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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예식은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 별 문제없이 진행되어 마침내 석양이 사방으로 붉게 번짐과 같이하여 모든 행사가 무사히 종료되었다.
《퇴전~! 향락~! 응립~!》
물러가라는 신호에 따라 맨 앞줄에 섰던 이들부터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누른 자세로 제보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맨 뒷줄에 선 관계로 가장 늦게 입장했음에도 가장 늦게 빠져나가게 된 우리는 얌전히 순서를 기다렸는데, 무료한 건 둘째고 그 와중에도 내 실수를 못 마땅히 여긴 의전관이 슬그머니 다가와 남들 모르게 옆구리를 꼬집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게 또 무지하게 매운 손맛이어서 나는 그냥 자지러졌다.
「이놈이 도중에 갑자기 망할 머리를 쳐들어 여러 사람 놀라게 만들고... 사고를 안 쳐 다행이지. 하여간 촌뜨기들은 어디를 가든 꼭 말썽이라니까. 폐하의 용안이 어떤 모습일지 그게 그렇게 궁금하더냐. 흥! 소원은 성취했으니 당장 죽어도 불만은 없겠구나.」
입술도 안 움직이고 소리를 내어 날 책망하는데 뭐라 대들지도 못하겠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소원을 성취하다니.
붙잡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아니, 이보시오. 저 높은 곳으로 누가 있기는 있었소?!

더듬더듬 물어보자 린청은 가만히 물그릇을 내밀었다. 갈증이 심해 내 머리가 살짝 이상해졌다 여기는 듯했다. 물론 나는 매우 목이 마른 상태였고, 이젠 살았다는 투로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느라 바빴다. 서둘다보니 사래가 들려 기침도 터졌다. 덕분에 입으로 넣은 물이 콧구멍을 통과하여 줄줄 새어나왔다.
『황제? 몰라. 코가 하나 달리고 눈이 두 개인 사람이겠지. 적손의 얼굴은 네가 쳐다봤지, 내가 본게 아니잖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답답하여 가슴을 치니 물 마시고 체한 거냐 안스럽게 쳐다본다. 이걸 어떻게 얘기를 풀어간담.
『적손께서 거기에 계셨어? 분명 계셨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거기에 안 있음 경공법을 써서 지붕 위에라도 올라가셨겠어?』
린청은 내가 무엇을 묻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허둥거려, 안즈. 훔쳐보니 평범한 사람과 달라 이마에 눈이 하나 더 달렸든? 그래서 그렇게 놀랐어?』
『그런게 아니라...!』
『아, 국화 찐빵이다.』

만 하루 동안의 단식이 끝났으니 이어지는 것은 잔치다. 단단히 허기졌던 아이들은 지금만큼은 예절이고 품위고 모두 팽개치고 정성껏 마련한 음식에 팔을 걷어붙인 채 달려들었다. 하수들도 모처럼 신이 나서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부린데다 시장기에 맹물도 꿀처럼 달게 느껴질 터이니 평소 점잔을 빼던 연회당은 시장바닥처럼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모양만 좋을 뿐 감질나게 만드는 다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식사 대신으로 삼을 국수며 찐빵이며 고기완자에 잔뜩 눈독을 들인 상태로, 린청만 해도 접시에 옮겨 담은 고기의 가짓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밀가루 반죽에 큰 새우를 넣어 기름에 튀긴 메보는 무려 다섯 개나 집었다. 그러고도 성이 차질 않는다며 굴 즙으로 맛을 내고 양파와 같이 볶은 밥을 주걱으로 푹푹 떴다. 소식을 하는 내 입장에선 이틀 치 식사량이었지만 린청은 당연히 혼자서 전부 먹어치울 거라 했다.
『음, 이건 많이 매운데. 그래서 궁금한게 뭐라고?』
『그.러.니.까!』
『닭요리 싫어해? 왜 접시에 음식을 하나도 담지 않는 거야. 혹시 편식하는 거야? 그럼 못 쓰지.』
『어... 그건. 나도 닭요리는 좋아하는 편이고...』
『오! 그건 집지 마라, 맛이 엄청 짜다. 제국인들은 원래 맵고, 짜고, 단 음식을 좋아하나? 세상에, 단팥을 넣은 이 스란은 왜 이리 단 거야! 설탕 범벅이잖아.』
이래선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다.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배가 되어 나는 발을 동동 굴러댔다.

『못 봤단 말이야.』
『뭘.』
『황제 폐하.』
『아이고, 그거 억울했겠구나~!! 작정하고 노렸는데 실컷 야단만 맞고 결국 적손의 버선코만 본 거야? 너 진짜 억울했겠다. 게다가 그 망할 의전관이 널 엄청 꼬집어댔잖아.』
우물우물 밥을 씹던 린청이 정말 안 되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반응도 이해가 안 간다.
애초부터 황제가 그 자리에 있기는 있었느냐고.
내가 봤던 건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내관이 들고 옮긴 깃발이었다.

린청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와 내 뺨으로 옮겨붙은 밥알을 떼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내관이 깃발을 앞세우고 나타나서 그걸 적손이 앉을 가람막 뒤로 가져가더라고.』
『깃발? 무슨 깃발.』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얘기하잖아. 적손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깃발이 있었다니까!』
내 심각함에 덩달아 린청 역시 그 얼굴에서 웃음을 슬그머니 지웠다.
『너 분명 더위 먹었다. 황제 납시오, 이러고 뜬금없이 깃발이 대신 등장했다는 거냐?』
『그렇다니까!』
『너.., 시력이 그렇게 많이 안 좋아?』
『몰라!』
그만할란다. 더 얘기했다간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다.

전해져 오는 옛날 이야기에 이런게 있다.
신라국에 고귀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요술의 비단이 있었는데 그걸 둘째라면 서러울 부자가 엄청난 금액을 들여 다섯 필을 구입해 자신의 의복을 짓게 했다.
그런데 완성된 물건이랍시고 받아보니 상자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여기 들었을 물건은 보물인데 그걸 빼돌렸구나 - 부자는 화가 치밀어 배달을 책임진 하인을 회초리로 때렸다.
하인은 애고 아프다 고함을 지르며 항변한다.
이 고운 빛깔의 외출복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절 꾸중하는 겁니까, 나리.

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건
① 하인이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상자는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 부자는 사기를 당했다.
② 부자는 고귀한 자가 아니라서 신라국의 요술 비단으로 지은 외출복을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기분 좋은 결말은 아니다.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요술...이었나.』
신라국의 비단까지는 아니겠으나 그것들 전부가 요술의 일종이었다고 하면 그럭저럭 설명이 된다.
제보전에 나타난 황제는 요술로 만든 허상이었다 - 모두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가운데 내관이 요술 깃발을 재빨리 가림막 뒤로 옮기면 황제 또한 자리를 옮긴 것처럼 보이게 된다. 어쩌면 허기와 탈수로 인한 집단 환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요술이라고 여기는게 적절할 것이다.
『헤에, 뭐야. 그런 거였나. 나이가 있을 테니 몸이 안 좋았을 수도 있고... 단순히 행사 참석이 귀찮았던 거였을지도 모르지. 그래... 이제 이해가 간다. 요술이었구나.』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때리며 스스로 납득하자 옆에서 린청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저것 말하기 귀찮았던 나는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장소를 떠났다.

Posted by 미야

2015/05/18 22:33 2015/05/1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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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20 01:31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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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감상을 적자면 이런 건 결코 무용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무게가 거의 없는 솜뭉치를 안는 기분으로 양팔을 앞으로 내밀어.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사선으로 틀어 옆으로 반보 전진하는 거야. 아니야, 그렇게 많이 벌리면 상체가 흔들려서 안 돼. 미끄러지듯 조금만. 거기서 재빨리 돌아 크게 숨을 내쉬고, 엉덩이와 허리를 일직선으로 고정하여 똑바로 선다. 이제 팔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무릎을 살짝 굽혀... 아니, 그보다 더 구부려.』
그보다는 건강 체조에 더 가깝지 않은가 - 그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제1보부터 2보까지만 외우면 이후로는 식은 죽 먹기라서 예의 동작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하늘에 감사하고, 땅에 감사하고, 은하와 별들의 운행함에 감사하고, 부모에게 감사하고...
용신의 은혜에 감사하고, 생명 있음에 감사하고, 황제의 은덕에 감사한다. 이것이 칠배례.

『요령을 알면 아주 쉬워.』
『과연.』
소년은 기억력이 좋았다. 세 번 정도 반복하자 어색했던 동작이 물 흐르듯 바뀌고 틀리는 부분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보기에 매우 좋았다. 무예를 익힌 몸이라 그런지 간결하고도 기백이 넘쳤다.
책에 적혀진 그대로 정확하게 움직일 줄 알아도 근본부터가 물렁뼈인 나와는 느낌이 많이 달라 나는 박수라도 치고 싶어졌다. 세상에, 같은 춤인데 사람에 따라 이렇게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 거였다. 앞줄에 세워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머리를 길게 기른, 남의 말 안 듣는 변방국 사람이라는 불리한 조건만 아니었으면 선발되어 뽑혔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저 등을 전부 덮는 길이의 머리카락은 여기선 너무 눈에 튀는데...
『머리카락은 죽어도 안 자를 거다.』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린청이 투덜거렸다.
그 짧은 기간동안 나름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 같다. 어쩌면 직접적으로 가위를 들고 린청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린청은 주먹질을 해가며 위기를 모면해왔던 걸까, 냅둬라, 관둬라,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을 그를 상상해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한숨이야. 기분 나쁘게.』
『글쎄, 왜 한숨이 나오는 걸까,』
당분간 머리 모양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의 심혈관 질환 방지를 위해서라도 피하는게 좋을 듯하다.

『어쨌든 부럽다. 내가 추는 예식의 춤은... 뭐랄까. 운동을 전혀 못하는 자가 억지로 시늉하며 허우적대는 그런 느낌인데 말이지.』
『자학이 심하군, 안즈.』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고 늘 놀림을 받은 걸. 커다란 물 양동이를 들고 무게에 버거워하는 엉덩이 큰 여인처럼 하체가 이리저리 흔들흔들...』
『누가 그런 심한 말을 하든? 예의 그 꺼벙이들?』
『아니, 그 녀석들이 아니라 사실은...』
오래 전 내 친구가, 라고 말하려다 합죽이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린청은 반쯤 벌어진 내 입을 주시하며 이어질 대답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그「오래 전 나의 벗이었던 자」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가볍게 도리질하며 웃기만 했다.
『누가 그랬다고?』
『어, 그게.』
『무시해버려.』
꺼벙이들 짓이라고 멋대로 단정을 지은 린청은 시원하게 잘라 말했다.
『머리가 텅 빈 바보가 지껄이는 말에 일일이 신경 쓰다간 오장육부가 썩는다.』
그가 지적한 바보라는 자가 제국의 황제라는 걸 알면 린청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돌연 궁금해졌다.

「그로부터 세월이 이렇게나 오래 흘러버렸으니 나의 친우도 많이 늙었겠구나...」
이 세계의 평균수명은 결코 길지 않다. 청룡의 용주(龍珠)이자 용선인(龍仙人)인 김 가(家) 태영의 말로는 자기가 원래 살았던 세계에선 평균수명이 80세가 넘었다던데 나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고...
그래도 용신의 수호를 받는 이사실의 황족들은 누구랄 것 없이 신체 건강하고 보기 드문 장수 체질이다. 선황께서도 백수(99세)를 넘어 중수(100세)를 누리셨으니 녀석도 분명 칠순(70세)을 무사히 맞이하였을 것이다. 빈사국의 외진 골방에선 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접할 수는 없었다만, 이사실의 황제가 붕어했다면 화산폭발이나 지진에 버금가는 큰일이니 분명 내 귀에도 소식이 들어왔을 거다.

어지러운 상념에 빠져 가만히 손가락을 입에 넣고 지분거렸다.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는 하얗게 샌 백발을 자랑하며 건강하게 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왜 그래, 안즈. 식은땀을 흘리고.』
『배가 너무 고파서.』
『그거 큰일이군! 그런데 손톱을 씹는다고 허기가 가시겠어?』
그의 지적에 얼른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었지만 정체 모를 초조함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지리가 안즈로 다시 태어난 이상 이제는 완전 남남인 관계가 되어버렸지만.
그렇게 끊어진 관계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부분은 여전히 과거 어느 지점에 묶여 있다.

소원대로 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책들과 같이 불살라 죽여주지.

떠올리자 현기증이 일었다.
『이봐!』
『조금 어지러워서.』
『낭패군. 그럼 그늘에서 조금 쉴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조금 숨을 고르면 괜찮아질 거야.』
시간은 누가 뭐래도 흘러간다. 가로막는다고 멈추는 일 없고, 흔든다고 제 길 아닌 곳으로 돌아가는 일 없다.

때마침 의전관이 타를 울려 모두를 환기시켰다. 무시할 수 없는 큼직한 탕, 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처럼 줄에서 벗어난 자들이 묵묵히 신을 고쳐 신고 자리로 돌아왔다.
잡담하는 이 없이 일순간 모두 입을 다물자 주변은 매우 엄숙해졌다.
그 고요함을 제물로 삼아 선두에 선 의전관이 다시 타를 들어 탕 탕, 간격을 길게 두 번 울렸다.
《각오~!》
저건 그저 준비하라는 뜻인데 나의 귀에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각오해야 하나? 그럴 리 없지. 우스워. 이런 적 없었잖아. 겁먹을 필요 없어.
어느새 중천에 뜬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약해지는 햇빛에 나는 약간 안도했다. 앞 사람의 그림자에 가리워질 내 얼굴 같은 건 저 위에선 먹으로 검게 물들인 종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이 안타까움은 쓸데없다.
《입장~!》
나는 안즈. 내 이름은 안즈.
제 명에 죽지 못한 책벌레 부서고서리의 팔자가 이제 와 서럽다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리.

하늘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땅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예식이 시작되어도 황제는 나서지 않는다. 칠배례가 황제 개인에게 바치는 의례가 아닌 탓이다. 황제의 육신 자체가 신룡을 대신하는 입장이지만 절까지 대신 받는 건 도에 지나치다.
은하와 별들의 운행함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이 순간엔 배고픔과 목마름도 잊는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숙연한 기분마저 든다.
부모님에게 감사하시오, 생명 있음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모든 조화와 섭리에 수긍하며 이에 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감사하오, 감사하오. 무량의 은혜에 감사하오.

《위전~!!》
황제가 위용을 뽐내며 제보전으로 입장하는 건 이 무렵이다.
적손의 은덕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의전관들의 봉납 노래가 끝남과 같이하여 춤추던 이들이 저마다 허리를 절반으로 구부렸다.

마음속에 무엇이 자라났는가, 이것은 풀인가 아니면 꽃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이기심인가
그대는 분명 나라는 존재를 잊었는데
밤중에 이슬이 내려 마치 비라도 내린 듯 젖은 속눈썹 무거워
눈을 질끈 감고 사랑하는 이여 오랜만이군요, 말을 걸어보고 싶어라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일어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보면 안 돼!」
옆으로 자리한 린청이 재빨리 손을 뻗어 무지막지한 힘으로 내 머리통을 찍어 눌렀다.
다시 타가 세 번 울리자 모두가 손등으로 눈을 가렸고 높으신 이 또한 준비된 가림막 뒤로 자리를 옮겼다.

Posted by 미야

2015/05/17 01:55 2015/05/17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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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른과 달라 꾸밈이 없고 천진난만하여,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며...

소문이 빠르게 돌아 벌써부터 나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오는 도중 강도를 당해 가진 재물은 전부 빼앗기고 수행하던 자들은 전부 도망갔다더라,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집으로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더라, 신발이 헤어졌는데 창피하게도 그걸 모르더라, 듣자하니 서남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바가지 하나 들고 구걸행색하며 돌아다녔다더라, 기타 등등.
누군가 고의로 내 등을 세게 밀쳤다. 흠칫하여 돌아보니 언제 그랬느냐며 딴청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번엔 실수인 것처럼 해서 다시 어깨를 때렸다.
「시비를 걸고 있구나.」
또다시 등을 떠밀리기 싫어 몸을 사리자 이번엔 교묘히 다리를 뻗어 발잔등을 세게 찍어 밟았다.

눈물이 쏙 우러나왔다.
아파서 한참을 겅중거리는데 예의 불쾌한 키득거림이 따라붙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눈에 잘 보이질 않아 그만 실수를 했네. 어디서 콩알을 밟았나 했는데 그게 사람이었군. 고의는 아니니까 용서해줘.』
『......』
『얼씨구? 눈초리가 고약하군. 왜 노려봐? 이렇게 사과까지 했건만. 성미가 나쁘구나.』
『후후후. 단순히 품성만 나쁜게 아니고 어쩌면 가난뱅이라서 예절 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흐음... 그 말도 그럴 듯하군. 야! 다들 봐봐. 이 녀석, 우릴 또 노려본다.』
애들은 어른과 달라 천진난만하고 꾸밈이 없다고?
앞뒤 가리지 않아 즉흥적이고, 마음의 가책을 느끼는 일 없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날벌레의 머리를 손톱으로 잡아 뜯으면서도 그게 바로 살생의 행위라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재밌다 생각하면 그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벌레는 연못에 흘려 개구리가 먹게 내버려둔다. 그리고 개구리가 벌레를 먹으면 다시 그 개구리를 붙잡아 혀를 빼어낸다. 그게 바로 어린이들의 체험이고 놀이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들어 날 에워싼 무리에게 진정하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내가 언제 노려봤다고 그래.』
『아냐, 방금 노려봤어. 모두 다 같이 봤다고. 그러니까 고개 숙이고 사과해.』
이놈들은 완전 정신 나갔다. 사람을 때려놓고 사과까지 받으려고 하다니.
『사과라니. 그쪽에서 먼저 발을 밟았잖아.』
『밟았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방금 전 밟은 건 콩알이었어.』
『그럼 피멍이 든 내 발잔등은 투명 인간의 짓이라는 거니?』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데 또 다시 등을 떠밀렸다. 도대체 누구 짓인가 확인하려 하자 이제는 대놓고 뒷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얼얼해진 뒷통수를 감싸쥐자 실례, 이러고 또 등을 떠민다. 이거 아주 된통 걸렸다.
『표정이 그게 뭐냐. 사과해, 사과하라고.』
『아프니까 그만해. 아파!』
『순서가 틀렸잖아. 아프다고 울기 전에 정중하게 머리 숙여 우리에게 사과부터 해. 잘못했습니다, 빌어.』
『그런게 어딨어!』
이렇게 한참을 옥신각신하는데 짜증 섞인 목소리가 방해하며 끼어들었다.
『야! 너희들! 성가시다. 저리 가라.』

보다 못한 의전관이 참견을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 많던 의전관들은 앞줄에 선 아이들에게 온전히 정신을 집중하여 뒷줄 무리에서 벌어지는 혼란에 대해선 귀와 눈을 감을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앞줄로 세워진 이들은 내로라하는 굴지 명문가 집안의 자제들이었고, 조금이라도 더 황제의 눈에 띄었으면 하는 욕심에「잘 봐주세요」사전 청탁도 들어간 상태였다. 금품이 있는 곳으로 눈길도 가는 법, 두툼한 무게를 지닌 정체불명의 복주머니를 선물 받은 의전관들은 가난한 하급 관리의 자녀들이나 나 같은 외국인에겐 일절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귀가 멀었냐. 저리 가라고 그랬다.』
아는 얼굴이었다. 멀미가 심해 이사실로 오는 도중 몇 일이고 토하던, 이쪽에서 일부러 말을 걸자 자신과 친해지려 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며 쌀쌀맞게 굴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 뼉다구가 괜한 참견을... 컥!』
『부끄러운 줄 알아.』
냅다 찌른 주먹에 뒷말은 자연스레 끊어졌다. 상대의 턱을 위로 올려치는 동작은 신속하고도 정확했다. 게다가 겉으로 봐선 별 거 아닌 가벼운 타격으로 보였지만 그게 기를 모아서 친 거라서 그 충격이 머리에 이르렀을 적엔 제법 커다란 진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둥근 파문이 멀리 뻗어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맞은 곳은 턱이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뇌다. 두개골이 종처럼 뎅뎅 울리며 진동하는 탓에 시비를 걸던 소년은 독한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려 하는 동료를 부축하며 그들이 외쳤다.
『너!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는 거냐?! 내 아버지는 장무서리소장으로...』
주먹 찌르기를 시전한 소년이 다 듣지 않고 내뱉듯 말했다.
『몰라.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너희들이 누군지 알고 있어야 할 까닭이라도 있냐?』
『윽!』
『그럼 다음은 누굴 손봐줄까. 널 손봐주랴?』
그가 손칼로 무언가를 후려치는 동작을 해보이자 아이들은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를 읊으며 사라졌다.
『이이익! 어디 두고 보자!』
『오냐! 기대하마.』

이 모든 걸 지켜보며 나는 그저 속눈썹만 깜빡거렸다.
『그리고 너.』
이번에는 화살이 나에게로 튀었다.
날 보려고 하지 않고 계속하여 정면만 응시하던 소년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얼핏 보아하니 예전 의식의 춤을 제법 괜찮게 따라하던 것 같던데. 나는 이런 거엔 서툴거든. 괜찮으면 시범을 보여줬음 하는데.』
그러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이미 구면이지?』
『그래.』
『오던 길에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고 들었다. 운이 나빴군.』
글쎄다. 단순히 운이 나쁜 거라고 치부하기엔 그간 겪은 이야기가 너무나 구구절절했다.
그렇다고 한들 이 소년 앞에서 신세 한탄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하여 짧게 수긍했다.
『그러게. 운이 나빴던 것 같네.』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하지. 나는 예당국 련 가의 린청이다. 잘 부탁한다.』
『나는 빈사국에서 온 지리가 가의 안즈라고 해.』
나고 자란 장소의 관습에 따라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뒤로 올려 묶은 소년의 시선이 그제야 내 얼굴로 향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호의를 담은 차분한 시선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5/16 13:38 2015/05/1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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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16 14:27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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