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 모두 제국인이 아니라는 탓도 있었지만, 우리들이 자리를 함께 하자 여러모로 안 좋은 방향으로 눈에 띄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무릎을 다친 탓에 절룩거리는 나야 말똥 투척 사건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떠도는 소문이 극히 좋지 않았고. 린청은 고집을 부려가며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녀 사내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참이다. 짧게 자른 머리를 선호하는 이사실에서는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데 제국의 풍습에 따르기를 강요하며 가위를 들고 따라다니는 이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주먹질로 하나하나 제압하고「날 내버려둬!」주장하고 있으니 관계자 입장에선 아무래도 눈이 시릴 터, 최근에는 상급생들까지 끼어들어 모종의 압력을 계속하여 가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 몸싸움을 하는 빈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길게 늘어진 뒷머리를 슬그머니 쳐다보는 내 시선을 의식한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자를 거야.』 그런 까닭으로 이 무가 출신 소년에 대한 평판은 매우 나쁘다. 『죽을 때까지 길러봐. 저 황소고집을 누가 말려.』 그리고 여기, 소년의 동갑내기 사촌누이 휘사가 있다.
『바느질이 어렵진 않아? 도와줄까?』 『괜찮습니다. 할 만 합니다.』 내 요청을 듣고 흔쾌히 반짓고리를 빌려준 그녀는 찢어진 소매를 직접 수선하는 나를 조바심을 내며 지켜보았다. 자신과 달리 정식으로 수예를 배운 적이 없을 터이니 바늘에 찔릴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선을 곤란하다 생각하며 느릿느릿 八자 형태로 실을 꿰었다. 내 비록 수예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도 전생의 부서고서리 시오재는 궁진한 살림살이에 헤어진 의복을 손수 고쳐서 입던 사내였다. 덕분에 생전 처음 해보는 바느질이었음에도 실의 매듭짓는 방식 같은 어느 정도의 기본 지식은 갖고 있다. 『윽!』 그렇다고 해도 손가락에 구멍을 내는 걸 피해갈 수는 없어 휘사는 어쩔 수 없군, 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역시 안 되겠어, 내가 꿰매줄게.』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사양할 것 없어. 너는 그냥 영광으로 알아. 지아비가 아닌 자의 옷을 꿰매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테니.』 눈을 감고도 손수건 위로 한 떨기 모란꽃을 피우는 재주를 가진 사람에겐 이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내 손아귀에서 수선 중인 겉옷을 빼앗아갔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 『그러니까 너는 그냥 감사합니다. 태양을 가릴 지경으로 아름다운 분이여, 이러고 인사만 하면 돼.』 성격이 이렇다보니 그녀도 적이 제법 많은 편이다.
『듣는 내가 다 오그라든다! 그 말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냐.』 『내 말투가 어때서, 린청 오라버니.』 『낯간지럽잖아. 세상에 어느 여자가 태양을 가릴 지경으로 아름답다고 자화자찬하는 법이 어디에 있어.』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육지전서 87장에 장군은 스스로 자만하여 눈이 흐려지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병법 이야기가 왜 나와!』 옥신각신하는 이 두 사람은 이종사촌지간으로 어머니끼리 자매다. 태어난 달이 다른 열 한 살 동년배이고, 휘사의 어머니가 예당국 왕의 다섯 번째 빈이라고 하니 신분으로 보자면 옹주인 휘사가 훨씬 높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가깝게 자란 탓인지 서로 간에 허물이 없고 반말도 예사롭지 않게 툭툭 던지곤 했다. 본인들 주장으로는 기저귀를 차고 있던 핏덩이 시절부터 앙숙 관계라는데 내가 볼 적엔 앙숙까지는 아니고 투닥거림이 좀 있는 남매처럼 보였다.
『아무튼 스스로 예쁘다, 예쁘다, 이러는 건 적을 만드는 행위라고.』 『하지만 난 어디를 봐도 미인인데 어쩌라고. 입에 침 바르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이 미모에 시기, 질투가 따라붙는 건 내 탓이 아닌 걸.』 『네 탓 맞거든? 이 추녀야!』 쏘아붙이자 소녀는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채 툴툴거렸다. 그런데 찐빵이 되었음에도 못 생겼다는 느낌은 없고 같은 여자인 내 눈에도 정말 예뻤다. 『휘사 님은 미인이에요.』 『그거 봐, 오라버니. 안즈도 인정하잖아.』 『그거야 저 녀석 눈이 삐어서 그렇고.』 턱을 괸 삐딱한 자세로 삐딱한 발언을 개의치 않게 내뱉은 소년은 둘이서 편먹었다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저게 미인이면 세상의 모든 미인의 씨가 마른 거야.』 린청의 기준에 따르려면 그 눈을 살짝 찌푸리기만 해도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성벽을 무너뜨려? 그건 미인이 아니라 괴력의 소유자잖아.』 고사를 잘 모르는 소년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무튼 린청의 말에 일리는 있어요. 자고로 여인들의 시기 질투는 칼보다 무섭다고 하니까.』 바느질을 하다 말고 휘사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 안즈. 내가 질투를 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아닌데. 피이~ 게다가 치사하잖아. 그깟 가락지, 아무리 비싼 보석을 박았다고 해도 길게 가냘픈 내 손가락을 우아하게 만들지도 못할텐데 내가 왜 그런 걸 훔쳐서까지 가지려 들겠어. 그걸 설명을 하는데도 귀가 막혔는지 못 알아듣는 거야. 하도 기가 막혀서 내 손을 보여줬지. 그딴 가락지가 없어도 내 손은 너무나 고와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답니다, 이러고.』 저런 반응이니까 상대방도 감정이 상해 머리채를 잡으려 한 거다. 『평범하게 그냥「내가 안 가져갔습니다. 난 모르는 일이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냐, 누이야.』 『말했어요. 평범하게 말했다고요, 오라버니.』 『세상의 모든 평범이 목을 매달고 죽었다든?!』 『알게 뭐야. 어차피 내가 하는 말은 아무도 안 믿어주던데. 어떻게 생긴 가락지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발끈해서는 내 방을 뒤지겠다고 윽박지르더라. 그래서 거절하겠습니다, 숙녀라면 방문 전에 약속을 잡아주세요, 그게 예의잖아요? 라고 말해줬지. 그랬더니 찌그러진 양동이처럼 생긴 여자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날 뒤로 확 밀쳤다니까.』 『듣자하니 밀쳐지기 전에 네가 먼저 뺨을 때렸다던데.』 『아닐 걸? 모르긴 몰라도 내가 먼저 때리진 않았을 거야.』 『거기서 왜 추측형이야.』 『내 기억으로는 거의 동시였거든ㅇ... 핫!』 거기까지 말한 휘사가 돌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 무슨 일인데.』 『아, 아무 것도. 진짜 별 거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갑자기 얼굴색이 변했는데 별 거 아니라는 말을 우리가 믿겠니? 뭔데 그래.』 『음... 그러니까 그게.』 소녀는 부끄러워하며 꿰매던 내 옷을 짐짓 뒤로 감추려 했다. 아무래도 속으로 짐작했던게 맞았나 보다. 신분 높은 소녀가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제대로 해낼 리 없었다. 방틀 위로 팽팽하게 잡아당긴 명주 천에 나비와 꽃을 수놓을 줄은 알겠지만 상한 옷을 수선하는 건 어디까지나 딴 세상 일이다. 정확하게는 아래 것들의 일이다. 하여 그녀는 소매를 한 장으로 이루어진 천으로 생각하고 위아래를 촘촘한 박음질로 꿰매버리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 가운데로 팔을 꿸 공간을 없애버린 거였다. 『크크크푸훕!』 참지 못하고 웃었더니 휘사의 뺨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기괴한 소리로 웃을 건 없잖아, 안즈.』 『푸, 푸흡! 크핫핫핫~!』 『어쩜. 시원하게 웃어버리니 더 얄밉네.』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는 나를 향해 색동의 실패가 날아들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08 13:58
2015/09/0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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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빠질 거라 했다. 어린애처럼 별똥별에 대고 소원을 빌기를 원래대로 감쪽같이 붙기를 희망했지만 아무래도 새 손톱이 자랄 때까지 아픔을 참는 수밖에 없나 보다. 『소문의 도련님이시죠?』 그게 어떤 소문이냐 묻고 싶었다. 어쨌거나 좋은 쪽은 아니어서 의원은 치료에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무릎의 상처는 물로 깨끗이 씻은 뒤 별다른 소독도 없이 통증을 완화시켜 준다는 약초즙만 슥슥 발랐다. 내가 봐도 꽤나 엉성한 치료였다. 공인된 자격이 없는 동네 돌팔이 의원도 이보다 더 정성스럽게 치료해준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들은 소문이라는 것이 돈 한 푼 없는 거지라는 내용이었나 보군.」 상처가 덧나도 결코 내 책임은 아닙니다 - 수중의 약병을 주섬주섬 챙기던 사내는 이것으로 자신의 의무는 끝났다며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다.
『끝났습니다.』 『저어, 의원님. 붕대라도 감아주셔야...』 『싫은데요. 달리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정식으로 다른 의원에게 제대로 보이십시오.』 차갑다. 냉정하다. 귀신 같으니라고. 하지만 나는 저 남자를 이해해줘야만 했다. 의술 행위는 어디까지나 공짜가 아니다. 좋은 효과를 보이는 약초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그 가격이 결코 싸지 않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의원의 옷자락을 붙잡고 저 남자가 그렇게나 듣고 싶어 하던 말을 해줘야 했다. 『치료비 때문이라면 내일 숙희 숙사감대부에게 청구하시면 되요.』 『호오~ 그분이 학부생의 치료비를 대신 내주실 거다?』 안 믿는 눈치다. 뿐만 아니라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며 야단을 치는 시선이 되어버렸다. 『저런! 비용을 그분에게 돌리다니. 도련님은 숙희 님이 어떤 분인지 아직 잘 모르시나 보네요.』 『그게 아니라...』 숙희가 보관하고 있는 내 몫의 금전을 설명하려던 찰나, 의원이 의자에 다시 앉았다. 『나도 모르겠다... 좋아요. 어지간히 쓰리고 아픈 모양이니 일단은 속아드리죠. 이번 딱 한 번 만입니다. 그럼 바지를 다시 걷어보세요. 무릎의 상처를 보도록 할까요.』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지 한숨과 함께 다시 내 상처를 봐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중에 미끄러져 넘어진 겁니까?』 방금 전까지 쌩 소리 나게끔 매몰차게 굴던 인간이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느냐며 관심을 보여 왔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냥 넘어져서 이렇게 되긴 힘들텐데.』 멍들고 찢어진 부위를 차분하게 만져보고, 눌러보고, 가만히 주물러도 보았다. 피부가 찢어져 껍질이 들고 일어난 부분엔 불투명한 회색의 고약도 발랐다. 싸한 느낌의 독특한 냄새가 나는 약이었는데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는 향이었다. 계속 코를 대고 있으면 기침이 나는 종류다. 『꿰매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나쁜 피가 고인 곳으로 침을 몇 대 놓죠.』 침을 다 놓자 이번엔 약을 조제해줬다. 별 건 아니고 진통제 종류라고 했다.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절반을 드시고, 남은 건 내일 오후에 드십시오. 다소 어지럼증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고 식사는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약이 더 필요하면... 아시죠?』 『정식으로 다른 의원에게 제대로 보여라?』 『정답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약포를 받는데 삼킨 것도 없이 입안이 매우 썼다.
하염없이 발가락을 꼬물거리고 있자니 길게 늘어진 휘장을 걷으며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린청이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젊은 숙사감이었다. 학부생이 다쳤다는 말에 확인 차 보러 온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그는 당사자인 나를 쏙 빼놓고 처치를 끝마친 의원과 말을 나눴다.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겁니까?』 『본인 입으로는 넘어졌다고 하더군요.』 『상처는?』 『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위에 보고는 해야 하겠죠.』 그리고 의원과 숙사감 두 명은 무슨 골동품 도자기 감정하듯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 되겠다 싶어 끼어든 건 린청이었다. 『원숭이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네? 원숭이요? 말도 안 돼. 그런 것이 어디에 있다고.』 의원이 거짓말을 그렇게 지어내면 곤란하다며 코웃음을 쳤다. 『사실인데요.』 『이래서 변방인들은... 쯧. 이 부근엔 원숭이 같은 건 살고 있지 않아요.』 졸지에 이야기를 꾸며낸 것으로 몰린 린청은 주먹을 쥐고 분노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분명 원숭이로 보이는 뭔가가 안즈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만하세요. 그런게 존재할 리가 없잖습니까. 아니면 올빼미를 잘못 보았겠지요.』 『올빼미가 살기를 드러내고 일부러 사람 가까이 접근하는 법도 있답니까?』
따지듯 고집스럽게 주장하자 듣고 있던 숙사감의 한쪽 눈썹이 좋지 않은 의미로 활처럼 구부러졌다. 허리에 손도 얹었다. 경험으로 보자면 저건 사람을 윽박지를 적에 보이는 태도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근깨 숙사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안경 없인 사물의 모습이 흐리게 보인다며 때 아닌 근시 타령을 했다. 『그러니까, 어디보자.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예당국에서 오신 도련님이죠? 분명 련 가의...』 그리고 묘한 어조로 비웃었다. 『오늘 저녁 여학생부에서 가락지가 없어졌다고 한바탕 소동이 났을 적에도 예당국에서 온 분이 그 가운데 있으셨는데. 그거 참.』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말을 들은 녀석이 어금니를 으득 씹었다. 『휘사 님이셨죠? 그렇게 기억하는데. 두 분이서 같은 나라에서 오셨으니 사촌이신가요?』 『시끄러워! 녀석은 결백하다.』 혈연관계냐고 물어봤는데 듣는 사람이 대답하길, 죄가 없단다. 뭔가 안 맞는 것 같다. 『오,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엉뚱한 걸 잘못 보시고 오해를 하는 버릇이 있는 듯하여.』 린청이 분노하자 주근깨 숙사감이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듣는 입장에서 조롱을 당했다 격분하면 말단 관리 입장에서 맞닥뜨리기가 곤란할 것이다. 너무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의원 또한 숙사감의 옆구리를 조용히 찔러댔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술만 움직여 그만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이 참, 다들 왜 그러시나. 별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진 말아주세요.』 보는 눈이 있는 관계로 주근깨 숙사감이 건성으로 사과했다. 『그래도 말씀드리는데 원숭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주십쇼.』 하여 공식적으로 오늘 밤 일지에는 미끄러져 넘어져 부상당한 학부생 한 명이 치료를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말단 관료인 두 사람은 그렇게 입을 맞추고 어려움 없이 평상시처럼 상황을 정리했다.
『단호하게 그런 건 없었다고 부정을 해버리는 군.』 꼬물거리고 있는 내 발가락 위로 예고도 없이 수건을 휙 집어 던지면서 소년은 넌더리를 냈다. 맨발이 문제였던 걸까, 수건으로 발을 가리고 난 뒤에야 린청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저들은 말단 관료들이야, 린청. 일이 복잡해지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하지.』 『하지만 나는 내가 보고 겪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어.』 『알아.』 다친 건 나인데 왜 린청을 달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가 변방인 출신이라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내가 아니라 송주가 원숭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면 저들의 반응이 아까와는 달랐겠지?』 한 3초 정도 생각하고 대답했다. 『음... 그렇지 않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 『하!』 『관료라는 건 그런 법이니까... 그보다 휘사 님께 무슨 일이 있었어?』 『녀석이 가락지를 훔쳤다고 누명을 뒤집어썼어. 그래서 여학생부에 가봤던 거야.』 『허어.』 그러고 보니 비싼 가락지가 없어졌다며 여자들끼리 머리채를 잡고 있다고 했다. 숙희 숙사감대부는 콩가루 비지떡에 망할 계집애들이라고 욕을 했고. 그게 휘사 님이었던가. 아이고.
Posted by 미야
2015/09/0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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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그걸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할 거라 여긴 내가 바보다. 머리를 흔드는 단순한 몸짓을 취하는 대신 자세한 설명을 해줬어야 했다. 최소한 머리 위를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주던가, 주위를 둘러보라고 권하던가.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건 맹해빠진 나와는 달리 기척에 예민했고, 거기에 반응하는 몸동작 또한 기민했다는 거다. 갑자기 몸을 빙글 돌리더니 들고 있던 우장을 반쯤 접었다가 우리가 대체적으로 눈 깜짝할 사이로 인식하는 속도의 대략 다섯 배 빠르기로 접었던 우장을 도로 펼쳤다. 그냥 펼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우매한 내 눈에도 기라는 걸 흘려보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장 표면에 소복이 내려앉았던 빗물이 삽시간에 작은 폭탄이 되어 빠르게 튕겨나갔는데 그걸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입장에선 빠르게 날아오는 무수히 많은 돌조각에 두들겨 맞는 기분이 들었을 거다. 나무 표면에 생채기가 생겼을 정도다.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었을 그.것.이 끼에엑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저건 뭐지. 털 빠진... 원숭이?』 어두워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 관계로 린청은 처음엔 그것을 원숭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곧 의문이 생겼던 것 같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생동물이라고 하기엔 그 기척이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던 까닭이다. 이마를 찌푸린 소년은 접은 우장을 흡사 검처럼 겨누며 어둠을 응시했다. 그것의 정체가 요괴일지 모른다는 가정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산에서 내려온 들개보다 훨씬 더 위험한 종류라는 건 제대로 인식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놈이 있는 방향으로부터 서서히 뒷걸음질 했다.
『이거 영 살벌하군. 저런 거에 쫓기고 있었던 거야?』 『후반엔.』 『그랬구... 응? 지금 뭐라고. 후반?』 그럼 전반엔 네가 저것을 쫓고 있었다는 거냐 - 힐끔 돌아보는 소년의 눈초리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해도 확실히 하자. 어느 쪽이야, 네가 저걸 노리는 거냐. 아님 저것이 너를 노리는 거냐.』 답변이 곤란했다. 『그게... 음. 그러니까. 처음엔 내가 먼저 쫓고 있었던 건 맞는데... 암튼 복잡해.』 『이 녀석 봐라. 여기서 어떻게 복잡해질 수가 있어!』 어쨌든 멀리 물러나는 것이 우선이다. 버럭 대마왕이 고함을 질러대든 말든 계속해서 머리 위를 조심하며 길을 따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빠르게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절룩거리며 정신 사납게 각기춤이나 추었다. 『틀려. 그쪽은 여학생부로 가는 길이야. 여인네들 숙소로 가서 어쩌려고. 이쪽이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없이 우장을 완전히 접은 그는 턱짓으로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부축의 의미로 내 팔을 안으로부터 감싸 쥐었다.
이제 린청은 저것의 종류가 과연 야생동물이 맞는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는 않았으나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멀리서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보통은 사람을 피해 도망쳐야 옳다. 거기다 이쪽은 혼자가 아니고 일행이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리는 기세다. 그렇다면 ① 녀석의 배가 어지간히 고팠거나, ② 품고 있던 새끼를 사람이 건드려 화가 단단히 났거나, ③ 그것도 아니면 동물로서의 본능이 망가진 경우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굶주렸다고 가정하긴 좀 그렇다. 사람을 먹거리로 삼아야 할 정도로 천재지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린청은 나에게 다짜고짜「원숭이 새끼를 건드렸느냐」따져 물었다.
『나를 뭐로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막 쓰다듬고 그랬던 거 아니야?』 『이 몸에게도 상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에게 멋대로 접근하거나 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래선 얘기가 틀려지잖아. 네가 먼저 저 동물을 쫓고 있었다며.』 분명 그랬긴 하다. 『그래. 처음엔 내가 저것을 쫓았지.』 『어째서? 저것 옆에 붙어 있는 새끼 원숭이가 귀여워서는 아닐테고.』 『새끼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나도 알아.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그러면서 린청은「새끼는 둘째고 저게 암컷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
『그게... 확인을 해야 했어.』 『무엇을?』 『복잡하다고 했잖아. 설명하자면 길어.』 맙소사. 자초지종을 전부 털어놓기엔 장소가 너무 부적절했다. 그러니 이를 어쩐다, 신음하며 허리를 구부정히 했다.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 선 린청은 무릎을 심하게 아파하는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려 어둠을 확인했다. 느껴지는 기척이 있는지 소년의 표정이 심각했다. 무의식중에 허리춤에 달렸을 검을 더듬어 찾았지만 이사실로 와서 검이라는 걸 소지한 적이 없으니 불필요한 동작이었다. 『쳇.』 비를 피하는 용도로 제작된 우장은 겁을 줘서 야생동물을 쫓기에 쓸모가 있긴 하다. 돌진해 오던 멧돼지도 활짝 펼쳐진 우장 앞에선 덩치가 큰 상대를 보았다고 착각하고 멈칫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덤벼드는 것이 야생동물이 아니라면 이런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본능이 아닌 것을 따르고 있다면 얘기가 한참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청화국 같은 나라에서 특수한 목적을 갖고 개를 훈련시킨다고 하더군. 그와 비슷한 걸까?』 나는 차마 저것의 정체가 동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고 가르쳐줄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제국에서 저런 걸 키우다니...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되었군 그래.』 계속 들고 있어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라고 판단한 소년은 우장을 땅바닥에 버렸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저걸 멀리 떼어 버리는게 우선이니까.』 주먹을 쥐고 공격 자세를 취한 린청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의 날숨, 후읍. 두 번째 들숨, 후읍, 그리고는 들입다 나무기둥 한 가운데로 주먹을 찔러 넣었다.
기세가 제법 흉악했기에 녀석의 손이 망가지거나, 아니면 나무줄기에 주먹 모양으로 구멍이 뚫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 못했던 큰 북의 가죽을 때리는 팡,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나무를 어떻게 다뤘기에 북처럼 울렸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속하여 가냘프게 울리는 진동이 이어졌고, 그 떨림은 가지 윗부분까지 곧장 뻗어나갔다. 위로 뻗어갈수록 진동의 폭이 커졌는데 제법 높은 부위까지 이르자 잔가지들이 미친 돌바람을 맞은 양 마구 요동을 쳤다. 그리고 줄기는 마침내 휘어짐을 견디다 못해 반으로 짝 갈라져 - 《케엑!》 그 위에서 맨발로 앉아있던 것이 기겁을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마침 비가 내렸기에 망정이지.』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린청?』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지? 그것과 비슷한 거야. 나무가 젖어 있어서 다행이었어.』 내가 봤을 적엔 그것과 이것은 전혀 비슷하지 않았지만 본인 입으로 비슷하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릴 뿐이다. 『저러고도 끝까지 안 달아나면 어째야 하나 걱정했는데.』 집어 던졌던 우장을 도로 주우면서 이 정도로 끝나 천만 다행이라고 말했다. 『보아하니 놀라서 멀리 튄 것 같군.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지. 다시 돌아온다는 가능성이 아주 없지 않으니까. 이대로 얌전히 떨어져 나가면 좋으련만...』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 안즈. 우장을 쓰면 시야가 가려지니 주변을 경계하려면 이걸 쓸 수 없겠다. 미안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비를 맞아야 할 것 같아.』 『난 상관없는데.』 『네 안색이 영 괜찮지가 않아 보이니까 하는 말이야.』 이 마당에 내 얼굴색 따위가 뭐가 문제람. 그보다 그것으로부터 이세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는 점이 뭇내 아쉬울 뿐이었다.
이세(理勢). 젖은 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는 가운데 문득 깨달았다. 그것이 녀석의 이름이었다. 나를 하나뿐인 친구라고 치켜세웠으면서 동시에 불살라 죽이고 싶으리만치 증오했다. 이사실 제국의 272대 황제. 신룡의 적손이라고 불리는 지고의 존재. 나는 그런 존재로부터 맹목적인 증오를 닮은 사랑을 받았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03 14:46
2015/09/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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