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조짐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고담의 범죄율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납치, 마약거래, 살인과 같은 심각한 범죄가 아니라 소매치기나 편의점 도둑, 지하철 성추행과 같은 자질구레한 범죄들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 심각성을 몰랐다.
서서히 데워져가는 들통 속의 개구리는 자신이 삶아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죽는다고 했던가, 깊어지는 치안 악화에 사람들은 패스트푸드의 트랜스지방 탓을 하거나 배기가스로 오염된 공기 탓을 했다. 그리고 이 미쳐 날뛰는 모든 악행이 종말에 이를 즈음에 시장 선거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범죄와의 전쟁은 때로 정치 선전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싸이렌 소리가 아무리 자주 들려도 그걸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운동 전략으로 여겼다.

「범죄 관련 뉴스를 잔뜩 때린 뒤에 여론이 악화되면 시장 후보가 선언하는 겁니다. 이 모든 잘못을 제가 반드시 바로 잡겠습니다~!! 그럼 순진한 유권자들은 기립박수를 치는 거죠.」
「그런데 이걸 어쩌죠. 우린 너무 익숙해졌어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고담은 항상 범죄가 들끓었습니다.」
토크쇼를 진행하는 루이 시켈이 카메라 앞에서 신랄하게 공화당 선거 전략을 까고 나섰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이 모든 건 얄팍한 눈속임이 아니었다.
컴퓨터 통계자료에 의하면 크고 작은 범죄율이 12%나 상승했다.
배트맨이 이 사실을 고든에게 귀띔을 해줬을 적에 두꺼운 안경을 쓴 반백의 GCPD 경찰국장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구치소가 항상 미어터질 지경이라 좀 이상하다 생각은 했소만... 그 정도였다고?」
「조커나 펭귄, 투페이스 같은 빌런만 염두에 두니까 사소한 디테일을 놓치는 걸세, 지미.」

그리고 거기에는 미묘한 패턴이 있었다.
흡사 도시 전반으로 범죄 투어라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배트맨이 파악한 바에 따르자면 잡범들은 외지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 무슨 백화점 쇼핑이라도 하듯 범죄를 저지른 뒤, 뒷골목에서 탈취한 자가용을 몰고 고담을 떠났다. 운이 나쁜 몇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나머지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관광하듯 고담으로 돌아와 편의점 금고를 강탈하거나 귀가하는 여성을 덮쳤다.
「자, 잠깐만 기다려보게, 배트맨.」
「여기 내가 분석한 데이터가 있네. 자네에게 주지.」
「도시 바깥으로부터 범죄자들이 유입되고 있다고?!」
「그들 한명 한명은 별 대수롭지 않지만 가랑비가 모여 강물이 되는 법이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걸세, 짐. 누군가 뒤에서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게 분명해.」

팀 드레이크 - 레드로빈은「못된 장난」이라는 표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 아세요? 배트맨. 난공불락의 큰 요새를 몰락시키려면 병든 쥐 세 마리면 충분하다는 걸.」
실제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도시를 점령한 정복자가 있었다.
「자니베크 칸은 병으로 죽은 쥐를 투석기를 사용해서 도시 성벽 안으로 집어 던졌죠. 나중엔 새카맣게 썩은 병사들의 시체도 던졌고요. 덕분에 페오도시아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어요. 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폐허가 되었죠. 그 뒤의 중세 유럽의 역사는 우리가 배운 그대로에요.」
「누군가 우리에게 병든 쥐를 떼로 보내고 있다는 거군.」
「비유하자면 그래요. 누군지 몰라도 무척 악랄한 수를 쓰고 있는 것 같네요.」
「배후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내야겠다.」

그런 까닭으로 운 나쁜 소매치기가 밧줄에 발목을 묶인 채 3층 건물 높이에서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꺄아아악~!!」
배트맨은 경고도 하지 않고 소매치기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물론 그는 불살주의자다. 줄의 길이가 짧았기에 소매치기의 머리는 지면에는 닿지 않았다. 하지만 체중과 가속도 탓에 밧줄에 꽁꽁 묶인 발목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탈구되었다.
「누가 너를 이리로 보냈지.」
「크아악, 크아앗~!! 아프다고, 아파! 제발, 제발!」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를 배트맨은 다시 공중에 매달았다.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 또한 밤새도록 이러고 싶지 않아. 누가 너를 이리로 보냈지?」
「고문은 불법이야, 불법이라고~!! 아악, 내 발! 내 발이 뜯겨져 나갈 것 같아~!!」
「그 자의 이름을 대면 널 당장 병원에 보내주겠다.」
「개새끼!!」
「그 자의 이름이 개새끼인가.」
「멍청이! 그럴 리 없잖아~!!」
「그럼 누구지.」
「이이잇!」
배트맨은 침착하게 줄을 조정했다.
「알았어.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죽을 거 같다고 생각한 소매치기가 새파랗게 질린 채 한 이름을 외쳤다.
「미스터 춥스! 미스터 츄파춥스야! 춥스가 날 고담으로 보냈어!」

어쩐지 비만과 당뇨병에 걸릴 듯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철거 예정이던 공장에 불을 지르려 했던 방화범을 붙잡아 심문하고 성추행범의 손가락을 분질러서 미스터 츄파춥스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어냈다.

- 스타 시티에 주소지가 있음.
- 단독 행동을 좋아함. 아니면 내부 조직에 명령체계가 없음.

불장난을 하려다 붙들려 호되게 경을 치게 된 방화범이 미스터 츄파춥스의 몽타주를 만드는데 기꺼이 협력했다.
하지만 그다지 도움은 안됐다. 완성된 몽타주 속의 얼굴은 싸구려 냄새가 풀풀 나는 할로인 가면이었다. 한쪽 눈은 햇빛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리고, 뺨이 찢어져 너덜거리고, 벗겨진 피부 아래로 치아와 턱뼈가 드러난 외모였다. 투페이스는 얼굴 반쪽까진 정상이었는데 이쪽은 전부가 망가졌다.
「너, 마약을 하나.」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에... 또. 가끔 합니다만. 그래도 어젠 하이를 안 했지라요.」
「정말로 이런 외모였다고?」
「그러니까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한 뒤, 방화범은 턱짓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배경으로 오렌지 빛깔의 화염을 그려줄 것을 당부했다.
「이왕이면 머리카락도 훨훨 타는 모습으로 그려주쇼. 내 진짜 드러워서... 퉷.」
「이상하군. 왜 그렇게 싫어하지. 네놈의 두목이잖아.」
「그런 끔찍한 소리 마세요. 그럴 바엔 차라리 바퀴벌레를 제 형제 삼겠어요.」

왜 그가 미스터 츄파춥스를 그렇게나 혐오하는지 짐작을 못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이유가 나왔다.
GCPD에 체포된 날치기 하나가 춥스의 비밀을 지켜줄 의리 따윈 없다며 이실직고를 해버린 것이다.
「경찰이라고?」
「정확하게는 부패 경찰이에요, 배트맨. 이름과 소속은 아직 불명이지만 불법 거래를 눈감아주고 현장에서 붙잡혀도 체포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여러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하더군요. 포주를 협박해서 한 번에 만 달러 이상의 돈을 요구한 적도 있었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쇠지레나 야구 방망이를 써서 폭행을 했다더군요.」
레드로빈은 세 명의 용의자를 추려 나이트윙과 배트맨에게 보여줬다.

「어떻게 용의자를 확정했지, 레드로빈?」
침착하게 내려앉은 배트맨의 목소리는 흡사 어려운 과제를 검사하는 선생님 같았다.
그리고 레드로빈은 실제로 숙제 검사를 받는 기분을 느꼈다.
「불법 거래를 눈감아주고 현장에서 범인을 붙잡아도 체포를 하지 않음 - 이게 키워드에요. 다시 말해 부패 경찰의 근무 실적은 바닥이고 검거률이 평균치 이하겠죠. 실제와는 달리 눈가리개 효과로 그 사람이 근무하는 시간에는 마치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것을 전제로 최근 1년간 스타 시티의 잡다한 사건 사고 기록을 수집하여 분류해봤어요. 살인사건이나 마약거래, 조직폭력과 같은 굵직한 건은 미스터 츄파춥스가 터치하기 곤란했을테니 일단 2순위로 밀어뒀고... 도둑질, 단순폭행, 성매매 같은 사건의 검거 시간대를 각 구역별로 정리해서... 쨘.」
컴퓨터 화면으로 수백, 수천의 붉은 점들이 빠르게 찍혀나가자 확실히 점이 덜 찍힌 흰색 바탕이 눈에 보였다.

「소개합니다, 미스터 츄파춥스입니다. 아니, 그의 근무 시간이랄까. 아무튼.」
레드로빈이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하며 코를 으쓱였다.
물론 배트맨이 잘 했다 소년탐정을 칭찬하는 일은 없었다.
허나 딱딱하게 굳은 배트맨의 입매가 잠시나마 부드럽게 변하는 걸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었다.

『...... 그때는 이미 다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라며 쉽게 생각했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던 딕 그레이슨은 쓰게 웃었 - 아니, 지금은 히어로 코스튬을 입고 있으니 나이트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 뼘 너비의 담장 위를 전력질주 하듯 빠르게 뛰어가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소방용 비상계단 위로 착지했다.
주의는 했다만 소음이 전혀 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잠시 귀를 뾰족 세우고 숨을 고른 뒤, 그제야 안전하다 판단한 그는 잔뜩 눌렸다 튕겨 오르는 스프링처럼 팔을 움직여 소방계단 맨 윗단으로 줄을 걸었다. 길게 늘어났던 줄은 언제 그랬냐며 줄어들었고, 79kg의 체중이 잡아당겨지며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웃한 골목 아래로는 한밤중의 차가운 기운을 뒤집어쓴 자가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느리게 걷고 있었다.
집에 가서 이빨 닦고 자겠다던 마이클 윈저였다.
피곤하고 졸린지 간혹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어쨌든 문제는 여기가 그의 집과는 완전히 정 반대 방향이라는 거였다.

Posted by 미야

2016/06/14 16:23 2016/06/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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