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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7

다섯의 움무들이 저마다 싸울 태세를 갖췄다.
스틸스는 신호를 하면 일제히 공격하라는 눈짓을 보내고 인질로 잡은 소년의 목으로 칼날을 가까이 가져갔다. 방금 전까지 숫돌에 날을 갈고 있었던 터라 필요 이상으로 쩍 하고 피부가 베어졌다. 순식간에 목깃이 붉게 물들었다.
따끔거리고 아파서라기보다는 아마 무서워서 그랬을 거다. 후스코가 눈물을 찔끔거렸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요.』
그래도 눈치는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지는 않았다. 비명을 지르면 움무들이 흥분한다. 흥분하면 난폭해진다. 위험이 닥쳤을 적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 - 사전에 배운 지식은 없었어도 자기보호 본능은 후스코의 행동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통제했다. 소란을 피우며 큰 소리를 내지 말 것. 반항적으로 움직이지 말 것. 계속해서 여리고 약하다는 인상을 줄 것. 그래서 스틸스가 비싼 물건을 구매자 앞에서 전시하듯 그를 한 가운데로 몰아세웠을 적에 소년은 어떠한 반발도 없이,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지며 순순히 끌려갔다.

『잘 보이는 곳으로 나와라. 허튼 짓을 하면 아이의 목을 베겠다.』
『충고하자면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충고를 할 입장이 아닐텐데? 그만 떠들고 나와.』
남자는 스틸스의 요구에 응하며 보다 가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오른손에 개조한 장총을 한 자루 쥐고 있었는데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길 태세는 아니고 말 그대로 들고만 있었다. 마치「난 이게 뭐 하는 물건인지 전혀 모르거든」이러고 주장하는 것 같아 꽤나 기묘한 인상이었다.
『어쩌지. 그냥 쏴 버릴까? 두목.』
당혹스러워하며 몇 명의 움무가 스틸스의 눈치를 살폈다.
스틸스는 아직 그들 무리에게 이렇다 할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마을 놈이 아니군. 분위기가 틀려.』
그게 질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리스는 자신의 할 말을 천연덕스럽게 읊었다.
『너희들은 지금 미성년자 유괴 행위를 저질렀다. 무장을 해제하고 순순히 인질을 석방하기를 권고한다. 그렇게 한다면 제1급 처벌 대상의 범죄 내역을 무시하고 중립지역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눈감아 주겠다. 만약 제안을 거부한다면 안전은 보장할 수 없어.』
하는 짓도 그렇지만 말투도 이상하다. 세익스피어 연극처럼 고색창연하다고나 할까. 무리 중 보다 젊은 측에 속하는 움무가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완전히 돌은 놈이잖아.』
『아자렐로, 입 다물어.』
『그치만 스틸스.』
『입 다물어!』
스틸스의 표정은 험악했다. 스프레이로 뿌려진 고춧가루와 겨자 액 탓에 피부로 붉은 발진이 돋아 가뜩이나 야차 같은 인상인데 눈을 크게 부릅뜨고 노려보기까지 하자 감히 대적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자렐로는 입에다 지퍼를 채우는 동작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불만을 표시하며 땅바닥에 침을 뱉는 건 잊지 않았다.

숫자적으로 우세한데 이상하게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다.
『넌 정체가 뭐냐. 혹시 중앙의 개냐.』
『아니.』
남자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보다 거슬리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저놈은 이 상황에서도 긴장이라는 걸 할 줄 모르는 눈치잖아.」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게... 순간 소름이 돋았다.
사람은 규칙적으로 호흡을 한다. 심장이 뛴다. 근육은 요동치고, 눈꺼풀을 깜빡인다. 그러니까 자기 딴엔 가만히 있는 거라지만 살상은 쉬지 않고 미세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저 햄릿 말투의 남자에겐 그런 인간적이고도 자연스런 부분이 부족했다. 주변이 어둡다는 점은 별개로 치고... 스틸스가 보기에 남자의 모습은 마치 정지된 화면과도 같았던 것이다.
「저놈, 숨은 쉬고 있는 거 맞아?!」
땀구멍이 조여지며 닫기는 감각이다. 동시에 밑바닥으로부터 아우성치며 올라오는 무언가가 등줄기를 성가시게 긁어댔다. 일이 상당히 잘못되고 있다.

땀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칼자루를 고쳐 쥐는 것과 동시였다.
입맛을 다시던 아자렐로가 제멋대로 나서며 남자를 총으로 한 방 갈기려 했다.
『아직 쏘지...』
경고하려던 찰나 귀청이 떠나가는 쾅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이쪽이 아니고 저쪽에서 났다. 장총을 쓸모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막대기처럼 취급하던 남자가 제대로 사격 자세를 갖추지도 않은 채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아니, 언뜻 보기엔 그냥 아무렇게나 흔들어댄 것처럼 보였다. 어디를 쏘면 좋을지 판단조차 하지 않고 내키는대로 총을 들었다 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자렐로는 무릎을 움켜쥐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악! 내 다리! 내 무릎!! 으아악!』
여기서 더 무서운 건 남자는 다시 예의 긴장감 제로의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는 거다.

스틸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너~!!』
『사전에 경고했잖아. 그래도 머리를 겨누진 않았어.』
잘못을 나무라는 말투 또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머지는 이제 넷.

『인질을 그만 놓아줘. 그럼 여기서 걸어나갈 수 있어.』
『웃기지 마!』
『내 말이 웃겼나? 이상하군. 원래 나는 농담을 잘 못하는 편이야.』
『적당히 으스대는게 좋을 거야, 친구. 내 장담하지. 여기서 널 죽일 거야. 그리고 이 아이도 죽일 거다. 멈추지 않고 마을로 내려가겠다. 집에다 불을 지르고, 여자들을 욕보일 거다. 남자들은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들개에게 먹이로 던져버릴 거다.』
『어떻게?』
리스가 재빠르게 팔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제대로 조준하고 쏘는 동작이 아니었다. 시선은 똑바로 스틸스에게 고정되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총을 눈높이로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겨선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없다. 게다가 스틸스는 방패처럼 소년을 붙들고 있었다. 목이 졸린 모습으로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후스코는 또래와 달리 마른 체격도 아니다. 음식에 대한 탐심이 강해 살집이 있는 아이다. 그런 상태에서... 완전히 미쳤다.
『스틸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무 상인의 머리로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다.
아이는? 후스코는 확 뿜겨져 나온 살점과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정신이 나간 눈치다. 그러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그 상태로 할 수 있음 어디 해봐.』
리스는 차갑게 내뱉듯이 말하며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장총을 도로 내렸다.

Posted by 미야

2012/09/11 16:53 2012/09/1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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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6

생각해보니 이 이야긴 주인공이 죽으면서 끝나는 새드엔딩이었습니다.
괜찮아요. 현 상황에선 엔딩 못 봅니다? 응?


『잠깐만요. 무기를 빌려 뭘 어쩌려고요.』
걱정을 산더미같이 끌어안은 핀치가 허푸덕거렸다.
『어쩌긴요. 당연한 거잖아요. 15세라면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미성년이니 내버려둘 수 없죠.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려면 도구가 필요해요.』

목젖이 까딱까딱 위아래로 움직였다.
안 돼! 카터, 주지 말아요. 그 남자의 정체는 로봇이에요. 최상위 통합 MOTHER-시스템으로부터 잔존 거주자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수신 받았을 겁니다. 롭에게 무기를 줘선 안 돼.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사실을 카터에게 말할 수 있겠어? 그렇게는 하지 못하지. 왜냐하면 너는 겁쟁이거든.
- 저 남자의 정체만 폭로하겠다고? 그 전에 먼저 네 정체부터 폭로해보시지.
- 속으로 환호하고 있지? 넌 결국 오른손을 자르는게 싫었던 거야.
- 그게 아니라고? 그럼 카터에게 말해. 저 남자는 로봇이라고.
- 못하겠어? 이거 왜 이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지만 말고 말해봐.
- 뭐? 목소리가 안 나와? 핑계 좋다. 역시 넌 뼛속까지 비겁자야.

「위선자.」

마지막으로 들려온 외침은 이미 죽고 없는 친우의 목소리를 많이 닮았다.
그럴 리가. 핀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네이슨은 그에게 결코 상처가 될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옛날을 돌이켜보면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리던 친구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그에게로 향하던 비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차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던, 지옥 언저리 부근으로 생매장시켜버린 불편한 진실...

카터는 가까이 오라는 투로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였다.
『첫째, 두 번 다시 나를 미스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무기를 리스에게 흔쾌히 건네주었다.
『낡았다고 해도 10년 전에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건 아니라고요.』
두 사람의 신장 차이만큼 신발 사이즈 역시 차이가 났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 뒤축을 꺾어 억지로 넘쳐나는 발가락을 구겨 넣은 리스는 겅중거리며 카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맙다, 감사하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식의 인사는 일절 생략, 건네받은 연발식 총을 신중한 태도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약실을 당기고, 다시 집어넣고. 탄창을 제거했다가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탁, 소리가 나도록 올려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는 총신을 똑바로 세운 후 그 무거운 걸 어렵지 않게 한 바퀴 빙글 돌려 무기가 주는 중량감을 몸에 붙게 했다.
『대략 알 것 같아요. 당신 손의 크기와 몸집에 맞게 손잡이를 개조했군요. 공이 밑의 몸체 끝으로 반동을 흡수시키도록 했어요. 다만 눈으로 봐선 탄환을 발사했을 시, 오류각이 어느 정도 나오는지 모르겠군. 한 발 쏘고 테스트를 해봤으면 좋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무리겠죠. 이거, 소음이 꽤 상당하죠?』
오른쪽 어깨를 개머리판에 바짝 붙인 자세에서 가상의 표적을 조준해봤다. 예전에도 다루어본 적이 있다는 식으로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지켜보던 카터는 짐작가는게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수동식이군요.』
메뚜기를 콩과 같이 삶아먹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카터가 눈썹을 찌푸렸다.
『당연히 수동식이죠. 델타에서 사용하는 무기엔 자동식이라는게 있나보죠?』
이번에는 리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델타라는 건 뭡니까, 미스?』
델타는 중앙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특수 부대의 별칭이다. 실체는 구경이 어렵고 그림자만 있는 존재다. 중앙으로 롭이 진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맡고 있다. 롭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전을 벌인 것으로 여러 전설적인 무용담을 남겼다. 뭐, 얘기만 그럴싸할 뿐이고, 정작 그 정체는 고위 관료들의 호위 부대라며 평가 자체를 제멋대로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없진 않다. 그래도 지난 반세기동안 중앙이 괴멸당하지 않은 건 그들이 흘린 피 값이 있어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카터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델타가 뭔지 모른다고요?』
『모르면 곤란한 종류입니까.』
『이럴 줄 알았다니까. 됐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델타 출신이냐 물으면 다들 당신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델타가 뭐냐, 구워서 먹는 거냐, 이러고 발뺌하더군요. 하지만!』
『아. 그렇지. 미스라고 부르지 않을게요, 진짜로요.』
리스는 자신의 실수를 용서해 달라며 빌었다.

리스의 정중한 사과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수분을 섭취한 화초처럼 보다 싱싱해졌다. 늑대인간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척을 죽일 줄 아는 자다. 저 남자가 돕겠다고 하면 뒤로 돌아가 움무 무리를 충분히 기습할 수 있다.
『좋아요. 그럼 작전을 새롭게 짜야겠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기습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정면 돌파를 할 겁니다.』
『뭐요?』
말도 안 된다며 옆에서 카터가 펄쩍 뛰었다.
『무장을 한 상대가 모두 일곱 명이라고요!』
리스는 갸우뚱했다. 겨우 일곱 명 정도로 그녀는 왜 저러는 걸까. 아, 그렇군. 인질의 안전!
『아이가 안 다치게 주의하겠습니다. 약속하죠.』
『그런게 아니라! 젠장... 핀치! 거기서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줘요!』
핀치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꿀 먹은 벙어리 흉내만 낼 뿐이었다.
이제 와서 뭐라고 말을 하라고? 할 말이 없다. 굳이 하자면...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다. 핀치의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리스가 그러겠다 마음만 먹는다면 반각도 지나지 않아 도시 하나가 초토화된다. 그까짓 일곱 명의 움무, 머리가 척추에서 분리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그런 핀치의 복잡한 심정도 모르고 곧바로 카터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핀치! 그 남자가 안 보여요! 빌어먹을! 그새 어디로 사라졌지?! 썩을! 우라질!』

뛰어서 가고 있다 표현하기에는 평소 알고 있던 상식이 방해했다. 한쪽 다리를 땅에 딛었다고 생각한 찰나 5미터 이상 가볍게 가로질러 간 상태다. 뒤돌아보면 어느새 작아진 뒤통수만 보인다. 체중이 있는 존재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착지한 순간보다 공중에 떠있는 순간이 갑절 이상 더 길다. 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속도를 유지한 채 늘어진 나뭇가지를 피해 자유자재로 달린다. 검은 장막처럼 드리워진 어둠을 상관하지도 않는다. 빛이 사라진 깊은 숲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장애물을 제치고 건너뛴다.
『저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소리?』
『몰라. 파도 소리 비슷한 것도 같고.』
『파도?! 여긴 산이야, 이 미친놈아. 바다따윈 부근에 없다고.』
『그러니까 비슷하다는 말을 썼잖아! 누가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어?! 파도 같다고!』
그 정체는 빽빽하게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큰 바람에 휩쓸려 자기들끼리 몸을 비벼대면서 나는 소리였다. 움무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어쩌면 큰 바람을 동반한 소낙비가 다가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구름 사이로 별이 반짝거린다는 점은 별도로 하고, 맑은 날에도 가끔씩 정신 나간 비가 내리곤 한다. 실제로 쏟아져 내린 것은 짐작도 못했던 거였지만, 아무튼. 움무는 몸이 젖는 걸 염려하며 옷깃을 바짝 여몄다. 그리고 그게 그가 기억하는 내용의 마지막 끄트머리였다.
강한 힘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아프다는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뇌와 연결된 신호들이 전부 끊겼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몸이 붕 떠서 3미터 가까이 날려갔는데 의식이 있었다면 무척 고통스러웠을 거다. 땅바닥에 내팽겨 쳐지면서 팔이 비정상적인 이상한 각도로 돌아가 버렸다.
『뭐야! 누구야! 어떤 놈이야?!』
산속에서 파도 어쩌고 떠든다고 흉을 보던 자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로 손가락을 걸었다. 판단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동료의 몸이 뭔가에 떠밀려 튕겨나갔다. 그는 곰을 떠올렸다. 엄청나게 굶주린, 배가 고픈 살인 곰 비슷한 거 말이다. 그래서 여기다 싶은 곳으로 일단 한 발 쏘았다. 짐승은 총 소리를 두려워한다. 그렇지 않던가?
『아아악!!』
어둠 가운데서 돌연 잘 만들어진 사람 모습의 가면이 떠올랐다. 놀라서 탕, 탕, 두 발을 더 쏘았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명중했어야 옳은데 사람의 얼굴은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눈치다.
『제발 다가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귀신아, 저리 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과 동시였다. 매우 딱딱한 물건이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자신의 배를 때린 물건이 장총을 닮았다는 건 훨씬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중에야 기억해냈다.

『뭔가 왔다.』
보초를 서고 있던 두 명이 쓰러지자 나머지 움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이프를 꺼내든 스틸스는 하도 울어 눈자위가 퉁퉁 분 소년을 재빨리 끌어당겼다. 그리고 후스코의 목 한 가운데로 날이 바짝 선 흉기를 들이대었다.

Posted by 미야

2012/09/10 13:12 2012/09/1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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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5

『좋아요, 존 리스. 그럼 이제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보세요.』
기록부에 인적사항을 기록하는 요령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부근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키는 187cm 이상, 체격은 마른 편이고, 눈썹이 살짝 아래로 처졌다. 눈동자 색은 어두워서 파악 불가. 회색의 새치가 드문드문 보이는 머리카락은 짧게 다듬었다. 부랑자는 아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부랑자는 입가에 부스럼이 생긴다. 리스의 피부는 상당히 깨끗한 편에 속했다. - 물론 흙먼지를 다량 뒤집어쓰긴 했다.
옷차림은 생소했다. 몰개성의 셔츠에다 허리를 밴드로 처리한 편안한 바지를 입었는데 상하의 모두 미묘한 광택이 있는 재질로 만들어졌다. 비단은 아니다. 중앙에서 값비싼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여성들을 본 적이 있는 카터는 재질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었다. 비단이 보다 호화롭다. 그가 입은 옷은 인공적이면서도 대량 생산된 싸구려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그리고 어째서인지 맨발. 양말도 안 신고 맨발. 영광의 아베베 비킬라.
늑대인간 어쩌고 줄거리가 스멀스멀 그녀의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카터가 그의 발을 물끄러미 쳐다본다는 걸 알았다. 리스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어. 제 이름은 이미 말씀드렸고요, 저는... 음.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지.』
『늑대인간?』
『설마!』
지금 농담하냐며 리스의 한쪽 눈썹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오늘밤에 보름달이 뜬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게 아니고 실은.』
그렇게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던 찰나,
『우와악~!! 카터! 내가 막을게요! 어떻게든 할 테니까 어서 달아나요!』
엉금엉금 네 다리로 기어온 핀치가 리스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보다는 옷자락을 잡아당겨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고 보는게 훨씬 더 정확한 묘사겠지만,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당황한 리스는 재빨리 허리춤을 붙들었고, 카터는 외간 남자의 살색이 드러나는 걸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카터! 도망쳐요! 빨리!』
내가 왜? 거기서 더 잡아당기면 엉덩이 굴곡까지 공짜로 전부 구경할 수 있겠구먼.
『왜 가만히 서있는 거예요! 이 남자가 당신을 헤치기 전에 어서 피해요!』

그의 얼굴색이 울그락불그락 난리가 났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카터가 서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머리꼭대기까지 짜증이 치솟았다. 폭발을 언제 하느냐만 짐작하면 되겠다. 3초, 2초, 1초,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다마다.
콧구멍이 두 배로 벌어진 리스가 핀치의 이마를 또다시 찰싹찰싹 두드리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불빨래에 경악한 엄마가 오줌싸개 말썽꾸러기를 마구 혼내주는 모양새다. 말리고 싶은 생각은 그래서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관망했다.

『그만! 그만해요! 아파! 아프다고!』
『에잇, 더 맞아라. 더 맞아! 이 정도로 울먹거리긴. 흥! 이봐요, 해롤드. 어째서 아까부터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겁니까!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제가 죽이고 싶다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상은 오직 당신밖에 없다고요. 그걸 아셔야지.』
『어.』
『진짜라니까. 전 지금 당신 모가지를 비틀고 싶어 안달이 났어요.』
『그.』
『뭐요? 안 들리니까 더 크게 말 해봐요. 충동? 무슨 충동. 내가 무슨 충동을 느낀다고?』
『우?』
『말도 안 돼! 제가 이성을 잃고 저 여성을 덮치기라도 할까봐 그러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파렴치한 인상인가요?! 그러냐고요!』
『아.』
『깨달았으면 제 바지는 그만 잡아당기세요! 절 발가벗기고 싶은게 아니라면 말이죠.』
「발가벗기려 한다」라는 말에 핀치는 황급히 그에게서 손을 떼었다. 매 맞아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 말고도 뺨과 목덜미 역시 홍조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깨닫자 입이 헤 벌어졌다. 리스의 바지는 이미 허벅지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잘못했습니다.』
『사과는 필요 없고.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화 좀 하죠.』
까딱하면 혼내주겠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리스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핀치는 꼼짝 못하고 혼이 전부 빠져나간 모습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바지를 추스르는 모습은 둘째고 사람을 쏘아보며 화내는 리스는 엄청 무서웠다.

『그나저나 붕대를 이상하게 감아놨군요. 누가 이랬답니까? 이래서는 피가 통하지 않을 겁니다. 팔을 이리 내요. 제가 다시 제대로 처치를 해볼게요.』
전의를 상실한 채 얌전해진 핀치의 모습에 감정이 한층 누그러진 모습이 된 리스는 제일 먼저 핀치의 오른팔을 칭칭 감은 헝겊조각에 관심을 보였다. 한눈에 봐도 완전히 비상식적인 처치다.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썩게 만들 거다. 얼마나 꽉 묶어뒀던지 혈색을 잃은 손톱이 청색이다. 콧잔등에 가로주름을 만든 그는 몸을 뒤로 빼는 핀치의 동작에도 아랑곳없이 강압적인 태도로 매듭을 풀어내려 했다.
『안 되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미스터 리스.』
어렵게 묶은 매듭을 풀지 말라며 핀치가 애원했다.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어요. 그래서 인질범들에게 제 오른손을 잘라주기로 했습니다.』
『네? 고양이가 말가죽 뒤집어쓰고 강물에서 헤엄치며 노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설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리스는 움무가 뭔지 모른다. 중앙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칩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만 사람의 피부 아래로 이식하는 칩이라는 건 생소할 거다. 당연한 얘기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약 200년의 간격이 벌어져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세기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동안 형용하기 힘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정말로 많은 일들이.

『특이하군. 요즘 인질범들은 돈을 내놓으라고는 안 하는 모양이죠?』
요점만 간단히 정리해서 짧게 말해주었더니 역시 이해를 못 했다.
『그래서 용의자는 모두 몇 명입니까, 핀치.』
허리를 접고 앉아 핀치의 신발 두 짝을 모두 벗겨내다 말고 리스가 질문했다.
『일곱 명이오. 그런데 뜬금없이 내 신발은 왜 벗기는 겁니까.』
『빌리려고요.』
그리고 카터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미스, 괜찮다면 그쪽에게선 무기를 좀 빌렸으면 합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Posted by 미야

2012/09/06 17:08 2012/09/0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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