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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 부를 장소가 있다면 그곳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세계 어디에도 내 고향이라 부를 곳이 존재하지 않으니
정을 붙이고 안식을 취할 집 역시 허락될 일 없겠구나
창을 열면 푸른 벼이삭 보일 풍요로울 그곳을
꿈에라도 그리워하며 흐느끼며 팔베개할 뿐

눈을 감으니 벼가 자란 들판이 아닌, 새카맣게 타버린 하늘 아래 만물의 죽음이 깃든 민둥산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살아있는 생물은 나를 제외하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삭막함이 어쩐지 뼈에 사무쳐 나는 용신의 모습을 찾아 계속하여 흐느꼈다. 하지만 있을 리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소중한 이는 내게 불리울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떠났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가슴이 조이는 듯한 격한 통증이...
- 꼬르륵 -
그게 아니라 단순히 배가 고파 눈앞이 캄캄해진 거였나.
배고픔인지 울분인지 구분되지 않는 감각에 치를 떨며 쪼그리고 앉았다.
단순히 허기 탓이라면 무언가로 배를 채우는 즉시 불쾌감이 진정되겠지만 먹는 행위가 금지된 지금으로선 이 둘을 구분할 재주가 없다.

작은 돌 하나를 주워 눈치껏 입안에 넣고 굴렸다.
저것이 돌았구나 탄식하며 옆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물론 나는 인간이라서 돌을 씹어 소화시키는 재주는 없다. 그래도 자극을 받아 침이 나오니 목마름이 약간 가셨다.

『그렇게 앉아 계시면 안 됩니다.』
『압니다.』
『아시면 일어나십시오.』
『죄송합니다.』
『일어나라 하였습니다.』

편돌을 깐 제보전 앞에 일단 줄을 맞추어 서게 되면 아무리 급해도 무리에서 이탈하여 화장실에 가는 행위가 일절 허락되지 않는다. 설사병이 나도 제례는 제례, 그래서 제보전에서 중요한 의식이 열리는 날엔 의례히 단체 금식이 행해진다.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없으면 똥구멍으로 배출되어 나오는 것들도 없는 법, 하여 깔끔하게 하루나 이틀 정도 식사를 거부한 채 몸의 상태와 기분을 조절한다.
말은 쉽지만 몸은 힘들다. 어른들도 버거운데 하물며 우리들은 성장기 어린이다.
뿐만 아니라 배례 의식에서 하여야 할 몸동작도 사전에 연습해 두어야 한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진이 빠질 노릇인데 타 라는 이름의 악기가 내는 소리에 맞춰 팔을 올렸다 내렸다,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이게 또 별 것 아닌 것 같은 동작임에도 박자 맞추기는 은근히 까다롭다. 더하여 배가 고프니 주의력이 떨어진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따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뭍으로 나온 오징어 몸짓을 해보일 수밖에 없다.

『참을성이 부족하군요. 옛날에는 이렇게 축 늘어지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힘들단 말예요!』
『폐하 앞에서도 힘들어 죽겠다 어디 나불거려 보시던지. 하여간 요즘 어린 것들은... 쯧쯧.』
『부탁입니다.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자꾸 쉬려고만 하니 팔을 올려야 할 때에 다리를 올리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쉬기는 뭘 쉽니까!』
그걸 아니꼬워하며 의전관들은 아이들을 혼내고 야단치며 반강제로 일으켜 세우기를 반복했다.
협박하듯 타의 막대기를 아이의 코앞에서 따악 소리가 나게 부딪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전관이면서 하는 짓은 완전 깡패다. 50년 전에도 그랬으니 앞으로 100년 후에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칠배례 의식에서 적룡신님도 뵐 수 있나요?』
그리고 이쯤하여 꼭 나오는게 바로 이것이다.
더위에 지쳐 다소 힘을 잃었지만 질문하는 아이의 눈빛은 반짝 빛을 냈다. 용신이 내려오시는 건가? 하늘님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 같은 애들의 춤을 직접 봐주시는 건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웃었다.
칠배례는 일곱 가지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일곱 번 반복하여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원래는 이곳 서대륙이 아닌 북대륙의 전통 풍년 기원 의식이다. 친선사절로 배를 타고 남-기스가르트로 갔던 문교가 이를 구경하다 홀딱 반해서 우리도 해봅시다, 이러고 그 형식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 사람 눈에는 보기에 매우 좋을지 몰라도 적룡신이 보기엔 완전 짝퉁에 국적불명의 의식인 셈이다. 노랫가락에 등장하는 흑룡을 이쪽에서 멋대로 적룡으로 가사를 살짝 바꿔봤자 근본부터가 짝퉁인 건 어쩔 수 없어「니들 참 애쓴다, 애써. 쯧쯧...」반응밖엔 안 나왔다. 최초에는 문무신관 전원이 모여 거창하게 행하던 예식이 오늘에 이르러 어린아이들의 봉납의 춤으로 격하된 것도 다 그런 까닭에서다.
「적룡신이 칠배례 의식을 시큰둥히 여긴다는 걸 애들은 전혀 모르지. 이쪽은 물도 못 마셔가며 힘들게 노력하는데 말이야.」
이래서야 완전 헛발질이다.
분명 저승에서 문교가 황송하다며 스스로 자기 목을 밧줄로 메다는 시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무엇이 우습다는 건지요.』
『아.』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백발의 주름 가득한 노인의 얼굴이 나를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다.
놀라 허겁지겁 거짓말 했다.
『그게! 적룡신님을 뵐 수 있구나 생각하니 기뻐서...!! 네, 기뻐서 웃었습니다.』
내 설명을 듣고도 노인의 파란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졌다. 백발이라 미처 몰랐는데 그는 색목인, 그러니까 동대륙 먼 이국의 출신이었다. 머리카락도 젊어서는 아마 밝은 빛깔의 갈색이었을 거다. 물론 추측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눈썹에까지 하얗게 눈이 내려 예전 빛깔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만 과거에는 그 외모가 무척이나 눈에 띄고 화려했을 것이다.
『다른 생각에 웃었던 것이 결코 아니옵고...』
노인은 내가 하는 변명을 채 듣지 않고 콧방귀부터 뀌었다.
『적룡신님은 바쁘십니다. 제국의 하늘과 땅을 온전히 다스리시니 얼마나 바쁘시겠습니까.』
그 작자 취미가 낚시인데 그 무슨 얼어 죽을.

어쨌거나 아이들은「용신님은 오지 않으신다.」라는 말에 크게 실망하고 한숨을 쉬었다.
지분대는 웅성거림을 베어내고자 벽안의 노인이 타를 마주쳐 큼직한 따악 소리를 냈다.
『그래도 용전 앞입니다. 황제 폐하 앞인데 실수를 하면 안 되겠지요. 그랬다간 대를 이어 망신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더 연습해봅시다. 제 일보부터 이보까지의 동작입니다. 하나, 둘. 저를 보고 따라 하십시오. 이렇게 팔을 들어서 손목을 이리 구부려...』
소매를 슬쩍 흔들기만 했는데도 박력 넘치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맨 뒷줄로 가십시오.』
나름 벌을 주려던 의도였던 것 같은데 나야 제일 눈에 띄지 않는 구석이 좋다.
『왜 머뭇거리고 있는 겁니까.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뭐 하고 있습니까!』
『예.』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마자 부리나케 구석으로 도망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그게 무척 한심하게 보였나 보다.
킥킥 낮게 웃는 소리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 의도적으로 영어식 표기를 피하다보니 갑자기 막히는 경우가 자주 생기네요. 컨디션... 커튼... 스트레스... 이걸 무어라 하면 좋단 말입니까?

Posted by 미야

2015/05/15 11:49 2015/05/1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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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실의 수도 루은(累恩)은 거듭되는 은혜라는 그 뜻만큼 좋은 곳이다.
태어나 자란 적은 없어도 아무래도 서대륙의 중심지인 만큼 유람 차 들린 적도 많고, 일꾼으로 품을 팔러 온 적도 있었다. 전생에서는 이곳에서 공부를 했고, 성적이 좋았던 관계로 관직을 줄테니 옮겨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인연이 아니라 판단하여 관직은 에둘러 사양했지만 책을 구하러 최소한 1년에 한 번씩 찾아오곤 했다. 당시 나는 작은 나라의 부서고(府書庫), 국립 도서관의 총 책임자였다.
『비켜주세요, 지나갈게요.』
『각종 야채 있어요, 과일 팔아요.』
그때마다 나는 마을의 활기참에 감탄하며 인파에 휩쓸려 거의 넋을 잃곤 했다. 성격 급한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들 역시 발걸음이 빨랐다. 시장은 미어터지고 짐꾼들은 걷는 대신 뛰어다녔다. 소란도 빈번한 편으로 외문을 통과하려는 성마른 백성들이 서로의 등을 떠밀다 시비가 붙는 경우도 잦았다. 여자들은 깔깔거렸고 엄마 치마폭을 붙잡은 애들은 과자를 물고 빨았다.
『분명히 사라사 비단주가 420포요. 여기 거래서가 있소.』
『네 눈은 동태 눈깔이냐. 기록에는 400포잖아.』
『이리 다시 주시오. 그럴 리 없는데... 먹물이 튀었나.』
『먹물 어쩌고는 난 모르겠고, 신고부터 다시 하시게.』
『씨발.』
외지에서 들어오는 물자들의 행렬이 단속을 이유로 정체될 적엔 상인들의 입이 걸어졌다.

외문을 통과하고 나면 돌연 분위기가 차분하게 바뀐다. 아무래도 중심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높으신 분들이 많이 살고 정비된 구획으로 자리를 잡은 중요 관청들의 숫자도 늘어나는 법이다. 그만큼 절제와 제한의 요구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통행인들의 발걸음은 보다 느려지고, 마차는 위급상황이 발생한들 정해진 속도 이상으로 달릴 수 없다.
도로는 세로 방향으로 왼편부터 일문대로부터 십이대문로가, 가로는 북쪽 방향에서 일주로부터 시작해 십이주로가 뻗어나간다. 적룡신의 은혜로 외적의 피해를 일절 당한 적 없어 예로부터 이곳은 미로형이 아닌 네모반듯한 바둑판 모양으로 시가지를 세웠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무척 멋질 거라 생각한다.

오문대로를 곧장 달려 황궁의 지붕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면 드디어 내문인데 그 경계는 인공수로다. 너비 28척으로 땅을 파서 물을 채웠고 깊이는 어른의 키 정도 된다. 배를 띄울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데다 수원인 비천호에서 많은 물을 끌어오기엔 문제가 있어 원래 설계보다 상당히 작아졌다. 표면적인 주목적은 화재 예방이지만 872년 전 인공수로 위로 놓인 다리가 화마에 전소된 적이 있으니 그 효과는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이사실의 주인이 그저 뛰어난 경관을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내재원으로 가신다고요... 사친으로 오셨군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사정이 있어 나 혼자일세.』
『그럼 나중에 오시게 됩니까?』
『일행은 없네.』
작은 옷 보따리 하나 끌어안고 다리를 건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문장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행색을 살펴보곤 한쪽 눈썹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릴 내용이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어느 나라인지는 모르나 감히 거지를 보냈군.」
고개를 돌려 건너왔던 다리 저편을 바라보니 이래저래 기분이 착잡했다.

『다행이라 생각하십시오. 어쨌든 비가 새지는 않으니까요.』
내재원 숙사에 이르러선 아예 바닥에 엎어져 손바닥으로 땅을 짚어야 했다.
계란을 구하려면 닭부터 기르라고 했던가.., 준비한 닭이 없으니 계란도 없었다. 하여 그들이 나에게 내어준 방은 일반적인 방이 아니고 잡동사니로 가득 찬 창고였다.
『보시오, 저렇게 창문도 달렸고.』
시큰둥하게 설명하던 숙사감은 두꺼운 판자를 덧댄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판자는 두꺼운 못으로 고정이 되어 환기를 하려면 먼저 도구를 사용해 뜯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뽑을 수 있다면 말이다. 못의 상태로 봐선 판자를 떼어내려다 창문부터 박살날 가능성이 많았다.
『이불도 있고.』
이번에는 100만년 전에나 물과 비누를 만났을 것 같은 쥐색의 담요를 가리켰다.
『화장실도 달렸고.』
숙사감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걸레를 빠는 용도였을 큼직한 나무통이 보였다.
정말이냐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었지만 숙사감의 말대로라면 아무래도 저건 소변통 용도인가 보다.
『청소는 직접 해야겠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셔야지요.』
긍정적으로 보자면 주란새가의 정치범 수용소보단 시설이 썩 괜찮았다. 그러나 아마주리의 매음굴보단 형편없었다. 최소한 그 매음굴에선 여러 개의 다리로 재빠르게 기어가는 벌레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벌레에 물려 피부에 가려움이 오르면 몸을 팔 수가 없기에 거기선 그나마 주기적으로 약을 쳤다.

어쩌지. 차라리 이대로 도망쳐버려?
내려놓은 옷 보따리로 시선을 내리깔자 웬일인지 숙사감의 시선도 같이 붙어 따라왔다.
『......』
『......』
그러자 퍼득 깨달음이 왔다. 저 인간은 이라벽치의 요청을 들었음에도 업무가 바빠 그만 내 방을 마련해둬야 한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먹은 것이다.
살집이 붙은 사내는 서늘한 온도에도 겨드랑이로 땀을 흘렸다.
「이만하면 알아듣고 나가겠다 하겠지.」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던 그는 은밀히 기대하며 내 입을 주시했다.

『식사는 어찌합니까.』
『잘 생각하셨소. 이러지 말고 부근 여인숙으로 옮겨... 응? 지금 뭐라고?』
숙사감의 단추 구멍 같던 찢어진 눈이 위아래로 벌어졌다. 여기서 잠을 자겠다고? 진짜? 정말로? 그리고 두껍고 징그러운 얼굴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무어라 하셨소.』
『식사는 어찌하냐 여쭈었습니다.』
내 호주머니엔 여인숙에 지불한 돈 같은 건 없다. 정 급하면 노숙이라도 하겠지만 깊은 밤 내재원 뜰안에서 찬 이슬을 피할 불을 피우면 진짜 볼만할 거다. 야간 순찰 중이던 병사들이「이거 좋은 걸? 같이 불이나 쬡시다, 형씨.」이럴 리 없으니 방망이질에 곤죽이 되는 걸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의 가장 적절한 판단이라는 건 창고라도 감지덕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식사 같은 건 없소!』
계략이 어긋나자 숙사감은 솟구치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아니, 그럼 날 쫄쫄 굶기겠다는 거냐. 이사실 인심 진짜 박해졌네!
나 또한 화가 치밀어 허리에 손을 얹고 무어라 한 마디 하려던 찰나, 숙사감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내일이 길일이라 칠배례 행사가 잡혔소. 오늘 하루 식사는 없고 마실 물도 제한되고 있으니 그리 아시오. 바빠 죽겠는데 짜증나게... 에잇.』
그리고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5/05/14 10:47 2015/05/1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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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14 20:4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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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기억은 뒤죽박죽이다.
큰 열을 내며 드러누운 탓에 벌어진 일의 순서라던가, 장소라던가, 사람의 얼굴 같은 것들이 죄다 섞여 혼란스런 그림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나는 서남문 한 가운데서 기절했고, 어린애가 죽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의 등에 업혀 어딘가로 옮겨졌고, 의원으로 짐작되는 자가「몸살입니다, (이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말했고, 열을 식히기 위해 얼굴을 덮은 차가운 물수건이 코와 입을 막아 질식사의 위기를 겪었고, 누군가 물그릇을 엎었고, 젖먹이가 울어댔고, 정복을 입은 관원이 찾아와 질문에 답을 하라며 침상에 누운 내 몸을 마구 흔들었으며, 포도 알보다 곱절은 굵은 약을 억지로 삼켰고, 까무룩 정신을 놓고 잠들었다. 그러다 다시 깨어나면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 손가락은 몇 개입니까, 식의 우문이 이어졌다.
만사가 귀찮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 손가락은 두 개요, 대꾸했더니 억지로 복용해야 할 약이 더 늘어 포도 알 크기가 복숭아 크기가 되어버렸다. 맛 또한 상상초월로 지독해졌다.
담 너머 익숙한 향취 맡으매 님과의 밀월 약속이 꿈처럼 아득하여 슬픔을 지운 달은 뜨고 지고 -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속벽향가에 실린 연애시나 실컷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미쳤을지도 모른다.
1편부터 42편까지 외우고 나서야 입안을 맴돌던 지독한 쓴맛이 가셨다. 몸에는 좋을지 몰라도 정신에는 해로운 약이었다.

『얼굴빛이 많이 좋아졌구나.』
진통제에 취해 다소 멍한 기분으로 날 찾아온 손님을 쳐다보았다.
『누구신지요.』
『아... 그게. 이 아저씨는... 그러니까 뭐랄까... 음.』
사내는 차마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을 제 입으로 털어놓기가 민망했던지 있지도 않은 티끌을 털어내겠다며 뒷목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투명한 더듬이를 길게 뻗어 내 안색을 주의 깊게 살폈다. 뭐냐, 이 인간. 군장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어 인상이 크게 달라졌을 터이니 포박한 나를 성문 안쪽을 향해 집어던진 본인이라는 걸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구렛나루까지 밀었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라벽치, 이 등신각치야. 소원대로 끝까지 모르는 척해주마.
나는 시치미를 잡아떼고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누구신지요.』

이라벽치의 어두웠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구나, 지화자. 사내는 신이 나서 가까이 있던 의자를 세게 끌어당겼다.
나는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그가 의자에 앉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덩치가 큰 자였다. 산속에서 그 난리를 쳤을 적엔 몰랐는데 그가 엉덩이를 붙이자 방 자체가 비좁게 느껴졌다. 심지어 천장도 아까보다 1척은 낮아진 것 같아 숨이 막혔다. 과연, 그래서 이름에 치 라는 글자가 붙는 거였다. 치는 큰 남자를 의미한다. 속어로 거대한 남근이라는 의미도 있다.

『우선 이걸 가져왔다. 네게 무척 중요한 물건 맞지?』
많고 많은 잡동사니 중 하필이면 그가 가지고 온 물건은 아버지가 먼 길 떠나는 나에게 내려준「자결 상자」였다. 새카만 빛깔의 자개 장식 상자를 보자 뺨 근육이 굳으려 했다. 집안의 명예를 항시 잊지 말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 그는 안에 든 서찰을 꺼내 읽고 내가 어느 집 자식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중요한 거라 판단하여 일부러 챙겨왔다.
목이 터져라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내 심정은 까마득히 모르고... 치밀어 오르는 걸 삼킨 채 상자를 받았다.

『훌륭하신 아버지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읽었는데 좋은 내용이었다.』
물론 그랬을 것이다. 적은 글 속에 영혼은 없어도 최소한 모양새 하나는 반듯했으니까.
『도중에 사고가 있었노라 빈사국으로 연락을 취하긴 했는데 답장을 받기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 같구나. 그래도 자식인 네가 무사하다는 걸 아시면 부모님께선 크게 기뻐하실 거야.』
과연 그럴까, 이번에도 마당을 향하여 벼루를 집어 던지실 지도.
『네가 학업을 할 내재원에도 알려 머무를 방을 준비해둬라 급히 일러뒀다.』

이쯤해서 이라벽치는 송충이 모양의 눈썹이 가렵다며 손가락을 얼굴로 가져가 긁기 시작했다.
『끄응... 그런데 뭔가 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 내재원 숙사감 양반이 엄청나게 화를 내더라고. 계란을 얻으려면 일단 닭부터 키워야 한다나, 뭐라나. 닭이 없는데 알을 내놓으라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다음으로 나올 얘기가 어떤 종류일지 짐작이 갔다.
『있잖아, 이거 제법 민망한 이야긴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거다. 어차피 가던 도중 죽임을 당할 아이라서 아버지는 사전에 미리 예비할 일을 등한시했다. 책값이니 수업료니 하는 것들을 마련하지 않았고 내재원의 숙소도 미리 잡아두지 않았다.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는 건 자존심을 세워가며 엄청 신경을 썼는데 그 다음부터는 신호가 뚝 끊겨 아이의 의식주 문제 전부가 허공으로 붕 떠버렸다.
『사친으로 온 네가 여기 이사실에서 굶어 죽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겠지만... 곤란하게 되었구나.』
수중엔 땡전 한 푼 없는데다 심지어 당장 갈아입을 속옷조차 없다.

이런 건 싫으니 집으로 보내 달라, 울음을 터뜨릴 거라 짐작했던 모양이다. 커다란 몸을 긴장시키고 곧 가득 차올라 이불을 흥건히 적실 눈물을 각오했다. 이라벽치는 호랑이를 잡는 것보다 아이들 달래는데 더 어려움을 느끼는 남자였다.
『어허! 울지 마! 울지 말고!』
하지만 나는 희노애락을 전부 잊어버린 멍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울어서 해결이 된다면야 맹인이 될 때까지 눈물을 떨굴 것이다. 매운 양파를 얼굴에 문질러서라도 울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는 건 단순히 체력 낭비다.
당장 급하게 된 건 그동안의 약값이다.
자연스럽게 무릎 위로 올려놓은 세공품 상자로 시선이 갔다.
이걸 팔아 한 달치 생활비라도 벌면 좋으련만.
『곧 집에서 좋은 연락이 올 거다. 그때까지만 힘내서 참는 거야, 알겠지?』
남의 사정도 모르고 이라벽치는 속 편한 소리를 꺼냈다.
허나 고국 빈사국에서 달가운 답장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약간의 호의를 얻어 깨끗한 옷을 구했다.
『우리 아들 놈 옷이야.』
이 정도면 대충 맞을 거라며 사내 옷을 몇 벌 꺼낸 이라벽치는 꿈에도 내가 여자아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 내 몸을 진찰을 한 의원이 사실을 바로잡아주었을 법도 했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계속 사내 취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빈사국 지리가 家의 장자(長子) 안즈」로 적힌 서류들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범인은 바로 이라벽치였다.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언제부터 일이 꼬였는지... 이걸 무슨 재주로 바로 잡아야 할까.
『저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니? 내 눈엔 그다지 낡은 것 같진 않은데...』
『마음에 듭니다.』
잘라 말하고 감청색의 옷을 손으로 잡아챘다.

Posted by 미야

2015/05/12 16:36 2015/05/1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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