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4 : 풀무불의 노래 2

"화톳불의 노래" 와는 시기가 연결되지 않아요.


『사막으로 나가는 건가.』
괴물을 잡는 장검을 가진 자가 목소리를 크게 했다.

이부와 청년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눈빛으로 열 마디 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교환했다.

「이런 식으로 등장한 것치고 정상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키는 나만한데 아직 변성기도 겪지 않은 목소리네. 도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는 거야.」
「저놈의 검은 왜 저리 크담.」
「머리 꼭대기까지 후드를 눌러쓰고 눈만 빼꼼 내밀고 있으니 수상한 사람 같잖아.」
「사막 안내자는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이면 우리 쪽으로...」

출발 준비를 끝마친 사막 썰매를 흘끔 쳐다본 소년이 다시 말했다.
『돈은 후하게 쳐 주겠다.』
자신의 말이 한 점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었던지 소년이 제법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쥐고 흔드니 쩔렁 소리가 난다. 싸구려 구리붙이나 자갈을 넣어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동으로 만든 대륙 통화이거나 은화다. 그것이 돈 주머니임을 확신한 - 게다가 주머니에 든 금액이 상당하다 - 이부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원하시오.』
『테라로 가고 싶다.』
젠장맞을.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부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못 가오.』
『어째서?』
『먼저 온 손님과 가는 방향이 다르오.』
『사막으로 가는 거 아니었나.』
『사막은 사막인데 같은 사막이 아니오.』

염연히 다르고 말고. 한쪽은 관광지고 다른 한쪽은 전쟁터다. 이부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머리를 긁어댔다. 모험가들을 데리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과 당장에라도 폭탄이 날아올 것 같은 험한 곳을 돌아다니는 건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일부러 위험한 걸 자처하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 먹여 살려야 할 처자도 있... 이쯤해서 이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으~앗!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으니 먹여 살릴 처자가 없잖아!
가느다란 개미 허리를 가진 꿈 속의 마누라를 상상하며 이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언제 장가들어 토끼 같은 자식들의 재롱을 보나.
『다른 안내자를 찾아보시오. 나는 선약이 있소.』

그래도 소년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사막으로 나가는 건 맞지?』
『그렇수다만...』
『방향이 같은 곳까지라도 태워주게. 도중에 내리라고 하면 군소리 않고 얌전히 내리겠네.』
짐작컨대 이부와 같은 반응을 보인 사막 안내자들을 한 다스는 미리 만났던 것 같다. 돈을 보여줘도 싫다고 한다. 두 배, 세 배, 아니. 다섯 배로 준다고 해도 모르는 척한다. 그러니 구걸하고, 애원하고, 떼를 써본다. 소년의 말투엔 절박감이 묻어 있었다.

이부는 난처해하며 머리를 더 심하게 긁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라니까. 말을 하면 좀 알아 들어라, 이 찐드기 같으니라구.
그리고는 옆에 선 청년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하고 있소.」
「에?」
「싫다고 해, 어서. 동행하기 싫다고 말하라고.」
「나, 나는... 그, 그런...」
「난리통에 휩쓸리고 싶냐구. 그러니까 말해.」
마지못해 젊은이가 입을 벌렸다.
『에, 나는 그러니까...』

하지만 그 전에 저쪽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눌러쓰고 있는 후드를 벗어내리자 새빨간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흘러내렸다.
저주스런 불꽃의 빛깔이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곤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이부의 눈이 접시가 되었다.
여자다.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자였다. 냉정하게 굳게 다문 입술이, 그리고 곧게 뻗은 콧날이 오아시스의 바람 같다. 크고도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멋지다.
천진난만한 외모에 숨겨진 잔혹함이 참을 수 없게 매혹적이다.
이부는 자신이 생전 처음 여자를 보는 얼뜨기처럼 뺨을 붉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리를 같이 한 청년 역시 정신을 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매우 천천히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도중까지만이라도 괜찮네. 나는 그저... 몸져 누우신 아버님께 마지막으로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어서... 흑!』

눈물을 삼키는 소리에 반응, 이부는 재빨리 몸을 날려 사막 썰매에 실은 짐 꾸러미를 한편으로 치워 자리 하나를 급히 만들었다. 비싸다는 새 방풍 마스크까지 어디선가 찾아 꺼내놨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어서 빨리 타도록 하십쇼~!」라고 말했다. 엉겹결에 동행이 생긴 젊은이가「그렇다고 내 가방을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항의해도 가뿐히 씹었다. 적이 포탄을 바가지로 퍼부어도 기어코 뚫고 지나가 보리라. 성난 사자가 울부짖어도 전진하리라. 이부는 흥분하여 출발의 깃대를 높이 올렸다.
『테라로 갑니다~! 테라~』

예나 지금이나 미인계가 장땡이다. 거기다 초선의 눈물이 더해지면 천하의 여포도 동탁을 배반한다. 그것이 눈물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바른 침이라 해도 남자들의 마음은 가볍게 부셔진다. 보태어 슬픈 미소를 살짝 지어라. 그 누가 항복을 선언하지 않고 버티리.

사막 썰매에 올라타자마자 도로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는 여자를 보고 청년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거, 이거.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다.
사막 썰매 지붕에는 뜨거운 햇살과 자외선을 반사하는 특수 코팅 차양막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티카티카 바위 새는 닭처럼 생긴 외모와는 달리 말보다 빠르게 달린다.
이걸 다시 말해보랴. 발가벗고 온갖 난리를 피워대도 사막 썰매에 타고 있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엔 잘 안 보인다. 뭔가 온다 싶어 뒤를 돌아다 보면 이미 휙- 하고 저 만큼 앞을 지나간다. 따라서 썰매에 탄 사람이 제대로 옷을 입었는지, 아님 홀딱 벗었는지를 가려내려면 올빼미보다 더 커다란 눈과 엘프의 눈썰미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드를 깊숙이 눌러썼다는 건...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구린 곳이 많다는 거다.
내기를 해도 좋다. 저 여자는 초원을 걸어도 자기 발자국을 지워가며 앞으로 나아갈 거다.

『이것도 인연인데 이름이나 알고 그러십시다.』
포장도 뜯지 않은 여자의 새 방풍 마스크와 토사물 찌꺼기가 달라붙은 자신의 처량맞은 마스크를 번갈아 쳐다보던 청년이 퉁퉁 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라바스요. 댁은?』
『유나.』
언제 울먹였느냐며 그 목소리엔 떨림이 없다.
순 사기꾼. 그라바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거 압니까?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마지막 술을 올리는 겁니다.』
당연하다. 아파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에게 술을 먹이는 멍청이 짓을 누가 하냐. 혼수상태의 환자인 경우엔 더더욱 못 한다. 설마하니 코에다 튜브를 꽂고 술을 들이붓지는 않을 것이고... 그딴 짓을 저지르면 그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뭐, 술 냄새가 코가 아프도록 진동한 나머지 데리러 온 저승사자가 이마를 찡그리며「술이 깰 즈음에 다시 오겠네」라고 한다면야 시도해볼만은 하겠지만.
그럴 일이 절대로 없다는 점에서 생애 마지막 술은 장례식에서 올리게 된다.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똑 부러지는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셨다.』
『어랍쇼. 방금 전에는 몸져 누우셨다고 했잖아요. 분명히 그랬다고요.』
『2분 전에 돌아가셨다.』
『우와~. 무지하게 솔직한 언니네.』

「댁이 잘못 듣고 착각한 거예요」라고 잡아떼지 않고 완곡어법으로「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다」이라 인정한다. 그라바스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싸우려던 의지를 꺾었다. 솔직한 사람에겐 약해진다. 하여 여차하면 사막 썰매에서 여자를 끌어내리려던 계획은 백지로 돌리고 이부가 잔뜩 쌓아올린 짐 꾸러미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부의 썰매는 3인승이다. 그래도 워낙에 실린 짐이 많아 두 사람이 앉아 있기엔 좁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여자가 좀 더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게중에 가장 작아 보이는 짐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최대한의 편의를 여성에게 양보했다.
여자에겐 잘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얘기다.

여자는 조금은 놀란 눈치다.
『그럴 필요까진 없다.』
『아뇨. 이럴 적엔「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유나.』
『내 엉덩이는 작다. 나보다는 자신을 걱정해라.』
남자의 말투를 쓰면서 유나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과시하듯 자신의 장검을 들었다 놓았다. 그렇다고 여차하면 베어버리겠다는 위협은 아니고... 저 동작의 의미는 아마도 자신은 보호를 받아야 할 약자가 아니라는 뜻일 거다.
오히려 여자는 그 반대를 생각하는 듯했다.
남자답지 못한 좁은 어깨와 팔뚝, 그리고 보들거리는 손. 냄새가 심하다고 마스크를 멀리하는 소심함...
유나는 이부가 꺼낸 새 마스크를 그라바스를 향해 툭 던졌다.
『이걸 써라.』
애 취급에 꼬맹이 취급.
그라바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며「이건 또 뭡니까~」하고 하늘을 원망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이럴 적엔「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거다.』
당했군.
그라바스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여자 앞에서 할 말을 잊었다.

Posted by 미야

2006/06/17 10:53 2006/06/1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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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19 21:03 # M/D Reply Permalink

    오아시스의 바람같다, 크으... 유나미스는 어렸을적부터 미인이었던것 같아요. 맞나요?; 기억나는게,그.. 여관 아주머니의, 유나어린이의 허벅지에 대한 감상. 광활한 사막에 불꽃같은 붉은 머리가 휘날리면 정말로 멋지겠죠. 강한언니!!! 정말 좋아요!! 마지막 대화는 터미네이터 생각나요. 꼭 저렇게 돌려줬었죠.. 유나미스는 굉장히 굳세고 단단한 아가씨로 자랐군요. 그래도 그 말빨;은 역시 리나의 핏줄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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