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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츄파춥스라는 정체가 발각되어 도주했다고 여기는 편이 적절할 터였지만 구석 어딘가에서 그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다른 가능성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몰래 심어둔 위치 추적기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확인해본 결과 10분 안팎으로 마이클은 고작 300미터 가량 이동했다. 이는 승용차나 바이크와 같은 탈 것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두 다리만을 사용해서 장소를 옮겼다는 의미로, 일반적인「도주」와는 양상이 달랐다.

그렇다면,

- 자의적으로 걸어갔을 경우
누군가와 접선 중인 건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동업자라던가, 아니면 부하라던가.
가능성 있다. 하지만 2인1조로 행해지는 경찰업무 중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영 부자연스럽다.

- 강제로 끌려갔을 경우
혼자 있는 것을 노려서 납치를 시도했다.    
다만 그런 것치고는 멀리 가지 못했다. 겨우 300미터.

판단을 유보한 채 곤봉을 단단히 쥐었다.
『......』
잠시 머뭇거린 그는 이윽고 결심했다며 손전등은 바닥으로 던지고 곤봉을 하나 더 꺼내 양손으로 쥐었다.

바로 그 시각, 시커먼 자루를 머리에 뒤집어쓴 마이클은 죽어라 버둥거리며 온몸을 비틀어댔다. 양팔을 모두 결박당하기도 했거니와 자루가 벗겨지지 않도록 목 아래로 단단히 매듭을 지어놓은 상태였기에 그 움직임은 격렬하면서도 동시에 억압된 상태였다.
《우우우웃~!!!》
커다란 자루를 뒤집어씌운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탓에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고, 더하여 서서히 숨이 막혀와 완전히 진이 빠졌다.
흙과 감자의 냄새가 나는 자루는 두꺼운 면 재질로 만들어져 있는데다 올과 올 사이가 제법 촘촘한 편이었다. 입과 코를 활짝 벌리고 최대한 숨을 들이마셨지만 충분한 공기가 주어지지 않았다. 뇌로 공급되는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자 판단력도 덩달아 흐려졌다.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 해보고 대신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버둥거리고만 있는 건 그런 탓이었다.

붙잡힌 팔을 뿌리치려 하자 옆구리에 주먹이 꽂혔다.
갈비뼈가 욱신거려 끙끙거리고 있자니 이번엔 구둣발이 날아왔다.
일부러 고통을 주기 위한 의도가 다분한 게 같은 위치를 반복해서 걷어찼다.
무릎이 꺾이면서 나동그라졌다. 아픔을 호소하는 것이 우선인지, 아니면 숨을 쉬는 게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마이클은 격하게 헐떡거렸다. 저항하던 움직임이 작아지자 사내들은 다시 마이클의 양팔을 잡고 무슨 짐짝이라도 되는 양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 부위가 닿자 쓸린 바지가 엉망이 되어갔다.

『그런데 이거 제대로 잡아온 거긴 한 거야?』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사내가 근심하며 물었다.
제복 차림새의 경찰관을 붙잡고 린치를 퍼붓는 건 재미로 노숙자를 폭행하는 것과 차원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판사들은 원래 집단 폭행에 대해 너그럽지 않은 편인데 여기서 그 피해자 신분이 경찰이 되면「너그럽지 않다」라는 표현도 더는 쓸모가 없다. 무조건 최대 형벌을 때린다. 보석 허가도 안 내준다. 가석방 신청도 거절한다.
그나마 그가 이번 일에 끼겠다고 수긍한 건 상대가 악질적인 부패경찰이라고 해서다.

『엉뚱한 사람을 데려온 거라면 입장이 곤란한데.』
주변이 어두웠기에 경찰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저놈 잡으라고 하니까 잡았고, 묶으라고 하니까 묶긴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래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었다.
『헤이, 대답해봐. 당신이 진짜 미스터 츄파춥스야?』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봤자 상대방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도 못했다. 들리는 건 으, 혹은 어어, 정도로 하나같이 발음이 뭉개져 제대로 된 단어들로 들리지 않았다.
『잘 안 들려. 지금 뭐라고?』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마이클이 두 팔을 힘을 줘서 허우적거렸다.
자루 속의 외침도 커져갔다. 짐작하자면 아마도 풀어달라거나, 놓아달라는 뜻일 것이다. 목을 세우고 바르작거리는데 알아듣진 못해도 절반이 욕이라는 건 이해가 갔다.

『애원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무리 중 하나가 손바닥에 퉤퉤 침을 뱉더니 각목으로 마이클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마이클이 한쪽 무릎이 반으로 접혔고, 사내는 다시 각목을 휘둘러 어깨를 때렸다. 따악, 따악 소리가 연거푸 울렸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소환하는 주문을 다섯 번 외우고.
『할 수 있으면 내 뒤에서 까꿍 인사해봐라!』
진심을 다하여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하늘을 보는 자세로 벌렁 쓰러진 마이클의 몸뚱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좋지 않게 얻어맞았던지 어느새 뒤집어씌운 자루에 시뻘겋게 핏물이 묻어 나왔다. 손가락조차 까닥이지 않자 무리 중 하나가 겁을 먹었다. 비록 일생토록 갈취와 협박을 일삼기는 했지만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죽이고 싶지도 않았다.
『야... 루모. 이러면 계획했던 것과 틀리잖아. 그냥 몇 대 때려서 본때만 보여주고 죽이진 않을 거라며.』
『시끄러.』
『곤란해, 진짜야. 이러면 곤란하다고.』
『닥치라니까! 이 겁쟁이들아!』
아드레날린 분비가 최고치에 이른 루모는 각목을 야구배트처럼 들고 동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뒤로 빼는 거야?! 이 새끼들아. 이놈은 우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슈퍼맨에게 넘기려고 했단 말이다. 슈퍼맨! 메트로폴리스! 그런데 뭐? 곤란해? 지금 곤란하다고 했어? 어따 대고 한심한 소리를 지껄여.』
붕붕 소리가 나도록 각목을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이놈이 안 죽으면 우리가 죽어. 정신들 차려! 이건 생존의 문제라고.』

과학자들이 아무리 심각하다 강조했어도 오존층 파괴는 그다지 피부에 와 닿지 않았지만 이건 달랐다.
슈퍼맨이 제아무리 대중적으로 예의바른 신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쳐도 그 정체는 외계인이다.
루모는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컴퓨터 오작동으로 잘못 발사된 핵미사일을 우주 밖으로 냉큼 내던졌다던 슈퍼맨의 활약상을 떠올렸다. 이 신과 같은 위대한 존재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구상 반경 70km 어딘가는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 어딘가는 그가 살고 있는 스타 시티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재앙을 비켜갔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그조차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어느새 그림이 바뀌어 슈퍼맨이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우주를 날아가고 있었다.
《지구를 깨끗하고 안전하게.》
영웅은 코딱지만큼 작은 소행성 저 너머로 자신을 던지고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그렇게 되고 싶냐, 엉?! 되고 싶냐고!』
『하지만 슈퍼맨은 불살주의잖아.』
『그래서 뭐. 편의점 털다 슈퍼맨이 나타나면 내 등짝에 멋지게 싸인 해주세요~ 이러려고?』
『싸인 좀 받으면 어때서. 나, 슈퍼맨 좋아해.』
『어이고! 환장하겠네. 범죄자 주제에 팬이셨어요? 어이고!』
화가 치민 루모는 이 어리벙벙한 친구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
덕분에 숨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대자로 누운 채 꼼짝을 하지 않던 마이클이 어느새 몸을 스윽 일으켜 세우고 앉는 걸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16/07/06 15:53 2016/07/0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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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뒤로 돌아 경찰서로 돌아가겠다는 걸 어르고 윽박질러서 순찰차에서 내리게 했다.
꼼짝하기가 싫었던지 마이클은 가위바위보를 제안했다. 이기는 사람 마음대로 하자는 거였다.
딕은 더운 여름날 귀신 장난하듯 맥라이트 손전등을 아래턱에 대고 스위치를 딸각 올렸다.
『제가 이기면 선배님을 옥상 난간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가위바위보를 하죠.』
『와아~ 너, 지금 방긋방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니까 꼭 사이코패스 같다.』
그렇게 가위바위보는 없던 일로 묵살되었고, 마이클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마냥 딕의 뒤를 따라갔다.

『이대로 한 바퀴를 다 돌자고?』
『돌아야죠.』
『너, 평소에 요령 없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
『사람을 말려죽일 거 같다는 얘기는 자주 듣습니다.』
『그건 칭찬이 아니야, 리처드 2호! 지금처럼 코를 으쓱이면서 자랑스럽다는 투로 할 대사가 아니라고!』

출입금지 표지판 옆으로 커다란 자물통이 달려 있었다.
일반 철물점에서는 취급조차 하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부수려면 절단기가 필요할 정도로 쇠가 굵었는데 과장을 양념처럼 조금 보태자면 잘 익은 코끼리 음경 크기였다.
손전등으로 비춰보자 금속의 광택이 번쩍였다.
어쩐지 든든하고 흡족한 기분이 들어 위아래 방향으로 잡아 당겼는데 -
『어라.』
잘 맞물려 있던 주둥이가 거짓말처럼 쩍 벌어졌다.
튼튼한 건 외견뿐이고 실상은 개좇이다? 열쇠를 꽂아 돌린 것도 아니고 그저 살짝 잡고 흔든 것 정도로 스륵 풀려버리다니. 당황한 나머지 두 손을 연꽃받침으로 만들어 자물쇠를 감싸 쥐었다.

『누군가 자물쇠를 망가뜨렸군요.』
『아냐. 내 생각엔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불량품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제대로 걸리지 않은 거야.』
인위적인 개입 따윈 없었다고 마이클은 우겼다.
그래서 손전등의 강렬한 불빛이 자물쇠가 아닌 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망가진 게 자물쇠인지, 아님 인간성인지... 자세히 봐요. 선배.』
음료 캔을 잘라서 만든 것이 거의 확실한 조그마한 알루미늄 조각이 자물통 구멍 속에 말려있었다. 그것으로 안쪽 핀을 눌러 자물쇠를 열었던 것 같다. 비싼 자물쇠에는 이런 식의 장난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하게 고안된 풀림 방지 장치를 삽입하는데 이 제품에는 그런 게 없었다. 크기만 컸지 99센트 스토어에서 파는 싸구려였다?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 더 살펴봐야겠어요.』
딕은 손전등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허나 건전지로 작동하는 손전등의 불빛 하나만으로는 대형 쇼핑몰 너비의 폐건물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불가능했다. 듬성듬성 위치하여 불빛을 내뿜고 있는 보안등이 보우하사 완전한 암흑 상태는 아니었어도 20미터 앞에 세워진 파란색 드럼통이 검정색으로 보일 정도다.
쯧, 하고 혀를 물었다. 자경단 일을 하고 있을 적에는 광원을 자동으로 조정해주는 특수 렌즈를 통해 사물을 보았기에 답답함을 느낄 일이 없다시피 했는데 맨눈인 지금은 드럼통 개수를 세는 것도 불가능했다. 센서를 조작하듯 손가락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지만 까만 시야가 밝아질 일은 없었다.
「이럴 적엔 슈퍼맨의 능력이 부럽다니까.」
일단은 출입구로 보이는 곳을 비춰봤다. 두꺼운 나무판을 덧대어 못질을 했고, 창문도 상태가 엇비슷했다.
깨진 유리조각 탓인지 건물 주변이 바닷가 모래밭처럼 반짝거렸다.

『가까이 가보죠.』
『에이.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마이클이 말했다.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 없음. 들리는 수상한 소리 없음. 코를 자극하는 냄새 안 남. 느껴지는 진동 없음.
그러니 돌아가서 별 이상 없었다고 보고해도 된다.
그렇지 아니한가.

『이상이 없긴 뭐가 없어요. 누군가 자물쇠를 손상시켰잖아요.』
딕 그레이슨의 얼굴에서 영업용 미소가 지워졌다. 아니, 정색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더 이상 시간낭비 하지 말죠. 저는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아볼게요, 선배님은 오른쪽으로 돌아보세요. 수상하다 싶은 곳이 있어도 단독으로 움직이지 마시고요. 최대한 빠르게 한 바퀴를 전부 돈 뒤에 이곳 출발점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죠.』
『답답하게 뭐 하러 그래. 뭔 일 있으면 그냥 소리를 질러 널 부를게. 됐지?』
『아뇨. 그렇게 해선 정찰이 되지 않아요.』
『뭔 소리여. 그럼 시한폭탄을 발견해도 입 다문 채 가만히 있으라는 거니?』
『비슷해요. 어차피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는 폭탄이 해체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출발점으로 돌아와 제가 오길 기다려 주세요. 이해되었나요?』
리더도 아니면서 지시 아닌 지시를 내린 딕은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아 보이는 마이클을 무시한 채 오른손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쥐고 있던 손전등을 왼손으로 바꿨다.

「너 말이야, 배트맨이 그렇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행동들을 언제부터인가 고스란히 따라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니? 욕하면서 닮는다고 너도 꽤 독선적이야.」
환청처럼 들려온, 악다구니에 찬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재수 없는 녀석.」

들러붙은 비난을 털어내기 위해 가볍게 목을 좌우로 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오른손이 권총집을 덮은 자세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받은 주입식 교육 탓에 총기류 사용이 거북했다. 그래서 매뉴얼대로의 자세가 아니라 여차하면 휘두를 각오로 곤봉을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 있었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대놓고 툴툴거렸던 것과는 달리 마이클도 그럭저럭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느긋한 태도라는 문제가 있기는 있었지만 - 그 정도는 괜찮겠거니 생각한 딕은 다시 앞을 주시했다.

이렇다 할 수상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무렵 딕은 이유를 모르게 굉장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뭐랄까. 꼭 속고 있는 듯한... 알면서 속아주는 듯한?
정확하게는 다른 식구들이 모두 외출한 집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마침내 한 바퀴를 전부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그는 흠, 소리를 내며 곤봉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설마, 그건 아닐 거야. 단지 선배의 걸음이 느려서 그런 거야.

5분을 더 기다렸다.
시계 초침의 움직임을 확인한 딕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3분 더 같은 자리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3분이 흐르자 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이 썩어빠진 인간 같으니!』
바닷가 모래를 차는 팟, 팟 소리를 내가며 순찰차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꽉 다물린 어금니에서 화난 짐승이 내는 으르렁 소리가 새어나왔다.
「한 바퀴 돌기는 뭘 돌아. 일찌감치 순찰차로 돌아가서 지금쯤 시트에 등을 기댄 편안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겠지. 내가 못 살아!」
차 바퀴를 향해 발길질을 하려던 걸 가까스로 참고 운전석을 향해 불빛을 조준했다.
『선배! 마이클 윈저! 당장 이리 나와서...... 어라.』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순찰차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깨달음이 해일처럼 밀려오자 갑자기 얼굴에 난 솜털 전부가 쭈삣 일어섰다.

Posted by 미야

2016/07/04 15:54 2016/07/0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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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기와 소형 카메라와 같은 첨단장비를 동원해 몇 주에 걸쳐 주도면밀하게 관찰해온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마이클 윈저를 평가하자면 단 한 마디,「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족했다.

올해 나이 서른 둘. 브루스 웨인보다 한 살 어렸다.
결혼을 한 기록은 없고, 가족도 없다. 늦둥이로 태어났기에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부모님들 연세가 제법 되었다. 나름 열심히 운동하고, 담배를 끊고, 채소를 많이 먹었지만 윈저 부부는 각각 심장마비와 급성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여든 둘, 그리고 일흔 아홉이었다.
그렇게 되리라 짐작했기에 아들의 미래를 염려한 부모는 신탁을 예치하여 대학을 졸업할 학비 정도는 마련해줬던 것 같다. 현명했던 부모님 덕분에 마이클은 친척에게 손 벌리지 않고 스타 시립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가 그다지 적성이 맞지 않아 1년 만에 중퇴했다. 그리고 빈둥거렸다. 남자는 세계 일주, 봉사활동, 개인사업, 이런 거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예금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아르바이트로는 벌이가 영 신통치 않아 결국 생활비가 바닥났다.

신용 대출을 알아보던 중 덜컥 경찰시험을 봤다.
시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흉악한 범죄로부터 지켜내고 싶다는 사명감 따윈 아마 없었을 것이다.
채용이 쉽게 되니까 무작정 지원했다고 본인 스스로가 자백했다.
빌런들의 위협 탓에 법 집행 종사직에 대한 선호도는 오래전부터 바닥이었고, 여차하면 목숨을 잃거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며 기피 대상으로 꼽혔다. 그런 만큼 경찰조직은 만성적인 인력부족을 호소하고 있었고, 경찰관을 뽑는 시험은 대놓고 형식적이었다. 오죽하면 시험지에 자필로 이름만 쓰게 하고 체력 테스트 딱 하나만 본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돌기도 했을 정도다. 일반 회사에 지원했다가 연거푸 쓴 잔만 맛봤던 마이클에겐 아마도 마지막 선택지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경찰관으로서 근무 실적은 형편없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승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가 승진에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만사 의욕이 없었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봤자 몸만 피곤하잖아요? - 평소 입버릇이 관 뚜껑 열고 그 속에 들어가 30년간 죽어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참 한심한 인간이었다. 여자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핸드폰 단축메뉴로 저장된 절친도 없었다.
유일한 취미는 텔레비전 시청, 그리고 잠자기. 극장이나 경기장에 가지도 않는다. 휴일이면 집에 틀어박힌다.
틈만 나면 졸고 있고, 근무태도는 불량하다. 노골적으로 뇌물을 받는 타입은 아닌데 통행 제한 구역에서 차렷 자세를 취하는 대신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식이다. 언젠가 실종자 수색을 하던 중에 제보 전화를 받기 싫어 수화기를 몰래 바닥에 내려놓은 적도 있단다. 수사과의 데이비슨은 대놓고 마이클을 경멸했다.

「그런 남자가 미스터 츄파춥스라는 건가. 고담시에서 범죄가 흑사병처럼 창궐하도록 만들려던 자라고?」
순찰차 조수석에 앉은 딕 그레이슨은 양팔을 가슴에 두른 자세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게으른 악당.

어쩐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며 눈을 비비는 허수아비나, 졸음을 호소하듯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는 펭귄, 잠에 찌든 표정으로 턱받침을 하고 있는 아이비, 이불을 뒤집어쓰고 깨우지 말라고 투정하는 조커... 가능해? 그게 가능하냐고.
「배트맨은 분명 전부가 연극이라고 할 걸.」
그렇다면 마이클 윈저는 대단한 배우다. 경찰시험을 치루는 대신 포트폴리오를 들고 극장으로 갔다면 그는 아마 매년 금가루가 뿌려진 레드카펫 위를 걸어 다녔을 것이다. 신문은 대서특필 했겠지. 올해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라고.
저 평범한 얼굴로.
여자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는 얼굴로.

옆에서부터 지긋이 내리 꽂히는 시선에 마이클은 백미러를 움직여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코털이 삐져나온 것도 없고, 체크.
아랫니에 음식물 찌꺼기가 끼지도 않았고, 체크.
겨드랑이도 이상 무. 바지 지퍼 이상 무.
그런데 어째서 나는 냄새 지독한 똥 방구를 뀐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거지.

『저어... 무슨 문제라도?』
『글쎄요.』
『없으면 없는 거고, 있으면 있는 거지. 무슨 대답이 그따구야.』
『......』
딕은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손을 뻗어 제 위치를 벗어난 백미러를 적당히 조정했다.
『쳇, 알았어. 있다가 약국 들려서 생리대 사자.』
『저 지금 생리 안 하거든요?! 선배님.』
두 사람은 동시에 인상을 구기며 서로를 흘겨봤다.

빈정상하게도 먼저 눈을 내리깔은 건 마이클 쪽이었다.
쓴물처럼 올라오는 패배감을 애써 무시하며 업무 방향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어제에 이어 쓰리스톤 12번가 * 코드 425야. 같은 장소로 신고가 또 들어왔대.』
『425(수상한 상황)? 너무 추상적인데요.』
『추상적인 게 아니라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는 거지. 거긴 오래된 공장 지역인데 의류 산업이 몰락하면서 껍데기만 남은 곳이야.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지만 시 예산 부족 탓에 사업 진척은 여전히 지지부진이고 듣자하니 렉스코프에 대규모 토지 매각을 추진 중이라고 하더군. 그 와중에 정치적인 것도 살짝 얽혀서... 그렇게 폐건물을 방치하다보니 한 달에 두세 번씩 신고가 들어와. 흘러나오는 불빛을 봤다던가, 철망이 뜯겨져 나갔다던가, 망치로 뭔가를 때려 부수는 쾅쾅 소리가 들린다거나... 뭐, 대충 그런 거지.』
마이클은 스타 시티 10대 철부지들이 자물쇠 뜯고 들어가 흥청망청 술파티를 벌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딕 그레이슨은 마약 거래 현장을 상상했다.

『아냐, 아냐. 심각한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었다.
유수 대기업을 개발 사업에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당국에서는 당연히 추문이 나는 걸 꺼려했다. 살인사건 현장으로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들 죽었다고 복창 - 시청 고위 공무원이 으름장을 놓자 불똥은 경무관이 입고 있는 제복 바지 위까지 튀었다. 경무관은 다시 새해 첫날 조무식에서 부하들을 갈궜고, 불똥은 이제 경위들에게까지 튀었다. 하여 까라면 까는 경장과 순경들은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에워싼 철조망 위로 큼직하게 협박 문구를 써서 달았다.

무단으로 침입할 시 좇 되는 거임. 왜냐면 하루도 안 빼먹고 이곳을 확인함.
푯말 바탕에 칠해진 흰색 페인트는 얼룩 하나 없이 깔끔했다.
다만 거리가 있어서 정확한 문구는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마 이와 비슷한 내용을 것이다.

『아직 크레이지 덤프가 잡히질 않았잖아?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일선 경찰들이 제일 먼저 뒤져보는 곳이 바로 저기야. 그걸 우리도 알고 걔네들도 알고 있지. 바보가 아닌 이상 숨어들지 않아. 모르고 기웃거리는 건 수배중인 범죄자가 아니고 여드름투성이의 10대 철부지들이라고.』
마이클은 안전벨트를 푸르기도 전에 경광등의 작동 버튼을 눌러 귀에 거슬리는 삐익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딕 그레이슨은 완전히 질겁했다.
『소리를 꺼요!』
은밀하게, 신속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 이 세 가지는 행동 요령은 싸그리 무시되었다.
뿐만 아니다. 마이클은 3분은 족히 자동차 운전석에 엉덩이를 붙인 채 가만히 버텼다.
설령 수상한 자가 폐건물 속에 숨어있었다고 해도 이러면 걸음아 나 살려라 이러고 전부 도망치고도 남는다.

『맞아. 전부 도망가라고 그래.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음... 글쎄. 전혀 아닌 것 같은데.

Posted by 미야

2016/06/29 15:50 2016/06/2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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