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적으로 그는 비싼 옷을 파는 장사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여느 장사치로는 안 보였다. 옷을 파는 자가 호랑이 기백으로 화를 낼 수는 없으니까.
분식회계 금지법안을 코앞에 두고 어찌할 바 모르는 부정부패한 대소신료들 앞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찧는 백발의 원로대신 비슷하달까... 혐오감에 실망감, 짜증으로 뒤범벅이면서 밖으로 말은 삼가고 대신 차갑게 미소를 짓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중립일진대 그 속은「한 마디만 떠들기만 해봐.」다. 이른바 폭풍전야다.
쉽게 말해 웃는 얼굴이면서도 어디로 칼날이 튈 지 믿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군. 그 남자로부터 부탁을 받았다는 건가.』
나긋나긋한 목소리지만 그거야 겉 표면에 불과하고. 바삭거리는 과자 껍질 안엔 부드러운 카스타드 크림이 아닌 맵고 톡 쏘는 고추냉이가 알차게 들어 있다. 모르고 실수로 베어 문 날엔 입안에서 붉은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관두자고 하거나, 도망치자고 할 적마다 옆에서 세 번 안 된다고 말하라고 그랬~다?』
『오남, 너 또 말투 바뀌었어. 이번엔 궁중 노인네 말투야.』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소년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하긴, 제국의 황제더러 아무렇지도 않게 그 남자, 이 남자 운운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게다가 그는 분식회계가 뭔지도 모른다. 앞에서 비난의 눈초리를 던져봤자 까마득히 모르는 걸 어쩌라고. 학교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운 적은 있어도 재무제표 만드는 법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워, 아저씨. 지금 눈에 힘주고 날 노려보는 거야?』
그러니 위엄 넘치는 눈빛으로 겁주기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청년은 팔을 위로 올려 목 뒤에서 손깍지를 꼈다.
『애시당초 이 몸께서「안 돼」라고 말해봤자 무슨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여기서 뭐라 한다고 귀담아 들을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저 손을 들고 외칠 뿐, 안 돼. 그러니 너는 네 맘대로 하시라고요.』
식탁에 앉아 손이 닿지 않는 소금 병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황제는 딱 세 번만 저 사내를 말려달라고 했다. 중도에 포기하고 툭 하면 도망치기를 잘하는 자니 옆에서 자극을 좀 줘야 한다나 뭐라나.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여야 한다거나, 우물에 독을 풀어야 한다거나, 여염집 아가씨를 납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으면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을 거야. 하지만 들어보니 별 거 아니더군. 네가 보따리를 들고 여기서 도망치겠다고 할 때마다 세 번 안 된다고 옆에서 말만 하면 된다는 거야. 굳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그래서 못할 것도 없겠네요, 라고 대답했지.』
『하아?!』
『그게 전부였다고. 진짜야.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한다. 그러니 안심해라, 오남. 그 남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막으라는 주문은 하지 않았어.』

피로감이 드러난 맨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뭘 안심하라는 거야, 뭘! 포인트가 빗나갔다고! 망할! 일개 옷장사에게 이러는 법이 어디에 있누! 요는 돌멩이를 던져 두 마리 새를 동시에 잡겠다는 거잖아!』
중신관을 상대로 트러블을 일으킨 김 태영을 데리고 나가 바람이나 쐬고 오는 여행이라고 얕잡아 봤는데.
실수다. 란데가스의 황제씩이나 되는 위인이「가서 잘 놀고 오렴.」이러고 손수건을 흔들어줄 리가 없었던 거다.
뭔가 있다. 촉이 온다. 도망치겠다는 의지를 꺾어야 할 정도의 중요한 뭔가가 이곳에는 있는 것이다.
8년 축제가 벌어지는 이 땅으로 별 거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해서 그를 보내고,
「무슨 꿍꿍이인 거야, 그 사내는!」
김 태영을 끌여들여 무려 세 번씩이나 도망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겠단다.

『나는 여성복을 파는 옷장사야, 태영.』
『옷장사라굽쇼? 솔직히 말해 난 네가 스파이라고 생각해.』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 튀오나온 대답에 오남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내가 스파이라고.』
『그래. 스파이. 이곳 말로는 세락이라고 한다며? 발리반이테 할아버지가 그랬어. 오남은 세락이라고.』
『인석아. 무늬만 귀족이라고 해도 공작 각하에게 할아버지가 뭐냐, 할아버지가!』
『어...? 그럼 곤란한 거야? 저번에 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그렇게 인사했는데 나더러 뭐라 하지 않았거든.』
『내가 못 살아.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행여라도 담벼락에 엿듣는 귀가 없는지 주의하며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세락이 아니라 세작이겠지. 신분을 감추고 어떤 대상의 정보를 몰래 알아내어 자신의 편에 넘겨주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세작이라고 한단다.』
억울하다는 뉘앙스지만 부정은 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고 태영은 생각했다.

그는 오남상회의 상단주다. 여러 번 말했지만 그의 가게에선 귀족이나 왕족들이 입을법한 매우 비싼 여성복을 판다. 사라사 비단 같은 원단과 보석들도 같이 취급하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완제품인 옷을 판다.
그렇다면 드레스가 전시된 가게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동대륙 그 어디에도 옷을 걸어둔 가게가 없다.
일보 양보하여 엄선된 주문제작 방식이라 쇼 윈도우 룸이 달린 공간이 딱히 필요 없다고 치자.
무슨 놈의 상단주가 시장조사를 한다면서 맨손으로 돌아다니느냔 말이다.
그 흔한 종업원도 곁에 없고.
대신 옆에 붙은 건 검은 머리카락의 이단아에, 더하여 정체불명의 미스트다.

푸드득 소리를 내며 그들 주위로 작은 새가 날았다.
종류는 멥새나 참새 비슷한 종류일 거라 생각한다. 굉장히 작은데다 갈색의 털이 소박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친다.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뭇가지 위로 앉은 새의 모습에서 다소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참새의 목덜미 뒤쪽으로 등 부위에 작은 혹이 달렸다. 그런데 평범한 혹이 아니다. 가만 보면 짐승의 눈을 닮았다. 눈꺼풀까지 달려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기까지 하고 있다.

《주인님.》
참새가 사람의 말을 뱉었다.
태영은 머리 위에 앉은 참새를 흘깃 쳐다본 뒤에 노골적으로 혐오의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니다. 저것은 그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으로 주인인 오남의 명령에 따르는 정령 같은 거라고 들었다.
하지만 투명한 날개를 가진 쭉쭉빵빵의 미녀를 상상하던 태영은 반발했다. 저런 흉악한 것을 정령이라 부르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끈적거리고 껄끄러운 존재다. 미스트는 정해진 형태가 딱히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것에 기생한다. 때로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몸에 달라붙은 채 나타나 기겁한 적도 있다.
「정령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차라리 요괴라고 할 것이지.」
본능적으로 그는 소리가 들린 부분으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무서워서 피한게 아니다. 더러워서 피한 거다.

『생각보다 많이 늦었군... 어쨌든 여기는 보는 눈이 많아.』
《그럼 장소를 옮길까요.》
미스트의 목소리는 어린 소년의 것과 흡사했다. 변성기를 맞지 않은 아주 어린애 말이다.
오남은 그러자고 하며 인적이 드믄 적절한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10/22 16:19 2015/10/2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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