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14

우울증 걸린 갓파가 우물통 아래서 정좌하고 써내려가는 이상한 이야기.
오리지널 성향으로 POI 설정과는 맞지 않습니다.


못 생긴 손이다. 손톱은 뭉툭하고 피부엔 주름이 졌다. 노화 탓에 검버섯도 생겼다.
노동을 한 손은 아니다. 손바닥은 부드러운 편이고 굳은살은 어디에도 박히지 않았다. 다만 중지손가락 관절부위가 유난히 딱딱하긴 하다. 펜을 쥐고 글자를 많이 적는 사람에게 생기는 흔적이다.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지만 핀치는 지루한 줄거리의 자전적 장편소설과 일기를 빙자한 수기들을 몰래 써왔다. 자필로 쓴 원고는 다락 으슥한 곳에 숨겨져 있다. 아마 문학적으로는 가치가 없을 거다. 그래도 먼 훗날, 옛날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이러고 나중 사람들이 역사 자료로 참고삼아 줬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이 있다.
「감상에 젖지 마, 해롤드. 왼손으로도 글은 적을 수 있을 거야. 연습하면 되겠지.」
핀치는 각오를 다지며 깊게 심호흡했다.

『할 수 있겠어요?』
카터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눈동자 빛깔도 진흙처럼 새카맸다.
『경고하자면 말이죠. 익히지 않은 날 생선을 다듬어봤다면 짐작이 갈 겁니다. 지금 당신이 하려는 행위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우 힘든 일입니다. 사람의 뼈와 근육은 그렇게 쉽게 잘리지 않아요.』
「당신은 못 할 거예요」라며 그녀가 핀치로부터 흉기를 빼앗았다.
『차라리 제가 하죠.』
핀치는 만류했다.
『당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 않습니다, 카터.』
그녀는 앞으로 더 먼 곳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추측하건대 그녀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은 대단히 험하고 굴곡져 있을 것이다. 업보라는 이름의 짐을 하나 가득 짊어지고, 벼랑을 닮은 그곳을 어떻게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업보의 무게는 하나 둘 더해갈 것이다. 결국 언젠가「최후의 때」가 오면 산더미처럼 쌓인 짐 더미는 이 대단한 여장부를 삽시간에 깔아뭉갤 것이다.
핀치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최후의 때를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싶었다.
『언젠가 쓰러지는 날이 오더라도... 당신은 보다 더 오래 버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할 무게를 줄여줘야 한다.
핀치는 카터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힘이 달려서 잘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하지만 처음부터 당신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강조하지만 이건 제가 나서서 한 결정이고, 나는 당신이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카터에게 그로부터 조금 떨어져 달라 부탁했다.
『힘을 주어 세 번 손목을 긋겠습니다. 그 정도면 근육까지는 잘리겠지요. 모양새가 다소 보기 흉할 겁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보이고 싶지 않군요.』
『핀치.』
『제가 쓰러지면 재빨리 다가와 뼈를 끊어주세요.』
『핀치!』
『이제 뒤로 열 발자국 이상 물러서주셨음 합니다. 자, 어서.』

별 거 아니다. 주문을 외웠다. 별 거 아니다. 이보다 더 한 고통도 겪어봤다. 그때마다 흐느껴 울었고, 뒹굴었고, 비명을 질러댔다. 통증은 혓바닥 위로 올려진 불타는 석탄과도 같았다. 그걸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고 살아왔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지금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니 다시 주문을 외우자.
「산다는 건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지.」
칼날을 손목으로 가져갔다.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였다.
『이 개 같은 자식! 멋대로 뒤통수를 치고 말이지... 음? 나, 아주 제대로 열 받았다고.』
멋지게 발길질 당했다.

『삐약!』
악, 이 소리도 아니었다. 억, 이 소리도 아니었다.
병아리 울음 소리를 낸 핀치는 옆으로 벌렁 넘어갔다.
간절한 부탁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카터는 깜짝 놀랐다.
인기척을 전혀 내지 않고 날아왔다. 지금은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있지만 그녀는 원래 군인이었다. 매복과 기습에 익숙하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와도 대부분 눈치를 챈다. 전속력으로 뛰어온다? 이런 경우 못 알아차린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뭐란 말인가.
그녀가 만약 어린 소녀였다면 말로만 듣던 늑대인간을 목격한 거라고 믿었을 거다.

당혹감을 뒤로 한 채 일단은 무기를 들어 수풀에서 날아온 남자를 겨누었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개의치 않고 남자는 핀치를 손가락으로 마구 찔러댔다. 성을 내며 욕을 퍼부었다.
『아이고 이걸 그냥 확! 어떻게 혼쭐을 내면 좋을지!』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핀치의 이마를 찰싹찰싹 때린다.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봐!』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이마 위로 앉은 파리를 때려잡는 동작이 다소 느슨해졌다.
남자가 천천히 이쪽들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놀란 표정이다. 핀치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는 식이다. 늑대인간이 나타났다며 놀라게 한 쪽이 누구인데. 카터는 총구를 신중하게 움직여「내 행동은 위협 따위가 아니다」임을 강조했다.
『그에게서 떨어져!』
『어... 저기.』
『떨어져!』
강한 어조에 남자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꽤나 원시적인 무기군요. 그래도 그것으로 제 머리를 겨누는 건 그만하면 안 될까요. 그것보다 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수칙은 모두 학습하셨는지요, 미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닥치고 신분을 밝혀요!』
『제 이름은 존 리스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카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상체를 살짝 비틀었다.
그게 또 의외였는데 카터가 보기에 그 행동은 혹시라도 잘못 발사된 총알이 핀치의 몸뚱이를 맞추는 일 없게끔 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두 팔을 벌린 것도 항복의 의미라기 보다는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예를 들면 카터의 시야로부터 핀치를 가리고자 하는 의도로...
남자는 천천히 다시 움직였고, 이번에는 보다 분명해졌다.

나중에 그녀는「잠옷, 혹은 잠옷과 흡사하게 생긴 옷을 입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무튼 카터의 판단에 의하자면  회색의 잠옷 차림새를 한 남자는 비록 핀치를 향해 멋들어지게 발길질을 했어도 그를 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미면 그녀 역시 스커트 자락을 위로 들어 올린 채 핀치를 발로 밟아대고 그러지 않았던가. 그거랑 비슷한 거다.
계기판 바늘이 한 단계 딸깍 내려갔다.
총구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카터는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Posted by 미야

2012/09/05 15:06 2012/09/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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