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그런단 말이오 - 상대방이 하소연을 하고 있지만 루안은 간질이며 들려오는 소리를 알아서 차단했다. 단추를 누르면 기계장치가 움직여 저절로 문이 닫히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문이 닫히면 듣고 싶은 것만 선별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신박한 재주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화병을 얻어 명줄이 짧아졌을 것이다.
그럼 일단 증거품인 신발을 보자. 높은 굽에 은도금을 한 리본 모양의 금속 장식이 달렸고 색은 부담스러운 핏빛 빨강이었다. 빨간색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베인 자국으로 흘러나온 듯한 선명한 핏빛에 가까웠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이런 건 잔칫날에도 신기 어려운 종류다. 구두의 주인공은 어지간히 튀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흉기와도 같은 뾰족하고 기다란 굽에 깨진 사탕 부스러기가 어지럽게 묻어 있다. 설탕 가루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자 발 냄새에 진한 설탕의 향이 더해져 의도치 않게 콧구멍이 실룩 움직였다. 『아유, 왜 더럽게 신발 냄새를 맡고 그러세요. 보는 사람 민망하게.』 다 그럴 만한 의도가 있어서 하는 일인데 짜증나게 사람을 변태로 몰고 있다. 루안은 더 이상 허튼 소리 말라는 의미로 오남을 쏘아본 뒤, 증거물용 봉지 주둥이를 밀봉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을 해봅시다. 광장으로 들어오는 가마 옆에 서 있다가 머리에 토사물을 뒤집어썼다, 당신 머리 위로 구토한 여자는 당신이 가마를 좌우로 마구 흔들어댄 범인일 거라 짐작했다, 왜냐하면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까. 하여 흔들리던 가마에서 잘 익은 감처럼 떨어진 여자가 가만두지 않겠다며 소리를 지르고 당신에게로 달려들었다, 당신은 상대가 여자인지라 아무래도 맞서 싸우기가 민망하여 그대로 달아났다, 그랬더니 여자가 뒤통수를 향해 신발을 벗어 던졌다... 맞습니까?』 『어우야. 요점 정리 엄청 잘하시네.』 오남은 원하던 물건을 10% 할인가격으로 팔겠다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해야만 한다면 경비원의 소매를 뜯어먹기라도 할 기세다. 하지만 루안은 거의 까무룩 잠들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만큼 피곤했고 짜증이 났다. 『그렇군요.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세상에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었다. 그러나 경비원 루안은 오히려 왜 화를 내느냐며 반문했다. 『악담이 아니에요. 이건 엄연히 현실적인 겁니다.』
8년에 한 번, 그들은 성대한 축제를 열어 천하제일의 미인을 뽑는다. 『여기서 우승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행자인 당신은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말이죠... 그냥 꽃다발에 우승 트로피만 받고 끝날 것 같아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남은 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음... 아마도 엄청난 상금도 받겠죠?』 그래서 그 여자는 그렇게도 화를 냈을 것이다. 힐끔 곁눈질하며 속으로 이거다 싶은 구체적인 금액을 떠올렸다. 『혹시 우승 상금이 저택 다섯 채를 한꺼번에 구입할 정도로 어마어마한가요?』 『집 다섯 채는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아니라는 얘기에 다시 이거다 싶은 구체적인 금액에다가 궤짝으로 금은보화를 덧셈했다. 『그럼 지방 영주님의 1년치 봉납금 정도가 되나요.』 『돈 문제가 아니라는데 자꾸 그러시네.』
우승자는 모두로부터 엄청난 축하를 받으며 왕궁으로 입궁한다. 그리고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공왕과 포옹을 한 뒤에 그 우편에 서게 된다. 다음 축제가 열릴 때까지 계속.
처음 반응은 허탈하게 웃는 것이다. 『공왕 우편에? 다음 축제가 열릴 때까지 쭈욱~?』 왕의 좌편에 서는 건 여왕, 혹은 왕비다. 그 우편에 서는 건 총리대신이고. 국정운영을 총괄하는 총리대신을 제치고 일개 축제 미인대회 우승자가 8년씩이나 왕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는다?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키득 소리를 내며 웃던 오남은 장난을 치듯 루안의 어깨를 톡 때렸다. 하지만 루안은 그게 농담이었다는 식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더하여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해졌다. 덩달아 오남의 얼굴도 뜨거운 화덕에 눌러 붙은 탄 냄비처럼 변해갔다.
『알겠다. 그렇다면 미인대회 우승자가 왕의 첩이 되는 건가요.』 질문을 던진 건 태영이다. 그는 아직 미숙한데다 경험이 없어 왕의 오른편에 선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있다. 왕이 없는 세계에서 왔으니 거기엔 총리대신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일개 첩과 총리대신의 위치를 나란히 놓는 우를 범했다. 당황한 오남이 소년의 옆구리를 찔러가며 목소리를 낮추어 타박했다. 『야. 네가 살던 너희네 나라에선 첩이 왕의 오른편에 서있냐.』 『아니. 우리나라는 일부일처제야.』 엉뚱하게 답변한 태영은 자신의 말실수를 여전히 모르는 눈치다. 그래봤자 루안은 너무나 졸린 나머지 판단력이 흐려져 태영의 발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뭐, 그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라고는 해도 다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하고 있죠. 아무래도 공왕님께서 늘그막에 예쁘장한 손녀 같은 아이를 옆에 두고 귀여움을 보고자 하시는 것 같다고...』 『손녀!』 『실제로도 왕족처럼 우대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는 말을 들었어요.』 『왕족!!』 『그러니 상금 따위는 문제도 아닌 거죠. 이제 아시겠어요?』
이러니 우승후보에서 탈락한 여인이 그 원흉이라 짐작되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자 할 법도 했다. 그런 까닭에 루안은 자신의 손에 들린 든 빨간 구두 한 짝을 피 묻은 손도끼처럼 인식했다. 이 구두의 주인은 과연 계속해서 복수에 집착할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디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서야 오남은 루안의 경고가 농담 따먹기가 결코 아님을 깨달았다. 진짜로 그는 죽을 수도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삣 섰다. 『그 여자가 우승 후보였나요?!』 『유력한 후보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제법 순위가 높았죠.』 『성격은요? 착하다던가, 순진하다던가... 아니면 모두에게 친절하다던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그들은 속으로 같은 내용을 생각했다. 그녀는 피처럼 붉은 구두를 신는 여자다. 그리고 그 구두를 흉기로 휘두를 줄 안다.
오남은 그 즉시 옷자락을 펄럭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겠다, 텐.』 『어째서? 생각보다 여기 축제라는게 보기와는 달리 참 재밌기만 하구먼. 지루하다 생각했던게 싹 사라졌어.』 『남의 집에 불 났냐?! 인석아!』 당연히 남의 집에 불 났다. 태영은 한가롭게 휘파람이나 불어댔다. 『에이, 화내지 말라고, 오남. 게다가 나에겐 그. 남.자.로부터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일이 있다고. 네가 관두자고 하거나, 그만두자고 하거나, 피하자고 말할 때마다 나는 세 번 안 된다고 말해야 해. 반드시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래서 부탁받은 그대로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원망하지 말아줘.』 『지금 뭐시라.』 『그럼 말할게. 도망치겠다고? 안 돼.』 『......』
여기서 태영이 말한 그 남자는 란데가스 제국의 제1인자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이시다.
Posted by 미야
2015/10/1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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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짬나는 대로 끄적이는 자급자족 습작입니다. 연재주기는 불규칙합니다. ※
미인은 그 발을 소제한 물도 달다더니... 순 공갈.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사고가 정지했다. 몸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미나가스트의 산적떼로부터 도끼로 머리를 찍어 죽이겠다 살해 위협을 받았을 적에도 손가락 하나 떨지 않던 그였지만 토사물 공격만큼은 얘기가 달랐다. 뭐, 지금도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은 건 마찬가지긴 하다만...
미인의 입에서 쏟아졌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악취가 진동하는 토사물을 머리위로 잔뜩 뒤집어쓴 탓일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등을 떠밀리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치우듯 광장 바깥쪽을 향해서 말이다. 완전히 귀신 장난이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거짓말처럼 행렬 뒤편으로 너무나 쉽게 밀려났다. 어, 어,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 누가 안아들었다가 내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광장에서 밀려나 한적한 골목 어귀 부근으로 안착했다.
『오남!』 태영은 오남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손을 흔들며 그에게로 뛰어 왔 - 다가, 코를 움켜쥐고 두 발자국 물러섰다. 여전히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인 그가 막 입을 떼려던 찰나, 괘씸하게도 태영은 저 남자는 자기 일행이 아니라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고양이에게 줄 쏘시지를 사러 가야지.』 『야!』 비타아른 공왕국에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생겼다.
『동티가 났구먼.』 더러워진 머리를 닦으라며 수건을 건네던 마을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동티가 났다고 할 수 있을까. 동티란 원래 예부터 건드려선 안 되는 걸 잘못 건드려 스스로 재앙을 사는 걸 일컫는다. 쉽게 예를 들자면 마을 어귀의 수호 목을 잘못 베고 나무꾼이 열을 내며 앓아누우면 그걸 가리켜 동티가 났다고 한다. 여신에게 바쳐진 공물을 탐을 내던 사제가 은전에 손을 대자마자 신전 대들보가 빠지면 그게 바로 동티다. 『미인대회에 출전한 가마 가까이 서있었던게 전부인데 제가 재앙을 샀단 말인가요.』 『그러니까 동티지.』 일흔 살은 족히 넘겼을 것처럼 보이던 노인이 별안간 심각한 표정으로 이 빠진 입을 안으로 오므렸다. 오목하게 홀쪽 들어간 노인의 뺨을 보자 오남은 지레 겁을 먹었다. 재앙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건 아닐지 염려스러웠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번갯불에 튀겨지기라도 하나. 그런 속도 모르고 노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응? 손을 마주 잡자고? 그건 아닐텐데. 무슨 의미로 내민 손인가 싶어 오남은 잠시 눈을 꿈뻑거렸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 『심하네!! 새 수건도 아니잖아요. 헤어져 구멍도 뚫렸는데 물건 값을 달라고요?! 그냥 재수 옴 붙은 나그네에게 공짜로 친절을 베풀면 안 됩니까. 영감님... 진짜지 그렇게 각박하게 살면 안 돼요.』 『야 이놈아.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딨누. 늙은이 저승길 노잣돈에 보탠다고 생각하고 수건 값을 내.』 요즘 세상엔 친절에도 값을 매긴다. 입을 앙 다물고 동전을 건네주자 인상을 구기고 있던 노인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돈으로 손주에게 과자라도 사줄 생각인가 보다. 싱글벙글 웃으며 노인이 안주머니 깊숙이 돈을 찔러 감췄다. 그 망할 호주머니에 구멍이라도 뻥 뚫려라, 속으로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눈을 흘 - 겼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럴 짬도 없었다. 그 동티라는 거, 아무래도 제대로다. 이번에는 삿대질을 하는 여자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를 향해 돌진해왔다. 저놈 잡아라, 쩌렁쩌렁 울리는 대사가 판에 박힌 듯 전형적이었다.
『멧돼지?』 불경하게도 오남은 일직선으로 공격해오는 빠르고 강한 날짐승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떠올렸다. 부릅뜬 눈에 눈물로 번진 화장, 땀으로 젖은 의상, 산발한 머리카락에 신경질적인 걸음걸이... 그런데 얼굴 생김새가 어디서 봤던 것처럼 익숙하다. 가만 헤아려보니 가마 위에서 그의 정수리 위로 토사물을 쏟아낸 바로 그 여자다. 이름 같은 건 모른다. 다만 어째서인지 저 여자가 판매사원으로 일한다는 사소한 것들이 떠올랐다.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고객들에게 새로 입고된 물건을 보여주며 상냥한 목소리로 상품을 선전하는 아가씨를 상상하긴 힘들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일직선으로 돌격하는 멧돼지다. 게다가 맛도 약간 갔다. 뒤집힌 눈이며 하얗게 거품이 올라온 입가가 아무래도 싱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멧돼지에 싱싱하다는 표현을 써? 보통은 생선 아니야?』 태영의 질문은 과감히 씹었다. 아무튼 잡히기만 하면 오도독 소리를 내며 한 입에 씹어 먹겠다며 그 기세가 매우 흉흉하다.
『뭐 하나 젊은이. 안 도망쳐?』 헌 수건을 새 수건 값으로 팔아치운 노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싱글벙글 웃었다. 오남에겐 재앙이었어도 그에겐 놓치기 힘든 여흥거리다. 『제가 왜 도망을 쳐야 합니까?』 『그럼 여기서 저 여자에게 멱살을 잡힌 채 먼지 휘날리도록 얻어터지던가.』 『그러니까 어째서 제가 얻어맞는다는 겁니까.』 『참말로 답답한 사람일세. 동티라고 했잖는가. 동티가 났다고. 그러니 달려. 어서 달리게!』 정말 모르겠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일단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고 보았지만 영문을 몰라 답답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다는 기분만 들었다. 축제라고 했는데. 미인대회라고 하던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흥분한 멧돼지에게 쫓기며 미로형의 골목길에서 행인들을 밀치며 전속력으로 달리기라는 걸 하고 있다. 『너! 거기 안 서!』 이제 멧돼지 여자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양손에 쥐었다. 『너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어떤 각오로 왔는데!』 뾰족한 여성 구두가 돌멩이처럼 날아들었다.
『화가 났을 법도 하죠. 일생일대의 기회가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날아갔으니.』 나름 증거물이랍시고 구두를 들어 구분된 봉지에 담던 경비원이 쓴 웃음을 지었다. 구두는 노리던 오남의 머리통을 박살내지는 못했다. 멀리 던지기에는 여자의 팔뚝 근육의 힘이 한참 모자랐다. 목표물을 빗나간 흉기는 대신 엉뚱한 행인을 맞췄는데 하필이면 사탕을 먹는데 열중해있던 여섯 살짜리 어린애였다. 정확하게는 아이가 먹던 큼직한 막대사탕을 명중시켰다. 애는 통곡했지만 하늘이 도왔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래도 아이 엄마가 화가 단단히 났기에 구두의 주인은 소환당해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또 당신입니까.』 경비원 루안은 시커멓게 빛깔이 죽은 눈자위를 문질렀다. 좁은 침상에 누워 쪽잠을 즐기던 중 어린아이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놀라 눈곱도 떼지 않고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왔더니 피해자는 막대사탕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데 목격자는 아는 얼굴이다. 게다가 식초를 쏟기라도 한 것처럼 시큼한 냄새도 풍기고 있다. 악취는 루안의 참을성을 바닥으로 만들었다. 『듣자하니 가마를 마구 흔들어 우승 후보였던 여자를 떨어뜨려 탈락시켰다면서요.』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을!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말입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악당을 잡아들였는데 말이죠. 그때마다 빼먹지 않고 듣는 말이 있어요.』 『정말입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바로 그 말이었어요. 오늘도 변함없이 듣게 되네요. 거 참.』 치솟는 짜증을 감추지 않은 채 루안이 쏘아붙였다.
Posted by 미야
2015/10/1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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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흥이 깨졌다. 오남은「귀양」운운하는 태영에게 구경거리를 적극 권하기가 난감해졌다. 예쁜 여자도, 맛난 풍토 음식도 그다지, 소년은 주체못할 지경으로 넘쳐나는 시간을 따분해할 뿐이다. 「난감하네. 아직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데. 《미스트》로부터 연락도 없는 상태고.」 오히려 태영이 관심을 보인 건 미인대회가 아닌, 지나가는 삼색 뚱땡이 암컷 고양이였다. 『여기 고양이가 있어, 오남!』 그러더니 쭈쭈 소리를 내며 낯선 고양이의 턱을 만지려 들었다. 『쏘시지를 주고 싶다.』 태영에게 번쩍 들어 올려진 길고양이가 니아옹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이 임박하자 어느새 광장은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환호성이 터지고 공중에서 준비된 꽃가루가 뿌려졌다. 코앞으로 적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종루에서 종까지 치고 있다. 덕분에 귀를 막아도 시끄럽고, 막지 않아도 귓청이 떨어질 것처럼 얼얼하다. 마침내 미인이 탄 가마가 멀리서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소리가 한층 요란해졌다. 발 디딜 틈도 없는 가운데 군중들이 가마를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며 앞에 선 사람을 밀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접근하지 말라며 행사 진행자들이 안간힘을 썼지만 현장 통솔은 엉망이다. 개 껌을 씹겠다며 달려드는 강아지의 꼬리를 어린애가 힘겹게 잡아당기는 꼬락서니다. 덕분에 맨 앞줄의 가마가 너울을 만난 것처럼 좌우로 요동쳤다. 가마 위에 올라탄 미녀가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손잡이를 움켜잡는게 멀리서도 보였다. 당혹감을 감춘 채 애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 마당에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소리가 사방으로 반사되어 더욱 웅장해졌다.
이런 식의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다. 내심 당황한 오남은 한 발 뒤로 빼려 했다. 『생각보다 엄청난 걸? 이래선 축제 어쩌고가 아닌데. 까딱하다간 깔려 죽겠군.』 『남의 일처럼 얘기할 때가 아니야, 오남. 우웃, 방금 발을 밟혔어!』 처음 이 두 사람은 골목 뒤쪽으로 자리를 잡고 남의 집에 불났다며 멀찍이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갑자기 누군가 등을 확 떠밀었다. 불쾌감에 뒤를 돌아보고 따지려 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또다시 밀쳐졌다. 어, 어 하는 순간 어느새 100보 거리를 떠밀렸다. 휩쓸린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 틈새로 몸이 꼈다. 끼기만 했던가. 납작하게 눌려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 상태에서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어딘가로 계속해서 흘러간다. 버티고 서서 두 다리에 힘을 꽉 줬지만 격류에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신발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사람의 얼굴이 휙휙 바뀌고 주변 건물의 모습이 휙휙 변해간다. 이대로는 멀미가 날 것 같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텐! 텐! 여기서 빠, 빠져 나가야 해.』 오남은 힘을 힘껏 팔을 뻗어 태영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태영의 손이 이렇게 굵고 포동포동했던가.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힘을 주어 끌어당기고 보니 가슴 풍만한 아줌마가 잔뜩 삐져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마당에 또 성추행이냐! 이 빌어먹을 옷 장사꾼아!』 고함소리는 뒤쪽에서 들렸다. 아니, 앞쪽이다. 아니면 그 옆이던가... 아무튼. 얼른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욕설이 들린 방향으로 헤엄쳤다. 하지만 태영이라 생각되는 머리통은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시야에서 계속 멀어져갔다. 잡힐 듯 말 듯, 이런 수준이 아니다. 거대한 힘이 그냥 확 채갔다. 『헐.』 의외로 포기는 빨랐다. 보호자가 필요한 코찔찔이 어린애가 아니니 어떻게든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것이다. 지금은 그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남은 자신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분명 시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도 앞뒤로 납작하게 눌린 시체. 그 전에 무리에서 빠져나갈 궁리부터 해야 한다.
체면불구하고 옆에 있는 사람의 옆구리를 세게 밀었다. 산소부족으로 안색이 파랗게 변한 다부진 몸집의 사내가 통증을 느끼고 오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자는 넋이 절반은 나가 왜 남의 옆구리를 찌르느냐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다만 무생물이 운동 에너지에 반응하는 것처럼 - 무거운 돌을 밀면 약간은 움직인다 - 땀을 비오듯 흘리며 옆으로 한 발자국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그것으로 오남 주변으로 여유가 생겼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남자가 옆으로 한 걸음 이동하자 자신은 두 걸음 그에게로 다가섰다. 자의는 아니다. 자꾸 뒤에서 밀어대는데 견딜 재주가 있나. 어느새 포옹하듯 밀착하여 뜨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사내가 뿜는 콧김이 불쾌하게 얼굴에 닿았다. 마찬가지로 오남 또한 뜨뜻한 입김을 사내의 목덜미에 내뿜었다. 하여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며 몸을 비틀어댔다. 그럴수록 부딪치는 팔뚝과 비벼지는 허벅지의 느낌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끔찍했다. 시큰거리는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마의 행진이 인파에 밀려 광장 안쪽으로 쉽게 진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군중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가마를 노리듯 돌진한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 죽겠어~!』 오남의 비명은 환호성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결국 산소부족으로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버린 그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이런 오남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건물 옥상으로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소동의 한 가운데를 내려다본 것이 아니다. 가마 위에 선 곱슬머리의 아가씨가 밀려오는 토기를 참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속으로 외치는 말은 사.람. 살.려. 느끼는 것은 동질감. 견디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입가를 막는다. 동시에 뺨이 볼록해졌다. 아가씨의 위급함을 눈으로 본 것도 아니면서 가마를 메고 있는 가마꾼의 얼굴 또한 홀쪽하게 변했다. 이 마당에 그녀가 구토를 하면 뜨뜻미지근한 국물이 떨어질 장소야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가마꾼은 꾀를 낸답시고 어깨에 들쳐 멘 무거운 가마를 슬그머니 옆으로 기울였다.
몸무게가 옆으로 쏠리자 비틀거리는 여자의 동작이 더욱 커졌다. 이제 그녀는 필사적이다. 머릿속으로 경전을 암송하며 울렁거림을 진정시켜보고자 기를 쓰지만 파도치는 손바닥들이 가마를 쿵쿵 찍어대자 빠른 속도로 한계점에 이르렀다. 《안 됩니다, 안 되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멀미라도 해봐요, 당장 탈락입니다.》 확성기 소리에 반응하여 이제 여자는 자신의 손등을 피가 나도록 꼬집었다. 경전 대신 원주율을 외운다.
이것이 미인대회. 8년마다 도래한다는 비타아른의 명물 축제다.
『오남, 오남!』 절반은 정신을 잃어 고개를 뒤로 젖혔던 오남이 목소리에 반응,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고 몸을 추슬렀다. 그래봤자 의식이 가물가물한게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렇게 기절한 채 있을 때가 아니라고.』 『기절하지 않았어.』 『흰 눈깔 뒤집고 있었으면서 어디서 거짓말이야. 당장 거기서 나와. 아니면 너, 분명 후회한다.』 말이 쉽지. 나도 이런 곳엔 있기 싫다고.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 태영이 숨을 들이켰다. 『아... 저 여자, 토한다.』 탄식과 같이하여 얼굴로 뜨뜻한 것이 쏟아져 내렸다.
Posted by 미야
2015/10/0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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