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즉부터 제법 많은 초현실적 존재를 만나왔다.
데미갓인 원더우먼부터 시작해서 크립톤 행성 사람인 슈퍼맨, 화성의 마지막 생존자인 마샨 맨 헌터라던가... 사이보그 기계인간이라던가.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도 알고 있다. 솔로몬 그런디라고, 지금은 마법으로 엄중 봉인되어 공동묘지 어딘가에 사일러스 골드라는 이름이 새겨진 측은한 묘비 아래 잠들어 있다. 그렇다. 이 세계에는 모자에서 흰 토끼를 끄집어내는 속임수로서가 아닌 마법 또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총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가 멀쩡히 다시 일어나 숨 쉬는 자를 앞에 두고도 호들갑을 떨 까닭이 없었다.
『병원! 일단 병원부터! 아니다, 그보다는 응급처치를...!!』
그렇고말고. 어디까지나 그는 침착했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면 어디까지나 그건 당신의 시력 문제다.

레드후드의 헬멧을 아무렇지도 않게 갈취한 마이클은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제법 빨랐다는 것과는 별개로 걸음걸이는 여전히 불안했다. 방금 전까지 시체였다는 점을 무시하자면 술에 취했거나, 아님 중증의 파킨스 환자의 보행 장애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있다.
『마이클! 기다려요. 부축해드릴게요.』
『아아.』
이도저도 아닌 대답이었다.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딕의 호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서 가까이 오지 말라는 거절의 몸동작을 해보였다.
『미안, 너도 보다시피 내가 지금 살짝 맛이 가서 말이지... 더 가까이 오면 내가 뭔 짓을 할지 감히 장담을 못 해. 그러니 가까이 오지 말고 좀 떨어져줬음 좋겠어.』
협박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어디까지나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었으며, 사고회로가 금방에라도 바스라질 것 같다는 점에선 환각상태에 빠진 중증의 마약 중독자보다 더 위험했다.
『내가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말은 진짜야. 그러니 시험해보려 하지 말고 거기서 손들고 서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이클에 수중엔 개조한 글록 권총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권총을 흔들어 보이자 딕은 시키는 대로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참기 힘든 두통이 엄습하는 가운데 마이클은 인내력의 잔해물이라 부르는 찌꺼기를 바닥까지 긁어냈다.
『순찰차는 내가 가져갈게. 택시를 잡아탈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아서 그래.』
『그 상태로 운전이 가능할 리 없잖아요.』
『괜찮아. 살살 운전하면 돼.』
만취 상황에서의 운전보다 몇 곱절이나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우기고 보았다.
『그러지 말고 절 믿어줘요. 전 선배 편이에요. 제가 운전할게요.』
마이클은 헐떡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대신 휴대폰으로 딕에게 대신 연락 좀 해줘.』
『딕?』
『너 말고 다른 딕.』
딕 그레이슨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할 여유 따윈 없었다. 마이클은 정말 급했다.
『앤더슨 녀석에게 길게 설명하려고 하지 마. 그냥 비상사태라고만 해. 그래도 다 알아 들어.』
『선배님...』
『아우, 씨! 넌 그냥 전화만 하라고!』
탁상용 전화기나 쓰레기통이 주변에 있었음 홧김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주변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기에 대신 그는 일부러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 비상사태인 건 틀림이 없지.
마이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딕은 다짜고짜 레드후드의 자켓 안주머니를 허락도 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가슴에 총 두 발 맞고도 저는 무사합니다. 이렇게 걱정을 해주셔서 정말 감동 먹었습니다. 두 번 먹었습니다.』
화끈거리는 통증에 끙끙 앓던 레드후드가 이를 갈아댔다.
그런다고 딕 그레이슨이 조금이라도 미안해 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더듬거리는 손길은 성추행에서 고작 한 큰 술 덜어낸 정도였고, 레드후드는 더욱 진저리를 쳤다.
『씨발아! 어딜 더듬어!』
『바이크 열쇠 어딨니.』
『허리춤에.』
『어디에 세워뒀는데.』
『건물 출입구에서 7시 방향. 그런데 빌려준다고 아직 말 안 했다.』
『......』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해왔다. 부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어딘지 강압적인 분위기여서 레드후드는 기분이 언짢았다. 이럴 적엔 please,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거라고 웨인 가(家)의 집사 알프레드가 조언했지만 아무래도 사내애들이다보니 효과는 없었다.
『시동을 걸려면 열쇠를 꽂고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리는 거 맞지?』
시중에서 판매되는 바이크처럼 다뤘다간 점화장치가 그 자리에서 폭발한다. 도둑맞을 것을 염려하는 것도 아니면서 레드후드는 손버릇 고약한 이들을 겨냥해 악의적인 개조를 곧잘 했다.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 살의가 충만하다는 점에서 그 성질이 매우 나빴다.
『흠집 내면 모가지 따버린다.』
마지못해 허락하며 레드후드가 투덜거렸다.

상당히 서둘렀어도 따라잡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말로는 살살 운전하겠다고 했으면서 순찰차는 시속 90km에 이르는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신호도 무시했다.
한적한 시간대여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운 나쁜 사람들 몇몇은 단순히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했다는 이유로 죽어나갔을 것이다.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네... 진짜.」
훔쳐온 쇼핑카트에 전 재산을 싣고 가던 노숙자가 질겁해선 이를 피했다. 야, 이 미친 경찰 새끼야 - 철렁한 가슴을 쓸어내린 것으로는 부족했던지 노숙자가 꽤나 귀한 재산이었을 통조림 깡통을 두 개나 집어던졌다. 하나는 참치 깡통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파인애플이었다. 요란하게 굴러가다 뚜껑이 벌어졌는지 지나치자 달큰한 설탕 냄새가 맡아졌다.

「진짜로 집으로 가는 방향... 아, 위험!」
끔찍한 졸음운전 같았다. 차량이 좌우로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인도 위로 바퀴 하나가 올라갔다. 균형을 잃은 순찰차는 정신없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신문 가판대와 정면충돌까지 앞으로 3초, 아슬아슬하게 다시 도로로 내려오더니 운 나쁜 쓰레기통을 멀리 튕겨냈다.
「저러다 차량전복을 일으키고 다시 죽겠는데.」
곡예하듯 좌회전 하며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을 적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딕 또한 바이크의 오른쪽 엑셀 손잡이를 미친 듯이 돌렸다.

D. 앤더슨은 어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마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죽인다...》
그리고 돌아누워 베개에 바로 얼굴을 파묻은 것 같았다. 어찌나 조용하던지 딕 그레이슨은 통화가 자동으로 끊어진 모양이라고 착각하고 재다이얼 버튼을 누를 뻔했다.
『앤더슨! 이봐요, 앤더슨!』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비상사태입니다! 마이클 윈저가 전하랬어요. 비상사태라고요!』
혹여 다시 잠든 것은 아닐까 싶게 핸드폰 너머는 다시 조용해졌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
대답하는 앤더슨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또렷했다.

Posted by 미야

2016/07/27 15:32 2016/07/2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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