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하다 제대로 당했다 - 반사적으로 양팔을 수직으로 세워 가드하려 했지만 쓰나미 지나가고 방파제 세우는 격이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휘두르기가 왼쪽 어깨에서 쇄골로 이어지는 부위를 정확히 맞췄다.
「윽!」
초보자의 그것이라도 해도 수긍했을 공격이 통한 탓도 있었고...
다른 까닭이 보태어져 어깨를 움켜쥔 그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병신육갑 떨던 그 망할 몽타주가 장난이 아니라 진짜였어?!」
배트맨 패밀리에게 붙잡힌 방화범이 (머리통을 벗겨버리겠다는) 협박에 순응하여 미스터 츄파춥스의 몽타주 제작에 협조한 적이 있다.
이를 묘사한 자가 향정신성 약물에 취해 있었다는, 배트맨 가라사대 보충설명 태그를 붙여놨던 문제의 몽타주는 딱 보기에도 B급 스플래쉬 영화 속 특수 분장 그 자체였다. 피부가 벗겨졌고, 눈꺼풀이 녹아내렸고, 뺨에 난 구멍을 통해 어금니와 잇몸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가닥가닥 휘날리는 머리카락은 비비드한 형광 주홍색이었다.
「뽑아낸 자료를 처음 봤을 적엔 드레이크의 재수 없는 농담 따먹기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레드로빈을 욕했다.
이렇게 보니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이건 누가 봐도 같은 제작자가 만든 할로윈 가면이었다. 같은 틀에서 찍어내 채색만 다르게 했을 뿐이다. 하나는 눈언저리의 두두룩한 살덩이 위로 파란색을 칠했고, 하나는 붉은색 물감을 칠했다. 단지 그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었다.
「그 방화범이라는 놈, 약에 취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칭찬을 받아야 할 만큼 열심히 해줬던 거군. 역시나 배트맨. 얼마나 무섭게 협박했으면.」

얼음 위를 스치듯 뒤로 미끄러져 공격자와 세 걸음 떨어졌다.
『좀비...?』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도 폐가 이완하고 수축하는 가슴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심장은 뛰고 있는가, 모르겠다. 그런 건 맥을 짚어봐야 확신할 수 있을 터다.
그런데도 움직임은 제법 자연스러웠다. 바닥에 떨어진 곤봉을 주워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휘두를 정도다. 밀림에 사는 원숭이도 부러진 나무 막대기를 무기로 사용할 줄 알지만 좀비는 도구에 대한 인식이 없다. 대다수의 뇌 기능이 정지되어 있기 때문에 지붕 위의 생존자를 노리기 위해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필요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돌려야 한다는 걸 몰라 몸통 박치기부터 하고 본다.
「하지만 지금 저 남자라면 담장에 몸통 박치기를 하는 대신 창고에서 사다리를 가져올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한 건가?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줘도 뒤통수 절반은 스프처럼 곤죽이 되어버렸을 텐데. 전부를 100%라고 했을 적에 뇌가 40%만 남아도 괜찮은 거였나?」

그때 마이클의 입이 벌어지면서 후우, 하고 긴 숨소리가 빠져 나왔다.
레드후드는 질색했다.
시체가 뿜은 입김이 닿았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을 강철 수세미로 벅벅 문질러 닦고 싶어졌다.

저것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확실해 보였다. 여기요, 저기요 고함을 질러대는 딕 그레이슨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상체를 왔다갔다 흔들면서 흡사 뒤를 돌아볼 것 같은 동작을 취했으니까.
이때다 싶어 개조한 글록을 꺼내들어 좀비의 머리를 조준했다.

깡.

페이크였다. 순전히 돌아보는 척만 했을 뿐으로 레드후드는 어쩐지 그가 씩 (비)웃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내 곤봉이 손목을 후려쳤고, 충격으로 권총 자루를 놓쳤다.

『승ㅈㄹ이 ㅏ! 아오~!』
저 대사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어도 느낌으로 그다지 좋지 않은 의미일 거라 쉽게 짐작이 갔다.
『젠장! 욕하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허리를 숙여 떨어진 이삭을 줍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서로 빼앗고 뺏는 실랑이를 벌이는 대신 왼손을 뒤춤으로 내려 예비용 권총을 꺼내들었다. 게다가 그는 양손잡이다. 원래는 오른손잡이였지만 완.전.히. 죽.었.다. 되.살.아.난. 뒤.부.터. 일종의 재활 훈련을 거쳐 지금은 왼손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정확히 조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씨ㅂ, 그러식ㄱ? 또 해ㅂㅗ자ㅜ!!』
떨어진 무기를 허겁지겁 주워 올린 마이클도 조준을 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발사 자세를 취하는 레드후드를 보자마자 천장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댔다. 이후로도 완전히 제멋대로여서 한 발은 눈 감고 바닥에, 한 발은 천장에, 다른 한 방은 벽면에, 그런 식으로 총알을 낭비했다.
아이러닉하게도 덕분에 대응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마이클이 레드후드를 노렸다면 이야기는 쉬웠다. 짐작하고 피하려면 총구의 방향만 보면 되었다. 그러나 무차별로 난사되는 총알 앞에선 손깍지를 하여 머리를 보호하고 자세를 낮추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 날렵하기로 소문난 딕 그레이슨도 날카롭게 비명을 질러댔다. 콘크리트 기둥을 맞고 튕겨나간 총알이 불꽃을 튕기며 코앞으로 날아와 바닥으로 기다란 흠집이 패이게 만들었으니 기겁을 할 법도 했다.

『이거 탄창이 며ㅊ발ㅉ아지?』
난사를 중단하고 그가 질문했다. 개조한 권총이라 탄창이 몇 발짜리가 들어가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3?』
정답은 22발이었다. 하지만 탄창이 비었다고 믿게 하고 싶었던 레드후드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글쎄.』
『뭐, 상관없ㅓ. 한ㅂ 정도는 남았게ㅆ지. 야, 새끼야, 방탄조끼 입어ㅆ어?』

타앙.

질문을 던진 것과 동시에 가슴 정 중앙으로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충격은 대형망치 여러 개를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의 몸 위로 동시에 떨어뜨린 것과 비슷했다.
『어훅... 씨발! 이러는 법이 어딨냐! 안 입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특수한 다이니마 소재의 상의는 훌륭하게 총알을 막아내었다. 그래도 몸에 구멍만 안 나게 만들었을 뿐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나마 갈비뼈가 아려 속 편하게 기침을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알겠더라, 있고 어ㅆ거 같았어.』
『추측일 뿐이잖아!』
『씨꺼, 샊갸. 암튼 안 죽었잖아.』
그리고 같은 위치로 또 한 방 쐈다.
『악!』
눈물이 찔끔 솟았다.

가운데손가락을 세운 채 마이클이 화를 냈다.
『짜증나게. 하필이면 얼굴을 망가뜨려서... 집에 가기 힘들게 되었잖아!』
『......집?』
『그럼 이 몰골로 술집에 놀러가리?!』
바로 맞받아치려 했는데「집」이라는 단어를 접하자 공격수치가 절반 이하로 왕창 깎여버렸다.

집으로.
돌아갈 장소로.

『아, 씨. 몰라, 짜증나. 지쳤어. 집에 갈 거야.』
그렇게 말한 뒤, 마이클은 밭에서 다 자란 무를 수확하듯 레드후드의 헬멧을 벗기려 했다.
상대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망가진 외모를 감출 헬멧을 얻는 것이 목적의 전부인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손으로 강화 플라스틱 표면을 움켜잡고는.
『어우, 땀 냄새.』
뽑았다.


*** 여름 휴가를 맞아 치과 치료 중입니다. 써뒀던 걸 손보려던 계획은 종이짝처럼 구겨버리고 그냥 올려요. 이가 아프니까 만사가 귀찮고,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식사를 거의 할 수가 없음... 어제 점심에 국수 먹고 오늘 점심에 컵라면 먹음. 중간생략, 이하생략. 배가 고픕니다. 넹.

Posted by 미야

2016/07/21 14:53 2016/07/2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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