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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이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혈압이 치솟아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일이 맞대응하기도 피곤한 노릇이라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귀가 먹어 아무 말도 못 들었다 거짓 행세를 하며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땅을 보고 걷는 나를 가로막았다. 손을 봐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회피하려는 내 의도 따윈 가볍게 묵살될 수밖에 없었다. 무리 중 이른 여드름이 난 소년이 우악스럽게 내 팔뚝을 잡더니 송주 앞으로 데려가 다시 세웠다. 좌우로 흔들어 뿌리치려 했지만 손아귀 힘이 제법 셌다. 버둥거리자 이번엔 아예 양팔을 잡혔다.
이런 자세일 때 배를 맞으면 내장이 끊어지는 것처럼 상당히 아픈 법이다.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지만 나는 아랫배를 잔뜩 집어넣고 힘을 주었다.

『네가 지금 이일 저일 가리게 생겼어? 마굿간 청소라도 감지덕지 생각해야지. 게다가 넌 지금 이사실에서 공짜 밥을 먹고 있잖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뭐라도 일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 거렁뱅이야.』
그런데 이 인간은 미리 짐작했던 것과 달리 배를 때리지 않고 내 뺨을 후려쳤다.
맞을 거라 각오했던 부위가 아닌데다 아무래도 얻어맞은 곳이 얼굴이다 보니 충격이 훨씬 컸다. 순식간에 입안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는데 통증은 둘째고 머리를 맞았다는 치욕감이 대단했다.
노리고 일부러 그런 거라면 칭찬할 만하다. 도발이 뭔지 잘 안다는 의미니까.
『어쭈? 이 녀석 표정이 달라졌다.』
『노려보면 어쩔 거냐.』
『어이, 송주. 한 대 더 갈겨.』
성미 고약한 녀석은 친구의 부추김에 내 왼쪽 뺨마저 갈겼다.
고개가 획 돌아가면서 눈앞으로 별똥별이 반짝였다. 이번엔 입술이 찢어졌는지 피 맛이 느껴졌다.

『알겠어? 마굿간을 청소하는 거다.』
송주는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날 다그쳤다. 청소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더 심한 폭행을 가할 기세다.
그래봤자 나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손가락을 씹어 먹겠다며 노려봤다. 목구멍 안쪽에서 폭우로 불어난 개천이 바위를 굴리는 으릉 소리도 났다.
『내가 왜 마굿간을 청소해야 하는데?』
『이 녀석은 기억력도 형편없군. 말했잖아. 이사실에서 공짜 밥을 먹여주면 일을 해야지.』
『이사실에서 공짜 밥을 먹여주는 댓가로 마굿간 청소라... 그렇다면 나더러 황제 폐하의 군마장에서 말을 돌보라는 얘기냐?』
송주는 그 무슨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법도 했다. 말은 상당히 비싼 동물이다. 그리고 황제의 군마는 으뜸 중의 으뜸이라 때로는 사람보다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나 같은 계집은 당연히 근처에도 갈 수 없고 군마장에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육사가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말을 돌보는 자의 계급은 쌀 창고지기보다 두 계단 더 위다. 당연히 녹봉도 많다.

『주제를 알아야지. 네가 돌볼 말은 군마장의 말이 아니고 우리 집에서 가져온 세 필마다.』
『어째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따져 묻는 내 목소리는 앙칼졌다. 바다에서 큰물이 육지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들판을 덮고, 야산을 덮는, 무겁고 어두운 물. 그것은 잠시 왔다 사라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말이 되지 않잖아. 공짜로 먹이고 재워주시는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은 내가 그 감사의 마음으로 너희 집 말을 돌봐야 한다는 거냐? 그래선 아귀가 안 맞아.』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하다. 송주가 어, 하고 콧잔등을 찌푸렸다.
『하, 하지만 넓게 보면 우리 집 말들도 결국은 황제 폐하의 소유물이니까... 이사실의 주인은 폐하이시다.』
『그럼 따져 묻자. 네 말들을 가져다 팔면 그 돈은 온전히 황제 폐하의 것이냐, 아님 네 것이냐.』
『어... 그건.』
이윽고 내 목소리는 아쟁이 내는 가장 높은 음역까지 올라갔다.
『이 고등어 회충 같은 놈! 왜 말을 더듬어. 결국 아니라는 거잖아. 잘 들어라, 그렇다면 네놈은 황제 폐하가 내려주신 은혜를 적손이 아닌 네놈과 네 집안에 갚으라고 감히 요구한 거잖아. 그것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모리배의 행위! 창피한 줄 알아야지!』

송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당연히 부끄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이유로 혈색이 바뀐 것이다.
『이, 이놈이!』
말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다음으로 등장할 건 폭력이다.
뺨을 치는 것만으로는 분을 삭힐 수 없었던 그는 주먹을 쥐고 나의 가슴 부위를 쳤다. 뼈가 끊어질 것처럼 아파 몸을 웅크리자 이번엔 무릎이 같은 부위를 치고 올라왔다.
비명도 못 지르는 상황이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아마 나는 꼴사납게 벌린 입으로 침도 뚝뚝 흘렸을 것이다. 진짜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려 했다. 흉부를 정통으로 맞으면 멎었던 심장도 도로 뛴다고 하니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찌르르 울리던 울림은 그 즉시 수천 배로 확산되어 내부 장기를 위아래로 뒤흔들었다. 덕분에 의식이 흐려져 사람 얼굴이 으깬 감자처럼 보였다.
『잡아 올려!』
명령이 떨어지자 양팔을 붙잡고 있던 소년이 발뒤축을 높게 세웠다. 덩달아 내 몸도 둥실 떠올랐다.
그야말로 표적으로 삼기에 안성맞춤, 잡아당겨져 상의가 말려 올라가 배꼽이 드러나려 했다.
『이게 입은 살아가지고!』
어렵사리 실눈을 뜨고 보니 녀석이 오른손을 말아 쥐고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기로 하고 그나마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다리를 뻗어 송주의 거시기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크어억!』
나도 남자였던 적이 있어 그 고통에 대해 잘 안다. 보나마나 시커먼 나비가 공중을 어른대었을 거다. 국부를 움켜쥔 소년은 솥단지를 철쑤세미로 긁어대는 기괴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좋다 이거야. 나는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걷어찼다. 이번엔 거리가 다소 짧았다. 제기랄, 기함하며 또 한 번 발길질했다.
아쉽게도 세 번째 공격은 완전히 헛발질로 끝났다. 내 양팔을 붙잡고 있던 소년이 황급히 내 몸뚱이를 끌고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야말로 아랫배에 힘을 줄 때라고 직감했다. 각오하는 것과 동시에 구경하고 섰던 이들이 저마다 욕을 퍼붓고 주먹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곧 힘으로 밀쳐서 구르면서 넘어졌고, 코가 뜨뜻해졌다. 아무래도 코피가 터진 것 같았다.
『변방인 주제에 어디서 감히!』
그들은 나를 벌레를 잡듯 계속해서 밟아댔다.

『당장 오늘부터 마굿간 청소를 하도록 해! 아니면 죽을 줄 알아!』
흘러나온 피가 숨구멍을 막아 나는 어쩔 수 없이 헐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알앙어. 그망 때려. 마궁간 청소 항게. 하지망 옹짜로는 앙야!』
『지금 뭐라고?』
내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소년들은 저마다 손바닥을 귓가로 가져갔다.
『다시 말해봐.』
『청소는 항 거야. 다망 댕가 없잉 안 해.』
『청소는 하겠지만 대가 없이는 안 하겠다고? 지금 네가 말한 내용이 그거야?』
맞다는 의미로 나는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타구니가 아픈 탓에 여전히 등을 구부정히 한 송주가 이를 갈아댔다.
『웃기고 있네. 돈은 못 줘. 이 빌어먹을 놈아!』
빌어먹을 년이라고 정정해줘라, 이 회충 같은 놈.
『동은 필요 없어. 너한테 돈 안 받아.』
입안에 고인 피를 퉷, 하고 뱉으면서 말했다.
『돈은 필요 없다고?』
『그래. 내가 웡하는 댕가는 돈이 아니야. 다른 거야.』
나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들어 녀석들을 하나하나 쏘아보며 머리속에 각인해뒀다.

Posted by 미야

2015/06/02 13:59 2015/06/0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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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02 19:11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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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걸음을 재촉하면 할수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상했던 건물의 자태가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제자리에서 멈추어 서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녹아내릴 것 같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그것은 빈사의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오래되어 낡은 건물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여서 단청의 고왔던 칠은 비바람에 지워져 맨 바탕이 겉으로 드러났다. 나무결이 상해 그 표면은 매우 거칠었고, 회벽의 일부는 탈락되었다. 길에 자라난 잡초만 겨우 뽑았을 뿐으로 전반적인 인상이 밑둥부터 병들어 썩어가는 고목과 흡사했다.
글쎄다. 사정이 생겨 건물만 내버려두고 중부고를 다른 장소로 옮긴 걸까? 의심의 눈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시설은 제법 낡은 편이긴 했다. 하지만 건물이라는 건 50년만 딱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서 사람이 손으로 지속적으로 가꾸고 수리하면 천 년도 간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오른쪽 방향으로 건물 외관을 따라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으나 희미한 온기는 남아 있었다. 힐끔거리며 위를 쳐다보자 단단히 닫긴 창문으로 어른 손모양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걸레로 창틀 먼지를 닦는 일은 없었으나 환기를 위하여 열고 닫는 행위는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잡초의 일종인 개불알풀이 파란 꽃을 점점이 피우고 있었다. 제멋대로 군생을 이룬 잡초는 원래부터 이 자리는 내 영역이라는 당당함을 앞세우고 돌이 깔린 통로까지 넘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엔 화단이었을 곳으로 접근하여 손바닥으로 망원경 모양을 만들어 1층 창문 안쪽을 염탐했다. 내부는 어두워 그 안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안에 방문객이 없는 건 확실했다. 의자와 책상은 가지런했고, 각이 잘 맞은 탁자 위에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놀라운 건 쌓여만 있는게 아니고 아래로 넘쳐흘러 책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엎어져있었다는 거였다. 마치 도둑이 들어 온 집안을 뒤지고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인상이다. 그 참혹한 광경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시험 삼아 창문을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자 덜컥 소리만 났을 뿐으로 아무래도 안으로 걸쇠가 잠겨 있는 듯했다. 답답한 심정에 창틀을 두드렸다.
『안에 혹시 누구 없습니까. 여보세요?』

이상한 녀석을 봤다며 응답하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어둠 가운데서 인영이 불쑥 떠올았다.
『아이, 깜짝이야. 이보시오, 오늘은 목요일이 아니잖습니까.』
약간은 부운 눈을 하고 있던 그 자는 아마도 부고의 말단 관리인 듯했다. 숙사감과는 색이 다른 의복을 입고 있었고 그 빛깔은 푸른색이었다. 정리 중이었는지 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다. 내가 선 위치에선 그가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은 읽을 수 없었다.
『갑자기 창문이 덜컹덜컹 흔들려 놀랐소이다. 유령인줄 알았잖소.』
『목요일이 아니라뇨?』
『이 부근에선 저승대부 유령이 간혹 나온단 말이오.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들 일 있소?!』
동문서답을 한 그는 - 라기 보다는 자기 할 말만 주억거린 말단 관리는 손가락으로 내가 반드시 봐야만 했던 안내판을 가리켰다.

- 목요일에만 개관

아마 나는 매우 놀란 얼굴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입을 일그러뜨렸을 수도 있다.
『저승대부 유령이라뇨? 그게 뭡니까?』
『여기 중부고는 목요일에만 문이 열린다오. 보아하니 잘 몰랐던 모양이군.』
서로의 대화가 계속에서 어긋났다. 나는 급히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잘 몰라서 다시 여쭙습니다. 오로지 목요일만 문을 연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이곳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중부고가 아니옵니까. 도서관을 일주일에 단 하루만 문을 여는 법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답니까. 혹시 착오 아닌가요?』
혹시나 싶어 숙희가 만들어준 나무패를 꺼내어 그가 볼 수 있도록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내 이름이 적힌 나무패의 효력은 그야말로 형편없어서 사내는 그걸 본체만체 하였다.
『어린 자가 이상한 소리를 쌈 싸먹네. 옛날부터 그리하였는데 거 무슨 소리요. 어쨌든 오늘은 화요일이니 이틀 뒤에 다시 오시오.』
『예전부터 그랬다고요? 진짜 그렇다는 말입니까.』
『최소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소.』
『말도 안 돼!』
날카롭게 외치자 사내는 다소 불쾌한 얼굴을 했다.
『이보시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 다는 거요?』
『그런 의미는 아니고...』
『이래서 변방인들은 안 된다니까... 쯧.』
기가 막혀하는 날 내버려두고 사내는 부운 눈을 비비며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움직임이 기괴할 정도로 느려 나는 그가 이곳에 가끔 나온다는「저승대부 유령」본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쨌든 헛걸음을 한 탓에 나는 화가 좀 난 상태였다. 애기동백을 따라 걸으며 애꿎은 숙희를 욕했다.
『진작에 가르쳐줬으면 좋았잖아!』
하지만 아까 봤던 말단관리 남자는 이렇게 말을 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래왔다고.
남자의 나이는 못해도 서른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다면 일주일에 딱 하루만 문을 여는 일이 당연하다 여겼을 터, 일부러 설명을 하고 자시고의 까닭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정상이냐고.』
것도 그렇고 저승대부는 또 뭐란 말인가. 이름부터 촌스럽다.
『공부에 진력난 자가 밤늦게 높은 장소에서 투신이라도 했나... 뭐, 쓸모없는 상상이겠지만.』
터벅터벅 걸어 이번에는 지름길이 아닌 도보를 따라 올라갔다.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명각루 주위를 지루하게 돌아 예의 샛길이 있는 현선당 부근으로 이르렀을 적엔 나는 비참하다 못해 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아이고, 저놈들은 일부러 수업에도 안 들어갔나.」
연회당에서 가래를 뱉은 건정과를 나에게 먹이려 들었던 소년이었다. 그 건정과를 입에다 넣었다 도로 뿜었으니 뒤집어쓴 입장에선 원한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댓가를 치루게 해주겠다 소리를 질러댔던게 으름장은 아니어서 오늘은 자기 친구들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내 행방을 찾아 주변을 계속 수소문하며 돌아다닌 눈치였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이런 좋은 날씨에 겨드랑이가 땀에 젖어 있었으니까.

『여어, 가난뱅이!』
언제부터 내 이름이 가난뱅이가 되었단 말인가.
『오전 무렵부터 어디를 그렇게 부지런히 다녀오는가. 구걸이라도 하러 갔다 왔는가.』
창의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재미도 없는 농담이었다.
나는 대꾸할 생각도 들지 않아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걸 무리들은 자기들 좋게 해석을 내려 내가 지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라고 착각했다.

『어때. 소득은 좀 있었어? 꽤나 멀리 다녀 온 모양인데.』
『그러지 말고 한 푼만 줍쇼, 우리에게도 빌어보지 그래.』
『잠깐 기다려봐. 그건 아니지! 송주 너는 저 녀석이 진짜로 한 푼 달라고 하면 기꺼이 돈을 줄 거야? 그건 곤란하다고?』
『하긴, 대놓고 거지 취급이었나.』
『그래.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이놈들은 서로 사이좋게 북도 치고 장구도 쳤다.
『자고로 공짜로 구걸하여 빌어먹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개나 돼지도 아닌데.』
『과연... 네 말이 맞다.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으려나?』
『마굿간을 청소시켜.』
『오오, 그거 괜찮은 생각이다, 송주. 그거야말로 적격이지.』
송주를 비롯해 소년들은 저마다 흐믓한 표정을 지으며 옳소, 옳소 소리했다.

Posted by 미야

2015/05/31 22:40 2015/05/31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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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습작입니다. 완제품이 아니라서 부분적으로 내용이 수정되고 있습니다. 카테고리는 오남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오남 - 저주하는 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


그날 새벽, 악몽을 꾸었다.
나는 다시 차가운 우물 아래로 떨어져 쉰 목소리로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다. 몸은 이미 얼음장처럼 굳었고 물에 불어 주름진 피부는 새파랗다 못해 보라색에 가까웠다. 부러진 것이 확실한 복사뼈는 냉기에 압도된 탓에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춥고 또 추워서... 형님들의 이름을 불렀고,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도와줘! 구해줘! 날 여기서 꺼내줘! 부탁합니다, 부탁할게요, 흐으윽! 살려주세요!』
내가 빠진 마을 우물은 그다지 깊지 않은 편으로 수량이 부족한 탓에 이용하려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두레박을 한 번만 올리면 될 걸 여기서는 적은 양으로 세 번씩 끌어올려야 했기에 어른들은 사용을 기피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은 공동 우물이었고, 줄을 일부러 서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기 때문에 나처럼 힘이 약한 아이에겐 요긴한 장소였다. 이를 고쳐 말하면 인적이 아예 끊기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외치는 비명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어째서야?!』
허리까지 차오른 물을 힘겹게 참방대며 나는 울부짖었다.
『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거야?! 나는 이 안에 있어!』

그 까닭을 이해한 건 다른 육신으로 태어나고 난 뒤였다.
나는 막내였다. 위로 여덟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가 있었다. 가난했던 부모는 먹는 입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즉, 실족하여 우물에 빠졌다는 걸 알았음에도 일부러 무시했다.
그들이 나를 위해 해줬던 일은 그렇게 죽는 것도 운명이겠거니 체념하고 우물 밖에서 손을 모으고 합장한게 전부.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고 우물 뚜껑을 닫아 봉인했다.

「도와달라 말을 해본들 달라지는 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음에도 얼굴에서 멍한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일부는 여전히 그 우물 안에서 참방대고 있나 보다.

오늘도 날씨는 좋았다.
고민을 해봐도 이렇다 할 수업 일정도 없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부러진 창틀을 고쳐볼까.
가만 생각했다가 도리질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부서고를 이용하고 싶다고요.』
『예.』
『그럼 이 숙희가 안즈 님이 쓰실 출입증을 하나 만들어 드리지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서류뭉치와 씨름하고 있던 숙희는 서랍 안에서 아무 글도 안 적힌 보통의 나무패를 꺼내 굉장한 달필로 빠르게 내 이름을 손수 적어 넣었다. 옛날에 보던 것과 모양이 상이하고 출입증이라기보다는「오늘의 숙직 당번 - 지리가 안즈」를 적는 것 같아 묘하게 신경 쓰였지만 명색이 숙사감대부라는 자가 일을 허투루 할 리는 없으니 일단은 그게 출입증일 거라 믿었다.
『그럼 또 궁금한 건?』
이미 학습된 바 있어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 말했다.
『오늘 석식 반찬은 무엇입니까.』
『개구리 반찬.』
『에?』
『놀라긴. 농담이오. 그럼 잘 가시오.』
나무패를 어떻게 이용해야 된다던가, 부서고의 위치는 어디라던가, 출입 가능 시간은 어떠하다는 안내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숙희는 책상에서 눈조차 들지 않았다. 각각의 장부에 글씨를 적어나가는 붓은 신들린 듯하여 일부러 말을 걸어 그 흐름을 끊기도 민망하였다.
나는 얌전히 허리를 구부려 절을 올리는 것으로 용무를 마쳤다.

왕궁 도서관은 내가 알기로는 총 여덟이다. 물론 이건 내 기억 속의 정보이고 어쩌면 현재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아는 이야기대로라면 그 중 셋은 황실의 영역이고... 셋은 관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서 급제를 하지 않은 자가 함부로 기웃거리면 경을 친다. 하여 남는 것은 두 곳인데 가운데 중(中)자를 쓰는 중부고가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다. 나눌 분(分)자가 들어간 분고는 중부고와 이웃하여 건물이 섰는데 그 외관은 매우 작다. 이곳은 책을 진열하거나 열람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고 왕궁 도서를 총괄하여 관리하는 직원들이 상주를 하는 곳이다. 새벽에 술병을 들고 부어라 마셔라 할 정도로 보안은 널럴했으나 어디까지나 관리라서 살짝 그 만행을 눈감아주는 것이고, 일반인은 그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나는 자석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중부고가 있었던 장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현선당 앞에서는 샛길도 사용했다. 부지런히 풀을 옮겨 심었음에도 어찌나 다들 애용을 해주셨던지 흙이 드러난 부분으로 눈치껏 내려가면서 나는 큭큭 웃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변치 않는 것도 있었다. 이 샛길을 이용하지 않으면 명각루와 그 주변 연못을 따라 먼 길을 한 바퀴 빙 돌아야 한다. 나처럼 귀찮음을 느낀 이들은 기꺼이「개구멍」으로 질러갔다.
의외였다면 바지춤을 잡고 아래 돌담을 기어 내려갔을 적에 귀신이 노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했는데 도대체 이 오한을 느끼게 만드는 것의 정체는 뭐지 이러고 주변을 둘러봤을 적엔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팔뚝을 문지르며 목을 움츠렸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나쁜 감정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였다. 따라붙는 시선은 그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많은 귀신이거나 그와 비슷한 종류일 거다. 아니면 적룡신을 모시는, 인간 아닌 부류의 시종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쪽의 기분이 나빠지기 전 허겁지겁 풀밭에서 빠져나갔다.
「아이고, 무서워라. 다음엔 아무리 귀찮아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하겠군.」
다시 길 위로 돌아와 먼지를 털며 그렇게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버릇처럼 지름길을 이용한 건 그다지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안즈는 처음 와보는 곳이잖아.」
익숙해도 그 익숙한 티를 내는 건 좋지 않다.
그래도...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에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종류는 뭐라도 상관없었다. 오래되어 낡은 이야기책이 취향이지만 지루한 연보감이라고 해도 기꺼이 읽어줄 작정이었다.
「그게 아니지.」
이쯤해서 가만히 턱을 문질렀다. 그게 아니라 중부고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연보감을 찾는게 좋을 듯했다. 연보감이라는 건 1년 동안의 일어난 일이나 사업을 보고하는 정기 간행물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이 세상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다.
「옳거니. 바로 그거야.」
그러자 엉덩이에 날개라도 돋아난 기분이 되었다.
스스로의 얕은 지혜에 감탄하며 신이 잔뜩 나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5/30 10:18 2015/05/3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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