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수수께끼를 푸는 재미를 느끼고 있는 숙희와 달리 엉망으로 얽인 실타래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피로감에 이리저리 몸을 맡길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 증서 말인데요... 아까도 말씀드렸죠? 절반만 진짜라고. 직인은 진짜입니다. 그런데 미묘하게 서식이 잘못되어 있어요. 혹시 안즈 님은 알아 보셨나요. 그러지 말고 좀 들여다 보시구랴. 수수께끼라고요, 수수께끼. 진짜 흥미 없어요? 에이... 재미 없게. 어디가 달랐냐 하면 취급자와 상은의 책임자 이름이 틀리게 나와 있더군요. 사람이 바뀌었는데 이를 위조한 사람은 그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도장은 진짜라서, 어떻게 이런게 가능했는지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 그런 마당에 용케 돈이 지불되었군. 죽어도 삼키면 삼켰지 뱉을 리 없는 돈 귀신들이 차라리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항복을 선언했을 정도라면 알아 볼 조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숙희 숙사감대부의 안색을 흘끔거리며 살폈다. 언제나처럼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지만 오늘따라 그의 존재 자체가 한층 더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쳐다보는 내 시선을 의식한 그가 짤랑 소리를 내는 색동 주머니를 눈높이로 들어 보였다. 안에는 아마도 법종 통화용 대륙 금화가 들었을 것이다. 이걸 다시 동으로 바꾸면 부피가 상당하겠지만 이렇게 압축된 모양새로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간 돈은 악의적인 주술을 사용해가면서까지 강도 상해를 벌인 원흉이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작은 느낌이었다. 주머니의 늘어진 모양으로 짐작하자면 겨우 여덟에서 열 개 정도다. 누구에게는 보석이 가득 달린 최신 유행의 비단옷 한 벌 가격이고 가난한 누구에게는 온 식구의 목숨 값이다. 그리고 누군가 날 가지고 장난을 치는 금액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야말로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그 속뜻을 모르지 않은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되묻는 짓은 하지 않았다. 『빈사국에서 온 지리가 가의 안즈입니다.』 아마도 지금 내 얼굴은 답답할 지경으로 바보스럽고 두드리면 텅 빈 소리가 날 정도로 멍청해 보였을 거다. 이에 반응하여 숙희는 손등으로 책상을 콩콩 두르렸다. 『그런 걸 질문 드린게 아닙니다, 안즈 님. 혹시... 빈사국의 숨겨진 왕자나 왕족의 사생아 비슷한 거우? 생각해보니 이사실로 오는 도중에도 안즈 님만 습격을 받았었지요? 강도에게 두 번 당하는 운세라는 거, 전 안 믿어요. 비슷한 일이 두 번 반복되면 우연이 아닌 법이죠. 하여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라도?』 단칼에 부정했다. 설마. 불알도 안 달렸는데 내 신분이 숨겨진 왕위 계승자일 리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아, 소리를 내고 이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 말씀에 제 친모의 신분이 천민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그것도 출생의 비밀에 속할까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에 있느냐며 숙희 숙사감대부가 한 뼘 두께의 장부를 내 모가지 대신 쥐고 흔들어댔다. 손등에 파랗게 핏줄도 도드라졌다. 『이거, 이거. 불알이 없는게 아니라 배알이 없구먼! 이보쇼, 답답해 미치겠네. 지금 이웃집에 불났소?!』 죽을 뻔한 상황을 겪었으면서 너무 느긋한 거 아니냐고 비난을 받았지만 사정의 심각함은 이쪽에서도 잘 인지하고 있다. 다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정신이 옷 갈아입고 멀리 산 너머까지 외출을 나간 듯한 이 멍한 표정은 순전히 버릇이다.
쥐고 있던 장부를 먼지 휘날리게 집어던진 그가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건 제 개인 의견인데 차라리 국적을 포기하는 걸 고려하는 건 어때요.』 『그런게 가능해요?』 『까다롭지만 아주 불가능하진 않아요. 여기서 누군가의 양자가 되는 거에요.』 『누구의?』 『그거야... 일단. 길거리에서 새 아버지 구함, 광고라도 해봐야 알겠죠.』 남의 집에 불났다는 투로 말하는 건 내가 아니고 당신이야! 이마를 접으며 파리를 내쫓는 시늉을 해보였다. 게다가 그다지 좋은 생각도 아니다. 내가 이사실 제국에 눌러 앉겠다고 하는 순간 모르긴 몰라도 난리가 날 거다. 그걸 모르는 숙사감대부는 오늘 당장 결정해야될 문제는 아니니 천천히 고민을 더 해보라고 조언해줬다.
『그건 그렇고 이 금화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머무는 창고에는 금화를 숨겨둘만한 은밀한 장소가 없다. 바닥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귀중품을 숨긴다고 해도 배고픈 쥐가 썩은 고구마 대신 물어 가면 그만이었다. 은밀히 속주머니로 만들어 허리춤에 차고 다닐 수도 있겠지만 귀찮은 짓이다. 움직일 때마다 짤랑 소리를 내면 놀림거리밖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금화는 당분간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괜찮겠지요? 혹시 특별히 쓰고 싶은 일이 있다던가... 예를 들자면 무지무지무지 비싼 고급 강좌에 등록을 한다던가... 옳커니. 일단 필기구라도 주문할까요?』 그동안 얼마나 알차게 잘 놀았으면「공부 좀 시켜보자!」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사친으로 와서 제대로 된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공부를 징그럽게 안 하세요 - 얼굴색 퍼런 궁정악사 귀신 누박기도 그렇고 락연도 그 말을 했었다. 귀신도 염려할 정도로 놀았으면 끝장이지... 나는 쓰게 웃으며 새 필기구 구입에 동의했다. 대신 너무 비싼 것은 필요 없으니 최대한 실용적인 것으로 가져다 달라 못 박았다. 그러다 생각났다. 『혹시 붓 말고 펜을 구할 수 있을까요.』 『호오, 이거 참. 안즈 님은 요즘 유행하는 가늠붓에 대해 잘 아십니까. 그거 의외네.』 『가늠붓이라뇨.』 『그게 펜이에요, 펜. 그럼 은촉으로 멋드러진 걸로 하나. 아니다, 둘. 먹물 대신 잉크.』 하지만 필기구에 대한 글자벌레의 흥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아서 헛기침을 하며 누군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숙사감 중 한 명이었다. 낯이 익지 않은 자였는데 소매장식의 띠가 밝은 귤색이었다. 흰색, 귤색, 파랑, 자주색 순서이니 말단직이라고 보면 되었다.
『왜.』 『죄송합니다. 도움이 필요해요. 싸움이 났습니다.』 『어디서.』 『여학생부에서.』 『어째서.』 『비싼 가락지가 없어졌다네요. 네가 가져갔네 안 가져갔네 이러면서 서로 머리채를 잡고 있습니다.』 숙사감대부의 어금니로 썩은 양파가 끼었다. 『콩가루 비지떡 같으니라고, 망할 계집애들!』 거칠게 욕설을 내뱉다 말고 흠칫해서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쓸었다. 그러나 본심은 신분 높은 숙녀들을 밧줄로 묶어 공중에 매달아놓고 지붕 위로 올렸다 내렸다 하기를 반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여자를 상대로 대륙어 표준 사전으로 사타구니 한 가운데를 찍는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입맛을 쩝쩝 다신 후 흉기 - 대륙어 표준 사전으로부터 시커멓게 색이 죽은 눈을 휙 돌리는 걸 봐선 내 짐작이 맞다. 투덜대며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허리가 노인네처럼 구부정하다. 『빌어먹을, 여기가 권력암투로 얼룩진 궁궐 한 가운데야?! 아니잖아. 그런데 하루도 편할 날이 없군.』
내가 보기엔 비교가 잘못되었다. 제국 이사실은 다른 나라와 달리 궁중암투가 그다지 극적으로 피어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제국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그 위와 다시 그 위로 올라앉은 용신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봐라. 반역을 모의하고 황제를 퇴위시켜봤자 신룡이 콧방귀를 뀌면 그 순간부터 여름 햇살에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신세다. 스스로 자기 머리에 기름을 붓겠다며 앙탈을 부려봤자 역정을 내는 적룡에겐 한 입 꺼리다. 실제로 그런 까닭으로 비명횡사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 세 명 정도? 「잠깐만. 그 중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고 백성을 대신해서 정신 나간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려던 자도 있었지. 결말이 꽤 입맛 쓰게 끝났는데. 그 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하하, 까먹었다.」 금광의 소유권을 두고 재상 두 명이서 박 터지게 싸울 수는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장군 둘이서 칼부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저 높은 곳으로부터 적룡이 친히 내려와 이 세계는 언제까지나 평화롭다.
낮게 깔린 구름이 한층 더 짙은 먹색으로 변하면서 물방울이 창틀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이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군요. 우장이 있으십니까.』 가락지를 두고 싸운다는 애들을 맨손으로 잡으러 가는 도중에 숙희가 빈손인 나를 걱정했다. 그래봤자 지나가는 여름 소나기다. 쾅쾅 울리며 가깝게 다가오는 천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 무척 오랜만입니다. 별 내용 없는 비축분 공개... ※
Posted by 미야
2015/08/23 16:54
2015/08/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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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목표물을 뒤에서 껴안고 목을 조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라벽치의 가정은 잘못되었다. 후끈거리는 팔뚝이며 등에 닿는 단단한 가슴팍이며 하는 느낌은 차라리 처녀를 겁탈하는 치한에 가까웠다. 그래도 뭐라도 해보라며 부추기니까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해본다. 그럼 잘근잘근 밟아볼까, 하지만 뒤로 끌어당겨진 탓에 나는 지금 한껏 까치발을 하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치한의 다리를 걷어차려 했지만 아쉽게도 사람의 신체는 뒷발질을 하기엔 최적화가 안 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나와 대화하기를 계속했다. 덕분에 애초부터 목적이 이쪽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었다. 『그 남자가 널 상대로 강도짓을 하려고 했다는 것도 수상해. 무슨 재주로 폐쇄적인 영업을 하는 소극 상은으로 네가 돈을 찾으러 온다는 걸 알았을까.』 밀착된 자세에서 속삭이며 묻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니 기분이 이상했다. 『상은의 직원이 증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렸을 수도 있죠. 좋은 먹잇감이 나타났다면서... 욧!』 이번에는 팔꿈치로 뒤를 힘껏 찍었다. 그래봤자 이라벽치는 약간만 반응했다. 근육이 두꺼운 탓에 유리를 박아 넣어도 개의치 않아할 사내다. 그럼 맨손인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밀착은 더 심해져 목덜미에 닿는 콧김이 덥다 느껴질 지경이었다. 『뭐,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 그런데 넌 아까부터 꼭 남의 일인 것처럼 담담하게 얘기하는구나.』 대답은 둘째고 일단 살아야겠다. 끙끙대며 팔을 최대한 위로 뻗어 말랑거리는 귀를 잡고 세게 비틀었다. 『아이쿠!』 귀가 떨어질 지경이 되자 이라벽치가 슬그머니 결박을 풀어주었다. 아싸, 성공.
『이게 정말로 안즈에게 도움이 되는 겁니까. 내 판단엔 전혀 아닌데.』 정해진 달리기를 다 마친 후, 제법 거리를 두고 서서 우리 두 사람의 엉겨 붙음을 계속 못 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린청이 그 즉시 쏘아붙였다. 애초부터 제국인인 이라벽치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던 아이다. 그의 눈에는「커다란 짐승 같은 놈이 애를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로 보였던 것 같다. 하긴, 커다란 거울이 옆에 있었다면 나 역시 거울에 비친 우리들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보자보자 하니 아까부터 뭡니까. 팔을 잡아당기거나, 다리를 걸거나, 뒤에서 끌어안거나!』 아직 변성기를 맞지 않은 소년의 성대는 말도 안 되는 영역의 고음처리가 가능했다. 『어쩔 수 없잖아, 호신술을 배우는게 처음이라는데. 누구나 다 이렇게 시작한다고. 가벼운 몸싸움부터 시작해 점차 고급 기술로 넘어가야지, 첫 술에 물 위를 걷는 법부터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구차한 변명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그런 식으로 몸싸움을 가르칩니까! 왜 끌어안는 건데요.』 추행범으로 몰린 이라벽치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끌어안은 거 아니다. 가상의 적으로 셈치고 공격한 거야.』 『제가 봤을 적엔 희롱하는 것으로밖엔 안 보이던데요.』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다. 오해야!』 그래도 린청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더하여 면박까지 줬다. 『어쨌든 당신은 그렇게 썩 좋은 스승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방식은 영 글러먹었어 - 메기수염처럼 하얗게 탈색된 이라벽치가 산소를 갈구하며 입을 뻐끔거리자 린청은 얼른 내 손목을 붙잡았다. 『목검을 들 수 있게 되기 전까진 저 남자에게서가 아니라 차라리 나에게 배워. 예당국 련 가의 장남 린청, 다듬어지지 않은 무예 실력이지만 너에게 기초 정도는 제대로 가르쳐줄 수 있다.』 『아니, 일부러 그럴 필요까지는...』 나는 진짜로 이런 걸 배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린청은 나의 우유부단한 거절을 다르게 이해했다. 『미안해할 거 없어. 신세진다고 생각지 마라. 단지 내가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니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손까지 휘저었지만 이미 안 듣고 있다. 『그럼 첫 수업으로 알아두면 유용한 기술 한 가지를 가르쳐 주마, 안즈. 적이 멍청하게 굴면서 머뭇거리면 주저하지 말고 눈을 찔러.』 소년은 예고도 없이 검지를 들어 이라벽치의 눈을 푸욱 건드렸다. 『악~! 내 눈!』 『봐, 효과 좋지? 상대가 그 유명한 멸락 장군이라도 꼼짝을 못 하게 된다고.』 남의 눈을 찔러놓고도 속 시원해하는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한참 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생각지도 못한 부자가 되어 있었다. 황금을 입힌 종이로 뒤를 닦을 정도의 갑부는 아니었지만 땡전 한 닢 없던 어제와 비교하자면 부자가 맞았다. 『증서에 적혀진 금액을 받아왔습니다. 것보다... 이 화상아.』 숙희 숙사감대부는 사건 이후 왜 자기부터 찾아오지 않았느냐며 성질을 부렸다. 한가롭게 놀면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던 건 아닌데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내 모습을 보더니 상황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로 몰아붙이며 벌컥 화를 냈다. 『안즈 님이 처한 상황이 어떻다는 건 알고 계시는 거 맞습니까? 지금까지 어디서 누구랑 놀고 있었던 겁니까.』 『안 놀았는데요.』 『아이고, 잘도 그랬겠다... 쯧쯧.』 안 놀았다는데 더 화를 낸다. 진짜지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성격 급한 사람만 모이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증서는 절반만 진짜였지만 소극 상은에서 일이 커지는 걸 꺼려했던지 손실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재원 부석상위 앞으로 왔던 편지와 증서를 다시 꺼내와 내 앞에 펼쳐놓았다. 염연히 사건 증거물일 텐데 어떻게 그게 일개 숙사감대부인 숙희 손아귀로 굴러 떨어졌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어쨌든 먼저 봤던 그 편지가 맞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것들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사납게 노려봐도 어쩔 수 없다. 여기 놓인 편지의 필체가 아버지의 것이 맞느냐 물어도 대답은 곤란했다. 신분 높은 이가 다른 사람에게 대필은 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있고, 유려한 필체로 대필을 해주는 걸로 밥 먹고 사는 중인도 있는 마당에... 한때 나도 대필을 하는 걸로 생업을 가진 적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니다.
『본국에서 가져온 아버님이 주신 글자가 있으시지요?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게 과연 나에게 있던가, 가만 생각했다가 자개 장식이 된「자결 상자」존재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물품의 존재를 제3자가 정확히 꿰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숙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 남자라면 쌈지통에 든 바늘 개수까지 전부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업무를 처리하는 무시무시한 속도와 양을 봐도 이 남자는 결코 얕잡아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내 물건이 숙사감대부의 책상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리고 있자니 숙희가 보일락 말락 고개를 숙였다.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개인 숙소에서 꺼내온 점을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불쾌한 기분이 들겠지만 이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굳이 숨겨야 할 물건도 아닌데요, 뭐.』 『그거 참, 하해와 같은 이해심. 그렇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뚝뚝 끊어지는 이상한 문장으로 양해를 구한 그는 상자를 열고 그 속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나란히 펼쳐놓고 보니 오싹했다. 집안의 명예를 항시 잊지 말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부석상위 앞으로 도달한 것과 그 형태가 매우 흡사했다. 누가 봐도 같은 사람이 쓴 글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획의 삐침과 기울어짐, 올라감. 줄의 간격과 크기까지 판박이라서 일부러 돋보기를 들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도출된 결론은 하나였다. 하지만 숙희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점이 보이는가 보다. 『먼저 부석상위 앞으로 온 편지를 볼까요.』그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사실 관습에 대해 아는 내용이 부족하여 일이 서툴렀습니다. 미리 챙기질 못한 것은 제 과오입니다. 요청컨대 나의 아이더러 소극 상은에 들러 “필요한” 금전을 찾으라 하십시오. 동봉한 것은 증서입니다.
이 간략한 문장에서 그는 필요한, 이라고 적은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자에서 꺼낸 편지에도 운 좋게 같은 단어가 적혀져 있더군요. 여기 이 부분이죠.「네게 “필요한”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너의 부족함을 먼저 인식하고 이를 채워줄 이에게 존경심을 보여...」자, 그럼 같이 나란히 두고 비교를 해볼까요. 어때요, 안즈 님이 보기에는.』 비교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로 쌍둥이처럼 똑같았으니까. 『똑같죠. 똑같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마치 습지에 비치는 모양대로 정성껏 그려 넣은 적은 것처럼.』 숙희는 재차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다듬지 않은 수염의 까끌거리는 촉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 재밌어요, 이건. 마치 도전해 봐라, 주장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Posted by 미야
2015/08/1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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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걷기와 천천히 뛰기를 몇번이나 반복하여 가까스로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생물 오징어처럼 어기적거리며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나를 향해 이라벽치는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표정이 참으로 대견하구나 칭찬을 하는 것 같아 몸은 힘들었어도 기분은 좋았다. 이런게 아마 성취감일 것이다. 땀으로 따끔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녹초가 되었어도 상쾌했다. 달리자, 이대로 이라벽치에게 달려가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 하? 기가 막히게도 이 미친 천둥 솥뚜껑은 갑자기 기합을 넣어가며 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아니, 시키는 대로 뜀박질을 한 사람에게 막판에 이르러 이런 식의 행패를 부리는 법이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에서 신호가 번쩍번쩍 울렸다. 주먹이 커다란 수박처럼 확대되어 보였으나 그걸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솥뚜껑을 향해 제법 빠르게 돌진하는 중이었고, 뭐랄까. 튀어나온 기둥을 향해 머리를 깨부수고자 달려가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느리게 반응하는 둔한 몸은 여전히 달리기 자세를 유지했다. 한술 더 떠서 왼쪽 발목을 삐긋했다. 참 가지가지 하는 몸뚱이다. 하여 시선으로는 계속 이라벽치의 주먹을 쫓았지만 몸은 왼편으로 크게 쏠렸다.
『동체시력은 괜찮은데 역시 몸이 안 따라주는구나. 역시 체력이 문제군.』 꼭 때릴 것처럼 굴던 남자는 간발의 차이로 쥐었던 주먹을 도로 활짝 펴고 넘어지기 일보직전의 나를 붙들어줬다. 『잘 했다, 안즈.』 『허억, 허억! 지금 방금 뭐였습니까?!』 『뭐긴. 죽었다 살아난 거지.』 그렇게 말하며 별 거 아니라는 동작으로 발목을 툭 건드렸다. 하지만 이 남자의 완력은 장난이 아니라서 신발코로 가볍게 툭 치는 것만으로도 무릎 아래까지 찌르르 하는 통증이 번져왔다. 『아까 접지르던 것 같던데.』 『그걸 확인한답시고 제 뼈를 부러뜨릴 겁니까?! 살살 좀 해주세요.』 『아니 이놈아. 그 정도에 뼈가 왜 부러져. 말라붙은 개똥도 안 부러진다.』 항의했더니 엄살쟁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투덜대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신을 벗고 왼쪽 발목의 상태를 살펴봤다. 엄지로 누르자 찌릿한 감이 들었다. 잘 됐네, 핑계를 대고 오늘은 더 못 하겠다 말해야겠다.
『그래도 눈이라도 좋으니 다행이다. 보여도 피하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그래도 눈으로 보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면 몸은 어떻게든 반응하기 마련이니까...』 『어떻게든 반응한다고요? 에이. 그럼 날아오는 화살도 눈으로 보면 피할 수 있게요.』 『나는 피해.』 『......』 『돌진하여 달려오는 멧돼지도 충분히 피할 수 있고말고. 몸을 계속하여 단련하면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말도 안 돼. 일반화가 너무 심각하십니다. 100년을 노력해도 저는 그런 경지에는 못 올라갑니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지만 이라벽치는 그것으로 결론을 도출하여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려 했다. 『자! 그러니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부지런히 몸을 단련하도록 합니다!」우렁찬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픈 발목을 살살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길 포기하면 됩니다.』 『그래. 열심히 체력을 키우...... 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조차 살아남겠노라 각오했다면 제일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하라. 무기를 드는 건 그 다음이다. 에이드 체이스만 치토.』
이라벽치는 치토라는 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누구냐.』 『이라벽치 님은 치토를 모르십니까?』 『그 기분 나쁜 말을 한 자가 누군데.』되물으며 그는 진심으로 불쾌해했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하여 살아남은 자입니다. 북대륙 채턴 지방 사람이에요.』 『들어본 적 없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무척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요. 끔찍한 재해가 닥쳤을 적에 밀려오는 식인 요괴들로부터 길마론 북서부를 훌륭하게 지켜냈어요.』 『그럼 그 자식이 영웅이란 말이냐?!』 『인간임을 포기했는데 영웅일 리 없죠. 나중에 그의 시신은 여섯 토막으로 잘려나가 훼손되었어요.』 요괴들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도 움직임이 둔한 어린이와 여성을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발 빠르게 도망치곤 했다. 나중을 도모하기 위해 인구 2천의 마을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전략은 훌륭했지만 인간이 할 말한 짓은 아니어서 치토의 도움으로 명줄이 길어진 왕조차 감사 인사를 생략한 채 그를 산채로 씹어 먹고 싶어 했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합니다 - 치토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증오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재해가 멎자 왕은 재빨리 그를 사형대 위로 올렸다.
『그렇다면 얘야, 너도 살기 위해서라면 인간이길 포기하겠다는 거냐?』 『아뇨.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눈을 있는대로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이라벽치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 그렇지?』 『모두로부터 욕설을 들어가며 사형대에서 목이 잘리는 건 싫습니다. 전 늙어 죽는 것이 소원이라서요.』 『그게 아니잖아!』 어쨌든 나는「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을 기억했을 뿐이다. 치토는 사형대 위에 오르기 전 감옥에서 짧막한 수기를 썼다. 나는 인간이길 포기했었노라고. 요괴와 싸우기 위해 요괴보다 더 지독한 짓을 저질렀다고.
신을 고쳐 신고 아픈 발목을 좌우로 돌려보았다. 다행히 심하게 욱씬거리지는 않았다. 차가운 물수건으로 화기를 내리고 하루나 이틀 정도 조심하면 기분 나쁜 이 감각도 곧 사라질 것이다. 『저라면 도망칠 겁니다.』 『음?』 『고난과 역경이 다가온다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칠 거에요.』 『그 다리와 그 체력으로?』 허리에 손을 얹은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겠다며 마치 절을 하듯 상체를 구부렸다. 『사내답게 정면에서 맞서 싸우라고는 말하지 않겠어. 지금의 네 상황에선 무리라는 걸 잘 아니까. 허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 가봤자 쫓아오는 악당에게 금방 잡힐텐데?』 이라벽치는 다시 원래의 결론 - 맞춤형 결론에 무사히 도달했음에 온몸으로 기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한다?』 체력을 기르자. 아자.
『칼을 들고 네게 덤벼들었다던 남자 말이다. 소극 상은 사람 말로는 너와 같은 빈사국 사람이라던데.』 이라벽치의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곰 같은 덩치에게 뒤로 껴안긴 채 목조르기라는 것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공격하는 시늉만 해 보이는 거라고 했지만 그거야 곰의 판단에서나 그런 것이고, 곰의 펑퍼짐한 앞발에 당한 나 같은 인간은 그냥 죽을 맛이었다. 『켁. 커억!』 『혹시 네가 보기에 얼굴이 낯익지는 않든?』 『그, 그게! 숨이 막! 켁!』 『그런데 그 남자의 주머니에 호패가 있더라니까. 빈사국 사람이 아니고 우리 이사실 백성이었다.』 어떻게든 조르기 공격에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쓰던 나는 잠시 버둥거리던 걸 멈췄다. 『몰래 훔친 걸까요?』 『하지만 호패의 원래 주인은 자기 걸 잃어버린 적도 없다고 그러던데.』 하여 나란히 놓고 보니 거짓말처럼 똑같이 생긴 호패가 두 개가 되었다. 직접 만든 두부를 팔던 장사꾼은 새파랗게 질려 쥐고 있던 손님 끌기용 딸랑이 방울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남에게 빌려준 적도 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똑같이 생긴 걸 깎아 만든 적도 없다고 했다. 호패를 위조하면 그 형벌이 매우 무겁다. 그걸 모르지 않기에 사내는 겁에 질렸다. 「억울하옵니다! 소인은 정말 억울하옵니다! 나리, 진짜로 저에겐 죄가 없어요!」 이라벽치는 사내의 주장을 믿어주었다. 『설마, 두부 장수가 그랬을라고. 왜냐하면 그 장사꾼이 팔던 두부가 모양이 영 예쁘지가 않고 이상했거든.』 『......』 『상품으로 내놓은 두부도 그 꼴인데 그 실력으로 호패를 위조하겠어? 그렇게 말했더니 이 인간이 갑자기 자기가 만든 두부는 모양은 그래도 맛 하나는 기가 막힌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거야. 단골도 얼마나 많은지 한 번 보라면서 거래처 장부를 꺼내 오더군.』 언짢은 기억 때문일까, 목을 조르는 힘이 약간 세졌다.
Posted by 미야
2015/08/12 13:45
2015/08/1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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