』
무도회장도 아닌데 생뚱맞게 파트너를 왜 찾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너는 이 자가 아닌 나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있군.』
눈도 안 떠지는데 어떻게 노려본다는 건가.

『우유부단한 너를 대신해 기꺼이 내 손을 더럽히는 건... 나이트윙.』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님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한 뒤, 레드후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 마이클을 총살했다.

Posted by 미야

2016/07/12 09:47 2016/07/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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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글입니다. DC 입문은 약간의 애니 감상이 전부라서 설정이 엉망입니다. 믿거나말거나 배트맨 나옵니다, 슈퍼맨 나옵니다. 그런데 언제 나오지?

무리가 알아차렸을 적엔 이미 늦어 피투성이 자루를 뒤집어쓴 마이클은 성난 황소처럼 무작정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벽에 부딪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절벽과도 같은 계단 아래로 고꾸라질 수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일직선으로 뛰었다.
『어휴. 방심했다고 그새 튀냐... 야, 잡아!』
루모는 한심해 죽겠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무작정 도망치려던 게 아니었나 보다. 잠시 멈칫거린 마이클은 들려오는 목소리로 방향을 가늠하더니, 이쪽이다 판단을 내리자마자 몸을 휙 돌려 머리를 앞으로 내민 모습으로 빠르게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미친!』
뿔로 콱 받아버리겠다며 황소가 돌진해오는데 멍청하게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서성거리고 섰던 구경꾼들은 혼비백산하여 좌우방향으로 흩어졌다. 노린 것도 아닌데 운 나뿐 사람은 한 명 정도 나오는 법인지라 루모가 배를 정통으로 들이받혔다.

『욱!』
장비를 착용한 쿼터백이 탱크처럼 돌진해와 태클을 걸어왔다 - 그런 생각밖엔 안 들었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한 바퀴씩 굴렀고, 마침내 눈앞에서 형광 빛을 내뿜던 색색의 별들이 진정세로 돌아섰을 적엔 루모의 몸 위로 마이클이 올라탄 형세가 되어 있었다.
씨발, 좇 됐다.
루모는 있는 힘을 다해 양팔을 선풍기 날개처럼 휘둘렀다.
그리고 마이클 윈저 또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루모를 공격했다. 즉, 묶인 탓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깔고 앉은 루모를 향해 박치기를 시도했다. 그것도 뒤로 힘껏 머리를 젖혔다가 가속도를 덧붙여 쾅쾅 박아댔다.

『꺄아아아악~!!』
루모는 자신이 끙끙 신음하고 있다 여겼지만 사실은 속옷이 강제로 벗겨진 여자처럼 앙칼지게 비명을 질러대는 중이었다. 핏방울이 떨어져 눈 속에 들어갔기라도 했는지 시야는 온통 붉었다. 문제는 그 피는 자신이 흘린 것이 아니었다. 돌덩이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이마가 아팠다. 하지만 정작 머리가 깨진 건 각목으로 맞은 마이클이다.
왜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피를 흘리고 머리가 터진 사람은 따로 있건만, 고통과 공포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완전히 미친 게 분명한 마이클 윈저가 맞지 않는 가락을 콧소리로 노래했다.
『흘흘흐. 붉게 흐르는 건 크랜베리. 찐득거리는 건 허니 라즈베리...♪』
골동품 레코드가 잡음을 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쉬어빠진데다, 음의 고저가 완전히 엇나가 원래는 밝은 동요와도 같았을 노래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내 이름을 불렀지? 안녕, 안녕. 나야, 미스터 츄파춥스. 똑똑히 들었어. 네가 나를 불렀어. 안녕, 안녕.』
『히익!』
온몸의 털이 거꾸로 솟았다. 이 남자는 저승의 망령이다. 공포에 휩싸인 루모는 이성을 잃고 두 팔을 뻗어 마이클의 목을 강하게 졸랐다. 이 자를 죽여야만 한다. 하지만 뒤집어씌운 자루가 벗겨지지 않도록 옭매듭으로 목에 감은 줄이 문제였다. 힘을 주어 목덜미를 누르던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손톱이 매듭 틈새에 끼어 뒤틀렸다.
망했다. 루모는 이것으로 목을 졸라 상대를 끝장낸다는 상상 속의 결말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에서 오래된 가죽이 당겨져 가닥으로 끊어지는 역겨운 소리가 들렸고 - 루모는 그게 자신의 손가락에서 난 소리가 아니길 빌었다 - 재차 박치기가 이어졌다. 순간 시야가 말갛게 점철되었다.

안주머니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꺼낸 사내가 욕설을 퍼부으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
온전히 폈을 적의 날의 길이가 8cm에 이르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는 주머니칼이었다. 원래의 용도는 맥주 병뚜껑을 따거나 강탈한 슈퍼마켓 금고를 부술 적에나 써먹는 하찮은 거였다. 그걸 쥐고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었다. 허나 지금까지 사람을 찌른 경험이 없다보니 정작 셋! 하고 숫자를 세었을 적에는 머뭇거렸고, 다섯! 하고 세고 나서야 마이클의 등 한가운데로 칼날을 찔러 넣 -

타앙.

뭔가가 빠르게 스치면서 등이 따끔했다. 동시에 화약이 터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손이 통째로 날아갔다고 누군가 울부짖었고, 우왕좌왕하는 기척이 커졌다.
「뭐지. 방금 무슨 일이지. 누가 총을 쐈지? 혹시 신참인가...」
마이클 윈저는 총성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자신의 파트너인 리처드 2호를 떠올리고 반색했다.
하지만 기뻐한 것도 잠시, 이상했다. 신참이 총을 쐈다고 하기엔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잘못되었어.」
그 정신없는 와중에 한참 생각한 그는「모두 꼼짝 마, 경찰이다, 손들어,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어쩌고저쩌고.」의 사전 경고가 빠졌다는 걸 가까스로 알아차렸다.
무경고 발포는 심각한 규정 위반이다. 때로는 피의자가 되어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일간지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올라가 공공의 적으로 비난을 받는 건 덤이다.
일반적으로 경고는 3회에 걸쳐 행해진다. 경찰관들은 용의자 체포 후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것만큼이나 경고 후 사격을 습관화한다. 물론 현장 경험이 적은 얼뜨기 신참들은 잔뜩 긴장하여 얼어붙은 나머지 방아쇠를 당긴 다음에야 혀를 깨물고「경찰이다!」외치기도 한다.
어쨌든 발포는 이루어졌고, 마이클은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지금쯤 리처드 2호는 외쳐야 했다. 모두 제자리에서 꼼짝 마.

「......」
기다리던 목소리는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얘기는 리처드 그레이슨이 폐건물 주변을 탐색하는 도중 사라진 자신을 구하러 여기까지 왔다고 여겨선 안 된다는 거였다.
깨닫고 나자 길거리에 버려진 콜라캔처럼 바닥을 굴렀다. 그 모양새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심히 보기 괴로을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나중 문제다.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간격을 두고 두 번째 총성이 울렸다.
상대는 상당한 명사수인가 보다. 탕 탕, 두 번을 연거푸 쏘는 2점 사격도 아니고 딱 한 발만 1점 사격을 했는데 이번에도 사람 죽는다 비명이 들렸다. 비릿한 피 냄새도 확 풍겼다. 악을 쓰고 욕을 퍼붓는 걸 봐선 치명상은 아닌 듯하고 다리나 팔을 맞춘 듯했다.
『아이고, 내 다리잇!』
음, 맞힌 곳은 다리였다.

『누구야! 웬 놈이냐!』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해?』
훼방꾼의 목소리는 이제 막 소년기를 지나기라도 한 것처럼 무척 젊었다. 짐작하자면 20대에서 30대 초반.
『나라면 그걸 궁금해 하는 대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튈 텐데.』
그것도 이런 폭력적인 상황을 별 일 아니라며 당연시 여기는 젊은이였다.

이번에는 위협사격이었나 보다. 연거푸 네 번의 총성이 들렸는데 콘크리트 바닥에 구멍만 뚫렸을 뿐, 몸 어딘가에 바람구멍이 나서 털썩 주저앉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얌전히 사라질 테니 쏘지 마! 제길, 재수 옴 붙었네.』
훼방꾼을 노려보며 대적해보려 했으나 상대방이 풍기는 기운이 워낙에 살벌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버텨봤자 손해다. 상황 판단이 빨랐다. 다들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처럼 후다닥 움직였고, 이미 다리를 맞은 놈은 겅중겅중 외다리로 뛰어서 자리를 벗어났다.
『쳇! 미스터 츄파춥스에게 친구가 있었을 줄이야.』
「친구」라는 표현에 새빨간 헬멧을 쓴 훼방꾼이 대놓고 짜증을 냈다.
『어디서 개소리야.』
『친구... 아니야?』
『전혀. 쓰레기와 같이 놀면 썩는 냄새가 옮겨 붙는 법이라서.』
불타는 빛깔이었음에도 헬멧의 빨간색이 얼음처럼 시리게 느껴졌다.

Posted by 미야

2016/07/09 20:01 2016/07/0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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