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그런단 말이오 - 상대방이 하소연을 하고 있지만 루안은 간질이며 들려오는 소리를 알아서 차단했다. 단추를 누르면 기계장치가 움직여 저절로 문이 닫히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문이 닫히면 듣고 싶은 것만 선별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신박한 재주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화병을 얻어 명줄이 짧아졌을 것이다.

그럼 일단 증거품인 신발을 보자.
높은 굽에 은도금을 한 리본 모양의 금속 장식이 달렸고 색은 부담스러운 핏빛 빨강이었다.
빨간색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베인 자국으로 흘러나온 듯한 선명한 핏빛에 가까웠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이런 건 잔칫날에도 신기 어려운 종류다. 구두의 주인공은 어지간히 튀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흉기와도 같은 뾰족하고 기다란 굽에 깨진 사탕 부스러기가 어지럽게 묻어 있다.
설탕 가루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자 발 냄새에 진한 설탕의 향이 더해져 의도치 않게 콧구멍이 실룩 움직였다.
『아유, 왜 더럽게 신발 냄새를 맡고 그러세요. 보는 사람 민망하게.』
다 그럴 만한 의도가 있어서 하는 일인데 짜증나게 사람을 변태로 몰고 있다. 루안은 더 이상 허튼 소리 말라는 의미로 오남을 쏘아본 뒤, 증거물용 봉지 주둥이를 밀봉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을 해봅시다. 광장으로 들어오는 가마 옆에 서 있다가 머리에 토사물을 뒤집어썼다, 당신 머리 위로 구토한 여자는 당신이 가마를 좌우로 마구 흔들어댄 범인일 거라 짐작했다, 왜냐하면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까. 하여 흔들리던 가마에서 잘 익은 감처럼 떨어진 여자가 가만두지 않겠다며 소리를 지르고 당신에게로 달려들었다, 당신은 상대가 여자인지라 아무래도 맞서 싸우기가 민망하여 그대로 달아났다, 그랬더니 여자가 뒤통수를 향해 신발을 벗어 던졌다... 맞습니까?』
『어우야. 요점 정리 엄청 잘하시네.』
오남은 원하던 물건을 10% 할인가격으로 팔겠다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해야만 한다면 경비원의 소매를 뜯어먹기라도 할 기세다.
하지만 루안은 거의 까무룩 잠들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만큼 피곤했고 짜증이 났다.
『그렇군요.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세상에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었다.
그러나 경비원 루안은 오히려 왜 화를 내느냐며 반문했다.
『악담이 아니에요. 이건 엄연히 현실적인 겁니다.』

8년에 한 번, 그들은 성대한 축제를 열어 천하제일의 미인을 뽑는다.
『여기서 우승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행자인 당신은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말이죠... 그냥 꽃다발에 우승 트로피만 받고 끝날 것 같아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남은 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음... 아마도 엄청난 상금도 받겠죠?』
그래서 그 여자는 그렇게도 화를 냈을 것이다. 힐끔 곁눈질하며 속으로 이거다 싶은 구체적인 금액을 떠올렸다.
『혹시 우승 상금이 저택 다섯 채를 한꺼번에 구입할 정도로 어마어마한가요?』
『집 다섯 채는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아니라는 얘기에 다시 이거다 싶은 구체적인 금액에다가 궤짝으로 금은보화를 덧셈했다.
『그럼 지방 영주님의 1년치 봉납금 정도가 되나요.』
『돈 문제가 아니라는데 자꾸 그러시네.』

우승자는 모두로부터 엄청난 축하를 받으며 왕궁으로 입궁한다. 그리고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공왕과 포옹을 한 뒤에 그 우편에 서게 된다. 다음 축제가 열릴 때까지 계속.

처음 반응은 허탈하게 웃는 것이다.
『공왕 우편에? 다음 축제가 열릴 때까지 쭈욱~?』
왕의 좌편에 서는 건 여왕, 혹은 왕비다. 그 우편에 서는 건 총리대신이고.
국정운영을 총괄하는 총리대신을 제치고 일개 축제 미인대회 우승자가 8년씩이나 왕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는다?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키득 소리를 내며 웃던 오남은 장난을 치듯 루안의 어깨를 톡 때렸다.
하지만 루안은 그게 농담이었다는 식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더하여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해졌다.
덩달아 오남의 얼굴도 뜨거운 화덕에 눌러 붙은 탄 냄비처럼 변해갔다.

『알겠다. 그렇다면 미인대회 우승자가 왕의 첩이 되는 건가요.』
질문을 던진 건 태영이다. 그는 아직 미숙한데다 경험이 없어 왕의 오른편에 선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있다. 왕이 없는 세계에서 왔으니 거기엔 총리대신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일개 첩과 총리대신의 위치를 나란히 놓는 우를 범했다.
당황한 오남이 소년의 옆구리를 찔러가며 목소리를 낮추어 타박했다.
『야. 네가 살던 너희네 나라에선 첩이 왕의 오른편에 서있냐.』
『아니. 우리나라는 일부일처제야.』
엉뚱하게 답변한 태영은 자신의 말실수를 여전히 모르는 눈치다.
그래봤자 루안은 너무나 졸린 나머지 판단력이 흐려져 태영의 발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뭐, 그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라고는 해도 다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하고 있죠. 아무래도 공왕님께서 늘그막에 예쁘장한 손녀 같은 아이를 옆에 두고 귀여움을 보고자 하시는 것 같다고...』
『손녀!』
『실제로도 왕족처럼 우대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는 말을 들었어요.』
『왕족!!』
『그러니 상금 따위는 문제도 아닌 거죠. 이제 아시겠어요?』

이러니 우승후보에서 탈락한 여인이 그 원흉이라 짐작되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자 할 법도 했다.
그런 까닭에 루안은 자신의 손에 들린 든 빨간 구두 한 짝을 피 묻은 손도끼처럼 인식했다.
이 구두의 주인은 과연 계속해서 복수에 집착할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디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서야 오남은 루안의 경고가 농담 따먹기가 결코 아님을 깨달았다. 진짜로 그는 죽을 수도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삣 섰다.
『그 여자가 우승 후보였나요?!』
『유력한 후보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제법 순위가 높았죠.』
『성격은요? 착하다던가, 순진하다던가... 아니면 모두에게 친절하다던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그들은 속으로 같은 내용을 생각했다.
그녀는 피처럼 붉은 구두를 신는 여자다. 그리고 그 구두를 흉기로 휘두를 줄 안다.

오남은 그 즉시 옷자락을 펄럭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겠다, 텐.』
『어째서? 생각보다 여기 축제라는게 보기와는 달리 참 재밌기만 하구먼. 지루하다 생각했던게 싹 사라졌어.』
『남의 집에 불 났냐?! 인석아!』
당연히 남의 집에 불 났다. 태영은 한가롭게 휘파람이나 불어댔다.
『에이, 화내지 말라고, 오남. 게다가 나에겐 그. 남.자.로부터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일이 있다고. 네가 관두자고 하거나, 그만두자고 하거나, 피하자고 말할 때마다 나는 세 번 안 된다고 말해야 해. 반드시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래서 부탁받은 그대로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원망하지 말아줘.』
『지금 뭐시라.』
『그럼 말할게. 도망치겠다고? 안 돼.』
『......』

여기서 태영이 말한 그 남자는 란데가스 제국의 제1인자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이시다.

Posted by 미야

2015/10/15 21:03 2015/10/15 21:0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00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257 : 258 : 259 : 260 : 261 : 262 : 263 : 264 : 265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1543
Today:
221
Yesterday:
215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