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4 : 풀무불의 노래 3

화나게 만들면 글이 나오는 거냐고 정색하며 묻진 말아주세요. 린젤에서의 코멘트 탓에 기분이 나빠져서 자기 멋대로 엉뚱한 버닝을 한 건 맞습니다만... 계기는 그렇다치고 간만에 즐거운 기분으로 쓰고 있습니다. 정말 정말 즐겁습니다. (<-푼수)
아, 그리고 먼젓번에 댓글로 적었다 지웠는데 여기서 그라바스보다 유나가 연상입니다. 이 글의 주제는 왕자님이 연상의 여인에게 어떻게 코가 꿰였는가 하는 거랍니다.


평범한 보통의 마부는 말을 다루면서 워워, 내지는 이랴,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게 사막으로 장소가 바뀌면 쮸쮸, 내지는 피피가 되어버린다. 썰매를 끌고 달리는 짐승이 말이 아닌 새다. 이 동네에선 말이나 당나귀가 알아듣는 소리를 내며 고삐를 잡아당겨선 일이 되지 않는다. 워워(멈춰)를 워워(점프~!)라 잘못 알아들었다고 새의 머리를 몽둥이로 칠 수도 없잖는가.
『자, 어디 한 번 멋지게 달려보자. 쮸쮸~!!』
외지인들은 이 광경에서 필연적으로 웃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그래도 웃음이 나오는 것도 때와 장소가 있다. 그라바스는 소리내어 웃기는커녕 반대로 창백해졌다. 이부가「쮸쮸~」하며 새의 발걸음을 독촉하자 모래 위를 미끌어지는 속도가 거짓말처럼 빨라졌다. 그 와중에 돌부리에 걸려 썰매의 몸체가 휘청였다. 눈앞이 아찔해진다.
앞서 이부는 말했다. 어떤 사람은 멀미를 일으킨다 - 확실히 그럴 법하다. 그라바스는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고자 손으로 얼른 입가를 막았다. 뜨거운 대기와 총알 썰매의 환상적 궁합! 머리가 목 위로 제대로 붙었는지, 아님 궁둥이에 붙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티카티카 새가 발톱으로 박차는 모래가 뒤로 앉은 이의 정면으로 쳐들어온다. 거의 끼얹는 수준이다.
가는 모래 탓에 콧구멍과 입은 따갑지, 속은 울렁거리지, 이 와중에 태평스럽게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황량한 사막 풍경을 감상하는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

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개울가에서 세수도 해봤다. 갑자기 쳐들어온 산적떼와 미친 듯이 싸운 일도 있다. 산불이 난 산등성이에서 맨 발로 달리기도 해봤고,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수십 미터 아래로 번지 점프도 해봤다.
그래서 여간한 일에 얼굴색이 달라질 리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무엇 하나 장담해선 안된다. 세상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안색이 새파랗군. 토할 것 같으면 상체를 숙여라.』
안절부절해 하는 그라바스와는 달리 여자는 총알 속도로 달려나가는 썰매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익숙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에 의한 자기 통제다. 추락하는 비행기에 앉아도 - 이 세계에 비행기가 있느냐 묻지는 말고 - 부처님처럼 고요할 거다.
『이보시오들? 많이 흔들릴 거요, 이 부근엔 바위가 많아서리.』
이부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덜컹- 하고 썰매가 높게 튕겨 올랐다가 내려 앉았다.
그라바스는 혼비백산하여 눈을 감았다. 이러다 통째로 뒤집히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자존심은 잊고 몸을 옆으로 기울여 가장자리를 꽉 잡고 매달렸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썰매가 한층 더 요란하게 좌우로 요동을 쳤다.
사람 살려. 목구멍 안까지 비명이 꽉 찼다.

『썰매를 모는 실력이 대단하군.』
유나의 혼잣말에 그라바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실력이 좋아? 그 반대가 아니고?
그치만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평온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면「이부 = 유명 배우와 함께 라스베가스 밤 거리를 활보하는 롤스로이스 자동차의 운전자」라는 공식도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흔들림이 없는 XX 침대 광고 장면이 생각나려 한다. 뜨거운 찻잔을 들고 있어도 옆으로 물 한방울 안 흘릴 거다. 썰매에서 튕겨나가는 일 없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그라바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이 어찌나 이질적으로 보이던지 그라바스는 유나가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라 주장해도 그대로 믿을 지경이었다.

『정말로 외계인은 아닐 것이고...』
『음?』
정말로 궁금해졌다. 저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당신은 엘프입니까?』
엉뚱한 질문이었다. 유나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아니. 내 귀는 뾰족하게 생기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드래곤인지요.』
『그럴 리 없지. 내가 드래곤이었다면 날개를 펼치고 사막을 가로질러 한 번에 날아갔을 것이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질문이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보통의 모험가 같지 않아서 그럽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검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고요.』
『흐응. 평범함이라고 했나, 젊은이. 그렇게 따지만 그쪽도 평범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지.』
그렇게 말한 유나는 그라바스의 손을 재빨리 잡아 올렸다.

뽀얗다 못해 하얗게 빛이 나는 손이다. 굳은 살도 박히지 않았고, 관절이 울퉁불퉁 하지도 않다.
뒤집어 손바닥을 가볍게 쓸어봤다. 모양과는 달리 감촉이 약간은 뻣뻣하다. 어쩌다 걸레를 들고 먼지 묻은 책걸상을 손수 닦았나 보다. 하지만 장담컨대 손 도끼를 들고 장작을 직접 팬 적은 없다.
그렇다는 건 부농, 혹은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어려서「도련님」소리를 듣고 자랐다는 것인데... 그「도련님」께서 시종 하나 데리지 않고 성지 부근을 어슬렁 거린다는 건 상식 이하다.
성지 부근의 사막은 질 나쁜 모험가에 트롤이나 오거 같은 괴물이 떼를 지어 득시글 거리는 곳이다. 그런 곳을 양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 혼자서 돌아다닌다는 건「빨리 날 잡아 잡수」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 하룻만에 가지고 있는 짐은 모조리 빼앗기고, 윤간당하고, 죽도록 얻어 맞고, 저급 마물의 먹거리가 되어 버린다. 한가닥 한다는 모험가들도 그래서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있다. 이곳은 최강의 육식 공룡인 티라노사우르스가 우굴거리는 태고의 정글과도 같다.
『다섯 발걸음에 한 번씩 몬스터와 마주친다는 장소다. 성지를 순례하러 온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호위꾼을 다섯 정도는 고용하고 나타나는게 맞지. 그런데도 혼자. 그것도 변변찮은 무기 하나 없이.』
절대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는 점에서 유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너야말로 드래곤인 거냐?』

흘깃 쏘아보니 그라바스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호오, 정말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정곡을 찔려 당황한 건가. 괜찮다. 비밀로 해주마. 그대가 드래곤이라고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여, 여, 여성이 먼저 제 손을 잡은 건 처음인지라!』
『음?』
『소, 손을 놔주시겠습니까.』
『어랍쇼. 설마... 부끄러운 건가.』
『으아아~ 놔주세요오~!!』

귀까지 빨개진 반응이 귀엽다. 심술을 담아 손바닥에 쪽- 하고 키스 하는 시늉을 해봤다. 놀리는 보람이 있어 펄쩍펄쩍 뛴다. 유나는 간만에 - 정말로 오랜만에 하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음 소리에 놀라 새를 몰던 이부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크 소리가 나왔다.
아버님께 마지막 술 한 잔 올리러 간다는 여자가 도중에 통쾌하게 웃으면 이상하게 생각되겠지.
유나는 쏘옥 우러나온 눈물을 닦고 그라바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놀려대서 미안하다, 젊은이.』
『젊은이가 아니라 그라바스요.』
『그랬던가... 그럼 다시. 나의 무례함을 사과하겠다, 그라바스.』
완전히 거꾸로다. 보통은 여자 쪽에서 눈치를 보며 색골 중년의 노골적인 시선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어가지 않던가. 그런데 이번엔 정 반대로 여자를 경계하여 남자 쪽에서 슬금슬금 피하고 있다.
이거 참 재미있게 되었다. 유나는 짖궂은 표정을 하고 떨고 있는 그라바스를 응시했다. 이참에 허벅지라도 쓰다듬어 볼까나... 했다가 그거야말로 성희롱에 강제 추행이라는 점을 떠올리고 참았다.

유나는 자세를 다시 바로하고 예의 56억 7천만년동안 기나 긴 묵상에 들어간 부처님을 흉내 냈다.
『말려들게 하지 않으마.』
무슨 말인지 부족한 제 작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유나의 말에 보인 그라바스의 반응은 그러했다.
『무슨 뜻인지...』
『있는 그대로의 뜻이다. 말려들게 하지 않겠다. 너는 가고자 하는 길을 가면 된다. 성지로 관광을 하러 온 것이라면「생존자 마을」에 들려 적당히 기념품이라도 사라. 단, 거기서 장사꾼들이 권하는 말린 오크 가죽은 사지 않는게 좋을 거다. 바가지 상술은 그렇다치고 냄새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더군. 넌 미처 모를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순진한 얼굴이니 이참에 벗겨 먹자고 달려드는 사람도 많을 터인데 무엇을 보여주던지간에 15 크로바기네 대륙 통화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버텨라.』
『저기요?』
『좋은 물건이 있으니 같이 가서 보자고 하면 거절해라. 십중팔구 납치범이거나 유괴범, 강간범이다. 따라가면「운이 안 좋았습니다」정도로는 일이 안 끝난다.』
『이봐요?』
『목이 마르지 않느냐며 물병을 내밀면 밀봉된 새 것 이외엔 죄다 거절하는게 좋다.』
『여차하면 약을 타서 먹이려 한다는 건 나도 잘 압니다. 그나저나 이보슈.』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몸을 부딪쳐오는 사람의 다수가 소매치기다. 사과하는 척하며 주머니를 털어가니 조심해야 한다. 가방은 항상 앞으로 매고 다녀라. 길을 두리번거리면서 걸으면 표적이 되기 십상이니까 똑바로 걷도록 하고...』
『이봐요, 언니!』

이쯤해서 말꼬리를 잘랐다.
그라바스는 정색을 하고 유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반대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무슨 일에 말려들게 될 거라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테라가 난리통이라고 이부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테라로 가는 겁니까. 테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대답하기 싫었던 것 같다. 유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나를 똑바로 봐요!』
여성에게 손을 잡혔다고 수줍어하던 청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기백에 유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대로 내가 당신과 같이 테라로 가게 되면... 무슨 일에 말려들게 됩니까.』
『말려들지 않는다. 너는 나와 같이 테라로 가지 않는다. 테라에는 나 혼자...』
『말씀하십시오.』
『저런. 보기와는 다르군. 고집이 상당하잖아.』
『그런 말은 옛날부터 들어왔습니다.』
『그건 자랑이 아니지.』

여자는 후우-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있을 거라는 설명으론 부족한가.』
『부족하다고 하면 더 설명을 해주실 겁니까, 유나.』
『아니. 시시콜콜 다 말해주면 발을 빼고 싶어도 빼지 못하게 되니까 말할 수 없다.』
『이미 한쪽 발을 잡아당긴 건 그쪽입니다.』
『그것은 틀린 표현이다. 난 너의 발이 아닌 손만 잡아당겼다.』
여자에게 손을 잡혔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는지 그라바스의 뺨이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특히나 손바닥을 천천히 쓸어내리던... 아니, 아니! 지금 그걸 떠올려 뭘 하겠다고!
『뭐, 손을 잡아당겼다고 치고.』
헛기침을 하고 어렵게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한쪽 손을 잡아당겼다는 건 부정 못 하는 거죠?』
『이상한 아이군.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넌 마치 곤란한 일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살면 제 수명을 못 누려.』
『제 손금은 이미 보셨겠지요. 생명선이 무지 길어 막판에 노망 날까봐 걱정입니다.』
『길이는 그렇다치고 중간에 뚝뚝 끊기던데...』
『저런. 손금 같은 걸 믿습니까? 그건 미신입니다.』
『이봐? 아까와는 태도가 다르잖아. 그리고 손금 이야길 꺼낸 건 그쪽이 먼저야.』
『그러니까 제 목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자! 어디까지 얘기를 했었죠?』

일이 이렇게 되면 아주 입을 싹 다물기도 힘들어진다.
여자는 조금 망설였고... 마침내 다 기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조물조물 속삭였다.
『네?』
『...라고 했다.』
『죄송하지만 잘 못 들었습니다.』
『이잇! 그게 나왔다고 했다.』
『뭐가요. 콧털이?』
당황해서 콧구멍을 얼른 어루만지는 그라바스를 보고 여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누가 콧털이라고 했나!「그 여자」의 흔적이 나왔다고 했지!』
『그 여자?』
『눈치가 없군. 이 동네에서「그 여자」하면 딱 하고 떠올려야지.』
『설마...』
『이제 알았나. 성마(聖魔) 다. 성마 리나 인버스다.』

Posted by 미야

2006/06/18 22:29 2006/06/18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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