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僻銀)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 유희 산맥 구석진 곳으로 은이 나왔는데, 그 토산품이 금이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가끔 해보았다.
귀금속이라고는 해도 가치가 떨어진다. 세공을 하면 그럭저럭 값을 올려 받을 수는 있지만 수요는 그리 크지 않다. 통화 화폐로 만들자니 대량유통 시 물가가 엉망이 되고, 게다가 해마다 산출량도 줄어 왕실과 신료들은 근심이 한 가득이었다. 그런 마당에 교역의 불균형을 두고 잦은 다툼이 벌어졌다. 무역 상인들의 농간으로 은은 곱게 가루로 빻아져 지나치게 싼 가격으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도 부자가 되는 건 타국의 상인들이라 백성들은 불만이 많았고, 편입된 외지인들은 은의 가격을 덜 치기 위해 저마다 딴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품고 있었다. 바람 잘 날이 없어 자고 일어나면 은괴를 빼돌린 관료가 감옥에 갇히거나, 상회의 주인이 거래 장부를 찢고 야반도주하는 식의 사건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사람들은 피해망상에 빠져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만 믿지 않은게 아니다.
오백년 간 신으로 모시던 용신 명라각희의 은총마저 믿지 않기에 이르렀다.
빠르게 신앙심은 붕괴되어「세수 부족에 따른 자금난」을 이유로 벽은국의 국왕은 용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마저 넌지시 그만둬버렸다.

「하는 일도 없는 빈둥신 용따위 알게 뭡니까. 지난 200년간 용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덕분에 꼬인 일을 나서서 푸는 건 전부 우리들 몫이잖아요. 광산에서 낙반사고가 벌어지면 명라각희가 짠, 하고 나타나 토사를 치워주던가요. 쓸데없이 돈이나 발라먹는 명라각희의 사당은 전부 없애버려야 해요.」
가명은 입버릇처럼 그 말을 달고 살았다.
부유한 상인 출신인 그는 다소 냉소적인 성격이었는데 어디서 명라각희 용신 이름만 들렸다 싶으면 만사 제치고 달려와 깎아내리는 말을 신랄하게 퍼붓곤 했다.
「저처럼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사람은 다리를 보다 튼튼하게 건설할 궁리를 하면 했지 사나운 폭풍우가 빨리 진정되도록 신룡에게 빌거나 하지 않는 법이라서요. 돈이 아깝단 말입니다.」
결국 쪼들려가며 은광 하나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미래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이미 한참 전에 그 방향이 정해져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해는 여름이 짧았다. 매미 우는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아 어쩐지 나쁜 일의 징조처럼 느껴졌다.
「없애버려야 한다니까요. 시오재 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죠?」
「틀려, 가명 군. 나는 명라각희 사당을 전부 헐어 없애자는 쪽이 아니야.」
읽던 책을 무릎 아래로 내려놓은 나는 그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설마, 그럼 스승님은 사당을 없애면 국토 수호신이 진노해 재해가 일어난다고 믿는 쪽인가요?」
나는 정색했다.
「그건 아니지. 사당을 없앤다고 재해가 일어난다는 근거는 없어. 자네는 흥악 상선과 연줄이 있을테니 동대륙에서 일어난 재해에 대해 들은 내용이 있는 것 같군. 허나 그건 사건이 잘못 전해진 걸세. 아리구스 이스타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은 그들이 용신을 배격한 탓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고 비교적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용이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격발된 자연재해라고 하는 것이 맞아. 비유하자면 이런 걸세. 여기에 똑바로 작동하는 평형추가 하나 있네. 수평을 맞추기 위해 양쪽에 무거운 물이 든 양동이가 달려 있어. 그런데 어느 날 한쪽에 든 양동이의 물을 전부 빼버린 거야. 그러면 평형추는 어떻게 되지? 요동치다 격렬하게 뒤집히겠지. 그거와 비슷해.」
아리구스 이스타는 현재 항구 도시다. 그들의 왕이 죽자 국토의 절대 다수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나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어쨌든 지도의 모습이 현저하게 바뀌어 예전에는 갈색으로 묘사되던 부분을 지금은 파랗게 칠해야 한다.

그는 깜짝 놀라 외쳤다.
「용도 죽습니까?」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무슨 엉뚱한 질문인가. 그들도 생명체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가까스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럼 평형추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명라각희 사당을 앞으로도 계속 내버려둬야 한다는 건가요.」
「아닐세. 사당이야 인간이 용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세운 것이니 없애버려도 무관하지. 허나 명라각희 자체는 우리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세. 용은 그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힘이야. 우리가 이 땅에서 용을 내쫓고 말고 자시고를 논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걸세. 그건 우리 앞에 태산이 있는데 햇빛을 가리는게 싫으니 없애버리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자네는 산을 들어 옮길 수 있는가?」
가명은 뒷통수를 긁었다.
「허어, 기도도 안 하는 양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러니까 착각이라는 걸세. 단지 내가 충성을 맹세한 신이 명라각희가 아니라서 그녀에게 기도를 하지 않는 것뿐이야. 그 탓에 신룡의 은총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버렸지만 나처럼 용신의 은총을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도 없을 걸세,」
「그래요? 그렇담 시오재 님이 섬기는 용신은 누구인데요.」
「비밀이야.」
「설마, 적룡?」
「전혀 아닌데. 하지만 그렇게 소문이 났나?」
「시오재 님은 이사실의 황제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니까요. 1년에 한 번씩 그 먼 길을 돌아 이사실의 수도 루은을 방문하기도 하고.」
「부서고서리의 입장으로 필요한 책을 사오는 것뿐이다.」
「황공하옵게도 거기 황제가 스승님께 추파를 던진다는 말도 있고.」
「맙소사... 20년 우정에 금 가는 소리 들린다. 둘이서 비역질을 한다며 수군거리진 않던?」
나는 재밌어 했는데 가명은 심각했다. 그는 자기 옆구리로 양팔을 대고 이렇게 말했다.
「한가롭게 웃을 일이 아니에요, 스승님. 실제로 이사실의 황제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잖아요.」

연애편지.
벼락같이 화를 내던 글인데 그게 왜 연애편지.
나는 허허 웃어댔다.
「요즘 젊은 것들은 애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죽여 버린다, 이런 살벌한 표현을 적는단 말이냐? 너는 그러하냐?」
「물론 저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만.」
어쩐지 그는 회피해버렸다.
「그나저나 스승님. 이사실에서 온 병사가 자살하겠다며 대들보에 목을 매려고 하던데요. 슬슬 그가 가지고 귀국할 답장 편지를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여기서 내 기억은 갑작스럽게 뚝 하고 끊겼다.

멍한 눈을 힘들게 올려 뜨자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작은 얼굴이 보였다.
『이게 누구야. 린청이잖아... 왜. 무슨 일 있어?』
어리둥절하여 묻자 소년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안즈. 너, 의식을 잃었었어.』
그런 거 모르겠고 어쩐지 졸립다. 온몸이 나른하여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머리가 울리고 쿡쿡 쑤신다.
그나저나... 가명 이 녀석은 나와 말하다 말고 어디로 갔노.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뿐인데 주변의 모습이 다시 바뀌었다.

사람 키 높이의 격자 창문 너머로 군대가 진열해있다. 온통 붉은 깃발, 그리고 붉은 갑주...
「대역죄인 시오재는 어서 나와 오라를 받으라!」
애나 어른이나 가릴 것 없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전형적인 반역자의 최후였다.

Posted by 미야

2015/06/21 19:54 2015/06/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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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22 06:16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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