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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로 돌아오자마자 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자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 나는 창피함도 잊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술에 취한 듯 금방 현기증이 일었어도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은 자유를 만끽했다.
머리를 씻기 위해 찬물을 뒤집어썼을 적엔 격한 욕지기가 터져 나왔지만... 굴하지 않고 두피를 문질러 닦았다. 더운물이 가득 찬 욕조 생각이 간절했어도 숙사감대부의 엄중한 명령으로 식사를 가져온 하수에게 개인적인 목욕물까지 부탁하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가뜩이나 싫은 표정이었는데 거기다 눈치도 없게 목욕물 이야기를 꺼냈다간 실수를 가장하고 들고 있던 쟁반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을 거다. 이럴 적엔 눈치껏 구는게 좋다. 다행히 지금은 한 겨울도 아니고 해서 나는 미리 나무통에 우물물을 길어두었다.
『차가워!』
괜찮다. 사람은 찬물로 머리를 감는 것 정도로는 죽지 않...... 장담은 못 하겠다.

몸이 둘로 쪼개지는 감각을 참아가며 이를 악물고 물을 한 바가지 더 부었다. 괜한 호기였다. 네 번째 물바가지를 붓자 신체가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제야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간수들이 죄수의 몸에 얼음장 같은 물을 끼얹는 건 순전히 고문을 하기 위해서라는 걸 떠올렸다.
『어우,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동안 나는 제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여러 번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얻어맞은 피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화기와 방금 전의 냉기가 격렬하게 부딪쳐 일종의 병목 현상을 일으키는 듯했다. 우박 섞인 폭풍우가 살가죽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며 뼈와 근육의 틈새를 망가뜨리며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녔다. 억지로 허리를 펴고 일어나 속의를 걸치려고 하자 살이 조각나는 통증이 등가죽을 타고 발뒤축까지 흘러내렸다. 끈 매듭을 묶으려는 손은 계속 떨렸다.

그 상태에서 침상에 가 눕는 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어떻게 무릎 하나를 올리긴 했지만 몸을 완전히 침상으로 이동시키고 바닥으로부터 발을 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곧 종아리가 당기며 쥐가 나려 했다. 나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두 다리를 뻗고 눕자 이번에는 꼬리뼈가 찌르르 아파왔다.

『거울을 보고 싶구나.』
똑바로 누운 자세에서 팔을 위로 뻗어보았다. 바짝 야윈 아이의 손은 어쩐지 낯설어 내 맘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주먹을 폈다 접었다하며 작은 손톱의 모양새와 손바닥의 주름을 잘 기억해뒀다. 그래도 피곤함에 눈을 감자 어린아이의 손은 어느새 핏줄이 돋아난 성인 남자의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먹물이 묻었고, 필기구를 하도 오래 쥐어 엄지와 중지에 굳은살이 배었다. 관절은 툭툭 튀어나왔고 손끝은 뭉툭했다... 아니다, 이것은 안즈의 손이 아니다. 힘겹게 다시 눈을 뜨자 세로줄 모양의 상처가 생긴 고사리 손이 보였다.
『맙소사. 이러다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먹겠어.』
쓰게 웃으며 뺨을 만져봤다. 열이 올라오는지 피부가 뜨거웠는데 신기하게도 목 아래쪽은 서늘하고 차가워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다시 더듬어 올라와 이마를 만지자 이쪽은 이미 열탕지옥, 자고 일어나면 연못에서 주워온 나무토막 신세가 될 거라는 숙사감대부의 말은 반드시 실현될 예언이었나 보다.

저녁식사로 나온 닭죽과 호박나물, 우엉조림과 바지락 튀심도 식욕을 잃어 반 이상을 남긴 상태.
그대로 까무룩 기절하려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숙희가 말똥을 양손에 들고 나타나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휩쓸리지 말라고 내 경고했소.」
어째서인지 나는 커다란 용으로 변해 빛도 없는 흑암의 공중을 날고 있었다.
그곳은 풍압이 엄청나 날개를 똑바로 펼 수도 없었다.
기를 쓰고 막을 펼치자 비늘이 떨어지고 피부가 찢겨져 뼈가 밖으로 드러나려 했다.
「내 충고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더니만.」
고통에 몸부림치자 곱게 갈린 날개가 찌익 소리를 내며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우와~, 엄청난 얼굴.』
사흘 뒤 창고 문을 두드린 린청은 나를 보자마자 소매를 들어 눈가를 가렸다.
햇빛을 가리려는게 아니라 몹쓸 전염병에 걸려죽은 사람을 보았을 적에나 하는 행동이라서 나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세워두고 부정한 시체 취급을 하다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다. 문지방에 팔을 기대고 서서 죽일 기세로 쏘아보자 소년은 가만히 소매를 도로 내렸다.
『몸살이 대단했던 모양이군, 안즈. 뺨이 푹 꺼졌는데?』
『신경 꺼주세요.』
『멍은 보라색이고. 아니다, 검정색에 더 가까우려나. 한 번 만져 봐도 돼?』
『거절하겠습니다. 것보다 송주, 넌 거기서 뭐 하냐?』
놀랍게도 린청의 등 뒤로 떨떠름한 낯빛을 한 송주가 보였다. 우리와 일행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소년은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서서 회색의 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봤자 싫든 좋든 이미 굴비 두름이었다. 콧망울을 긁는다고 한 벌이 된 걸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은 우리 세 사람이 나란히 벌을 받기로 한 날이다.

『어디 열쇠야?』
두 사람은 수업에도 참석을 못 하고 대신 숙희로부터 열쇠 하나를 받아왔다. 먼지를 치우고 걸레질을 하기로 되어있는 장소의 열쇠다.
겉옷을 주워 입으며 곁눈질로 보니 척 보기에도 크기가 매우 크고 낡아빠진 열쇠다. 그리고 제법 묵직했다. 일반적으로 열쇠의 쇠막대기에서 튀어나온 부분은 요라고 하고 깎여서 들어간 부분을 음이라고 한다. 이건 요가 셋이고 음이 다섯이나 된다. 그리고 요의 생김새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와 ㄱ자형이다. 이 정도면 복제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혹시라도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뜨리기라도 하는 날엔 강바닥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며 가뭄을 정성으로 기원해야 할 것이다.
『그 정도로 특이한 건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버릇인지 콧망울을 만지며 송주가 말했다.
『그야 넌 열쇠 종류를 잘 모르잖아.』
『그러는 넌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자신하는 거냐, 변방인!』
『네놈과 마찬가지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우리 집 대문 열쇠와 비슷하게 생겼어. 그런데 숙희 님은 이게 어디 열쇠라고 하였지?』
『어. 그게... 내게 말하길, 귀신 나오는 보물창고의 열쇠라고 농담하던데.』

우리 셋은 나란히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앞서 당해본지라 숙희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일단 확신이 없다.
제일 먼저 귀신이 나온다는 말이 신경 쓰인다. 진짜일까. 뭐, 한 걸음 양보하여 그깟 귀신, 복숭아 가지를 흔들어 내쫓는다고 치자. 그런데 진짜로 보물창고라면...
『걸레질하다 실수로 골동품 화병을 깨뜨리기라도 하는 날엔.』
침 삼키는 꿀꺽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송주가 느끼는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는 괴담도 있다. 어린애 울음을 그치게 하는 종류의 옛날 얘기인데 줄거리는 이러하다. 보물창고를 청소하던 몸종이 털이개를 신경질적으로 휘두르다 그만 선반 꼭대기에 올라간 화려하게 조각된 상자를 잘못 건드렸다. 바닥을 구른 상자는 걸쇠가 풀려 뚜껑이 열리고 말았는데 동그랗고 작은 것이 그 속에서 떨어져 나왔다. 몸종은 그게 귀한 바다진주일 거라 생각하고 얼른 집어 올렸다. 그런데... 가만 보니 색도 흐리고 광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무리 봐도 진주가 아니었다.
그걸 이리저리 굴리며 그 정체를 궁금해 하고 있노라니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내 눈알이야. 그만하고 돌려줘.」
우리 세 명은 다시 팔짱을 낀 자세로 침묵했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몸종의 두 눈이 모두 뽑혀 사라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 괴담이 주는 교훈은 뭐냐, 안즈.』
『먼지털이개를 사용할 적엔 신중하게.』
『그게 아니라 땅에 떨어진 건 함부로 줍지 말라는 거 아니야?』
나와 린청이 한가롭게 영양가 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자 송주가 모두를 대표하여 자기 바지주머니 속에 열쇠를 넣었다.
『속 터져 죽겠네. 지금 한가롭게 잡담이나 떠들고 있을 때냐?! 이 무식한 변방인들아!』
물론 그건 아니다. 하여 나는 얼른 빗자루와 걸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Posted by 미야

2015/06/11 19:41 2015/06/11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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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12 01:00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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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전해오는 말에 붓은 칼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도끼를 든 사형집행인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던 나도 붓을 휘두르는 자 앞에선 오금이 저려왔다. 분명 붓이 더 무섭다. 이게 왜 무섭냐 하면...
『이 싸가지 없는 것들이!』
기억해두자. 숙희는 흥분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욕설을 한다.
『자, 여기에 서명하라고, 서명해! 우리가 반드시 책임지갔슴다, 이러고 서명하라고! 내가 과로로 쓰러지면 내 마누라와 아이들 부양은 온전히 너희들의 몫이다. 싫다고 하기만 해봐, 불알을 까버린다.』
『차라리 일주일치 반성문을 쓰라고 하세요!』
『송주 님? 제가 방금 전 뭐라고 경고를 드렸지요?』
『부, 불알을 까버린다고...』
『야, 이 자식아! 내가 깐다고 하면 진짜로 까는 거야! 못 할 것 같어?!』
그러면서 붓과 종이를 코앞에서 펄럭거리고 있으니 소름이 돋다 못해 온몸에 난 땀구멍이 전부 막힐 지경이었다. 마른침을 꼴딱꼴딱 삼켜가며 지긋이 올려다보니 검은 안개처럼 생긴 것이 남자의 몸을 위아래로 두껍게 휘감고 있었다. 가끔씩 푸른빛의 번개도 번쩍였는데 아무리 봐도 그간 먹은 것이 부실한 탓에 허깨비가 보이는 것 같진 않았다. 두건 속의 감추어진 그의 머리카락도 아마 벼락을 맞은 감나무처럼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하자 체온이 내려갔다.

이런 흉악한 것에 대항하여 이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린청의 옆구리를 툭툭 치고 숙희가 내민 종이에 지리가 안즈라고 조그맣게 이름을 적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린청 또한 나를 따라서 자기 이름을 그 옆으로 나란히 적었다.
이 와중에도 송주는 꾀를 낸답시고 몰래 점을 하나 더 찍어 제 이름이 아니라「송쥬」라고 썼는데 지금까지 글자 밭에서만 놀고 살았던 숙사감대부가 그 사소한 걸 놓칠 리 없었다.
『눈 가리고 야옹거리면 내가 모를 줄 알아?!』
벽돌 두께의 사전을 번쩍 들더니 도끼살인마 저리가라 식으로 그걸로 불알을 찍어버...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암튼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바닥을 벌벌 기던 송주는 먼저 적은 이름에 가위표를 그린 뒤에 적당한 여백에 다시 글자를 적었다. 붓이 와들와들 흔들린 탓에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이번만큼은 숙희의 얼굴로 그럭저럭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도 남의 영혼을 절인 고등어 한 마리 가격에 강탈한 악마의 미소 그 자체였다.

『맙소사. 이제 내 나이 열 한 살인데... 여차하면 부양을 해야 할 사람이 생겼어.』
『그러니까 날 과로사의 위기로 몰아넣지 말란 말입니다, 린청 님. 처지가 비슷한 변방인이라고 자꾸 안즈 님 편을 들어주시는 눈치인데... 내 편도 들어달라고요. 보십시오, 제 눈자위가 시커멓게 색이 죽은 것을.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이런 소동을 겪은 건 결코 흔치 않았소. 제발 부탁이니 다른 분들처럼 얌전히 지내시란 말입니다. 골칫덩이 짓은 하지 말라고요.』
순간 항의가 빗발쳤다. 사람이 코앞에서 목이 졸리고 있는데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건 비정상 - 말똥이 머리에 비벼졌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 왜 얌전히 있는 놈에게 마굿간 청소를 시켜서 일을 이 지경으로 - 엄한 손가락은 왜 부러뜨리고 지랄 - 귀가 따가워진 숙희는 재빨리 가느다란 실을 가로로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동작을 해보이며 모두 입 다물고 정숙할 것을 요구했다.
『여러분. 내가 쓰러지면... 부양비가 청구됩니다. 거짓말 같죠? 시험 해봐요.』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다. 우리 세 명은 끽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특히 수중에 돈 한 푼 없어 빈털털이인 내 입장은 더욱 난감했다.
『또 소동을 피우면 이 숙희, 자리를 보존한 채 드러눕겠습니다. 제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제 가족들에 대한 부양비 청구는 그렇다 치고.』
뒤로 붙을 내용이 또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니 숙희가 다시금 악마의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들은 사흘 간 각자의 방에서 자숙하십시오.』
나는 대놓고 발끈했다.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요? 내일은 중부고가 일주일에 딱 한 번 열리는 날인데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어차피 그런 몸으로 독서는 불가능하오, 안즈 님. 부어서 눈도 잘 뜨지 못하면서 얼어 죽을. 그리고 내 장담하는데 오늘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이게 과연 내 몸뚱인지 아니면 연못에서 주워온 나무토막인지 구분도 안 갈걸. 돌아눕고자 했는데 호흡이 곤란, 사람 살려 외치지만 마시구려. 그러니 사흘간 침상에 누워 잘 쉬고 - 이후로 몸이 괜찮아지면 벌칙으로 노동을 좀. 요~만큼만.』
『노동?! 설마, 마굿간을 또 청소하라는?!』
『말똥은 이제 질렸소. 대신 다른 곳에 보내어 걸레질을 시킬 거요. 세 사람 전부!』

세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걸레질을 시키겠다는 엄포에 송주가 격렬하게 반항했다.
『나는 엄연히 피해자인데 왜 나까지 걸레질을?!』
그래봤자 씨알도 안 먹혔다.
『헐... 대륙어 공동 사전보다 더 커다란 걸로 확 까버려?』
소중한 곳이 맛보았던 지옥의 고통을 기억한 소년은 다소곳이 몸을 웅크렸다.
『알겠소? 지금부터 자숙이오. 이제부터 한 마디라도 더 뻐끔하면 쓴 맛을 보여주지. 각자 방으로 돌아가시오.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오는 것도 금지하겠소.』
린청이 서둘러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대륙어 공동 사전의 크기를 가늠하자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대신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뭔가를 눈빛으로 열심히 호소했다. 그러나 나는 점쟁이가 아니라서 린청이 하고 싶어 한 말이 무엇인지 알 재주가 없었다.
「네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어.」
입모양으로 뻐끔거리자 숙희가 보란 듯이 사전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우리들은 나란히 발잔등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쨌든 우리의 이름이 적힌「영혼 매매 증서」는 돌돌 말려 소매춤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숙희는 예의 피곤에 찌들고, 업무에 차이고, 수면시간이 부족한 관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젠장, 글피까지 재고 파악도 해야 하는데.』
그가 늘 파김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개인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이 한계치보다 늘 많아서임을 오늘에 이르러 확신했다. 지금 보니 탁상 위에 놓은 종이뭉치가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예부나 호부, 내이정부의 고급관리 - 예를 들어 예부의상서도 저 정도의 살인적인 서류작업은 하지 않을 터인데... 그들은 일개 숙사감대부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키고 있었다.

『안즈 님.』
간단히 목례하고 돌아 나오는데 숙희가 조용히 나만 불러 세웠다.
『예.』
『그분에게 휘둘리면 안 됩니다.』
『예?』
『안즈 님은 똑똑하신 분이니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하실 겁니다.』
이쪽에서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자 재차 못을 박았다.
『그분에게 휘둘리면 명이 획기적으로 짧아집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실이에요.』
숙사감대부가 말한「그분」이라는 건 분명 자손을 가리키는 것일 터, 나는 멍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작금의 말똥 소동은 그가 부추겨서 커졌다기보다 나 혼자 제멋대로 난리를 친 면이 없잖아 있고, 잘잘못을 따지면 죽을 죄인은 나 하나다. 숙희는 내가 그에게 심리적인 조종을 받아 그리하였다 여기는 듯했는데 사실 자손의 잘못은「제일 좋은 위치에서」호기롭게 싸움 구경을 하려 했다는 것 정도라서 숙희의 지적은 엉뚱한 면이 없지 않았다.
나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휘둘린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마구 부림을 당하거나 지배를 당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사감대부의 눈빛은 근심 걱정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상대가 황족이라고 호기심을 가지면 그 결과는 재앙입니다. 이사실의 황족과 변방인이라는 신분의 차이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요. 저는 분명 경고 드렸습니다... 그래봤자 귀담아 듣지도 않겠지만. 뭐, 이것도 다 팔자소관이려나.』
그러고서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데 어딘가 나사가 풀렸던지 끼익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Posted by 미야

2015/06/10 11:41 2015/06/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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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런 몰골로! 당장 꺼지지 못하겠... 허억!』
거짓말 같은 아까의 재탕이었다.
미친놈이 난입한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다가 주룩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손을 짚었다.
더러운 걸 들고 있는 나 보다는 곰방대를 입에 문 남자가 훨씬 충격적이었던지 자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곧장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처, 천세. 천처... 천천, 세!』
『꺼져.』
까무라칠 것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끝까지 예를 올리려는 걸 무 자르듯 하는 것도 똑같았다.
공포에 질려 휘둥글 벌어진 그들의 눈을 보고 있자니 이 남자를 여기까지 끌고 온 내가 죄인이었다. 알이 들어있는 제비 둥지에 살모사를 집어넣었다는 그런 죄책감이 든다. 제비들은 어찌할 바 몰라 큰 소리로 울며 둥지 주변을 빙빙 돌았다. 하지만 둘로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을 멀리 내쫓기엔 역부족이다. 부리로 쪼아보겠다며 가까이 접근했다가도 의기양양한 포식자의 냄새를 맡자마자 그대로 몸이 굳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억지로 날개를 움직여 보지만 깃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교당의 문을 슬그머니 열자 낭랑한 목소리로 교과서를 낭독하던 교수사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웬 놈이냐.』
『무례인줄 알지만 실례합니다. 사람을 찾고 있어서...』
『물러가라. 수업 중이니 지금은 안 된. 허억!』
교수사 또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동시에 두꺼운 책이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내 머리 위로 한 자 이상 올라간 부분으로 못이 박힌 상태였는데 맞은편 유리창에 비친 사람 그림자를 보니 내 뒤에 선 자가 손칼로 신나게 목을 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누가 가서 숙희 숙사감대부를 불러... 아니다. 먼저 예를 올려야. 아니다, 숙희를 서둘러 부르는게...』
공황에 빠진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공부 중이던 아이들 중 맨 뒤편에 앉아있던 소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지금의 내 관심은 어디까지나 그가 아니다.
급히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린청을 지나쳐 창가 쪽에 앉은 내 먹잇감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송주는 날 알아보고는 뒤로 몸을 젖혔다. 얼굴색도 새파랬다. 그리고 내 손 가득히 든 오물에서 감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거짓말이지? 소년이 눈으로 그리 물었다.
『여어~ 송주.』
『너. 여, 여기가 어, 어디라고!』
『네가 시킨 마굿간 청소가 방금 끝나서 말이지... 그 대가를 청구하러 왔엉.』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한 무더기의 말똥을 송주의 머리 위로 털썩 올려놓았다.

불붙은 뜨거운 화로를 머리에 올려놨어도 반응이 이렇게 화끈하진 않았을 것이다.
『믿허ㅐㄹ;미ㅓㄴㅀ고[ㄹ;효흐ㅏ~!!!』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털어냈는데 덕분에 좌우로 앉은 아이들이 죄도 없이 배설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이제 인간 아닌 것의 소리를 내며 오물 묻은 머리와 어깨를 터는 자는 다섯으로 늘어났다. 그제야 잔뜩 올랐던 머리의 열이 식는 느낌이었다. 비명이 터졌고, 누군가 의자를 박차고 달아났다. 동시에 송주는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잡았다.
『얼쑤, 잘한다.』
응원하는 이 목소리는 아마도 환청일 것이다. 이사실의 황족이라는 자가 어린애들 드잡이에 끼어들어「힘내라, 거기에 주먹을 날려~」훈수하고 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훈수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이미 나는 송주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고 내가 묻힌 말똥 탓에 손가락이 자꾸만 미끌어져 곤란을 겪는 중이었다. 몇 가닥은 생으로 뽑았으나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죽을 통째로 벗겨버리겠다는 투로 손톱을 세웠고 덕분에 멱살을 잡은 팔이 느슨해졌다.
『누가 빨리 가서 숙사감대부를 데려오너라, 빨리~!! 으아아아, 숙희를 데려와~!!』
이제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려 하면서 사이좋게 바닥을 뒹굴었다. 똥이 묻은 손바닥이 내 코와 입주변을 마구 밀어댔고 덕분에 찝찔짭쪼름한 맛이 입안에 가득 번졌다. 뱉어낼 짬이 없는지라 일단 삼켰다. 까짓 것, 말똥이잖아?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아니, 어느새 손이 미끄러져 잡은 건 소년의 귀였다. 그려? 그러면 귀라도 잡아 뜯자. 이리 오너라, 귀야.
귀를 잡힌 송주는 비명을 지르다 말고 팔을 크게 휘둘러 반격했는데 그것이 나에겐 악운이었다. 팔꿈치로 턱을 얻어맞자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숙희는 아직이더냐!!』
바닥에 두 팔을 벌리고 벌렁 드러눕자 송주가 재빠르게 내 몸통을 올라탔다. 그리고 체중을 실어 목을 힘껏 조르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나를 죽이기 위함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히는 건 물론이거니와 혀와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손톱을 세워 그의 팔뚝을 피가 나도록 긁었지만 이미 보이는게 없어진 상황이라서 송주는 오로지 내 목을 조르는 일에만 집중하였다.

『사람을 죽일 작정이냐! 이봐.』
린청이 달려와 송주의 몸을 세게 밀쳤다. 하지만 흥분한 송주는 괴력으로 버티며 여전히 내 목을 움켜쥔 채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나는 이미 정신이 아득해진 상태였다. 어디서 졸졸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죽으면 건넌다던 저승천의 물소리인가 보다.
『이러다 진짜 죽어!』
이렇게 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송주의 손가락뼈를 부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린청은 내 목 한가운데 박혀 있는 소년의 엄지손가락을 잡더니 자비심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은 단호한 태도로 바깥 방향으로 꺾어버렸다. 손가락이 손등까지 완전히 뒤로 젖혀지자 송주는 고통에 못 이겨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댔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는 사람이 지르는 비명보다 뼈가 망가지는 우둑 소리가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다시 열린 숨구멍으로 공기가 들어오는 걸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저놈이 내 손가락을 부러뜨렸어! 저 빌어먹을 변방인이 내 손가락을 부러뜨렸다고!』
우리들 중 누가 악인이고 누가 귀신인지를 구분하는 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나라는 인간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한참을 콜록대었고, 송주는 두 눈이 심하게 충혈 되었다. 그리고 린청은 송주에게 머리카락이라도 잡혔던지 어느새 풀어헤친 머리가 되어 봉두난발 상태였다.

잔뜩 찡그린 린청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자 손을 위로 올리자 그게 신호가 되었다.
『용서못해!』
이성을 잃은 송주가 개구리처럼 뛰어올라 린청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런데 그건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무가의 사람은 훈련으로 살기에 반응하는 방식을 몸에 익히게 되는데 나중에는 수저로 국을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동작이 자연스럽게 몸에 붙게 된다. 죽이겠다고 상대방이 덤벼들면 방어를 결심하기도 전에 찌르기가 나가버리는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머리를 묶던 손이 앞으로 뻗어나갔고, 내가 보기엔 주먹에 별도의 뇌가 하나 더 달려서 자기 멋대로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
『아.』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날린 린청이 한심한 소리를 냈다.
『......』
그러나 코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벌렁 나가떨어진 송주는 잠잠했다.
무릎으로 기어가 가만 들여다보니 눈에 검은자위도 안 보인다. 시험 삼아 손을 흔들었지만 반응 무.
나는 다소곳이 앉아 신실한 마음으로 합장을 했다.
『안 죽었어!』
평정심을 잃은 린청이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기에. 나는 눈치껏 쪼그라들었다.

Posted by 미야

2015/06/08 16:44 2015/06/0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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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08 19:35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15/06/09 11:25 # M/D Permalink

      감상 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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