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의 평온한 나날이 며칠 이어졌다.

크레이지 덤프는 수색망을 뚫고 여전히 도주 중으로, 긴급 체포 작전이 두 번씩이나 이어졌음에도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가 지휘부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랬다는 점에서 내부 정보가 새고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이 이어졌는데 모르긴 몰라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부패경찰과 범죄조직과의 커넥션은 예전부터 골칫거리였고 좀처럼 그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하나를 잘라내면 옆에서 다른 뿌리가 자랐다. 머리 하나를 자르면 잘린 부위에서 새로운 머리 두 개가 자라난다는 전설의 괴수 히드라 같았다. 그래서인지 청문감사반에서는 25%의 경찰이 상습적으로 뇌물을 받는다는 현실을 외면한 채 설령 조직이 괴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반에 걸쳐 맹독성 농약을 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번에 회람 도는 거 봤어? 마이클. 새로 차를 바꾸거나 고가의 시계나 명품 구두를 구입한 녀석들을 찾아 무작정 분풀이로 조지는 것 같더라고. 아무나 일단 걸려라 식이라서 옆에서 보기가 좀 그렇던데. 음... 그러고 보니 너도 못 보던 시계를 새로 샀네. 얼마짜리야?』
우물거리며 음식을 씹던 걸 멈추고 조신하게 대답했다.
『25달러.』
대답을 들은 딕 앤더슨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짠돌이... 보나마나 알람 기능도 없겠군.』
『그런 거 필요 없어. 시간만 잘 맞으면 되지.』
『내가 봤을 적엔 이미 5분 이상 틀어진 것 같은데...』
『오! 잘 됐네. 늦잠 자서 지각을 해도 변명꺼리가 있는 거잖아.』
『잘도 변명이 되겠다!』

리처드 D 앤더슨이 입안의 내용물을 밖으로 튀게 만들며 언성을 높였다.
식사 예절이 영 아니었지만 마이클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종이 냅킨을 들어 총알처럼 날아와 얼굴에 붙은 미세한 시금치 조각을 떼어냈고, 내친 김에 입가에 묻은 크림소스를 닦았다.
그들이 애용하는 글리블링 다이너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수요일 만찬」이라는 메뉴를 선보였는데. 메인은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큼직한 생선이었다. 푸짐한데다 싸고 맛도 좋았지만 곁들여서 나오는 소스가 매우 기름지고 묽었다. 그래서인지 먹고 나면 입술과 턱이 번들거려 미관상 보기가 나빴다.

앤더슨도 냅킨을 들어 기름 자국이 남은 얼굴을 수습했다.
『하여간 시계를 고르는 요령이 잘못되었어. 잘 들어, 마이클. 무릇 괜찮은 시계라는 것은...』
그러면서 자신이 찬 시계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앤더슨의 시계도 그다지 이름 있는 고급 제품은 아니었다. 두껍고 무거워 유행에 뒤쳐졌고 메탈 재질의 밴드는 색이 바랬다. 그래서인지 그 첫 느낌은 장롱에서 30년 묵힌 할아버지의 골동품 예물시계 같았다. 하지만 예물시계라고 볼 수 없는 게 시곗줄이 온통 긁힌 자국 천지라 실수로 자동차 바퀴에 깔린 적이 있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바로 이런 거야. 바로 이런 거.』

하얀 생선살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며가던 마이클이 기가 막힌다며 눈동자를 데구르 굴렸다.
뭐가 괜찮은 시계라는 건가. 트랭크의 가게에 맡기면 이것 또한 알짤 없이 40센트짜리다.

설득이 영 먹히지 않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앤더슨은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 본격적으로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예의 무용담이 튀어나올 순서였다. 자세히 보라며 왼팔을 내밀었는데 시곗줄 안으로 보이는 피부에 시곗줄과 마찬가지 방향으로 길게 그어진 상흔이 보였다. 흉으로 남은 꿰맨 자국은 강도와의 격투로 생겼으며, 금속 재질의 단단한 시곗줄이 없었다면 분명 힘줄까지 잘렸을 거라나. 그렇게 손목의 칼자국을 보여주며 자신의 용맹함과 선견지명을 자랑하는 것이 앤더슨의 버릇이었다.

허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다.
앤더슨의 상처는 강도를 제압하다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거다.
마이클이 알기로 저 치명적이었을 베인 자국은 앤더슨이 열여섯 살 때 생겼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의 신분은 경찰이 아니었고, 당연히 칼을 든 강도를 맨손으로 제압할 일도 없었다.
흉기 - 아마도 식칼이었을 무기를 휘둘러 방어하던 앤더슨의 왼손을 거의 잘라낼 뻔했던 이는 그와 혈연관계인 사람이었다. 그가 입 밖으로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마이클은 그 사람이 앤더슨의 친모일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이는 무덤으로 가지고 갈 음습한 비밀이었다.

소매 단추를 도로 채운 앤더슨은 건방지게도 손가락으로 마이클을 가리켰다. 재수 없는 손가락질이었다.
『25달러는 날렸다고 셈치고 다른 시계를 사게, 마이클. 그 물건은 영 틀렸어.』
『날리긴 뭘 날려. 25달러는 돈이 아니냐?! 그 돈이면 핫도그를 몇 개 사먹을 수 있는지 알아?! 양파와 피클이 없는 걸로 여덟 개나 먹을 수 있단 말이야!』
『그걸 꼭 일일이 세어봐야겠어?! 네가 최 빈민국가 걸식아동이냐고, 망할 핫도그... 월급 받아 뭐에 쓰냐. 처자식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구질구질해!』
눈을 흘기던 딕 앤더슨은 탁 소리가 나게끔 물 컵을 내려놓았다.
『그냥 사. 칼로 내리쳐도 안 끊어지는 튼튼한 걸로 사라고. 신용카드 들고 백화점 가서 사!』
이렇게 외칠 적에 그의 굳은 표정은 지난 사흘 내내 또 다른 리처드인 그레이슨이 지어보였던 표정과 판박이어서 마이클은 이제 두 사람이 혹시 배다른 형제는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생김새부터가 완전 달랐다.
원조 딕은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머리고 짝퉁 딕의 머리카락은 검었다.
체격도 차이가 크다. 내사부 접수계에서 일하는 클라라 래이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처드 2번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남신처럼 근사하기 짝이 없었고, 리처드 1번은 햄버거 가게 입간판 같다는 거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군살이 제법 붙었으나 다이어트를 고려해야 할 심각한 과체중까지는 아닌데 아무래도 비교 대상이 딕 그레이슨이다 보니 평가가 형편없었다. 평범한 민간인을 모델 옆에 세워두면 원치 않아도 오징어가 되는 법이라서 마찬가지로 새우, 광어, 우럭, 낙지 등등의 비슷한 수산물 취급을 받는 입장에선 입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똥을 시원하게 누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저 표정은 그리스 남신이나 햄버거 가게 입간판이나 똑같았다.
할 말이 있는데 - 꼭 해야 하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꺼낼 수가 없어서 답답해 미치겠다는 얼굴이다.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놔도 되는데.
지금도 그렇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강제로 집어삼키고 있다. 뺨 안쪽의 살을 안으로 빨아들여서 어금니로 물고 있는 건 또 어떻고. 약혼 6개월 만에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약혼녀를 옆에 두고 아무래도 결혼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을 적에도 저런 식으로 뺨 안쪽을 지그시 물고 있었다.

『있잖아, 마이클.』
오오, 드디어 결심했나 보다.
그는 신자의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으로 차분히 손가락 깍지를 꼈다.
『듣고 있네, 딕.』
계산서 종이를 움켜쥔 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침통한 눈빛으로 마이클을 쳐다봤다.
그리고서 하는 말,
『나에게 뭐 털어놓을 거 없어?』

아니 이보시오, 리처드 D  앤더슨 양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고해성사가 아니라 자아비판의 시간이었소?

이쪽에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딕은 자기 혀를 깨물려 했다.
허둥대는 그 모습이 마이클을 한층 더 자극시켰다.
『새끼야. 내가 뭘 털어놔야 하는데. 누가 일러바치길, 내가 몰래 여자 속옷 입는다고 하든?』
『그게 아니라.』
『됐어!』
테이블 아래서 요란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Posted by 미야

2016/06/23 16:44 2016/06/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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