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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僻銀)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 유희 산맥 구석진 곳으로 은이 나왔는데, 그 토산품이 금이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가끔 해보았다.
귀금속이라고는 해도 가치가 떨어진다. 세공을 하면 그럭저럭 값을 올려 받을 수는 있지만 수요는 그리 크지 않다. 통화 화폐로 만들자니 대량유통 시 물가가 엉망이 되고, 게다가 해마다 산출량도 줄어 왕실과 신료들은 근심이 한 가득이었다. 그런 마당에 교역의 불균형을 두고 잦은 다툼이 벌어졌다. 무역 상인들의 농간으로 은은 곱게 가루로 빻아져 지나치게 싼 가격으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도 부자가 되는 건 타국의 상인들이라 백성들은 불만이 많았고, 편입된 외지인들은 은의 가격을 덜 치기 위해 저마다 딴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품고 있었다. 바람 잘 날이 없어 자고 일어나면 은괴를 빼돌린 관료가 감옥에 갇히거나, 상회의 주인이 거래 장부를 찢고 야반도주하는 식의 사건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사람들은 피해망상에 빠져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만 믿지 않은게 아니다.
오백년 간 신으로 모시던 용신 명라각희의 은총마저 믿지 않기에 이르렀다.
빠르게 신앙심은 붕괴되어「세수 부족에 따른 자금난」을 이유로 벽은국의 국왕은 용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마저 넌지시 그만둬버렸다.

「하는 일도 없는 빈둥신 용따위 알게 뭡니까. 지난 200년간 용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덕분에 꼬인 일을 나서서 푸는 건 전부 우리들 몫이잖아요. 광산에서 낙반사고가 벌어지면 명라각희가 짠, 하고 나타나 토사를 치워주던가요. 쓸데없이 돈이나 발라먹는 명라각희의 사당은 전부 없애버려야 해요.」
가명은 입버릇처럼 그 말을 달고 살았다.
부유한 상인 출신인 그는 다소 냉소적인 성격이었는데 어디서 명라각희 용신 이름만 들렸다 싶으면 만사 제치고 달려와 깎아내리는 말을 신랄하게 퍼붓곤 했다.
「저처럼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사람은 다리를 보다 튼튼하게 건설할 궁리를 하면 했지 사나운 폭풍우가 빨리 진정되도록 신룡에게 빌거나 하지 않는 법이라서요. 돈이 아깝단 말입니다.」
결국 쪼들려가며 은광 하나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미래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이미 한참 전에 그 방향이 정해져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해는 여름이 짧았다. 매미 우는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아 어쩐지 나쁜 일의 징조처럼 느껴졌다.
「없애버려야 한다니까요. 시오재 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죠?」
「틀려, 가명 군. 나는 명라각희 사당을 전부 헐어 없애자는 쪽이 아니야.」
읽던 책을 무릎 아래로 내려놓은 나는 그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설마, 그럼 스승님은 사당을 없애면 국토 수호신이 진노해 재해가 일어난다고 믿는 쪽인가요?」
나는 정색했다.
「그건 아니지. 사당을 없앤다고 재해가 일어난다는 근거는 없어. 자네는 흥악 상선과 연줄이 있을테니 동대륙에서 일어난 재해에 대해 들은 내용이 있는 것 같군. 허나 그건 사건이 잘못 전해진 걸세. 아리구스 이스타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은 그들이 용신을 배격한 탓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고 비교적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용이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격발된 자연재해라고 하는 것이 맞아. 비유하자면 이런 걸세. 여기에 똑바로 작동하는 평형추가 하나 있네. 수평을 맞추기 위해 양쪽에 무거운 물이 든 양동이가 달려 있어. 그런데 어느 날 한쪽에 든 양동이의 물을 전부 빼버린 거야. 그러면 평형추는 어떻게 되지? 요동치다 격렬하게 뒤집히겠지. 그거와 비슷해.」
아리구스 이스타는 현재 항구 도시다. 그들의 왕이 죽자 국토의 절대 다수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나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어쨌든 지도의 모습이 현저하게 바뀌어 예전에는 갈색으로 묘사되던 부분을 지금은 파랗게 칠해야 한다.

그는 깜짝 놀라 외쳤다.
「용도 죽습니까?」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무슨 엉뚱한 질문인가. 그들도 생명체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가까스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럼 평형추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명라각희 사당을 앞으로도 계속 내버려둬야 한다는 건가요.」
「아닐세. 사당이야 인간이 용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세운 것이니 없애버려도 무관하지. 허나 명라각희 자체는 우리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세. 용은 그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힘이야. 우리가 이 땅에서 용을 내쫓고 말고 자시고를 논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걸세. 그건 우리 앞에 태산이 있는데 햇빛을 가리는게 싫으니 없애버리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자네는 산을 들어 옮길 수 있는가?」
가명은 뒷통수를 긁었다.
「허어, 기도도 안 하는 양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러니까 착각이라는 걸세. 단지 내가 충성을 맹세한 신이 명라각희가 아니라서 그녀에게 기도를 하지 않는 것뿐이야. 그 탓에 신룡의 은총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버렸지만 나처럼 용신의 은총을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도 없을 걸세,」
「그래요? 그렇담 시오재 님이 섬기는 용신은 누구인데요.」
「비밀이야.」
「설마, 적룡?」
「전혀 아닌데. 하지만 그렇게 소문이 났나?」
「시오재 님은 이사실의 황제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니까요. 1년에 한 번씩 그 먼 길을 돌아 이사실의 수도 루은을 방문하기도 하고.」
「부서고서리의 입장으로 필요한 책을 사오는 것뿐이다.」
「황공하옵게도 거기 황제가 스승님께 추파를 던진다는 말도 있고.」
「맙소사... 20년 우정에 금 가는 소리 들린다. 둘이서 비역질을 한다며 수군거리진 않던?」
나는 재밌어 했는데 가명은 심각했다. 그는 자기 옆구리로 양팔을 대고 이렇게 말했다.
「한가롭게 웃을 일이 아니에요, 스승님. 실제로 이사실의 황제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잖아요.」

연애편지.
벼락같이 화를 내던 글인데 그게 왜 연애편지.
나는 허허 웃어댔다.
「요즘 젊은 것들은 애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죽여 버린다, 이런 살벌한 표현을 적는단 말이냐? 너는 그러하냐?」
「물론 저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만.」
어쩐지 그는 회피해버렸다.
「그나저나 스승님. 이사실에서 온 병사가 자살하겠다며 대들보에 목을 매려고 하던데요. 슬슬 그가 가지고 귀국할 답장 편지를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여기서 내 기억은 갑작스럽게 뚝 하고 끊겼다.

멍한 눈을 힘들게 올려 뜨자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작은 얼굴이 보였다.
『이게 누구야. 린청이잖아... 왜. 무슨 일 있어?』
어리둥절하여 묻자 소년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안즈. 너, 의식을 잃었었어.』
그런 거 모르겠고 어쩐지 졸립다. 온몸이 나른하여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머리가 울리고 쿡쿡 쑤신다.
그나저나... 가명 이 녀석은 나와 말하다 말고 어디로 갔노.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뿐인데 주변의 모습이 다시 바뀌었다.

사람 키 높이의 격자 창문 너머로 군대가 진열해있다. 온통 붉은 깃발, 그리고 붉은 갑주...
「대역죄인 시오재는 어서 나와 오라를 받으라!」
애나 어른이나 가릴 것 없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전형적인 반역자의 최후였다.

Posted by 미야

2015/06/21 19:54 2015/06/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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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22 06:16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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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침착함을 잃으면 평소에 안 하던 바보짓도 곧잘 저지른다.
『문이 열리지 않아! 이놈의 망할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이곳의 출입문은 안에서 잡아당겨야 한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린 송주는 실성한 채 울부짖었다.
『이건 분명 저주야~!! 살려줘~!!』
린청 또한 그 옆에서 눈이 뒤집힌 채 들입다 문짝을 걷어찼다.
그래봤자 두꺼운 나무문은 활처럼 휘어지지도 않았고, 경첩을 튕겨내지도 않았다. 겅중 뛰며 다리의 아픔을 호소해봤자 깃털로 코끼리 피부에 구멍 뚫기다. 정교한 방식의 열쇠까지 달아놓았는데 어린애 발길질 정도로 구멍이 나게끔 싸구려 합판으로 문짝을 달았을까. 기본적으로 왕궁의 건물 출입문은 2문(60미터) 거리에서 궁수가 화살을 쏘았을 적에 그 촉이 뚫지 못하는 걸 최소 규격으로 삼는다. 무게와 실용성을 고려하다보니 규격에 한참 미치지 못해 문짝의 두께가 얇아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그런 경우 단단한 물푸레나무 소재를 사용하여 약탈자를 방어하고 있다. 더하여 창이나 도끼 같은 물리적 공격을 고려하여 놋으로 만든 장식을 덧댄다.
그러니 발로 걷어차서 열겠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노력한들 가엾게도 발목뼈에 금만 갈 뿐이다.

만류하며 뜯어말리자 린청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어쩌라고. 여기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도 그럴 것이 불에 그슬리고 머리가 박살난 남자는 계단을 타고 느린 속도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올려다보니 전체 윤곽은 어둠에 잠긴 상태이고 단화를 신은 발 정도는 그럭저럭 또렷하게 보였다.
마지못해 걷는다며 그것이 계단 하나를 어렵게 내려왔다. 좌우로 어지럽게 흔들거리는, 불안정한 행보였다. 걸음마를 갗 배운 아기처럼 아장거리더니 한참동안 제자리를 지켰다. 이윽고 다리 하나를 들어...
『꺄아아악!』
문에 등을 대고 돌아선 송주는 산 채로 끓는 기름 속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굴었다.

『당겨.』
『뭐?』
『그 출입구는 안에서 당기는...』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송주와 린청 두 사람은 손잡이를 세게 잡아당겨 열었다.
그리고는 서로 경쟁하듯 어깨를 겹쳐가며 열린 문으로 허푸덕 탈출했다.
『닫아, 빨리 닫아! 열쇠는 어딨어!』
『소, 손이 떨려서 꽂을 수가 없어!』
『아니, 그걸 땅바닥에 떨어뜨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 병신아!』
버럭 대마왕이 화가 잔뜩 나 고성을 질러대자 송주는 더 허둥거렸다. 희한하게도 열쇠는 지느러미가 달렸다며 사람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항 속의 금붕어를 뜰채로 떠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만 힘든게 아니었다. 겨우 붙잡은 열쇠가 또다시 손바닥에서 제멋대로 튕겨 올라 탈출을 감행했다. 잡으려 하자 주룩 미끄러진다. 아니, 그놈의 쇠붙이에 언제 누가 돼지비계라도 발라두었단 말인가.
보다 못해 내가 직접 나서 떨어진 열쇠를 집어 거침없는 동작으로 구멍에 꽂은 다음, 비틀어 돌렸다.
살았다... 찰칵 쇠 물리는 소리가 나자 안도감 이전에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엎어진 김에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나는 땅과 하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바, 방금 전의 그건 도대체 뭐였어?』
마찬가지로 주저앉은 송주가 넋 나간 소리를 하자 린청은 재차 격분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잖아~!! 어이, 송주... 슬금슬금 도망가지 마시고 이리 오게. 알고 있는게 조금이라도 있음 지금 전부 털어놓는게 신상에 좋을 거야. 너, 방금 전엔 무슨 까닭으로 2층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버틴 거냐.』
『왜 엄한 사람을 의심하고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가 보겠다고 한 너희들이 이상한 거지!』
『벌건 대낮에 저런 흉악한 것이 돌아다닐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으니까 그렇지! 너처럼 미리 알았으면 나도 저 위로는 안 올라갔어!』
『나도 나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던 건 아니야! 다만...!』
송주는 겁에 질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한 방 날리겠다고 주먹을 들어 보인 린청보다 훨씬 더 두려운 존재를 염려한 소년은 대드는 목소리도 더욱 작게 하여 거의 속삭이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나올 수도 있겠다 생각한 거지.』
캐묻는 린청의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뭐가 나오는데.』
『유령대부.』
『그게 누군데.』
바짝 마른 아랫입술에 침을 바른 송주는 영험한 북어포를 무기처럼 내밀었다.
『마흔 삼주 변방인 문장박사 시오재.』

말도 안 돼. 경악하여 손바닥으로 뺨을 감쌌다.
불에 탄 흔적. 망가진 두부. 맙소사... 저 흉칙한게 바로 나였어? 내가 원념이 되었다고?!
가만 있어봐.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잖아. 이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 거야?

그 이름을 듣고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지금의 마흔 삼주 벽은은 원래 은이 채굴되던 작은 나라로 이사실의 주로 편입되기 전에는 왕이 다스리는 왜소한 변방국가 중 하나였다.
원래도 바람 잘 날이 없는 나라였는데 왕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뜨자 새로운 왕을 옹립하자는 독립파와 제국 이사실과 병합하자는 제국파 사이에 격렬한 내분이 벌어졌다. 내전까지도 불사하겠다는 불온한 분위기 속에 하루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새해가 지나 열 칠일. 벽은국 부서고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다수의 서적 소실은 물론이고 문장박사 시오재가 변사했다. 불을 놓은 건 독립파였던 은서, 가명, 민정악 이 세 사람으로 후에 방화 혐의로 재판을 받은 후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 사건을 계기로 벽은국은 끝내 나라로서의 기능을 잃고 이사실의 마흔 세번째 주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잠깐만.』
맹세코 이건 내가 아는 줄거리가 아닌데.

『넌 무식해서 모르겠구나. 교과서에 나와.』
숨을 헐떡거리는 이쪽의 상태는 눈치 채지도 못하고 송주가 말했다.
『시오재는 황제폐하와 막역지간 관계로 사적으로 총애한 인물이었거든. 독립파에서 눈엣가시처럼 여겼지.』
『총애?!』
나는 이제 거의 울먹거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응. 그래서 유골을 수습하여 일부러 이사실로 가져왔어.』
남의 나라에 적룡군을 보내 부서고를 불질러놓고, 내가 죽자 그 뼈를 수습하여 여기까지 가져왔다고?
그런 주제에 총애?!
그리고 뭐? 방화의 죄를 물어 세 명을 교수형에 처했어?! 은서, 가명, 민정악 그들은 내 제자들이었다!

어느 순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피는 싸늘하게 식었음에도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없었던 눈물은 그 온도가 매우 뜨거워 나는 얼굴이 다 타버리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슬퍼하며 오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놓아버린 과거, 돌아봐서는 안 되는 나의 전생이 아니던가.
왜 오늘에 이르러.
원망 따윈 몰랐는데.
그런 꺼림직스러운 건 나와 관계없다 여겼건만.
지금 선명하게 되살아나, 저 아래에서 껍데기를 깨부수고 용암처럼 치솟는 이 불쾌한 감각이.
마구 소리쳐, 외쳐.
증오라 이름 붙을 이 생생한 감각이. 아아...

꽉 다물린 어금니 틈새로 인간의 말이 아닌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Posted by 미야

2015/06/19 15:13 2015/06/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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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19 17:07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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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남이 등장하지 않는 오남 이야기... ※


각이 진 벽에서 천천히 솟아오른 그것은 처음엔 회색의 안개처럼 흐릿했다.
전형적인 유령 목격담과 판박이라 속으로 이게 뭐냐 했는데 그 형태가 점차 뚜렷해지는 걸 보자니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게 되었다. 안개는 점차 위아래로 당겨져 늘어났고, 간수에 닿은 두부처럼 고형화되면서, 매우 느린 속도로 사람의 형상을 취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와 몸통, 그리고 다리의 모습까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늙은 여자?』
틀렸다. 린청이 여자라고 생각한 건 두건과 흡사한 모양새의 학건이 피와 오물로 범벅이어서 감지 않아 떡진 머리처럼 보였기 때문인데 꾸밈을 중시하기에 여자는 저런 식의 귀를 덮는 학건은 착용하지 않는다. 저건 원래 수도승들이나 쓰던 종류다.
가슴까지 내려온 학건의 천은 피로 젖어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몸은 새카만 검댕으로 뒤덮였고 머리의 절반은 몽둥이로 맞았는지 송두리째 날아가고 없었다. 덕분에 눈과 코도 제자리를 잃고 뒤틀려 악몽 같은 형상이었다. 아직 사람 시체를 봤을 리 없는 린청은 그 충격적인 외모를 보고 놀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때 유령의 턱이 약간만 벌어졌다. 그리고 그 비스듬히 벌려진 입으로 농도 짙고, 점성 높은 검은 액체가 꿀렁꿀렁 흘러내렸다.
다행이라면 썩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그래도 유황의 냄새가 상상되어 코를 막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제기랄, 저것과 눈이 마주쳤어.』
겁을 집어 먹은 자신에게 린청은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허나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어쨌든 주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가 딱딱 부딪치는 건 자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차가운 땀도 콧잔등에 송송 맺혔다.
위험하다, 위험해. 나 또한 이미 엉덩이를 뒤로 잔뜩 내민 자세로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대로 계단 있는 곳까지 재빨리 튀도록 하자.
말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귀신도 성가신 노릇인데 저쪽은 완전히 코 찢어먹은 악령이다.

달각.
아, 미치겠네. 그런데 도대체 아까부터 반복하여 들리고 있는 이 해괴한 기척의 정체는 뭐란 말이냐.

거슬리는 소음만으로도 충분히 환장할 노릇인데 유령의 얼굴마저 계속해서 그 형태를 바꿔갔다. 피부가 늘어지고... 구멍이 났다. 입술이 줄줄 녹아내려 치아와 턱뼈가 드러났다. 참담하여 똑바로 쳐다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눈꺼풀도 물미역처럼 흐느적거리며 탈락되어 어느 틈에 귀 아래로 걸렸다. 그런데도 눈구멍에 자리를 잡은 눈동자는 생전 모습 그대로 맑고 투명하여 그 느낌이 상당히 기괴했다. 게다가 그 시선에는 무슨 까닭에선지 악의가 없었다. 슬프다거나, 분하다거나, 억울하다는 식의 감정이 없고 대신 자리를 잡은 것은 끝도 없는 피로감이다.

『똑바로 보지 마, 안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눈싸움이라도 하지 않으면 바로 공격당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걸.
나는 계속해서 앞을 주시하며 신중하게 네 발로 기었다.
그렇게 왼쪽 다리를 뒤로 쭈욱 물리는데 신발을 벗은 발바닥에 단단한 물체가 닿았다.
『아후힌ㄹ~~!!』
기겁하고 얼른 돌아보니 책더미다. 사방팔방 쌓아올린 책들이 그만 퇴로를 가로막은 것이다.
『에.베.부.바.러.부.너.베!』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니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바퀴벌레의 움직임을 모방하여 두 팔과 두 다리를 현란하게 버둥거려 측면으로 이동했다. 계단! 계단은 어디에 있나! 혼비백산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뛰려는데 아뿔싸, 최단거리로 가로질러 가기엔 장애물이 지나치게 많았다. 린청은 별 어려움 없이 2단, 3단 높이로 쌓아올린 궤짝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지만 나에겐 그와 유사한 발군의 운동 실력 같은 건 손톱만치도 없다. 덮쳐오는 순서대로 손으로 밀고, 몸통 박치기를 해서 찍어 넘기는게 고작, 책들이 쓰러지자 거치적거리는 건 더욱 늘어 육지에서 헤엄치기에 이르렀다.
『서둘러! 그렇게 빙 돌아오지 말고!』
나와 달리 이미 계단 앞까지 이른 린청이 재촉했지만 내가 뭐 일부러 느리게 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성과 지능을 그릇에 담아 물 말아먹은 뒤에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던 나는 여전히 양손에 신발을 쥔 채 숨을 헐떡거렸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니 오른손에만 신을 들었고 왼손은 텅 비어 있다. 칠칠맞게 그 와중에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다.
『그냥 와!』
『그럼 나중에 또 찾으러 와야 하잖아!』
『새로 사!』
『그럴 돈이 어디에 있다고!』
걸죽한 욕을 한바탕 퍼부으며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신발을 찾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무거워졌다. 동시에 상한 음식을 먹고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거 안 좋다... 못 견디고 욱욱 입덧하며 눈동자만 굴려 위를 보자 어느새 자리를 옮긴 유령이 길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거 참 재빠르십니다. 나는 딱할 정도로 허둥거렸다. 그래서 말투도 많이 괴상해졌다.
『이, 이러시면... 소인은 그저 지나가는 과객으로... 뭐랄까, 벌칙으로 청소를 좀. 결코 화생(化生)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실 터럭만큼도...』
유령이 스륵 양팔을 내밀었다. 불에 탄 손가락은 하얗게 뼈가 일부 드러났다.
닿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 질겁하며 수중에 든 외짝 신발을 마구 휘둘렀다.
『저리로 물러나시오!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뼈가 드러난 남자의 손이 무언가를 호소하듯 공중에서 위아래 방향으로 흔들렸다. 그 동작은 무언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고통에 처한 자신을 도와달라는 단순한 구조 요청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봤자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살과 근육이 벗겨져내려 아래턱이 극히 일부만 머리에 붙어 있는 형상이다. 불에 그슬린 붉은 혀는 목구멍을 통해 삐져나왔다.
나는 진심으로 이 유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 생각밖엔 나지 않았다.
『이러지 마소! 제게는 원대한 포부가 있소. 그것은 평범한 노인네가 되어 슬퍼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후회는 없구나」읊조리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오. 그렇기에 여기서 당신과 더 이상 어울리고 싶지 않구려. 그러니 내 앞에서 퍼뜩 물러서시오!』

아무렇게나 휘둘러대던 신발이 유령의 가슴에 닿았다.
그런데 살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방금 나는 허깨비가 아니고 실존하는 묵직한 것을 때렸다.
과연 그럴 수 있는 건가. 상대는 귀신일텐데?
《아파.》
놀라서 위아래 방향으로 훑어봤다. 설마, 그럴 리가?
《제법 매운 손이네.》
안 어울리게 툴툴거리기까지 했다.

『안즈! 이리 와!』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얻어맞은 그것이 뒤로 주춤거리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끝까지 차오른 숨을 일시에 토해내며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고, 린청이 그런 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우리 둘은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쿵쾅거리며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판이 빠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무너지는 굉음이 났지만 알게 뭐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도 질끈 감았다.

『어이~, 그 위에서 뭐하는 거야? 시끄럽잖아.』
아래층에서 한가롭게 저 혼자 놀고 있던 송주가 찡그린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것도 열 받게 걸레를 높게 들어 좌우로 왔다갔다 흔들기까지 했다.
『왜들 수선이야. 지네라도 나왔어?』
그것과 비교하면 지네는 무척 귀여운 곤충이에요, 송주.
린청이 도깨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나도 옆에서 한 수 거들었다.
『비켜!』
『나왔어! 나왔다고!』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발판을 헛디뎠다. 주룩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아픔도 몰랐다.

Posted by 미야

2015/06/17 14:49 2015/06/1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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