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딕 그레이슨은 현재 난처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거리는 제대로 표시가 되었다. 점멸하는 빨간 점은 300미터 바깥에 위치했다.
『망했네.』
하지만 그 높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빨간 점을 따라잡아 지하 2층, 지상 5층짜리 빌딩 - 용도 폐기된 흉물 - 에 도착한 그는 욱씬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러야만 했다.
『돌아가면 위치추적기 성능부터 개량해야겠어.』

한때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을 정문 출입구는 굵은 쇠사슬로 막혀있었다. 그렇다면 창문으로 - 당연하다며 2층으로 날아오르려던 그는 허리를 더듬거리다가 그래플링 훅이 수중에 없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코스튬을 입지 않은 그는 나이트윙이 아니다. 일개 순찰경찰인 리처드 그레이슨이었다.
『아이구야... 오로지 두 다리로 뛰어야 하는 건가.』
아무런 도구 없이 벽면을 기어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늘어진 전선 가닥을 밧줄처럼 사용하기엔 강도가 약해 보였다. 시험하듯 잡아당겼더니 몇 가닥은 쉽게 끊어졌다.

포기하고 접근이 용이한 지하주차장 쪽으로 접근했다. 경사로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가는데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곰팡내와 썩은 물 냄새가 진동했다. 아래에서 침수가 진행 중인 듯했다. 그 영향으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온통 곰팡이 천지였다. 두리번거리며 계단의 위치를 찾노라니 이번엔 운이 따라줘 곳곳에 찍힌 사람 발자국만 따라가면 되었다.
발자국 숫자는 모두 다섯. 그 중 하나는 넘어지고 끌려갔다.
누구의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소량의 혈흔도 떨어져 있었다. 불행하게도 폭행 행위가 있었던 것 같다. 공기 중에 노출된 피는 원래 빠르게 굳기 때문에 색은 이미 갈색으로 변했다. 그래도 문지르자 위아래 방향으로 약간 번졌다. 이것으로 폭행이 이루어졌을 시간을 짐작하며 머리 위로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마이클이 가해자인 걸까? 아님 피해자인 걸까.
그를 찾으려면 어디까지 올라가면 되는 걸까.

바로 그때 총성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벽으로 몸을 붙였다. 소리가 제법 가까웠다.
문제는 사방으로 반향되어 울렸기에 어느 쪽에서 들린 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간격을 두고 두 번째 총성이 들리자 침착함이 송두리 채 고갈되는 기분이 들었다.
마피아 식으로 따지자면 한 발의 총성은「경고」, 그리고 두 발의 총성은「처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들끓어 곤봉으로 벽을 후려쳤다.
나이트윙이라면 계속해서 올라가야 했고, 순찰 경관 딕 그레이슨은 근무 수칙에 따라 더 이상의 독단적인 행동을 멈추고 지원이 오길 기다리며 그 즉시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만약 배트맨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상상하는 건 여기선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상속의 배트맨은 단호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밟아 올라갔고, 정장 차림새의 부르스 웨인 또한 거침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배트맨과 부르스 웨인 두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딕 그레이슨을 - 돌을 깎아 만든 듯한 무표정으로 -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와 다르다, 나이트윙. 너에게는 너만의 방식이 있지.》
그래서 배트맨이라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는 걸 그 즉시 관뒀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계단을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딕은 긴장했다. 좋은 점이라면 당장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할 필요가 싹 사라졌다는 거고, 나쁜 점이라면 단신으로 여러 명과 대적하게 생겼다는 거였다. 게다가 위치는 각개격파가 까다로운 좁은 계단. 그것도 상대적으로 유리한 계단 위쪽이 아니라 불리하기 짝이 없는 아래쪽이었다.
일사불란과는 거리가 먼 구둣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세를 낮췄다. 그렇다면 왼손에 든 곤봉은 일종의 미끼용으로 집어던지고, 적들이 움찔하면 재빨리 오른손에 든 곤봉으로 정강이를 들입다 후려쳐서...
『911을 불러주세요!』
제복 차림새의 자신을 보자마자 구급차를 불러달라는 작자들을 보자 지금까지 경계했던 게 무지하게 억울할 지경이었지만, 아무튼.

한명은 손을 다쳤다. 관통상이었다. 부축을 받고 있는 다른 사내는 허벅지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지 구멍의 위치로 봐서는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고 단순히 스친 모양이다. 그래도 겁을 먹은 사내는 전쟁 영화에서 봤던 장면을 더듬어 셔츠를 찢은 천으로 상처 윗부분을 졸라매었다. 그 영화의 배경은 분명 1차 대전이었을 것이다.

『마이클 윈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네 명의 사내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저마다 창백하게 안색이 질려갔다.
한 명은 뭍으로 올라온 금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렸고, 두 명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이라도 하듯 풀죽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머지 하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911을 불러...』
『다시 묻습니다. 마이클 윈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리 중 주먹을 꽉 쥐었던 자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우리 탓이 아니야.』
이래서는 동문서답이었다.
『계획한 대로가 아니었다고. 내 말 알겠어?! 우린 그저 적당히 손을 봐서 3층 아래로 던질 작정이었다고. 재수가 없음 목이 부러지겠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 아냐? 운이 따르면 반신불구로 살아남을 수도 있었겠지.』
뜬금없는 내용이었어도 딕 그레이슨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대략 알 것만 같았다.

패잔병과도 같은 무리를 내버려두고 서둘러 3층으로 올라갔다.
이젠 발자국이 아닌 핏자국을 따라가면 되었다.
그리고 그 흔적의 끝자락에서.
그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두 눈으로 목도해야만 했다.
『레드후드.』
붉은 헬멧을 쓴 자가 무릎이 꺾인 모습으로 주저앉은 마이클 윈저를 향해 시커먼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늦었네.』
『지루해서 담배 한 개피 땡겨볼까 했어. 담배를 줄이라는 네 충고가 생각나서 관뒀지만.』
『그간 훈련을 게을리 한 거 아냐? 너, 이곳까지 오는데 10분 넘었다. 그 남자가 알면 굉장히 실망하겠어.』
『표정을 보니 놀란 모양이군. 어째서? 이렇게 되리라고 속으로 짐작은 했을 거면서.』
『내가 미리 말했지, 네놈이 미적거리면 내가 직접 나설 거라고.』

입을 꽉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딕 그레이슨을 주시하며 붉은 헬멧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리고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린치는 내가 하지 않았어. 전부 딴 놈들 작품이야.』
비록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딕은 헬멧 속으로 감추어진 그의 입가가 한쪽으로 당겨진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 여겼다. 마치 배트맨처럼 말이다.
『더운 여름날 상한 먹이를 눈앞에 둔 개처럼 아둥바둥 싸우더라고.』
레드후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았다.
『정말 눈 뜨고는 보기 힘들었어. 선술집에서 술주정뱅이들끼리 싸움이 나도 그보다는 더 괜찮게 싸웠을 거야.』

스스로의 힘으로 가까스로 매듭을 풀고 두건을 벗어던진 마이클의 얼굴은 벌써부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해 그 모습이 엉망이었다.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 표현 그대로였다. 눈 한쪽은 완전히 감겼다. 그래서인지 레드후드가 말을 걸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못 알아보는 듯했다. 아니, 그게 누구이든 마이클에겐 아무 상관없었다. 설령 그 자가 미국의 대통령이었어도, 가수 비욘세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완전히 녹초가 된 그는 무릎을 세웠다가 도로 주저앉았고, 끙 소리를 내뱉었다.
아까부터 붉은 헬멧을 쓴 남자가 무어라 떠들고 있는데 솔직히 그게 영어가 아닌 제3세계 언어로 들렸다. 괜찮다면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세상이 두 쪽 나도 쉬어야 했다. 넌더리를 내며 망할 놈의 두건을 멀리 던졌는데 마음만 굴뚝이었고 코앞으로 툭 떨어졌다.

『오, 아니지.』
붉은 헬멧이 말했다.
마이클은 혹시 자신에게 말을 걸었는가 싶어 얼굴을 들었다. 그래봤자 상이 뚜렷하지 않았고 앞이 흐릿했다.
『거기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라고, 나이트윙.』
내 이름은 나이트윙이 아닌데... 마이클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혀를 움직여 혼잣말을 했다.
『그는 네 동료가 아니다. 파트너가 아니야. 죄과에 따라 처단할 자야.』
무도회장도 아닌데 생뚱맞게 파트너를 왜 찾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너는 이 자가 아닌 나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있군.』
눈도 안 떠지는데 어떻게 노려본다는 건가.

『우유부단한 너를 대신해 기꺼이 내 손을 더럽히는 건... 나이트윙.』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님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한 뒤, 레드후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 마이클을 총살했다.

Posted by 미야

2016/07/12 09:47 2016/07/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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