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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이 차원이동물이면 주인공은 김태영이 되겠지만 정체는 괴기물이에요... ※


몇 년 전, 차가운 바다로 떨어진 충격으로 이후 태영의 기억은 뒤죽박죽으로 섞인데다 일부가 누락되어 버렸다.
자신에게 연년생 누이가 있다는 건 기억한다. 그런데 그 얼굴을 떠올리면 눈과 코가 없었다. 달걀형인 하얀 얼굴에 입술만 이물질처럼 떠올랐는데 특이하게 윗입술에 검게 점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여동생이 섹시하게 보인다며 자랑하던게 기억난다. 그런데 태영이 기억하는 동생의 얼굴은 섹시함과는 거리가 먼 달걀귀신이어서 유감이었다.
나머지도 죄다 흐릿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가족의 이름이 뭐였느냐 질문하면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가 중소기업 회사원이었다는 건 안다. 특허가 있는 정밀기계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어머니는 요리를 잘 못했다. 생일은 8월 12일, 당신이 태어난 날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부근으로 하수가 역류하여 홍수가 났었노라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다고... 그런데 어머니 이름 석 자가 기억 안 난다.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언젠가 전부 기억이 날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태영.」
「그 말을 들은지 벌써 4년이나 흘렀어.」
「평생이 흐른 건 아니잖니. 이제 겨우 4년이야.」
「...... 말 하는 꼬락서니하곤. 저주하는 놈 아니랄까봐.」

간혹 꿈을 꾸는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전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풍경과 지루하다 싶은 네모난 건물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 편의점에서 먹던 컵라면의 맛... 그리고 동시에 가루가 되어 산산히 부서졌다. 알고 있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생소하다. 전부 착각인 것 같고, 찰흙으로 빚어진 가짜처럼 느껴지고, 과거에 그러한 풍경을 정말로 보았는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알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태영은 머리를 휘젓고 다니는 이러한 단편적인 기억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 아니고 흡사 책을 읽어서 습득한 지식처럼 느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함.

『미인대회라는 걸 구경해본 적 있어? 텐.』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걷던 오남이 어둡게 그늘진 태영의 안색을 깨닫고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응. 본 적 있어.』
이번에도 기억이면서 동시에 지식처럼 느껴지는 파편들을 접한 태영은 가볍게 두통을 느꼈다.
그의 고향에서는 매년 미인대회를 열었다. 이미 대중적인 인기는 식었고 다들 식상해 하는 행사였다. 그 또한 흥미가 동하지 않아 그다지 관심 있게 보지 않았는데 늘씬한 몸매의 후보들이 포즈를 취한 수영복 심사 사진만큼은 챙겨 본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한창나이인지라 훤히 드러난 가슴 굴곡이나 골반 라인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왕관을 쓴 드레스 차림새의 사진은 별로였다. 그보다는 단연코 수영복이 최고였다.

『수영복 심사?』
각지를 떠도는 장사치인 만큼 아는 지식은 많았지만 오남은 환상대륙에서 쓰이는 용어엔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태영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그의 궁금증은 말 그대로 궁금증으로 끝났다.
대신 태영은 눈을 가늘게 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동대륙의 여성들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속옷과도 같은 의상을 입고 과연 무대 위로 오를 것인가.
글쎄다. 이곳은 수영복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다. 헤엄을 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물에 들어갔다가, 허겁지겁 도로 나와서, 젖은 옷을 벗고 새 걸로 갈아입었다.
「물속에 무서운 것들이 있으니까 물놀이라는 걸 모르는 거지.」
그렇다면 물놀이를 안 해도 좋으니 손바닥 크기의 천을 건네주며 입어보라 해보면 어떨까.
십중팔구 뺨을 맞을 것이다. 더러는 이런 남부끄러운 걸 몸에 걸치도록 요구하기 전에 가족에게 결혼 허락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며 강한 어조로 항의할 것이다.
「수영복 심사는 무리군.」
실망하며 지나가는 마을 여인들의 옷차림으로 눈을 주었다.
허리를 조이고, 주름을 잔뜩 넣어 땅에 끌리도록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보자 왠지 모르게「르네상스」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은 났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태영은 알 수 없었다. 뇌에는 저장이 되어 있는데 회로들이 다들 엉키고 꼬여 부르는 응답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남. 르네상스라는게 뭔지 알아?』
『르네상스? 아까 말했던 수영복 심사를 말하는 건가.』
두 사람은 멀뚱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이건 아니잖아」속으로 중얼거렸다.

『에이... 뭐야, 결론은 미인대회라는 걸 잘 모르는구먼.』
『안다니까 자꾸 그러네.』
『좋아. 그럼 텐, 자네가 아는 미인대회라는 걸 나에게 한 번 설명해보게.』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몸매 죽이는 예쁜 여자를 뽑는 거지 뭐. 그보다 오남. 너, 말투 바뀌었어.』
순간적으로 태영의 머릿속으로 다시「카멜레온」이라는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진짜지 성가시다. 이런 식으로 환상대륙에서 쓰던 단어라던가 이미지 같은 것들이 예고도 없이 툭툭 치고 나갈 적마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리고 그 또한 형태가 불분명한 유령이 된 느낌이다. 이곳에 속해 있으되 속해 있지 않다. 눈이 하나 뿐인 주민들 속에서 눈 두 개를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정상이지만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눈 하나를 뽑아 남들처럼 외눈박이가 되어야 할까. 쓸데없이 초조해진다.

돌아와서.
오남은 카멜레온 같은 자다. 빨간 나뭇잎 사이에선 자신의 빛깔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사내다. 파랗게 칠해진 모래밭에선 새파랗게 빛날 것이다. 말투라던가 표정,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주변 색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한다.
『그야 난 뼛속까지 장사꾼이니까.』
원래 그런 거라며 오남은 그런 자신의 버릇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태영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았던 장사꾼들 중 이런 식으로 휙휙 변하는 자를 본 적이 없다.
때로는 성격도 변하는 것 같다. 더하여 가끔은 외모도 달라진다 싶었다. 란데가스 제국의 황궁 안에서의 그는 자비심이라는 걸 모르는 냉혹한 귀족처럼 보였는데 그때의 그의 얼굴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하품하는 평소의 얼굴과는 많이 달라서 딴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랬어?』
『그랬다니까.』
『그보다 카멜레온이라는 걸 보고 싶군. 피부의 색이 자유자재로 바뀐다고? 어떤 동물일지 궁금해.』
『실제로 보면 실망할 걸? 눈이 빙글빙글, 이상하게 생겼거든. 게다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따로 놀아.』
『뭐야. 그건.』
상상해보니 웃겼던 것 같다. 오남이 큭큭 소리를 내어 웃었다.
듣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부드러운 웃음소리여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덩달아 엄마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태영 역시 마주보고 서서 웃었다.
『양쪽 눈이 짝짝이로 돈다고? 어쩐지 더 마음에 들었어. 진짜야. 기회가 닿으면 정말 보고 싶어.』
『무리야. 나도 텔레비전을 통해 본게 전부니까. 탄냐파나 코카처럼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텔레비전?』
『그런게 있어.』

또 돌아와서.
광장에는 미인대회 우승 후보자에 대한 선전물이 어지럽게 사방에 걸려 있었다.
전신 초상화는 헉 소리 나올 정도로 고가인 관계로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자비를 들여 얼굴 초상화를 그려온 후보자는 몇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은「꾀꼬리와도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라느니,「겨울의 눈송이를 연상시키는 무결점 하얀 피부」식의 내용을 글로 적어 선전을 꾀하고 있었다.
태영은 턱을 괴고 생각했다. 말로 하는 건 그다지 효과가 없을텐데.
그래서 후보들은 높은 가마 위에 올라타 군중들 사이로 다니며 자신을 뽐내는 것으로 인지도를 높이려 했다.
『물어보니 아직 행렬 시간이 아니라고 하는군.』
『보통 몇 시에 하는데.』
『오전 11시, 그리고 오후 3시. 하루에 두 번. 오늘은 좀 늦을 수도 있다고 했어.』
고개를 끄덕거린 태영은 벽에 덕지덕지 붙은 선전 문구에 다시 집중했다.
비단과도 같은 머리카락. 사슴과도 같은 눈동자. 치유의 힘을 가졌어요, 감기 정도는 치료할 수 있어요. 2개 국어 자유자재로 사용. 사과와도 같은 뺨. 앙증맞은 발. 다섯 자리 숫자의 암산 가능.
이래서는 미인대회가 아니라 흡사 취업 박람회 같다는 것이 그 첫인상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18 15:22 2015/09/1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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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왕국에서 8년이라는 긴 주기를 가진 축제를 언제부터 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진 않다.
말단 경비원 루안의 나이는 올해 스물 아홉이다. 다섯 살 시절에 사람이 꽉 들어찬 광장에서 만세를 부르며 신나게 뛰어놀던 추억이 있으니 최소 3회는 넘었다. 다섯 살 무렵, 열세 살 무렵, 스물한 살 무렵. 그리고 올해.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내가 젊었을 시절엔 이런 지랄 맞은 행사는 없었어.」라고 했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연하인 잡화상 주인 토마스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으니 100년 전통을 가진 축제는 분명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언젠가 루안은 없던 축제를 새로 만든 계기가 있지 않았느냐 어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무릇 축제라는 건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함이니 하다못해 왕비님의 입덧도 좋은 핑계가 된다. 아니면 단순히 연못에서 독특한 무지개 빛깔의 잉어를 잡아 올렸던 것을 기념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잉어? 무지개 빛깔의?」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왕비님 입덧은 분명 아니야. 그분의 머리카락이 이미 오래 전에 하얗게 새셨으니까.」
그의 아버지는 머리를 긁었을 뿐, 이렇다 할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상관없었을 수도 있다. 그냥 그럴듯하게 풍년 기원이라던가, 왕족의 만수무강 기원이라던가, 지역 경제 활성화 같은 내용을 이유로 내세웠을 뿐, 그저 날씨 좋은 계절에 흥청망청 놀자 판을 벌리는게 진솔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는 주당들이 비가 와서 한 잔, 울적해서 한 잔, 여종업원 얼굴이 이상하게 예뻐 보여서 한 잔, 이러며 각각의 술잔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러니 오늘에 이르러 8년 축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건 쓸데없다.

『왕국 제일 미인을 뽑는 대회라고 들었습니다만.』
『뭐...... 그렇죠.』
분명 미인대회이긴 하다. 그래도 루안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슬쩍 옆으로 비킨 채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미인대회에선 아름다운 아가씨를 뽑는 법인데 비타아른 공왕국에선 이게 약간 달랐다.
그들은 미녀(女)가 아닌 미인(人)을 뽑는다. 즉, 아름다움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다. 하여 우승자는 남자일 수도 있다.

오남은 정색했다.
『여성이 아닌 남자가 미인대회 우승자로 뽑힌 적도 있습니까?』
『있는 걸로 압니다.』
『출전자들이 우승자를 죽이겠다며 이를 갈았겠군.』
것보다 다른 문제가 있다.
『오남. 너네 가게에서 남성복도 취급해?』
『그게... 커프스 단추 정도는 팔긴 하는데. 음.』
『안 판다는 거구나. 그럼 이참에 남성복 영역까지의 확장을 고려하는 건 어때.』
『싫어!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싫어! 그랬다간 하루가 멀다하고 맨날 --- 에게 불려다니게 될 테니까.』
삐--- 로 처리된 자의 이름은 루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남이 알아듣지 못하게끔 입술을 벌리지 않은 채 웅얼거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오남이 우물거린 이름을 잘 알아들었던 것 같다.
『그 남자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허나 매출이 껑충 뛸 걸? 돈이 궤짝으로 쌓일 걸 상상하면 기쁘지 않아?』
『매출 이전에 신경성 위염으로 죽을 거다.』
『엄살은. 고깔광대 독버섯을 삼켜도 멀쩡하게 소화 다 시키고 트림만 잘하는 주제에.』
『내가 언제! 이 몸은 섬세하고 예민해! 독버섯을 와구와구 씹어 먹는 무식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리고 자칭 델리케이트한 남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리듬에 맞춰 톡톡 건드렸다.

『저어... 나리. 올해는 분위기가 어떻던가요.』
어떻긴. 초조함을 한껏 담아 묻는 질문에 루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매회 그래왔듯 이번 축제에도 내놔라 하는 미소년들이 여성들과 어깨를 겨루며 출전했다. 루안의 판단으로는 참자가 중 여성이 60%면 남성은 40% 가량 된다. 하지만 군중은 목젖 튀어나오고 수염달린 족속에 그다지 너그럽지 않은 편이라 우승후보를 추리고 추려 인원수를 10명 내외로 좁히고 나면 여성의 비율은 90%로 껑충 뛰어오르게 된다.
그 중에서 누가 최종 우승을 거머쥐느냐고?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거고.

포만감으로 노곤해지자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에이딜렌 케이틀린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유력한 우승 후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벌꿀처럼 부드러운 금발에 보석과도 같은 푸른 눈, 잘록한 개미허리, 직업은 보모. 외국어 실력도 출중한 재주꾼이라고 하더군요.』
『호오~』
『안나 레머튼도 꼽을 수 있다죠. 쭉 뻗은 미끈한 다리,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 노래실력이 뛰어남. 사머튼 지방에서 보험사 직원으로 근무 중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힐머른 중앙 광장으로 나가시면 우승 후보들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에요. 아직은 한가할텐데 오전 10시 넘으면 사람으로 꽉 차요. 이따 가보시구려.』

언제 초조해했느냐며 오남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왜냐하면 그 말인 즉, 유치장 철컹철컹은 지금부터 안녕이란 소리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손을 모아가며 확인을 해본다.
『엄훠, 그러면 계속 이곳에 남아 즉석재판을 안 기다려도 되는 겁니까? 나리.』
『그럼 지금 당장 유치장 안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오?』
『아니오.』
『즉답이구먼. 그러면서 뭘 되물어요.』
뭐, 괜찮지 않을까. 이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여행객들일 뿐이다. 소매치기도 아니고, 강도짓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거리 한 복판에서 검을 빼어들고 - 되짚어 보니 검집에서 칼을 빼지도 않았다. 그저 혼을 내주겠다 말로 위협한게 전부다. 이전에 장부를 조작하고 투숙객을 내쫓은 여관집 주인의 잘못이 있으니 전후사정을 들은 판사는 똥 씹은 표정을 지은 뒤, 이런 건 재판할 꺼리가 되지 않는다며 기각 조처를 할 것이다.

『재판을 안 받아도 된다고 하시니 감사한 노릇입니다만, 저어. 그래도 짐은 여기다 놓고 가면 안 될까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다 놓았더니 보따리를 내놔라 한다던가.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며 경비원 루안은 뺨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다른 방을 구할 때까지만. 네?』
『이보시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루안이 화를 내는 와중에 오남은 포기하지 않고 제안을 더했다.
『물품 보관료를 따로 낼게요.』
『어차피 시장 조사차 나온 거라 가지고 있는 짐이 많지도 않아요.』
『유류품이라고 딱지를 붙여 그냥 물품 보관소에 며칠만 넣어주시면.』
『폭탄이나 음란물 같은 거 안 들었어요. 네?』
쿵쿵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관 앞에서 사기를 당했다 소리소리 지를 적에 못 본 척하고 그대로 지나칠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는데 쐐기를 박겠다며 오남이 자기 가방을 챙겨 루안의 품에 넘겨주었다.

『귀중품이 없어져도 나는 모르오.』
『그 안엔 양말과 속옷밖에 없어요.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루 보관료는 3세겔로 치지요.』
『3세겔?! 애들 과자 값도 그보단 비싸!』
『쳇. 그럼 5세겔. 그럼 오늘의 보관료를 받으시지요, 나리.』
무르기는 없다며 그가 루안의 손바닥 위로 짙은 갈색이 도는 작은 동전 하나를 올려놓았다. 포효하는 드래곤이 양각된 진짜 작은 동전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17 15:47 2015/09/1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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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제멋대로냐 하면 유치장을 공짜 여관방 취급하더니 이제는 또 식당 취급을 했다.
『사람 사는게 전부 밥 먹자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자... 그러지 마시고.』
그리고는 간도 쓸개도 전부 내던지고 손바닥을 비벼가며 경비대소 내 간이주방을 빌려 달라 간청했다.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다. 변호사를 불러달라면 또 모를까.
심각한 절차 위반이기에 루안은 굳은 표정으로 거절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에이, 괜찮다니까요. 그러지 마시고 여기 앉으세요. 어이, 텐. 물부터 끓여야지?』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불을 피운 화덕에 냄비를 올리고 있었다. 어째서?

『나보고 지금 물 끓이라고 했냐. 날 아주 허드레 일꾼으로 취급해라, 이 아저씨야.』
『그걸로 내 머리를 치려고? 들고 있는 프라이팬은 내려놔, 텐. 대신 칼을 들고 이거나 썰도록. 양파다.』
『감자가 먼저잖아. 분명 그렇게 배웠어.』
『채소를 다듬는 일에 순서가 어딨누. 그냥 한꺼번에 썰어도 되지. 그건 그렇고... 반죽을 해야 할텐데. 여기에 주둥이가 넓은 적당한 그릇은 있고. 죄송합니다, 나리. 밀가루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그 아래 칸에 있을 거요.』
『여기요? 아! 찾았다.』

밥을 해서 먹자는 제안에 왜 훌렁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루안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엔 자신의 몸뚱이가 너무나 피곤하다고 여겼다.
동료인 이슨은 나흘 전에 체력고갈로 쓰러졌고, 그 역시 번 아웃의 신체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복통이 심했고 건조증으로 눈이 쏘는 것처럼 아팠다. 두통도 심했다. 서서 소변을 누면서 졸거나, 상관에게 경례를 붙인다면서 멍하니 쳐다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제대로 잠을 청한 건 보름 전이니 무리도 아니다. 사람은 정기적으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3교대 근무가 꼬이면서 낮에 퇴근했다가 - 오전에 퇴근했다가 - 새벽에 퇴근하는 등 엉망진창이다.
거기다 일은 미쳤다는 표현이 딱 맞게끔 폭주하고 있다. 사방에서 주정뱅이가 날뛰었고, 소매치기가 창궐했으며, 골목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난다는 식의 민원이 300% 폭증했다.
5일만 더 참으면 축제가 끝나 기다리던 천국이 다가온다며 주문을 외워보지만.
알게 뭐냐, 지금 당장 죽을 맛이다.
그러니 유치장에서 꺼내주면 칼국수를 끓여주겠다는 꼬임에 이다지도 쉽게 넘어가는 것이다.

냄새를 맡고 나서야 루안은 배가 무진장 고팠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야근을 하는 내내 공복이었다.
루안은 군침을 삼키며 밀가루 반죽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대고 있는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칼국수라는 건 뭡니까.』
『아, 칼국수요. 먹어보면 조개로 국물을 낸 에조몰라와 비슷하다 생각하실 겁니다, 나리. 사실 그보다는 좀 담백합니다. 아무래도 포도주 없이 물만 넣고 끓인 거라서요. 그래도 뒷맛이 개운하죠.』
『방금 주머니에서 꺼낸 그 가루는 또 뭐죠?』
『이쪽에 있는 텐이 개인적으로 만든 건조시킨 양념입니다. 멸치와 다시마, 오징어, 쇠고기, 고추, 홍당무 외 기타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든 거지요. 넣고 물을 끓이기만 하면 되서 빠른 시간에 조리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대신 짭니다. 그러니 조금만 넣어야 합니... 앗, 너무 넣었다! 물, 물.』
『의외로 냄새가 진하네요. 조개 냄새도 나고.』
여행자라 그런지 생소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던 건조 육포와는 달랐다. 루안은 원래의 모양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조채소라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손으로도 직접 만져보았다. 시험 삼아 입에 넣고 씹어봤더니 이가 부러질 지경으로 딱딱했다. 하는 수 없어 손바닥을 대어 입안에 든 내용물을 도로 뱉었는데 이걸 보고 국자로 냄비를 휘휘 젓던 사내가 숨죽여 웃었다.
『아무래도 수분이 많은 신선한 채소를 먹는게 가장 좋죠. 저희도 여행 중이 아니면 이런 건 먹지 않습니다.』
간을 보기 위함인지 한 국자 떠서 국물을 입에 담았다.
『하윽. 하응.』
좋다는 건가, 끔찍하다는 건가.
진저리치는 것도 그렇고 음식의 맛을 보는 것치곤 신음소리가 어째 요상했다.
『어디서 성희롱이야. 반죽이나 썰어, 이 새끼야.』
얼굴 위로 핏기가 오른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보다 못해 타박했다.

『면도 다 익었으니 슬슬 먹어볼까요.』
『아아, 깍두기가 먹고 싶다...』
『이상한 헛소리 하지 말고 너도 자리에 앉아라, 텐.』
『헛소리라니. 자고로 칼국수엔 깍두기가 진리란 말이다.』
『그런 진리, 소인은 모른다오. 자, 여기... 한 그릇 받으세요, 나리. 혀를 데울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확실히 뜨겁군요.』
『이건 후후 불면서 먹어야 제 맛입니다.』
뜨끈하니 국물이 죽여줬다.
피곤에 찌든 루안의 표정이 후루룩 소리와 같이하여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맛을 보자 입안에서 바다 향이 맴돌았다.
하여 이 순간만큼은 즉석 재판을 기다리는 피의자를 멋대로 꺼내왔다는 근심 걱정은 죄다 날아간 상태였다.

『어, 좋다... 그런데 두 분은 어느 지방에서 오셨습니까?』
한 그릇 덜어 염치없이 얻어먹으면서 루안이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을 툭 던졌다.
옷차림으로 보자면 두 사람 다 언뜻 제국인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루안은 우물 안의 개구리여서 실제로 제국에서 온 여행자를 두 눈으로 본 적은 없다. 다만「이럴 것이다」라는 추측만이 있어 거기에 대입하여 동대륙 최강 제국 란데가스의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 인상에 부합했다.
뭐, 두꺼운 철면피와 뻔뻔함이 부합했다는 건 아니고.
그릇을 양손으로 쥐고 내용물을 호록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로 나가기 쉬운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호기로웠다고 할까.

『제국에서 오셨나요.』
『제국이라... 분명 란데가스를 거쳐서 오긴 했지요.』
의외로 사내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봤자 신분증을 꺼내 확인하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어디서 왔다는 걸 굳이 숨기려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새 눈빛을 날카롭게 만든 루안은 불심검문에 임하듯 오남이라 불리우는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남이라는 이름도 영 이상하다. 다섯 번째 아들이라. 그렇다면 형님들의 이름은 각각 장남과 차남, 삼남에 사남이라는 건가. 부모의 작명 센스가 어쩐지 직무 유기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아들만 다섯!

오남이 먹던 그릇을 조신하게 무릎 아래로 내려놓고 쓰게 웃었다.
『아, 그게 말입니다. 저는 장사치라서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거든요.』
『장사?』
『주요 품목은 고급 여성복이고 최고급 사라사 비단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게걸스럽게 칼국수를 흡입하고 있던 소년이 씹던 걸 채 삼키지도 않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드레스 말고도 새카맣게 썩은 양심도 팔고 있지.』
이런 모습을 접하니 왕자라는 첫인상은 확실히 실수다. 쭈그리고 앉아 오른손을 써서 복스럽게 먹는 모습은 이른 오후 새참을 먹는 농부의 자식 같았다.

『인석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천하에 둘도 없는 악덕 상인 같잖아.』
『어쭈구리? 당신, 천하에 둘도 없는 악덕 상인 맞거든?』
『아하하하, 나리. 이 녀석이 지금 뭘 잘못 먹었나 봅니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은 듣지 마세요.』
오남은 태영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을 흘겼다.
『그렇게 말하면 오해를 받잖니. 쉭쉭!』
그리고 자세를 바로잡고 서둘러 자신을 해명했다.
『여성복 전문의 오남상회 상주 오남이라 합니다. 비타아른 공왕국에서 8년만에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고 소문이 자자한지라 모처럼 꽃구경도 하고 시장 조사도 할 겸 와봤습니다.』

Posted by 미야

2015/09/16 13:06 2015/09/1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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