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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이 그 얼굴에 화장을 하고 보석으로 치장하는 건 왜일까.
지위 높은 자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호랑이 모피로 몸을 두르는 건 왜일까.
「그야... 보석이나 호랑이 모피로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함이겠지.」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의 자신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십대 중반임에도 어울리지 않은 고음이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여인이 보석 목걸이를 걸지 않으면 덜 아름다워지는 걸까. 댁은 어떻게 생각하우?」
질문을 던진 자의 목소리는 소름 돋을 정도의 중저음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또한 이십대 후반으로 젊은 편에 속했다.
「보석 목걸이를 걸어야만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이라는 건 이상한데, 오남. 어쩐지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 같아. 음... 하지만 화장이 지워지니까 꽝으로 돌변하는 건 봤어.」
「호오. 지금 그건 엘시엔테스 이야긴가. 하긴, 그 여자의 화장기술은 변신마법 수준이지. 아, 잠깐. 그런데 언제 화장 지운 그녀의 맨 얼굴을 봤다는 거지? 설마.., 이 호색한!」
「뭘 상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죄다 틀렸어.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여자 가슴 크다고 무지 좋아했잖여!」
어쨌든 과거 시우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가 오남 - 다섯 번째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상인과 나눴던 이 대화는 가장 이상적이다 할 수 있는 여성의 가슴 크기를 논하다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어 결국「테뮬라르 대공전하가 특상의 호랑이 모피 옷을 주문한 건 그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이다」라고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여인은 보석 목걸이가 없어도 아름다운 것이고, 권력자는 왕관과 홀을 구태여 들지 않아도 그 자체로 권위가 있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자꾸 더하고자 한다면 아름다움이든 권위든, 그 알맹이는 이미 손상되기 시작했다고 추측해야 한다 - 진귀한 비단옷과 장신구를 파는 상인이었던 오남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물건을 사가는 왕족과 귀족들 간의 미묘한 권력 흐름을 저울질했다.
「최신식 드레스와 보석을 무조건 많이 주문하는 자가 실세 아닌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네, 시우. 1인자는 물건을 사지 않아. 그들은 남이 산 고급품을 뇌물 선물로 받지.」
그런 까닭으로 오남 상회에서의 랭킹 1위 단골 거래처는 황제 아키테 3세가 아니라 젱키스 백작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인위적으로 결계를 덧그린다는 건 결계지속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다지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없다.
「결계가 부실해졌다는 건 곧 적룡신의 힘이 약해졌다는 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지.」
아랫입술을 가만히 빨아들였다.
「서대륙 최강이라던 용신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제국 이사실로 오는 도중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는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지경으로 요괴가 득실거렸지만 적룡님의 은총을 받는 땅이 되고부터는 가고한에도 제법 인가가 들어섰습니다. 숯을 굽는 마을이 여럿 생겼죠. 다만 치안은 여전히 좋지가 않아요.」

이건 반대로 적룡신의 위세가 커졌음을 의미한다. 아까의 가정과는 정 반대 현상이다.
오른쪽 주먹을 들었다가 다시 왼쪽 주먹을 들어 보이며 생각에 잠겼다. 상반되는 까닭으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동시에 벌어질 수도 있을까? 비가 내리지 않아 밭이 가물었는데 개울물이 벌컥 넘치는 것이다.
「그런게 가능해?」
왼쪽 주먹을 응시하다가 얌전히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 나는 오른쪽 주먹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라벽치는 내가 이상한 동작을 하고 있다며 의아해했지만 딴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더라면.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넋 놓고 빠져있지는 않았을 텐데.

무슨 까닭에선지 내가 머물던 창고 건물에서 린청이 나왔다.
녀석은 내 거처와도 같은 창고를 자신의 공붓방, 내지는 휴게실, 아니면 비밀의 장소로 삼은 것 같다.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건 그렇다 치고 주인이 없는 장소를 당연하게 차지하고 앉았다가 먼지를 털고 밖으로 나오는 모양새가「나에게도 이 장소를 이용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장도리에 맞아 박살난 창틀의 수리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권리 운운하기엔 지나치지 않은가. 어디까지나 저 창고에서 머리를 뉘여도 되는 자는 지리가 안즈, 단 한 명밖에... 없.
『너어어어~~!!』
그런데 녀석이 내재원으로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노성을 질렀다.
이라벽치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돈 떼먹고 도망간 사기꾼에게도 저렇게 소리를 지르진 않는다. 내가 그렇게 죽을죄를 잔뜩 지었던가. 속으로 지은 죄의 목록을 하나씩 헤아려보다 발끈하던 걸 그 즉시 멈췄다. 마, 많다...
『네 녀석이 감히~~!!』
그런데 어랍쇼. 소년이 분노를 퍼붓는 대상은 알고 보니 내가 아니었다. 린청은 천장을 쿡쿡 찌르기 위해 내가 구석으로 놔뒀던 막대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곤 그걸 목검처럼 휘둘러 이라벽치의 두꺼운 목을 부러뜨리려 했다.

바보 같은 짓이다. 전속력으로 간격 안으로 뛰어들며 발검과 동시에 적의 목을 치는 기술은 어지간하지 않는 이상 쓰지 않는게 좋다. 순수하게 사람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이 기술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격 직후 자신을 보호할 방법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적의 머리만을 노린다는 건 검의 위치가 높아짐을 의미하고, 무게 중심점 역시 위로 이동하게 된다. 무게 중심이 높아지면 자세가 불안정해지는 법, 그만큼 공격이 실패했을 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드는 노력은 곱절이 되고, 어지간한 고수가 아닌 한 그 회피 동작을 완료하지 못한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게 된다. 저 검법은 그런 기술이다.
『!!』
빈틈을 통해 곧바로 반격을 당하고, 그 결과 지금의 린청처럼 역으로 메다 꽂히게 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검을 손에 잡은 시간이 30년 이상 차이가 벌어지는데 처음부터 목을 노리다니.
퉁,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무기 - 사실은 애처로울 정도로 하찮은 막대기를 가루로 만든 이라벽치는 가볍게 호흡하며 두 팔을 안으로 높게 접었다. 격투술의 기본으로 일명 창과 방패 자세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로 주먹을 뻗어 때리기도 쉽고, 반대로 얼굴을 가려 방어하기도 쉽다. 벽화 같은 종류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자주 그려 넣는 모습이다.
어린애를 상대로 너무 진지하게 나오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 어린애가 다른 곳도 아닌 목을 노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이라벽치는 반격당해 바닥에 쓰러진 린청의 움직임을 계속하여 주시하며 자세를 낮췄다. 린청이 계속 싸우겠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그에 합당한 반격을 시도하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일어서지 마라.』
이라벽치는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린청이 고집불통이라는 걸 몰랐다. 메다 꽂힌 소년은 꿈틀거리며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두 번 반복하여 말하게 만들지 마.』
나는 이라벽치를 말려야할지, 아니면 린청을 말려야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경고했다. 거기서 일어서면 손목이든 발목이든 뼈를 부러뜨리겠다.』
뼈를 부러뜨린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부들부들 떨면서 어떻게든 두 다리로 일어서려고 기를 쓰더니 결국 무릎 하나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안 되겠다. 저 녀석을 말리자. 단호하게 결정을 내린 나는 이라벽치에게 등을 보인 채 린청을 향해 뛰어갔다.

『이 바보야, 그냥 엎어져 있어! 도대체 왜 이래.』
『하, 하지만 저 인간이 널 욕보였는데!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읭? 누가 누구를 욕보여.
영문을 몰라 멀뚱거리고 있자니 린청이 분노를 터뜨리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해도... 저놈이... 네 명예를 짓밟을 수는 없는 거다. 제기랄... 제길!』
이를 갈며 눈물을 글썽이는 소년 앞에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먼 이국땅에서 적룡군 병사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 얼굴에는 맞은 흔적이 있고, 본 적이 없는 새 옷을 입은데다 몸에서는 희미하게 향유 냄새도 난다 - 린청 또한 누구처럼 역사책 두께에 버금가는 장대한 두루마리 이야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자기가 써내려간 이야기의 줄거리가 너무나 속상하고 슬픈 나머지 내 손목을 잡고 울려 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여기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아이고 머리야.

Posted by 미야

2015/08/05 22:45 2015/08/05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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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mie 2015/08/06 04:07 # M/D Reply Permalink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오랫만에 글 남겨보네요. '갓파는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돗자리 지참해서 놀다 가기'를 꾸준히 실천하던 한 사람입니다. 슬레 팬으로서, 암시장이 비활성화 되기 직전에 입문해 미야님의 글을 알게 되었지요. 죄반을 비롯해 미야님의 많은 글들을 읽으며 행복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오남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단순히 슬레 팬픽이어서가 아니라 미야님의 필력에 반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네요. 소재는 다르더라도, 글 쓰는 걸 멈추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쭉 건필하시길 빕니다.

    1. 미야 2015/08/07 15:00 # M/D Permalink

      실례 아니에요. *^^* 우물통 방문 감사드리고, 부족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글을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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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태워져 우리가 향한 곳은 부유한 상인이 애용할 법한 여관으로 시설이 무척 고급스러운 장소였다.
이름은 부용관이라고 했다.
멈춘 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자니 직원인 듯한 자가 바깥까지 나와 깍듯이 인사하며 마중을 했다.
이라벽치의 군장을 보고 놀라고, 다시 피투성이 옷차림의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지만 숨을 들이킨 걸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결례는 없었다. 어지간한 상황은 죄다 겪어봤던 걸까. 다급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라고 묻는 대신 말고삐를 쥐고 앵무새처럼「어떤 방을 준비해드릴까요」정해진 대사만 늘어놓았다.

『이 아이를 씻기게.』
이라벽치의 주문에 직원의 뺨이 딱 한 번만 실룩 움직였다.
둔한 사내인 이라벽치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사실 눈여겨 관찰하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묘한 움직임이긴 했다.
그래봤자 직원이 숨을 죽인 까닭을 짐작해버린 내 입장에선 낯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음... 직원은 비교적 신분이 높은 적룡군 병사가 그다지 순종적이지 않은 어린 남창과 잠시 유희를 즐기려고 한다 착각하고 있었다. 남창은 뺨을 맞았고, 옷이 매우 더러웠는데 분명 여기에 오기 전 한바탕 치정 싸움을 벌였다 - 역사책 두께의 장대한 두루마리 이야기가 상상의 세계에서 화려하게 펼쳐졌지만 그래봤자 훈련된 직원은 사연을 캐묻는 대신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는 일 없게끔 고개를 숙였다.
신분과는 별개로 그런 목적으로 잠시 방을 빌리려는 손님은 늘 있어왔다. 수도 루은에선 매춘은 합법이었다.
다만 납치와 강제추행은 다른 문제라서 직원은 눈물자국이 남은 내 얼굴을 눈치껏 살폈다.
신고해야 할까. 하지만 상대가 적룡군이다 보니 신고를 하지 말자는 쪽으로 저울이 급격히 기울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안마사도 같이 부를까요 묻는 목소리가 물을 잔뜩 머금은 잎사귀처럼 나긋나긋했다.
『안마사가 왜 필요해?』
이라벽치는 역시 못 알아들었다.
『안마사는 부르지 말고. 목욕 후 이 아이가 입을 새 옷이 필요하네. 적당히 준비해주게.』
『알겠사옵니다. 그럼 도련님을 욕탕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직원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말하며 나를 꽤 깊은 안쪽까지 데려갔다.

입고 있는 옷은 모두 벗어 내놓으라 했다. 부정을 탔으니 정해진 절차에 따라 태워버릴 거라고 했다.
『속옷까지 모두?』
되묻는 질문에도 직원의 표정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흡사 진흙으로 만들어 붙인 가면 같았다.
『잃어버리면 곤란한 물건이 있으시면 따로 맡겨주십시오. 그럼 시중을 들 아이를...』
『혼자 할 수 있네.』
『알겠습니다. 그럼 물의 온도가 맞지 않으면 꼭 말씀하여 주십시오.』
희고 붉은 화려한 부용화 그림으로 장식된 개인 욕탕은 세 명의 어른이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사치스럽기도 하거니와 성인의 남녀가 목욕을 핑계로 성적인 욕구를 채우기에 안성맞춤이라 옷을 전부 벗고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기가 싫어지려 했다. 여관 사람들이 알아서 관리를 잘 했겠지만 또 아나, 어젯밤 이 속에서 정분이 난 연인이 한바탕 난리를 쳤을 수도 있다.
넓직한 욕탕에서 신선놀음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았지만 결국 나는 욕조 바깥에 앉아 대야로 물을 끼얹는 걸 선택했다. 좍좍 물 끼얹는 무식한 소리에 혀를 끌끌 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겠지만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흙과 먼지를 전부 지웠다 판단하고 욕실 밖으로 나오니 이런 일엔 이골이 난 직원이 끈으로 여미어 입는 속옷인 겨우기리를 대동하고 서서 발가벗은 나를 입혀주려 했다.

『크, 읍.』
그가 침을 기관지로 잘못 넘긴 소리를 낸 까닭은 달릴 것이 달리지 않은 내 아랫도리를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조화래. 옷을 벗기 전까지는 소년이었는데.」
덕분에 주변이 다소 분주해졌다.
『바깥손님에게 일러 여자 옷을 준비하리까, 아님 사내 옷을 준비하리까 여쭈어라.』
내 판단엔 쓸데없는 일이었다. 질문을 들은 이라벽치는 근육이 와르르 무너진 이상한 표정으로「그 녀석에게 여자 옷을 왜 입혀! 그건 누구 취미냐!」화를 냈다.
서로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직원은「그렇군요. 취향이 아니시군요.」공손히 대답하곤 뒤편을 향해 가만히 눈짓했다. 순식간에 이라벽치는 유녀(幼女)기호를 가진데다 침실 시중을 들 어린 소녀에게 남장을 시키는 변태스러운 인간으로 낙인이 찍혔다. 돌아가는 상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손님은 왕처럼 모신다던 부용관 사람들은 변태적 취미에 최대한 부응하여 나를 흡사 사무월 축제 최종 우승자처럼 꾸며놓았다. 뜨개바늘로 뜬 얇은 무늬장식을 덧댄 화려한 저고리에 나풀거리는 천으로 주름 장식을 최대한 넣은 마고를 입혔다. 마고는 통이 넓은 바지로 매듭으로 발목을 조이면 흡사 부풀어 오른 꽃송이 모양의 치마처럼 보이게 된다. 뭐, 기능성과 활동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사실 제국 사람들은 안방마님의 속바지라고 폄하하며 손가락질하는 의상이기도 하지만... 나는 무표정을 가장하며 천장을 응시했다. 이 옷의 장점은 틈새가 많아 옷 안으로 손을 넣기가 아주 쉽다는 점에 있다. 꿀이 나는 꽃술은 어디에 숨었는가, 이러고 손을 깊숙이 넣어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리기엔 더도 말고 딱이랄까. 대놓고 말해 천박한 종류다.

『뭐가 좀 이상한데. 이게 뭐냐.』
마고의 쓰임새는 몰랐어도 이라벽치는 인상을 썼다. 보는 눈은 없었어도 이건 잘못된 거라는 인식은 있었다.
『요즘엔 이런 옷이 유행이냐? 하지만 이건, 이건. 그러니까 이건...!』
어휘력 부족으로 이라벽치가 말을 더듬자 부용관 사람들이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고 하니 다른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이건 좀 아니다. 평범한 걸로 해, 평범한 걸로. 내 아들이 저러고 나타나면 나는 울음을 터뜨릴 거야.』
나는 다시 직원들 손에 이끌려 뒷방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그럭저럭 얌전한 분위기의 옷이 나와서 나는 안심하고 소매춤에 팔을 쑤셔 넣었다. 다만 옷의 크기가 좀 커서 손등을 덮는 소매의 시접을 접어야 했다. 덕분에 바보처럼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와.』
『의원도 부를까요.』
부용각 직원의 질문에 이라벽치는 내 쪽을 보았다.
『혹시 이가 흔들리거나 피가 나는 곳이 있니?』
나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의원은 됐고, 대신 얼음을 좀 준비해주게.』
『예.』
그동안 나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피곤함에 등을 구부정히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시장하냐. 배가 고프다면 식사를 주문해주마.』
식욕 따윈 멀리 달아난지 오래다. 나는 괜찮습니다, 라고 짧게 말해주고 다시 등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그걸 화가 나서 그런 모양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이라벽치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나를 다독이려 했다.
『하은 그 녀석은 원래부터 좀 막무가내지. 맞은 곳이 많이 아프니?』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야 사내 대장부지. 얼음으로 식혀주면 금방 열이 빠질 거야. 주머니를 대고 있으렴. 하지만 너무 오래 대고 있으면 피부가 상한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예.』
『대답도 잘하고. 착한 아이구나.』
평범한 아이라면 칭찬에 기뻐하며 수줍게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몸이라서 피곤한 미소만 짓고 말았다.
 
『것보다 원래 자리로 서둘러 돌아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라벽치 님.』
『신경 쓸 거 없어.』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빨리 돌아가 보았자 뭐가 좋다고」다.
하긴, 루은의 대로를 걷고 있는 자손을 보좌하고 있을 뿐이니 하품이 나오는 한가로운 업무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게다가 자손의 실력은 일당백이라서 도중에 불온한 자가 죽자 살자 덤벼들어도 걱정을 해야 할 대상은 적의 목이지 자손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라벽치가 해야 할 일은 자손이 퍼붓는 불평을 가까운 곳에서 들어주고 때때로 달래주는 것에 불과해서 자리를 보다 오래 비우고 싶은 욕구가 솟는 것도 지극히 당연했다.
『매년 같은 일을 하시는 건가요?』
『보통은.』
『힘드시겠어요.』
『괜찮아. 그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런데 내가 알던 시절에는 이런 거 안 했거든요? - 얼음주머니의 위치를 바꾸고 이를 다르게 질문했다.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 건가요? 고귀한 분을 모시고 친히 대로를 걷다니.』
『아, 그건... 고귀한 핏줄을 이은 분께서 신룡 님의 힘을 빌려 결계를 보다 튼튼하게 만드는 거란다. 사악하고 나쁜 것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 하도록 하는 거지. 이게 다 제국의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란다.』
알아. 그건 나도 눈치 챘어. 하지만 그건 원래 신룡의 은혜로 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 적룡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리면 될 걸 가지고 사람이 구태여 나서 결계를 튼튼하게 만들고 자시고 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Posted by 미야

2015/08/04 16:21 2015/08/0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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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8/04 21:06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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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장이 아닌 평복 차림새를 하고 있던 그는 옷깃을 엉망으로 풀어헤친 채 소금꽃이 핀 머리 꼭대기로 목을 축일 물을 붓고 있었다. 그래봤자 불쾌감을 주는 더위는 가시지 않아 눈빛이 난폭했다. 체온은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고 그저 습도만 높아졌을 뿐으로 피부에 물 먹은 옷감이 진득하게 달라붙자 더 못 참아 했다.
누가 저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데다 옷차림도 흐트러진) 남자를 위대하신 황제의 고귀한 핏줄이라 여기겠는가. 금관을 쓰고 높은 가마에 앉은 것도 아닌데.
머리카락에서 물방울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한결 더 야수 같았다.
그런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옆에서도 병사들은 다행스럽게도 그럭저럭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추측하자면 시체더미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자들이니 더위를 잡순 야수 정도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무리 중 그나마 지위가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자가 공손히 아뢰었다.
『자손. 이곳에서 지체하시면... 일정이 지체되옵니다.』
『닥쳐. 네가 감히 나에게 설교를 할 작정이냐.』
언젠가 땀투성이가 되어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 요구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이런 식으로 모두로부터 강요를 받아가며 바둑판 모습의 도시를 죽어라 걷고 있었던 걸까.
이것이 꽃으로 장식을 한 화동이 모두의 환호를 받아가며 마을 한 바퀴를 돌아 제대로 죽지 못한 것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결계를 만든다는 의례의 재현이라면 나는 그냥 배를 잡고 웃어버릴 테다. 여기엔 꽃도 없고 환호하는 인파도 없다. 당연히 화동도 없다. 입이 찢어진다 해도 스물 셋이나 먹은 사내더러 미동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잘 생겼어도 겨드랑이에 털이 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미동이라 부를 수 없다고, 나는 그렇게...
『이 머리에 구멍 뚫린 놈. 네가 지금 날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볼 입장이라 생각하느냐?! 응?!』
기시감이 휩쓸었다. 자손은 나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나를 한 팔로 붙잡아 허공에 대고 마구 털었다.
대롱대롱 흔들리며 나는 산산조각 나 보이지 않는 구멍을 통해 발밑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영혼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차이라면 먼젓번에는 독기를 뿜어대던 그가 이번엔 엄청난 짜증을 퍼부어댔다는 점이랄까, 둘 중에 뭐가 더 괜찮고 낫고의 차이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 아무튼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사내는 눈이 반쯤 뒤집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화가 나.』
『그거 참 황송하옵게도.』
『더워!』
『불평하신들... 날씨는 제 힘으로는.』
『신경질 난다!』
『항의는 돌아가셔서 내전관들에게 하심이.』
『했다고했다고했다고! 그것도 한 두번 했을 줄 아느냐! 하지만 녀석들 귓구멍은 꽉 막혔단 말이다! 창리궁 마마에게도 자식이 둘이나 있잖아! 그 녀석들을 시키란 말이다. 귀찮은 일까지 전부 나에게 떠넘기고 이게 무슨 짓거리야! 좌로 걸었다, 우로 걸었다, 방향을 정해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만 하는 건 재미가 없엇! 피곤한 건 둘째고 지루해서 기절할 것 같다고! 악령이 나와? 그럼 제령을 해! 요괴가 나와? 그럼 단칼에 베어버려! 그러는 편이 간단하고 좋잖아! 차라리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라고 시켯! 적병의 머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잘라다 바치겠다! 제발~ 이렇게 빌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매년 이러는 거 진짜 싫어, 싫다곳!』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지른 그는 숨을 크게 내쉬고는 들고 있던 내 몸뚱이를 예고도 없이 뚝 떨어뜨렸다.
『후아! 소리를 질렀더니 조금은 풀리는군.』
대신 내던져진 이쪽은 엉덩이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 열심히 궁둥이를 문질렀다.

소리를 질렀더니 개운해졌다는 건 빈 말이 아니었나 보다. 한층 표정이 편안했다.
『좋다, 그럼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네가 왜 내재원이 아닌 여기에 있는 거냐, 좁쌀?』
좁쌀? 그건 도토리보다 더 작잖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말이죠. 본국에서 증서가 도착해 이곳 상은에서 돈으로 바꾸려고 했는데요.』
『호오, 이제 거지 신세 면했군. 그랬는데?』
『갑자기 손님 오셨다 소리를 지르더니 식칼을 들고 덤벼들더라고요.』
『얘네들이?』
너희가 그랬어? - 라고 지적당한 포박된 무리들은 부리나케 도리질했다.
『아닙니다아닙니다우리가아닙니다!우리는강도가아녜요!우리도피해자라고요진짭니다믿어주세요!』
그들의 합창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던 자손은 뒤편으로 신호해 또 물을 요구했다. 도대체 얼마나 마시려는 건지. 것보다 체력이 보통이 아닌 자가 심한 갈증을 느낄 정도로 걸었다면 그 거리가 얼마나 될지 돌연 궁금해졌다. 상상 외로 엄청난 강행군이었을 수도 있다. 혼자서 루은의 여덟 대문을 기준점으로 정방돌음(오른쪽)과 정외걸음(왼쪽)을 말을 타지 않고 순전히 걸어서 돌려 했다면 살인적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된다. 성문 안 면적만 무려 2,750란호립에 이르기 때문이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황족인 남성이 그런 걸 몸소 하려 했을 리가...
추측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좁은 계단에서의 타평과의 싸움을 설명할 단어를 골랐다.
에, 하고 입을 여는 것과 동시였다. 갑자기 생각도 못한 물벼락이 나에게로 좌악 떨어졌다.

『어?!』
벌써 심문 들어간 거에요? 물고문인 거에요? 그러니까 설명하려고 했다니까요!
자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나를 쳐다봤다.
『생각처럼 깨끗해지질 않는 군. 끼얹은 물이 부족했던 걸까.』
영문을 몰라 입만 뻥긋 벌리고 있자니 보다 못한 이라벽치가 헛기침과 함께 끼어들었다.
『어험! 그래선 안 됩니다, 자손. 더러워진 옷은 벗어서 세탁을 해야 하는 겁니다.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물을 끼얹어봤자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피 얼룩은 원래 잘 안 지워지는 것이고... 그리고 저어, 당하는 사람 기분도 그다지... 이건 선의를 보여주는게 아니고 모욕을 주는 거라고요.』
뭐?! 이게 다 내 옷의 더러움을 지우려는 의도에서 나온 거였어?!
선무당식 세탁 방법을 지적당한 자손의 동공이 흔들렸다.
오늘의 교훈 하나. 물을 끼얹는다고 옷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원래 이 남자는 뻔뻔하다.
『그렇군, 물을 끼얹어봤자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군. 허나 팥알의 기분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내 의도는 모욕을 주려던게 아니니. 그러니 이라벽치, 네가 이 녀석을 책임지고 세탁해.』
좁쌀에서 팥알로 격상되었으나 하나도 안 기쁘다.
나를 깨끗하게 만들라는 주문에 이라벽치 또한 눈을 가늘게 떴다.
또 접니까. 이 애를 책임져야 하는 건 또 저인 거에요? 그의 표정이 그리 묻고 있었다.
반복하여 말하게 만들지 마. 이에 대응하는 자손의 눈빛은 엄격했다.

그제야 나는 포박된 무리에서 떨어져 이라벽치의 손에 이끌려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돌아보니 이미 어디론가 치워져 락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할 말이 있다며 이라벽치의 두꺼운 손을 힘주어 잡아당겼지만 그 또한 민간인이 아닌 군인, 내가 보내는 신호는 일절 무시한 채 다른 병사더러 자신이 탈 말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에휴. 단순히 강도를 당한 건지, 아니면 네 나라에서 암살자를 보내온 건지 아직은 모르겠다만.』
그래도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걱정해주었다.
『이렇게 소동이 크면 이사실에서 널 사친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본국으로 돌려보내려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을 듣고서야 줄곧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한꺼풀 벗겨져 나갔다는 기분이 들었다.

「빈사국으로 돌려보내질 수도 있다고?」
얼마나 사람이 이기적이면 그 즉시 락연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앞으로의 내 처우다.
물에 젖은 발잔등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니, 뭐. 본국으로 돌려보내진다고 해도 딱히 지금과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긴 하니까 땅이 무너졌다는 식의 기분은 들지 않지만... 그러는 수가 있었군.」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왕위계승 다툼에 휩쓸린 타국의 왕족이 사친으로 왔는데 내재원에서 떡~ 하고 암살당하면 이사실에서도 책임 문제가 불거지니까 제국 입장에선 사단이 나기 전에 반품 -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50동을 쓰지 않았다고 한 번 가정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 정체가 누구든 어지간히 내가 이사실에 머무는게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음대로 하라지. 상관없어. 차라리 잘 되었지. 나라고 여기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야.」

분위기가 어두컴컴해졌다고 느낀 이라벽치가 내 어깨를 가볍게 툭 밀었다.
딴에는 위로를 해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덩치가 남산이라는 걸 고려했어야만 했다.
힘에 밀쳐져 벌러덩 넘어지는 입장에선 그건 결코 위로가 아니었다.

Posted by 미야

2015/08/01 21:06 2015/08/0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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