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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2-02

오래된 동물 오감 실험 중에 이런게 있었다.
센서가 달린 우리 안에 실험용 쥐를 집어넣고 버튼을 누룰 적마다 먹이를 공급한다. 영리한 쥐는 재빨리 이를 학습, 단추를 누르면 맛있는 먹이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점을 알아차린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실험자는 버튼을 누르면 먹이통에 전기충격이 가해지도록 몰래 이를 수정한다.
대부분의 쥐의 주둥이가 전기가 올라 벌겋게 탔다.
그런데 극히 소수의 쥐는 - 사실 딱 한 마리만 - 사전에 이런 꿍꿍이를 짐작이라도 한 건지 배가 고픔에도 버튼을 누르지 않고 버텼다. 구석에 웅크리고 눈만 반짝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 모습은 흡사 우리를 탈출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험실 직원이 쥐를 잡기 위해 손을 뻗자 쥐는 사람의 손가락이 잘려 나갈 정도로 물어뜯었다.

쥐가 아닌 인간도 - 매우 극소수의 인간도 사전에 위험을 감지한다. 설명되지 않는 힘이다. 그들은 더할나위 없이 극적인 순간이 오면 별 이유 없이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메스꺼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안절부절 하다가 곧 폭발물에 타이머가 장착된 건물에서 서둘러 빠져나간다. 빠져나갈 수 없으면 제자리에서 방방 뛴다. 일반인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들은 일종의 천연 탐지기나 마찬가지다. 미리 귀띔을 해준 것도 아닌데 먹이통을 건드리면 먹이가 아닌 전기충격이 떨어진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극도의 불안에 떤다.
- 내 주변엔 그런 사람 없었어.
반복하여 말해두지만 극히 소수다. 지진이 나기 전에 머리를 감싸쥐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흔할 것 같은가. 아예 없다고 단정지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헨리는 그런 종류의 사람을 두 명이나 알고 있다.
한 명은 관리사문관인 카터다.
그녀는 거의 전설이다. 군 복무 시절엔 카터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병사들이 제법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가 들판에 앉으면 앉았고, 바위 옆으로 엎드리면 다들 따라서 엎드렸다. 작전 중 사망자 수는 마법을 부린 것처럼 줄었다. 이게 심해지자 카터가 인상을 찡그리면 장군의 명령에도 아랑곳없이 부대원들 전부가 몸을 사리게 되었다. 그래서 방출되었다 - 카터를 핑계 삼은 명령 불복종 사태가 빈번히 발생했다. 골머리 앓던 군에서 카터를 행정 방면으로 강제 전역시켰다는 건 아마 사실일 게다. 당시 조스 카터의 별명은 무당의 딸이었다.

그리고 이건 잘 알려진게 아니지만... 또 한 명은 - 경비병 시멘스키다.
『무슨 일 있는가, 시멘스키. 얼굴이 귀신 같어.』
『그게 말입니다, 헨리.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데 아직은 말할 수 없어요.』
『자네가 그렇게 나오면 난 무서워져. 설마,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지는 거야?』
『맙소사, 헨리.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럼 누가 도둑질이라도 했어? 그래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건가.』
『그런 종류가 아니에요.』
문을 노크하자마자 대답도 듣지 않고 사무실 손잡이를 돌렸다. 인기척에 반응하는「들어오세요」목소리는 없었지만 그 시간에 카터가 자리를 비웠을 거라고는 짐작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중이겠거니 여기고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화장실 용변 같은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적에 그대로 밖으로 나갔어야 했다. 시멘스키는 후회했다.
그날따라 무슨 생각이 들어 남의 책상 서랍을 왜 열어봤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그냥 남이 아닌, 관리사문관의 책상 서랍을 말이다. 완전히 미쳤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거기에 은색의 열쇠가 꽂혀 있었다. 그 조그마한 열쇠가 그를 유혹했다. 시멘스키는 지나쳐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슨 귀신이 씌웠던지 그는 키를 잡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열쇠는 찰착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돌아갔다.
『환장하겠네! 내가 왜 그랬을까!』
헨리가 기겁을 하든 말든,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보고서를 중앙으로 보내지 않았어. 작성은 다 해놓고도 서랍에 넣어두고만 있었어.」
어디 사는 누구의 책상과는 비교되는 모습으로 그녀의 책상은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바깥만 그런게 아니고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반듯하게 정돈된 필기구 옆으로 여분의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시멘스키는 감탄했다. 이것이 여성 관리사문관의 책상 서랍이었다. 아래 칸에는 서류들이 차곡차곡 들어가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그것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하필이면.
「손으로 잡은 건 그거 딱 하나였는데!」
그가 집어낸 파일은 마을 근방에서 움무들의 시신 2구를 발견했다는 보고서였다. 발견 장소와 시간. 유류품의 품목, 옷가지, 그리고 시신의 몸에서 발견한 문신의 생김새 등등이 적혀져 있었다. 시멘스키가 상관이었다면 모범적으로 작성된 훌륭한 보고서라고 생각했을 거다. 오직 객관적 사실만이 짧고도 간략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카터의 개인 의견은 단 한 줄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개인 의견이 없긴 뭐가 없어. 이걸 따로 빼놨다는게 바로 카터의 의견인 거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봐서는 안 되는 걸 봐버렸다. 그럼 이제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나.
『제발 그러지 좀 말게, 시멘스키. 어디서 불똥이 떨어질 것 같아 무섭다니까!』
옆에서 헨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시 아우성쳤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멋대로 누락시킨 장본인은 팔짱을 낀 자세로 사건의 요주의 인물 두 명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한심해 죽겠다. 성인 남성 둘이서 패닉에 빠져 꺅꺅 떠드는 꼬락서니라니.
『그렇게 뻣뻣하게 서있지만 말고 안젤라를 도와주세요, 미스터 리스.』
『어떻게 도와요. 난 못해요.』
『쉬가 마렵다고 하잖습니까. 데려가서 용변 처리를 도와주세요.』
『나더러 지금 3세 여아의 하의를 벗기라는 겁니까?!』
『무엇을 정색하고 그럽니까. 안젤라는 올해 23세의 나이를 먹은 여성이 아니라고요.』
『안 돼요. 그래도 여자잖아요. 전 못 합니다. 핀치가 하세요.』
『보세요. 전 지금 마이클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잖습니까.』
『하던 우유 공급을 잠시 중단하고 안젤라를 도와주면 되잖아요.』
『우유 공급?!』
리스가 우유 공급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법도 했다. 허리가 부실한 핀치는 체중이 있는 아이를 품에 안지 못했다. 대신 의자에 앉혀놓고는... 젖병 꼭지를 아이 입에 끼워 넣는 요령으로 그대로 푹-
말 못하는 어린애도 불만이 생기면 눈빛이 험악해진다. 마이클은「다 큰 어른이 이게 무슨 짓이야」라는 식으로 핀치를 쳐다보았다. 쪽쪽 빠는 건 빠는 거고,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애기가 인상을 마구 찡그리자 핀치는 그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혹시 자신이 분유 용량을 틀리게 했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물의 온도가 너무 차갑다거나...

『안젤라는 제가 화장실에 데려가도록 하죠.』
보다 못해 카터가 손을 더했다.
『그리고 못난이 남정네들더러 보육원 일을 도우라고 누가 그랬는지 알아내야겠어요.』
절묘한 타이밍으로 오줌을 싸기 일보직전인 안젤라가 서러워하며 와아 울음을 터뜨렸다.

Posted by 미야

2012/09/24 12:30 2012/09/2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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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2-01

2편은 틈틈이 적어 올리겠습니다.
오리지널 성향입니다. 배경은 아득히 먼 미래이거나 혹은 과거, POI 설정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 괴물과 같은 적응력.
허리를 구부려 장화 코에 묻은 마른 진흙을 돼지털 브러쉬로 요령껏 털어내는 지금의 리스를 보고 있자니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브라운 씨네 밭에서 잡초를 뽑고 왔습니다.』
일은 힘들지 않았느냐, 잡초라고 착각하고 엉뚱한 싹을 뽑아대지는 않았느냐,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 잘 하고 왔느냐 - 입안에서 빙빙 돌던 말은 전부 다 까먹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100년 전부터 여기서 터줏대감처럼 살아왔다는 식의 천연덕스러움은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핀치와는 대조적으로 리스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마을 분위기에 녹아들어갔다. 지난 보름동안 그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잡부 역을 자처하며 동네를 휘저었는데 도랑에 빠진 소를 끌어올리는 것부터 망가진 화장실을 수리하는 것까지 착착 해치워 부녀자들로부터 인기가 치솟았다.
『당신과 같이 먹으라고 브라운 씨가 찐 감자를 싸줬어요.』
여자들이 우리 편이라고 인정하면 남자들도 덩달아 여자들 의견에 따라가는 법이다.
어느새 그의 신분은 외부인이 아니고「핀치와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라는 것은 실은 점잖은 표현이고.
『핀치?』
이름이 불리워지자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수고하셨어요, 미스터 리스.』
복잡 미묘한 심정이 되어 리스가 내민 꾸러미를 공손히 건네받았다.
- 이러니 사람들이 누가 누구의 마누라니, 아내니 이러고 수군거리는 것이겠지.

먼 옛날, 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었고,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렸다.
그래도 렌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에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는데 신은 없다고 확신하던 무신론자인 만큼 앞으로 맞이하게 될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 - 원자로 분해되어 우주로 회귀하는 것이다 - 영혼이 있다고 믿는 건 한 마디로 미개한 미신을 신봉하는 것 - 편안함과 고요 - 이놈의 망할 세상과 바이바이 - 임종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렌은 오히려 평상시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신이 나서 친분 있는 사람들에게 흥겨운 내용의 작별 인사를 편지로 적어 보냈다. 마지막에는 옅은 미소를 띄운 채 단풍나무로 제작된 관에 누워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악몽은 그 이후에 시작되었다.
나름대로 사후 세계를 만끽하던 렌은 30년 후에 저승에서 다시 이승으로 강제로 불려왔는데, 죽었다고 여겼던 것은 사실은 오해였고, 진실은 과학자들이 아무런 동의 절차 없이 그의 육신을 냉동 보관하여 치료법이 개발되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거였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해도 된다고 내가 언제 동의를 했던가.」
「위원회의 결정이었습니다, 박사.」
「시끄러! 모두 꺼져! 그놈의 망할 위원장에게 고액의 소송을 걸 테다!」
「당신을 냉동 보관하라 지시한 선대 위원장은 18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닥쳐! 정 안 되면 부관참시라도 할 테다! 내가 못할 줄 알아?!」
냉동 캡슐에서 꺼내어진 렌은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일단 개발되었다는 치료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데다, 흘러가버린 30년의 간격을 뛰어넘는 일 역시 상상을 초월하게끔 힘들었던 탓이다. 하여 분노의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불은 초원의 풀과 나무와 거기에 깃든 생명들을 말살시키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적응 훈련은 무려 2년간 계속되었고, 그동안 화마에 시달린 렌의 인격은 잿더미가 되어 붕괴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렌은... 그는, 그 남자는.
적응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사후 세계라고 착각했던 그 적막감과 공허감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던지 이미 그 남자의 정신세계 대부분은 나쁜 벌레에 먹혀버린 뒤였다.

『핀치. 눈 뜨고 자요?』
『아.』
찐 감자를 손에 쥐고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있었던 모양이다. 놀리는 말에 핀치는「안 졸았어요」의미로 세차게 도리질을 했고, 그 어린애 같은 모습에 리스는 큭큭, 낮게 목을 울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젯밤 늦게까지 또 책을 봤죠? 당신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봤어요.』
인공 생명체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도 그는 잘 웃는다. 그리고 매력적이다. 팔꿈치를 괴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 채 이쪽을 보고 지긋이 고개를 기울이는 그 모습은, 뭐랄까. 보는 이의 마음을 미치도록 설레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여기서 곤란한 점은 리스도 그 사실을 잘 안다는 거였다.「나는 매력적입니다」광고하는 간판이 밤이나 낮이나 번쩍번쩍 빛났다.「나에게 반해도 괜찮아요」거기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주의가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핀치는 감성보다는 이성에 치우친 사람이다.
최소한 본인은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반쯤 남은 감자를 다시 접시에 내려놓은 핀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것보다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하느라고요.』
『고민?』
『리스 씨. 혹시 헤엄을 칠 줄 압니까.』
리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곰곰이 이것저것 헤아리는 눈치다.
『헤엄? 글쎄요. 기본적으로... 음. 헤엄을 치기 전에 가라앉는 쪽이죠. 특수하게 제작된 장비가 없다면 물놀이는 저에게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봅니까?』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널 수 있을까 해서요.』
스틱스 강 저편 플레게돈 분지로는 30만 명이 넘는 노아들이 살았다던 고대 도시가 있다. 밤에도 훤하게 불이 밝혀지는 곳이다. 비록 노아는 사라졌지만 그곳으로 아직 로봇은 많다.
『저더러 그리로 가버리라고요?』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며 리스가 항의했다.
『밤새도록 날 어떻게 내쫓을까 궁리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거 참 심하네.』
그리고는 삐졌다.
『아니, 그곳이 리스 씨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제 말은.』
핀치는 허둥거렸다. 거리로 내쫓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리스에게 일말의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지하 세계에서 현실로 그를 끌어올린 장본인인 만큼 누구처럼 휘몰아치는 들불에 육신과 영혼이 송두리째 타들어가지 않도록 그를 보호해야 했다.

살살 달래는 핀치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리자 감겼던 리스의 눈꺼풀이 한쪽만 슬그머니 올라갔다.
『여기서 나가라는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요, 리스.』
『가고 싶은 곳은 제가 알아서 갈 겁니다. 가기 싫음 가지 않고요.』
『그렇게 하세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면 당신도 같이 가는 거예요.』
『나까지 왜요. 그런게 어딨... 리스. 그리고 그건 제 찻잔... 내 허브 차!』
『윽, 달다. 세상에. 여기다 꿀을 얼마나 넣은 겁니까?!』
『한 숟갈밖에 넣지 않았어요.』
『그 한 숟갈이 스푼이 아니라 국자였던 거 아닌가요.』
이상한 취향이라며 리스가 핀치를 면박 주었다.

Posted by 미야

2012/09/21 16:03 2012/09/2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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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23

1편의 마지막 회.


『움무의 무릎을 쏘았다고 했죠?』
그녀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어조가 거슬렸다. 같은 말이라도 미묘한 음정의 높낮이로 일상적인 질문과 취조로 구분이 된다. 지금의 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네. 무릎을 쏘았습니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미리 가정하고 들어가는 이런 식의 대화는 서로의 신뢰감을 좀먹을 뿐이다. 리스는 감정이 상했고,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벗었던 셔츠의 단추를 도로 채웠다.「엉덩이로 이름을 쓰라고 하면 군소리 말고 써라」고 한 핀치의 조언을 떠올려 보자면 사실상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에 대하여 훈련을 받은 사람이고, 솔직히 그 방법은 리스가 알기론 때로 매우 거칠다.

『계곡 아래서 무릎이 나간 시체를 찾아냈어요.』
『핀치를 데리러 온 경비병이 그 이야기를 잠시 흘립디다. 걷지 못하게 된 움무를 등 뒤에서 쏘았다고. 그리고 쓰레기처럼 던져버렸다고요.』
『당신이 손봐준 겁니까.』
『나는 죽은 사람을 쓰레기처럼 취급하지 않아요.』
카터는 고개를 숙여 책상에 놓인 노트에 글자를 적었다.
『그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아이를 납치했어요. 나쁜 짓이죠.』
『그것 말고.』
『그다지.』
『예전에 본 적이 있다거나.』
『전혀. 그런데 이게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자기네들끼리 이름을 불렀어요. 내가 죽인 사람의 이름은 스틸스고 무릎을 날려버린 쪽은 아자렐로요.』
『글쎄요. 크게 도움은 안 될 겁니다. 원래 움무들은 두 개의 이름을 써요, 부모로부터 받은 본명은 미신을 이유로 비밀로 하고 대신 가명을 쓰죠.』
카터는 연필 끝으로 책상을 똑똑 두 번 쳤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그게 본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신의 팔뚝으로 문신이 있었어요. 먹이를 움켜쥐려는 매를 그렸는데 엉성하게 그린게 아니고 전문가 솜씨더군요. 물론 움무들도 문신을 즐깁니다. 하지만 선명한 색상을 내는 염료는 쉽게 구해지는 종류가 아니지요. 우리 마을에서도 못 구합니다. 보다 큰 도시로 가야 해요.』
『그래서요?』
『도시를 방문한 움무가 돈을 내고「문신하고 싶어요, 최고로 멋지게 해주세요」했다는 거잖아요. 불가능해요. 움무의 도시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고, 그들의 방문 가능한 장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문신 시술소는 방문 가능한 장소에 포함이 안 되어 있어요.』

냄새가 난다, 냄새가. 쉰 냄새가 풀풀 난다.
매우 희귀한 트랜스-제트 전지를 가져와 흥정을 하려고 한 움무 무리.
그 제트 전지가 가짜라는 걸 한 눈에 알아차린 해롤드 핀치.
여기까지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눈감아도 그 다음부터가 한층 더 괴상해진다.
움무 무리의 두목이 소년을 윽박질러 핀치의 집을 알아내고 그리로 쳐들어간다.
사기 행위를 들켰다 판단, 협박하여 그 입을 다물게 하려고 했다?
그런 것 같진 않다.
노트에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그렸다. 손으로는 낙서를 하며 사건의 순서를 정렬해봤다.
핀치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친다.
움무는 소년을 다시 납치한다.
그리고 핀치와 맞교환을 하자고 요구한다.
왜냐 - 핀치가 중앙에서 쫓겨난 전직 퇴물 관료라고 착각을 해서.
돌아와서 핀치는 말한다. 움무들이 진짜 원하는 건 해롤드 핀치라는 인간이 아니고 오른손에 이식된 중앙의 칩이라고.
칩? 중앙 관료들에게 이식되는 칩따위가 다 뭐야. 난 실제로 본 적도 없어.
핀치는 자신에게 그런 물건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칩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관료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핀치는 중앙 사람이야. 그건 분명해.」
「그리고 움무들도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그리고 다시 눈앞의 사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저 남자는 아마도 중앙의 델타. 물어보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지만.」
중앙, 중앙, 중앙. 어느새 화살표가 전부 중앙으로 향하고 있다.

『핀치에 대해 아는 것들을 말해봐요.』
리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속으로 다섯까지 숫자를 센 뒤 천천히 내뱉었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다소 괴짜이고요. 꿍꿍이가 깊어 다른 사람 뒤통수를 잘 쳐요. 건강은 좋지 않고, 특히 허리와 다리 상태가 나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열심히 하는 눈치가 아닌데 귀찮아서가 아니고 치료 행위를 불신하기 때문이지요.』
『남들 다 아는 사실 말고요.』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로 찬물을 끼얹으면서 차가워 죽겠다, 죽겠다 혼잣말해요.』
『그런 종류 말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카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를테면 중앙과 핀치와의 관계 같은 거요. 그런 걸 말해봐요.』
『아는 내용이 없는데요.』
『그런 식으로 뒤로 빼지 말고.』
『정말 모릅니다, 카터.』
『허, 계속 그렇게 나오시겠다?』
『찌르고, 때리고, 고문해도 해도 알지 못하는 건 말할 수 없는 노릇이죠. 아니면 그럴 듯하게 지어낸 걸 듣고 싶어요?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그 즉시 질문의 방향을 다르게 해봤다. 슬쩍 흘리면서 옆구리를 치는 방식이다.
『찌르고, 때리고, 고문해도 알지 못하는 건 말할 수 없다라... 예전에도 아는 내용을 실토하라며 고문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나보죠?』
『있었습니다.』
공책에 그 내용을 받아 적지는 않았지만 카터는 실마리를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다.
일반인이 고문을 당하는 일은 흔치 않다. 거의 없다. 아니, 없다는 말이 옳다.
『잠을 안 재우던가요.』
『고압 전류를 흘려보내 고통을 줬죠. 단지 제 이름을 알아내려고요.』
『고압 전류! 그래서 그들에게 이름을 말해줬나요?』
『제 이름은 처음부터 말해줬습니다, 카터. 존 리스가 내 이름이라고요.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지쳐서 내 이름이 알렉산더 카프레타크로스라고 거짓말을 했죠.』
『솔직히 제 생각으로도 존 리스는 언뜻 듣기에 가명 같아요.』
『그래도 그게 내 이름인데요.』
『당신을 고문한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리스는 그런 건 안 통한다며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는 사람 약 올리는 미소였다.
『누구였는지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안 납니다, 미스. 아니. 카터.』
성질이 나려했던 것 같다. 카터가 다시 연필을 들고 책상 위를 또옥, 똑똑 두드렸다.

한참 만에 풀려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 엉덩이를 문질문질 만지고 있던 핀치가 그를 향해 접근해왔다. 화가 난 의사 선생에게 주사 바늘로 찔린 부위가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다리를 저는게 아침보다 더 심해졌다. 안색도 나빴다.
그래도 전리품이랍시고 남성용 옷가지를 잔뜩 들고 있었다. 그는 그 점이 기쁜 듯했다.
『보세요, 리스. 이렇게나 많이 얻었어요. 그리고 모두 사이즈가 큰 옷들이에요.』
게중에는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물건도 있었는데 둘째 아들을 구해줘 정말 고맙다며 대장간 주인이 특별히 신경을 써줬다고 했다.
『이제 8부 바지처럼 생긴 제 옷은 그만 입어도 되요.』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당장 좋아졌다. 리스도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죠? 모두 친절한 사람들이에요.』
이것 좀 받으라며 핀치가 얻어온 물건들을 리스의 품에 잔뜩 안겨주었다.

Posted by 미야

2012/09/20 12:15 2012/09/2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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