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시선으로 날 보는데.』
『눼, 눼. 어련하시겠수.』
그렇게 비꼬는 까닭이 뭔데. 오남은 기분 나쁘다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세상의 모든 여인은 잠재적 고객이야, 텐. 아무렴, 내가 이상한 마음먹고 수작질이라도 할 거 같냐.』
기가 막힌 나머지 태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야, 이 좇밥아. 그게 수작질이 아니면 뭐냐. 3년 내내 기름에 닭을 튀겨 토기가 올라오도록 느끼한 아저씨가 어디서 상큼한 오이피클 흉내를 내고 앉았어!』
『내가 언제 그랬다고. 너, 안경 필요한 거 아니야?』
『아이 넷을 낳은 아줌마를 상대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하트를 마구 날린 사람은 너라고, 너!』
『하트를 날리는게 어때서. 미래의 고객을 허투루 대할 수는 없지.』
『닥쳐. 그 아줌마가 한 푼도 안 쓰고 200년간 저축해야 살 수 있는 엄청난 옷을 파는 주제에.』
『너야말로 공짜로 얻은 스콘이 맛있다며 와구와구 먹어치운 주제에.』
『빵은 맛있었어.』
『그런데 뭐가 불만이야.』
『뭐가 불만이긴. 오남, 네놈의 존재 자체가 불만이다.』
오고가는 대화 자체는 살벌했지만 표정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렇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벌어지는 외관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말로 투닥거리며 싸우는 건 그만큼 서로가 익숙해서다. 우유를 마신 뒤에 내 입 냄새를 맡아봐라, 하아~ 이러고 애들처럼 싸우는 관계다.

팔을 깍지 껴서 머리 위로 올린 태영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언덕을 내려갔다.
배부른 상태에서 휴식도 취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노곤했다. 과잉 영양은 필연적으로 졸음을 불러 일으켰고, 그늘에 앉아 또 쉬고 싶어졌다. 축제? 미인대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그대로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팔을 높게 들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어깨에서 따악 소리가 났다.
오십견이 생길 나이는 아직 멀었는데. 시험 삼아 좌우로 팔을 빙빙 돌렸다. 그래봤자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상자를 나른 것도 아니니 근육을 풀어준다고 해봐야 쓸데없다.

『어이, 오남. 것보다 미인대회가 다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야?』
『얘는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8년 축제를 즐기러 왔는데 맛도 보기 전에 마을을 떠나자고 하는 법이 어디에 있나.
앞으로 5일 남았다. 그동안 볼거리에 산해진미 먹거리가 넘쳐날 텐데 벌써부터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반칙 아닌가.
『예이, 예이. 즐겨야겠지요.』
『진짜지 뭐냐고, 야단맞은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진 표정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사람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질색이라.』
태영은 캐묻는 오남의 시선을 피해 일부러 광장 부근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건 더 질색이고.』
게다가 애초부터 축제 어쩌고를 즐기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
뒷말을 삼킨 태영은 이번에는 걷는 속도를 빠르게 하여 언덕을 내려갔다.

애초부터 축제를 즐기려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사건의 발단은 중신관 이돌란이 나이 어린 소녀를 심하게 매질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는 도벽이 있다고 했다. 신전에서 향초를 훔쳐 시장에 몰래 내다 팔았다니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렇게 챙긴 돈으로 어려운 부모나 동생을 몰래 돕고자 한 것도 아니다. 소녀는 그저 자신의 이득을 챙겨 화장품이나 고가의 장신구를 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자애의 옷을 찢고 채찍으로 후려치는데 합당한 이유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젖가슴이 드러나는 수치를 입고, 등가죽에 흉터가 남도록 매를 맞는다.
그리고 그 벌을 내리는 신관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쾌락에 들떠 묘한 표정으로 흥분하고 있다.
그것이 성행위를 할 적에나 보이는 흥분이어서 태영은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는 다짐을 잊고 그만 체벌을 내리던 중신관을 옆으로 세게 밀치고 말았다.

「이 사디스트 변태 영감탱이. 어린애를 벗긴 것으로도 모자라 때리면서 흥분하고 있어.」
「지금 뭐라고?!」
「이따위로 하려면 신관 당장 때려 쳐. 어디서 좇을 세우고 어린애를 때리고 지랄이야. 네가 모시는 신의 정체가 사드의 신이라도 되냐, 이 변태야. 그게 아니라면 더러운 채찍을 가지고 여기서 썩 꺼져!」

죄인을 체벌 중인 중신관을 책망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의 발언 자체도 큰 문제를 야기했다.
일을 수습하고자 불려나온 무늬만 공작 발리반이테 대공은 쓰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디스트라는 말의 뜻은 이돌란도 잘 몰랐을 거야. 저쪽에서 - 그러니까 환생대륙에서 쓰는 말이니까 말일세. 그 뜻을 알았으면 문제가 더 커졌지. 위대한 용신을 이상성욕자의 신으로 몰아세웠다고 신전 전부가 뒤집어졌을 걸. 그러니 사디스트에 대한 건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절대로 함구하도록 합세.」
그래봤자 은퇴한 노인네의 얼굴색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테이블을 주먹으로 콩콩 찍으며 공작은 난처하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영감탱이라고 한 것도 문제지. 이돌란 중신관 나이가 올해 겨우 서른둘이거든.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걸세... 게다가 그의 집안 내력엔 일찍부터 머리숱이 빠지는 문제가 있으니까... 뭐랄까, 자격지심에 울컥한달까.」
「대머리라고 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다행이지. 거기까지 말했음 이미 전쟁이야. 자네는 어찌된게 입이 그렇게 험한가. 응?!」

모두로부터 쏘이는 듯한 시선을 받은 태영은 짐짓 뒷통수를 문질렀다.
「알았어요. 내키진 않지만 사과하면 되잖아요.」
「당연히 사과해야지. 하지만 이돌란 중신관은 프라이드가 높은 자라서 쉽게 사과를 받아주진 않을 거야.」
「그럼 아예 하지 말죠. 어차피 그딴 변태 자식에게 사과를 할 생각따윈 요만큼도 없었는데 뭐.」
「사과해야 한다니까! 심지어 신관을 때려치우라고 했다며. 그거 위험 발언이야.」
「아, 씨이! 그럼 어쩌라고. 중신관 그 자식에게 새로 가죽 채찍이라도 선물할까요?!」
「이보게,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가 아닐세. 자네 덕분에 황실과 신전 사이가 틀어지게 생겼는데!」

그래서 나온 결론은,
중신관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먼 곳까지 가서 바람이나 실컷 쐬고 돌아오라는. 이른바 추방령이었다.

『할아버지 공작 각하께선 분명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했지만, 그 의중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아. 이른바 귀양이라고 하는 거겠지.』
『귀양?』
『옛날에 우리나라에선 높은 관직이나 신분을 가진 자가 죄를 지으면 먼 섬이나 지방으로 보내서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는 형벌을 내리곤 했어. 그걸 귀양이라고 해.』
듣고 있던 오남이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그 제스츄어는 긍정도, 부정의 의미도 아니었다.
『귀양이 그런 의미라는 걸 이해했어, 텐. 하지만 자네는 이곳으로 귀양 보내진 건 아니야. 왜냐하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란데가스로 돌아갈 수 있...』
도중에 말을 끊었다.
『이 멍청아. 돌아갈 수 없어. 할아버지 공작 말대로 내가 제국으로 돌아가면 신전과 황제가 대립하게 되니까. 신전에서 얼씨구나 기회로다 이러며 황제의 체신을 깎아내리려 할텐데 나더러 그걸 지켜보라고?』
태영이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돌아갈 수 없어. 지금은 아니야.』
『태영.』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축제를 즐기고 싶은 기분인 것도 아니야. 이해하겠어?』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등을 구부정히 한 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9/29 21:26 2015/09/2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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