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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4

우울증 걸린 갓파가 우물통 아래서 정좌하고 써내려가는 이상한 이야기.
오리지널 성향으로 POI 설정과는 맞지 않습니다.


못 생긴 손이다. 손톱은 뭉툭하고 피부엔 주름이 졌다. 노화 탓에 검버섯도 생겼다.
노동을 한 손은 아니다. 손바닥은 부드러운 편이고 굳은살은 어디에도 박히지 않았다. 다만 중지손가락 관절부위가 유난히 딱딱하긴 하다. 펜을 쥐고 글자를 많이 적는 사람에게 생기는 흔적이다.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지만 핀치는 지루한 줄거리의 자전적 장편소설과 일기를 빙자한 수기들을 몰래 써왔다. 자필로 쓴 원고는 다락 으슥한 곳에 숨겨져 있다. 아마 문학적으로는 가치가 없을 거다. 그래도 먼 훗날, 옛날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이러고 나중 사람들이 역사 자료로 참고삼아 줬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이 있다.
「감상에 젖지 마, 해롤드. 왼손으로도 글은 적을 수 있을 거야. 연습하면 되겠지.」
핀치는 각오를 다지며 깊게 심호흡했다.

『할 수 있겠어요?』
카터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눈동자 빛깔도 진흙처럼 새카맸다.
『경고하자면 말이죠. 익히지 않은 날 생선을 다듬어봤다면 짐작이 갈 겁니다. 지금 당신이 하려는 행위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우 힘든 일입니다. 사람의 뼈와 근육은 그렇게 쉽게 잘리지 않아요.』
「당신은 못 할 거예요」라며 그녀가 핀치로부터 흉기를 빼앗았다.
『차라리 제가 하죠.』
핀치는 만류했다.
『당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 않습니다, 카터.』
그녀는 앞으로 더 먼 곳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추측하건대 그녀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은 대단히 험하고 굴곡져 있을 것이다. 업보라는 이름의 짐을 하나 가득 짊어지고, 벼랑을 닮은 그곳을 어떻게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업보의 무게는 하나 둘 더해갈 것이다. 결국 언젠가「최후의 때」가 오면 산더미처럼 쌓인 짐 더미는 이 대단한 여장부를 삽시간에 깔아뭉갤 것이다.
핀치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최후의 때를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싶었다.
『언젠가 쓰러지는 날이 오더라도... 당신은 보다 더 오래 버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할 무게를 줄여줘야 한다.
핀치는 카터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힘이 달려서 잘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하지만 처음부터 당신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강조하지만 이건 제가 나서서 한 결정이고, 나는 당신이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카터에게 그로부터 조금 떨어져 달라 부탁했다.
『힘을 주어 세 번 손목을 긋겠습니다. 그 정도면 근육까지는 잘리겠지요. 모양새가 다소 보기 흉할 겁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보이고 싶지 않군요.』
『핀치.』
『제가 쓰러지면 재빨리 다가와 뼈를 끊어주세요.』
『핀치!』
『이제 뒤로 열 발자국 이상 물러서주셨음 합니다. 자, 어서.』

별 거 아니다. 주문을 외웠다. 별 거 아니다. 이보다 더 한 고통도 겪어봤다. 그때마다 흐느껴 울었고, 뒹굴었고, 비명을 질러댔다. 통증은 혓바닥 위로 올려진 불타는 석탄과도 같았다. 그걸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고 살아왔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지금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니 다시 주문을 외우자.
「산다는 건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지.」
칼날을 손목으로 가져갔다.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였다.
『이 개 같은 자식! 멋대로 뒤통수를 치고 말이지... 음? 나, 아주 제대로 열 받았다고.』
멋지게 발길질 당했다.

『삐약!』
악, 이 소리도 아니었다. 억, 이 소리도 아니었다.
병아리 울음 소리를 낸 핀치는 옆으로 벌렁 넘어갔다.
간절한 부탁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카터는 깜짝 놀랐다.
인기척을 전혀 내지 않고 날아왔다. 지금은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있지만 그녀는 원래 군인이었다. 매복과 기습에 익숙하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와도 대부분 눈치를 챈다. 전속력으로 뛰어온다? 이런 경우 못 알아차린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뭐란 말인가.
그녀가 만약 어린 소녀였다면 말로만 듣던 늑대인간을 목격한 거라고 믿었을 거다.

당혹감을 뒤로 한 채 일단은 무기를 들어 수풀에서 날아온 남자를 겨누었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개의치 않고 남자는 핀치를 손가락으로 마구 찔러댔다. 성을 내며 욕을 퍼부었다.
『아이고 이걸 그냥 확! 어떻게 혼쭐을 내면 좋을지!』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핀치의 이마를 찰싹찰싹 때린다.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봐!』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이마 위로 앉은 파리를 때려잡는 동작이 다소 느슨해졌다.
남자가 천천히 이쪽들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놀란 표정이다. 핀치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는 식이다. 늑대인간이 나타났다며 놀라게 한 쪽이 누구인데. 카터는 총구를 신중하게 움직여「내 행동은 위협 따위가 아니다」임을 강조했다.
『그에게서 떨어져!』
『어... 저기.』
『떨어져!』
강한 어조에 남자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꽤나 원시적인 무기군요. 그래도 그것으로 제 머리를 겨누는 건 그만하면 안 될까요. 그것보다 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수칙은 모두 학습하셨는지요, 미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닥치고 신분을 밝혀요!』
『제 이름은 존 리스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카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상체를 살짝 비틀었다.
그게 또 의외였는데 카터가 보기에 그 행동은 혹시라도 잘못 발사된 총알이 핀치의 몸뚱이를 맞추는 일 없게끔 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두 팔을 벌린 것도 항복의 의미라기 보다는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예를 들면 카터의 시야로부터 핀치를 가리고자 하는 의도로...
남자는 천천히 다시 움직였고, 이번에는 보다 분명해졌다.

나중에 그녀는「잠옷, 혹은 잠옷과 흡사하게 생긴 옷을 입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무튼 카터의 판단에 의하자면  회색의 잠옷 차림새를 한 남자는 비록 핀치를 향해 멋들어지게 발길질을 했어도 그를 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미면 그녀 역시 스커트 자락을 위로 들어 올린 채 핀치를 발로 밟아대고 그러지 않았던가. 그거랑 비슷한 거다.
계기판 바늘이 한 단계 딸깍 내려갔다.
총구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카터는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Posted by 미야

2012/09/05 15:06 2012/09/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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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3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는 속담대로 괜한 사람을 고자로 만든 카터가 야단스럽게 외쳤다.
『맙소사, 핀치! 어디에 처박혔다가 지금에야 꾸물거리고 기어나왔...』
뒷말은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그녀는 해태가 아니었고, 눈으로 본 핀치의 몰골 하나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추측하기는 너무나 쉬었다. 그의 얼굴은 흙과, 땀과, 말라붙은 피로 뒤덮여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의복은 넝마 꼴이다. 구멍이 뚫린 곳으로 무릎이 드러났다. 저 남자는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하여 자신을 붙잡으려는 자들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친 것이다.
「엄청 노력했어. 그리고 보란 듯이 굴렀구나.」
측은한 마음에 손수건을 내밀어 최소한 눈구멍 주위라도 닦으라고 제안했다.
핀치는 그 와중에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눈치다. 사람 민망하게 엉뚱한 방향으로 손을 내밀어 깨끗한 손수건을 잡으려 했다. 그 산만하고 갈팡질팡하는 동작에 카터는 그가 잃어버렸다던 안경을 기억해냈다.
『당신이 길에다 흘린 안경은 애덤이 찾아내어 보관 중입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 정도로 다행이라고 말하기는 일러요, 핀치. 후스코가 움무들에게 납치되었어요. 그리고 망할 움무들이 인질로 잡은 후스코를 당신과 교환하자고 했고요.』

『우...』
탈진 상태였던 핀치는 똑바로 서있는 것조차 힘들다며 나무기둥에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시멘스키는 그가 곧 훌쩍거리며 울 거라는 걸 알았다. 웅크리고 앉은 그의 몸은 매우 왜소해 보였고, 장대비에 녹아내린 풀떼기처럼 연약한 느낌이었다. 안쓰럽다. 그로서는 매우 견디기 힘든 험난한 하루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최악의 하루는 사실상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핀치가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눈물이 비후강을 타고 콧구멍 쪽으로 흘러내리는 모양이다. 평소 남자가 우는 걸 매우 꼴사납다 여겼던 시멘스키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치기로 했다.

『울지만 말고 얘기를 해봐요.』
『그러니까, 그게... 집으로 돌아가니 거실 한 가운데로 움무 상인이 도깨비처럼 서있더군요. 덕분에 심장 마비에 걸릴 뻔했죠. 그 자의 말로는 우리 집이 어딘지 알아내기 위해 후스코에게 겁을 좀 줬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이 엉덩이를 때려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움무들은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죠.』
『하아. 이걸 기뻐해야할지, 아님 슬퍼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네요. 솔직히 전 움무들이 후스코를 이미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었거든요. 아이가 무사히 살아있다고 하니 기쁜데, 저 대신 잡혀갔다고 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카터와 시멘스키는 여러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카터는 핵심을 꼬집어 질문했다.
『그들이 무엇을 요구합디까, 핀치.』
『가지고 있었다면 주었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나에겐 없는 물건이었어요.』
『핀치... 그들이 요구한 물건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박자 쉬고 카터가 재차 물었다.
핀치는 후후, 이러고 거칠게 숨을 불어대며 힘들게 대답했다.
『컴퓨터 칩이오. 중앙 정부에서 고위 관료에게 제공하는 칩을 원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여성용 손수건에 대고 얼굴을 파묻었다. 산발적으로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카터는 똑바로 서서 어둠을 노려보았다.
시멘스키는 알았다. 그녀는 거의 폭발 일보직전이었고, 부뚜막 아래로 벼락을 내리꽂는 악귀처럼 머리카락을 전부 세웠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외쳐대고 있는 외침이 무슨 내용일지도 짐작이 갔다. 타인에게로 향하는 흉폭한 저주, 그리고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녀의 몸뚱이를 후려치는 분노의 외마디 외침들이었다. 호랑이를 닮은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그리고 곧바로 붉어졌다.
『핀치.』
『네, 관리사문관님.』
『미안합니다. 나는 열 다섯 살의 소년이 외지인들의 손에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핀치가 손수건에서 짐짓 얼굴을 들었다. 그 역시 눈가가 붉었다.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요?』
반박하는 카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뇨, 당신은 날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핀치. 나 자신도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이 사람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거나, 저 사람의 목숨은 덜 소중하다고 말해서는 안 돼요. 생명의 가치는 수치로 계산되지 않지요. 하지만 지금의 나를 봐요. 난 방금 후스코를 위해 당신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할 거라고 결정까지 했는걸요.』
핀치가 손수건에 대고 리얼하게 코를 풀었다.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처지를 이해합니다, 관리사문관님.』
그리고 콧물로 흥건해진 손수건을 둥글게 말아 손아귀에 쥐었다.
『당신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저라도 그렇게 결정했을 테니까요.』

군인의 얼굴을 한 시멘스키는 내부규정 제5조2항에 의거, 일단 카터의 결정에 반발하고 보았다. 인질극에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최악이다.
『체념하기는 일러요. 더 생각을 해보자고요. 핀치를 넘겨주자고요? 그러면 핀치 씨가 죽을 텐데요.』
『다른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습니까, 시멘스키.』
『어... 그게.』
당황하여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를 대신하여 핀치가 조용히 말했다.
『실은 있습니다.』

관료의 칩은 오른손에 이식된다.
이쪽에서 그런 건 없다 아무리 주장해도 믿어주지 않을 터이니 차라리 직접 찾아보라며 손을 잘라주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뭐욧?! 손을 잘라서 주자고?!』
카터와 시멘스키가 동시에 펄쩍 뛰며 외쳤다. 핀치는 풀 죽은 표정으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과격하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처치만 제대로 하면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인질 교환을 하면 전 죽은 목숨입니다. 그럴 바엔 제 손을 잘라서 그들에게 던져주고 후스코를 데려오는 편이 낫습니다.』
『그건... 음. 하지만...』
『결정했으면 빨리 해치웁시다. 일단 피가 통하지 않도록 팔을 단단히 묶어야겠죠. 날이 잘 드는 칼을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도끼도 괜찮습니다.』
『핀치!』
『그런 얼굴로 절 보지 마세요, 카터 관리사문관님. 살해당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절 움무들에게 넘기겠다 하신 분이 제 손모가지 자르는 결정에 흔들려서야 되겠습니까.』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걸레가 된 외투를 벗어 곱게 개켜놓은 그는 셔츠를 잘게 찢어 그것으로 오른팔을 어깨 부위부터 꼼꼼하게 동여매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묶는 매듭이 영 신통치 않았다. 핀치는 답답해 미치겠다며 혀를 찼다.
『시멘스키, 가만히 서있지만 말고 묶는 걸 도와주세요. 그리고 카터.』
빨리 칼을 가져오라고 했다.

Posted by 미야

2012/09/04 16:33 2012/09/0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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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2

뾰족하게 튀어나온 길죽한 코가 미세하게 떠도는 화약 냄새를 맡았다. 귀로는 뱀이 나지막이 휘파람을 부는 식의 기분 나쁜 소리가 들을 수 있었다.
붐붐탄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붐붐탄을 쏘아대고 있다.
『역시나 카터... 과연. 대응이 빨라.』
붐붐탄은 원시적인 형태의 대인공격용 무기다. 압축공기와 약간의 화약을 사용해 쇠구슬이 아닌 돌조각을 날린다. 유효거리는 비교적 짧은 편에 속하며, 부상을 입히는게 주목적이라 그다지 위력적인 무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린애가 팔매질한 돌에 맞아도 피가 나는 법이라서 여럿이서 단체로 붐붐탄을 쏘아대면 얻어맞는 입장에선 천재지변이 따로 없다. 게다가 적당한 크기의 돌조각은 사방에 널려 있다. 그냥 아무렇게나 주워 적들을 향해 날리면 되기에 전투 중 실탄이 떨어지는 일은 안 생긴다.
『놈들을 몰아놓고 위협하고 있군.』
수풀에서 고개를 길게 내밀자 환하게 켜진 마을이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을 꼬박 지새운 채 모두가 등롱을 든 기세다. 절약이 미덕인 시대에 새벽이 다 되도록 불을 밝히는 까닭이야 뻔하다.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 노력 중이었다.

뛰어오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남자가 관리사문관을 급히 찾았다.
『카터, 저놈들이 후스코를 인질로 잡고 있어요. 무사히 나가게 해주지 않으면 아이를 해칠 지도 몰라요. 일단 차단한 길목을 풀어주는게 어떻겠습니까. 너무 조이는 건 안 좋아요.』
『썩을 것들!』
『놈들이 협상을 원해요.』
『핀치는? 그의 모습은 아직도 안 보이나요.』
『그게 문젭니다. 어디서 까무러치기라도 했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아요. 녀석들 말로는 핀치 씨를 내놓지 않으면 후스코를 돌려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맞교환 하자는 거죠.』
『진짜지 가지가지 하네.』
한 여름의 먹구름처럼 두통이 몰려왔다. 동시에 위가 쓰리고 아팠다. 격심한 스트레스 탓이다. 시멘스키를 포함하여 많은 눈이 그녀의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눈빛에는 무한을 닮은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올바른 결정을 내려 모두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기를 - 그 믿음에 언제까지 보답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녀는 성녀가 아니며, 부족함 많은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실수하게 되어 있다. 그녀로서는 지금이 그 실수를 저지르는 날이 아니기 간절히 바랄 뿐이다.
「판단을 잘못하면 후스코를 영영 잃어버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를 앙 다문 표정이 되어 시멘스키에게 손짓했다.
눈치가 빠른 경비병은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으슥한 곳까지 카터를 따라왔다.
그는 카터가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모두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떻다고 보나요, 시멘스키.』
『글쎄요, 카터. 그들도 나름대로 필사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적엔 제법 당황하는 모습이기도 했어요. 후스코를 납치한 건 사전에 계획했던게 아니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였나 봅니다. 엉뚱한 애를 왜 데려왔느냐며 자기네들끼리 언성을 높여 싸우는 걸 봤어요. 하지만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주의라서 지금은 아이를 방패처럼 쥐고 있죠. 덕분에 우리쪽 사람이 근거리에서 총을 쏠 수 없어요. 잘못하면 후스코 찡이 다쳐요.』
건조해진 입술 딱지를 손톱으로 잡아 뜯다 말고 카터가 다시 질문했다.
『그럼 스리-파인스 산비탈 아래로 길이 끝나는 부분까지 대치 상태로 가는 건 어때요.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를 넘겨주면 우리도 그들을 얌전히 보내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도 그게 최선책이긴 한데 말이죠...』
『무슨 문제라도?』
『그 목소리 크다는 대머리 자식이 완강하게 굴어요. 성격도 그지 같구요. 핀치를 빨리 내놓지 않음 후스코에게 몹쓸 짓을 하고도 남아요.』
카터의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변했다.
『아이를 죽이면 녀석이 천하에 둘도 없는 노아라고 해도 살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그 정도로 핀치 씨를 원하는구나 생각하면 뒷골이 아파요.』
『제트-트랜스 전지 사기 건이 핀치 때문에 발각났다는 걸 녀석들이 알아차린 거예요.』
그 점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라며 시멘스키가 지적했다.
『발각이 나면 또 어때요. 그럼 다른 마을로 가서 사기를 치면 되는데. 그리고 우린 쓰레기 전지를 사들이고 옥수수를 다섯 푸대나 줬어요. 우리가 손해를 봤지 저들은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요. 그들이 이 소동을 벌여가며 핀치 씨를 원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핀치는 이 마을 태생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15년 전 마지막으로 롭이 날뛰었을 적에 그 여파로 가족을 전부 잃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난민 중 한 명이다. 출생지는 캐트리나. 올해 쉰 아홉이다. 네 살 터울의 형과 미인인 약혼자가 있었다고 했다. 롭의 난동으로 그들이 비참하게 죽자 이후 핀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쭉 혼자 살았다. 심지어 여성과 교제하는 일도 없었다.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고, 가족이 죽었을 적에 정신적 데미지를 많이 입은 눈치다.
마을에서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건강한 체질이 아니어서 육체노동은 잘 못했다. 폭풍에 날아간 기와를 손질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가는 일도 힘들어했다. 대신 숫자 계산엔 밝아 상인들의 장부 정리를 돕거나 망가진 기계를 수선하는 일을 했다. 잡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시멘스키가 워워 소리를 내며 사소한 부분을 따졌다.
『과거형으로 말하지 마요, 불길하다고요.』
『아는게 많은 사람이다. 이제 됐나요? 시멘스키.』

전체적인 인상이 흐릿하다. 숨기는게 있다. 행동은 예의발랐으나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카터는 핀치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었으나 전폭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헤- 그거 의외인 걸. 카터는 소문을 믿었던 쪽이었군요.』
시멘스키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니까 살해당한 여자가 핀치의 약혼녀가 아니고 실은 형수가 될 여자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형제끼리 한 여자를 두고 다퉜는데 모양새가 좋지 않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는...
『핀치가 원래 중앙의 고위 간부였다는 얘기도 좀 돌았죠. 그 양반 분위기가 묘하게 우리 같은 일반인과는 괴리감이 있잖아요. 그래서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 추방된 관료라는 설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죠.』
『술좌석 잡담꺼리죠. 중앙의 권력자들은 여자와 얽힌 추문 정도로는 추방되지 않아요.』
『그야 모르는 일이죠.』
『중앙으로부터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주제에 그곳이 어떤 곳인지 감도 못 잡고 있구먼. 거긴 사람 탈을 뒤집어 쓴 아귀들 소굴입니다, 시멘스키.』
『그래서 섹스 스캔들이 아니라고요?』
『고민할 것도 없이 평소의 핀치를 떠올려봐요. 시멘스키는 그 허약체질 사내가 여자와 같이 침대에 누워 잠자리 행위를 하는게 상상이 갑니까.』
『그야... 음. 상상을 하려니 낯뜨겁네요. 하지만 핀치 씨도 15년 전에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고의로 엿들은 건 아니지만 핀치는 두 귀를 축 늘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없는 사람을 두고 별 이야기를 다 하시네요, 카터 관리사문관님.』
화들짝 놀란 카터는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조준했다.
그곳으로 까지고, 벗겨지고, 멍든 핀치가 - 두 사람으로부터 불능 취급을 받은 그가 서글프게 울상을 짓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12/09/03 14:51 2012/09/0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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