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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가방을 꾸려, 샘. 당장 이놈의 재수 없는 동네를 뜰 거야.』
사방에 널어놓은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가며 동생을 향해 명령했다. 이에 반하는 기타 의견은 일절 수렴하지 않겠음.「동생과의 사전 협의」라는 단어를 빼먹은 이 키 작은 보스는 성큼 걸음으로 반대편 벽장까지 곧장 향했다. 버릇대로 공처럼 둥굴게 말아둔 양말을 찾아 비닐 백에 넣었다. 꺼내놓은 책들과 자료로 모은 신문 스크랩들은 아무렇게나 쓸어담아 가방 속에 마구 찔러 넣었다.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은 두고볼 것도 없다며 포장된 상태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 그래도 무기류는 따로 신경을 써서 정리를 해두어야 한다. 베개 아래 숨겨둔 호신용 칼을 뽑아 육안으로 날의 상태를 점검한 뒤, 가죽으로 만들어진 전용 칼집에 잘 꽂았다.
어디 보자, 그럼 또 무엇을 챙겨야 하나.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딘은 아차, 소리를 내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콩 찍었다. 제일 중요한 걸 깜빡 잊었다.
『널 두고 갈 뻔했네. 그러니까 새미? 싸게 움직여. 여차하면 여기다 두고 간다.』

공부를 도중에 때려치우고 뜨네기 여행자로 살아온지 어연 2년이다. 훌훌 털고 다음 목적지로 떠나는 일이 하나도 어려울 리 없건만 샘은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딘의 움직임을 눈동자로 쫓으며「제발」이란 단어를 연발했다.
『기다려, 형.』
『오냐.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 이거지. 알았어. 딱 5분만 기다려주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오줌이 아니라 똥 마려워? 오케이. 그럼 1분을 더해서 6분.』
『디-인.』
제발 얘기 좀 하자며 두 팔을 벌렸다.
『이성에 호소해서 형이 지금 이러는게 결코 옳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어. 핸드폰에 남겨진 EVP가 애쉬의 장난으로 판명난 것도 아니잖아. 혹시라도 그게 진짜 유령의 짓이면 그때는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 말뚝으로 콱 박아버려야지.』
『쉽게 말하지 마.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건 나보다 형이 더 잘 알잖아.』

사람들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유령은 무조건 경계하고 보는게 좋다.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도록 돕는다는 영국의 엘로브릿지 교차로의 유령처럼 선한 의지로 모습을 드러내는 유령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허나 보통은 겁에 질려있거나, 악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분노에 차있기 일수다. 이런 부류의 유령들은 대다수가 산 사람에게 적대적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공격적 성향이 악화되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어제는 예의바르게 문을 두드리다가 오늘은 노여움에 치를 떨며 무거운 가구를 거꾸로 집어던지는 식이다. 심각해지면 보이는 족족 유리창을 전부 박살내거나, 집안에 사는 어린아이를 일부러 물에 빠뜨려 죽게 만들기도 한다.
샘이 염려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은 별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고 나중에까지 그러라는 법이 없다. 잠든 어린아이처럼 얌전하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마약에 취한 람보가 되는 유령은 많다. 딘이 자기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갑자기 얼굴색을 달리하고 방법을 바꿔 물리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수도 있다. 머리 위로 화분을 떨어뜨려 경고를 주는 식이다. 만사가 극단적인 유령은 화분에 잘못 맞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건 전혀 생각지 않는다. 아울러 머리통을 신나게 깨부수고도「미안하다」사과하는 법도 없다. 일단 죽으면 성인군자고 뭐고 다 그렇게 변하는 건지, 유령의 습성이라는게 원래 그렇다.

『그까짓 화분, 피하면 그만이지. 뭐가 문제라고 엄살이니.』
딘은 문제될 것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쇼트트랙 선수가 유연한 동작으로 얼음판을 미끄러지는 동작을 흉내내며 우쭐거렸다. 보았느냐, 형의 빼어난 운동 신경을. 화분이 아니라 바위가 떨어져도 끄떡 없느니라. 자, 아멘으로 화답하거라.
지퍼가 열린 가방을 침대 위로 던지고 샘의 재산 목록 제 1호인 노트북을 손가락질 했다. 어서 짐을 챙기라는 뜻이다.

『자, 이제 이야긴 다 끝난 거지? 그럼 싸게 가방을 꾸린다. 실시.』
『그치만 행여라도 형이 다치기라도 하면...』
『안 다쳐.』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 그건. 내 생각은 달라. 모든게 확실해지기 전까진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된다고 봐. 형이 계속 모르는 척하면 유령이 화가 나서 공격할 수도 있어.』
『이봐? 재수 없는 추측은 하지 말아. 자칫하면 내 다리 몽둥이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거니?』
『그건 알 수 없지.』
『그래. 알 수 없어. 내 다리 몽둥이가 부러질 수도 있고, 안 부러질 수도 있는 거야. 알 수 없는 미래까지 염려해서 뭘 하게?』
두 다리를 벌리고 선 딘은 평소보다 키가 곱절은 커 보였다. 샘은 살짝 주눅이 들었다.
『어쩌다 내 핸드폰으로 정체불명의 유령 목소리가 포착되었을 뿐이야. 그것도「추워요」라고 말한게 전부이고. 이게 무서워 사방에 소금 결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니? 입에다 마늘을 달고 살아야 하냐고. 내가 그래야 할 것 같아?』
『딘...』
『그만하자. 난 무시할테다.』

그래도 샘은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형이 냄새 나는 마늘을 입에 달고 사는 건 반대야. 하지만 이건 확실해. 그 괴 전화가 내 핸드폰으로 왔다면 형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신중해져야 한다며 몸 조심을 다짐시키고, 유령의 정체를 확인한답시고 부랴부랴 지역 도서관으로 가 오래된 신문들부터 들쳐봤을 걸. 내 말이 틀려?』
음... 그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딘은 끙 소리를 내며 어색함을 감추고저 코를 만졌다.
그것과 같이하여 샘은「이렇게 하는게 좋다」는 계산을 염두에 두고 물에 흠뻑 젖은 불쌍한 강아지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적부터 딘은 동생이 깽깽 소리를 내면 고집을 한풀 꺾는 경향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 몰래 표정 연습도 해왔다. 바로 지금처럼 눈꼬리를 내리고 울상을 짓는 거다.
『그리고 난 형이「이건 내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하는 걸 원치 않아. 형의 일이니까 나도 돕고 싶어.』
『동생아...』
『돕게 해줘. 그렇게 할 거지?』

타협을 하자며 손가락 다섯 개를 펴보였다.
딘이 인상을 찡그렸다.
되었다. 샘은 확신했다. 성공적으로 구워 삶았다.
『.......... 5시간?』
『아니, 5주.』
『야, 강아지! 그건 너무 길어. 그러지 말고 5일로 하자. 5일이면 충분하지 않겠어?』
『오케이. 그럼 당장 그 가방부터 내려놓자.』

그것은 제법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샘은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어 보자며 침착한 태도로 노트와 펜을 꺼내들었다.
『유령과 산 사람이 서로 마주치게 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
『혈연, 장소, 사건... 이 자식이 지금 누굴 테스트 하자는 거야.』
딘은 불만을 표시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너만 헌터인 줄 알어? 네 형도 헌터야.』

그 첫 번째가 혈연으로 서로 연관이 있는 경우다. 할아버지의 유령이 손녀에게 나타난다거나, 어머니의 유령이 아들에게 나타난다거나 하는 식이다.
『우린 이 경우는 제외해도 될 거야.』
샘은 노트 위로 적은「혈연」이라는 단어에 X자를 그렸다.
그렇다면 그 두 번째 접합점은 장소다. 잿더미만 남은 화재 현장에서 피해자의 유령을 봤다고 진술하는 소방관들이라던가, 호수에서 친구들끼리 뱃놀이를 즐기며 사진을 찍었는데 어린애의 팔뚝이 노를 잡고 있는게 찍혔더라 식의 얘기가 여기에 속한다. 유령과 목격자들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단지 그 장소가 문제였을 뿐이다. 불타버린 집, 그리고 아이가 물에 빠져 죽은 호수.
샘은「장소」라고 적은 단어를 볼펜으로 콕콕 찔렀다.

『지난 한 달동안 형이 어디를 갔다 왔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겠어.』
『파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요. 공사장, 집. 물류창고, 집, 공사장, 집, 물류창고, 집...』
여기서 숨 한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한 장소를 덧붙였다.
『랩 댄스 클럽에 딱 한 번...』
몰래 댄서들의 홀딱쇼를 즐기러 갔다는 고백에 동생의 눈빛이 확 거칠어졌다.
책망하는 그 시선에 딘은 중요한 경기를 망친 운동선수인양 고개를 푹 숙였다.
감독님이 화났다. 무셔, 무셔. 딘의 등이 노인네의 그것처럼 구부정하게 변했다.
『으아, 진짜~! 죽어라 고생해서 돈을 벌어놓곤, 한 타임에 35달러나 주고 G스트링만 입은 여자들의 테이블 댄스를 침 흘리며 구경했단 말이야?!』
『팁은 별도야.』
『의기양양해 하며 말하지 마!』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가끔은 오른손 애인이 싫어질 때가 있단 말이야, 샘. 너도 사내 자식이니까 내가 말하는게 어떤 건지 잘 알 거 아니냐. 리얼과 판타스틱이 교묘하게 만나...』
채 듣지 않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차라리 오른손 애인이 낫지! 놋쇠로 만든 봉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여자를 보며 욕구를 해소하는게 더 끔찍해! 그게 뭐야.』
『어. 가끔은 무대 밖에서 몸을 비벼주기도 하는데.』
『그만~!!』
샘이 쥐고 있던 볼펜이 뚝 소리를 내며 망가졌다. 더 얘기하다간 부러진게 볼펜 심이 아니라 다른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된 딘은「무조건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슬그머니 더듬이질을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조사하러 가 볼래?』
『랩 댄스 클럽에? 꿈 깨.』
성가시다는 투로 샘이 메모지를 찢어 구겼다. 그 평범한 동작 하나하나가 딘에게는 위협이었다. 정작 구기고 싶은 건 종이가 아니라 남의 멱살이겠거니 판단한 딘은 크게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아쉽긴 해도 좋지 않다고 판명된 패는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그래서 나름 안전하다 싶은 주제로 돌아갔다.
『그럼 공사장이나 물류 창고가 문제였다는 얘긴데... 이 형님은 모르겠다. 내가 굴리던게 중국에서 온 싸구려 가방 덩어리들이 아니라 수족이 잘린 시체였다는 가정은 꿈에도 하기가 싫구나.』
현명한 판단이었다. 씩씩거리던 동생의 호흡이 다시 안정되기 시작했다.
『일하면서 겪은 특별한 징조 같은 건 전혀 없었어?』
『음... 창고에서 같이 일하던 푸에타리코 씨가 먹어보라고 권한 햄 샌드위치는 참 맛있었어. 토마토와 양상치가 아삭거리는 촉감이 기가 막혔지. 두툼해서 배도 불렀어.』
『딘? 난 지금 무지 진지하거든.』
『네 눈은 해태냐. 나도 진지해.』
양손을 머리 뒤로 대며 딘이 툴툴거렸다.

잠시 두 사람은 대화를 중지했다.
토옥, 토옥 소리가 나게끔 볼펜의 머리 부분으로 테이블을 찍었다.
아무튼 물류 창고 괴담은 그 가능성이 적다. 설사 딘이 운반하던 상자 속으로 중국제 짝퉁 시계 대신 원한에 사무친 미이라가 들어 있었다고 쳐도 - 그게 세관 통과를 어떻게 했는지는 별도로 치고 - 이미 오래 전에 트럭에 실려 마이애미, 플로리다, 기타등등 어딘가로 훌훌 떠나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 시점에서 이미「장소」이론과는 맞지 않게 된다. 시체는 - 유령은 수천km 밖으로 멀어졌다. 추워요 어쩌고 하면서 딘의 핸드폰에 대고 나부렁거리기엔 장거리 전화 요금부터 걱정해야 할 판국이다.

샘은 메모지를 다음 장으로 넘기고 목소리를 바꿨다.
『좋아, 그럼 방법을 바꿔서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일단 그놈의 괴전화가 언제부터 오기 시작했는지 생각 나?』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게...』
『최초로 전화를 받았던 장소가 힌트일 수 있어.』
『음, 가만 있어봐. 뭔가 떠오를 것도 같으니까.』
입술을 문지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흐릿한 그림이 떠오르려 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힘내.
샘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런 딘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Posted by 미야

2007/04/21 20:07 2007/04/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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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신문을 보니까《난 영어를 못해, 버러지가 된 기분이야》라며 우울증에 빠진 대학생들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이게 저에게 닥치면《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도 못해, 읽고 죽으려 해도 팬픽을 읽을 수 없어, 버러지가 된 기분이야》가 됩니다. 황금 어장을 코앞에 두고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는 이 절망감. 배고픔에 몸부림치다 못해 결국은 자체 먹거리를 제작하는 내가 너무 불쌍혀...
요즘 쥰쥰은 검은 별 아래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뭔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굴어도 이해를 해주세요. 메시지 답변도 그래서 전혀 못 해드리고 있습니다. ※


『일단은 볼륨을 최대치로 올려봤어.』
간단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빨간색 막대 그래프를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만들었다.
최대치라는 말에 걱정이 된 딘은 행여 귓청을 일시에 날려버릴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진 않을까 긴장하여 어깨를 바짝 움추렸다. 그게 꼭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난 준비 되었어요. 보세요, 눈을 꼭 감고 있죠? 절대로 아프다고 울진 않을 거예요》라며 허세를 부리는 어린애의 모습인지라 샘은 덧붙여 길게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봤자 노트북으로 다운로드 받은 파일의 길이는 겨우 40초밖에 되지 않는다. 프로그램이 어쩌고, 조작방법이 어쩌고 떠들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다. 주사바늘로 찌르기도 전에 상황 종료. 안심하라며 딘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재생이 끝났다.

상상하던 대포 소리가 안 들렸음이다. 어리둥절해 하며「이게 뭐꼬?」라는 투로 샘을 쳐다봤다. 들을 수 있었던 건 치익- 하는 잡음이 전부. 나를 속인 거냐며 딘이 눈꼬리를 올렸다.
『유령이 내는 목소리는 인간의 귀로는 잘 들을 수 없다 - 라는 아빠의 말을 기억해?』
『음. 채널이 틀리다고 하셨지.』
『바로 그거야. 그래서 돌고래의 보호를 주장하는 환경 단체의 홈페이지에서「돌고래 목소리 들어보기」라는 프리웨어를 다운로드 받았어. 고주파수를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도록 변경해주는 프로그램이야.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보스턴 공과대학 학생이「프리윌리」영화를 무지 재밌게 봤다면서 만든 거라는데 내가 봐도 썩 괜찮아. 조작법도 간단하고, 용량도 그리 크지 않고. 그걸로 딘의 핸드폰에 저장된 음성 파일의 주파수를 조정해봤지. 적당한 채널을 찾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도 성과가 있었어. 그럼 변환한 파일을 다시 한 번 들어볼래? 헤드 셋을 도로 써.』

마음을 굳게 먹으세요. 준비 되었나요. 괜찮다 싶으면 오케이 싸인을 보내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핵폭탄 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르는 기분으로 엔터 키를 눌렀다.

《추워요.......... 엄마... 엄마?》

이번엔 약간 달랐다. 뱀이 쉭쉭거리는 듯한 노이즈에 섞여 가느다랗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인 것도 같고, 남자인 것도 같다. 어린애처럼 들리기도 하고, 노인네의 탄식 소리 같기도 하다. 쉽게 말해 종잡을 수 없다. 딘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들었어?』
『EVP (Electronic Voice Phenomenon). 전자음성현상.』
『예스. 아쉽게도 상대는 입고 있는 속옷의 색깔을 묻는 변태가 아니었던 거야, 딘.』
『젠장! 이런 좇 같은!』

욕설을 퍼부으며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쩐지 그는 대단히 분노한 표정이다.
왜 딘이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지를 모르겠다. 당황한 샘은 펄펄 끓다못해 사방으로 음식물 찌꺼기를 날려보내고 있는 이놈의 양은 냄비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무작정 뚜껑부터 덮고 봐? 자칫 실수하는 날엔 뜨거운 국물을 뒤집어쓰고 끔찍한 화상을 입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어쨌든 화덕에서 냄비를 내려놓아야...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아이고, 혈압이야!」비명까지 질러가며 뒷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딘을 다독거리려 애썼다.

『형? 일단 진정하자. 여기, 의자. 응? 앉아 봐.』
『Shit! 너라면 진정할 수 있겠어? 난 진정 못 해! 아빠나 삼촌, 최소한 아저씨 등등으로 부르기만 했어도 용서해줄 의향이 있었어! 그런데 엄마라닛! 이놈의 자식, 왕소금에 버무려 맛있게 태워줄테닷! 크앗~!』
분노의 원인이 (겨우) 그거였나. 샘은 바보처럼 굴고 있는 딘을 한심하다며 쳐다봤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맞았어, 아들. 사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지.』
딘은 여지껏 벌려져 있는 동생의 근육질 팔뚝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며 - 날 안으려는 거라면 맹세코 널 죽여버릴거야 - 위협적인 으르렁 소리를 냈다.

그들 형제는 헌터다. 유령을 잡는다.
『그런 우리들에게 보란 듯이 전화를 걸어? 유령이? 완전히 미친 또라이 짓 아냐.』

이걸 비유로 바꿔보겠다. 여우가 사냥꾼 앞을 어슬렁대며「제발 나를 잡아 값비싼 모피 코트로 만들어 주세요」애원하는 격이다.
『지능이라던가, 판단력, 내지는 생존 본능이라는게 있는데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 여우가 과연 존재할련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머리에 회충이 들어가 살짝 미쳤다고 치자고. 문제는 유령의 머리에도 회충이 들어갈 수 있느냐는 거야. 난 그게 불가능하다고 봐.』
『그러니까 형의 말은... 이게 유령의 짓이 아니라는 거야?』
『당연하지! 세상 천지 어느 유령이 헌터에게「나 잡아봐라~」전화를 걸겠냐. 수배범이 경찰서 앞을 어슬렁거리면 마음을 고쳐 먹고 자수를 하려나 보다 생각이라도 할 수 있지. 이건 두고볼 것 없이 장난이야. 게다가 나는 이런 짓을 저지를만한 엉뚱한 인간을 하나 알고 있어. 컴퓨터 사용에는 누구보다 능숙하지만, 머리가 텅 비었고, 상식이라는게 없고, 약에 쩔었지.』
형이 지목한 용의자가 누군지를 깨달은 샘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맙소사, 애쉬...?』

전화벨이 스무 번쯤 울렸다. 아직 영업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님 뭔 일이 생긴 건가. 딘은 루미녹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발을 동동 굴러댔다. 무남독녀 조가 독립을 선언하고 로드 하우스에서 나간 이후부터 앨런의 술집은 가끔 이런 식으로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종업원 애쉬는 애시당초 골칫덩이다. 앨런 혼자서는 일이 버겁다. 그리하여 감독하는 눈을 피해 사건이 벌어진다.
이제 전화벨은 서른 번을 훌쩍 넘어갔다. 또다시 끓는 국물이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용암 저리가라로 뜨겁게 달아오른 화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던 샘은「내가 눈치도 없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나」걱정하며 손톱을 씹었다.
거짓으로 화를 내는 딘은 오히려 귀엽다. 단, 그가 진짜로 화를 내면 무섭다. 샘이 임팔라 천장에 구멍이 뚫렸다고 펄펄 뛰는 딘을 피해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났던 건 다 까닭이 있다. 해안가로 200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밀어닥치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대서양 한 복판으로 지름 50km의 운석이 떨어졌어도 이보단 덜 흉악하다. 잡히면 머리카락이 송두리째 뽑힌다. 애쉬는 아마 죽게될 것이다.

홧김에 핸드폰을 집어 던지기 전, 잠에 취한 것이 분명한 애쉬가 가까스로 수화기를 들었다.
《아음냐. 여기는 로드 하우스외다. 게 누구슈...?》
『나다! 네 애미다!』
놀란 애쉬가 헉,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샘의 귀에까지 들렸다.
《어, 엄마?》
『그래! 엄마다!』
딘이 고래고래 악을 쓰는 것과 같이하여 전화는 뚝 끊겨버렸다.
그것이 자신이 유죄임을 고백한 거나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한 딘은 뚜껑이 열렸다.
『흥! 피한다고 피해질 줄 알어? 이놈의 망할 자식!』
맹렬한 속도로 숫자 버튼을 다시 눌러대는 걸 옆에서 지켜보던 샘은 잠자코 전화번호부 책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장례식장으로 보낼 화환으로 뭘 주문하면 좋을지는 형과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고... 그보다 앨런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할지 모르겠다. 하나뿐인 종업원이 죽었는데 이참에 가게 문을 닫고 은퇴하는 건 어때요 - 샘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무리다. 입을 떼기가 무섭게 앨런 여사는 엽총을 꺼내들고 방아쇠부터 당길 거다.

『애~쉬~!!』
《옴마, 딘 형씨 아니쇼. 겁나게 와 그라슈. 징징.》
전화가 다시 연결되자마자 애쉬는 우는 소리부터 냈다. 시작부터 나쁘다.「누가 내 엄마라는 거요. 농담치곤 안 웃겨요」라며 너스레를 떨어야 얘기가 그럭저럭 진행이 될 수 있을 터. 더듬이를 길게 빼고「언제부터 내 짓인지 눈치챘어요?」라는 투로 나오면 빗발치는 기관총에 반드시 바람 구멍이 뚫리게 된다.
바보, 멍청이. 위기시 살아남는 법에 관하여 어드바이스라도 하고 싶어졌다. 샘은 30분간에 걸쳐 무료로 강의를 할 의사가 있었다. 한껏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딘을 보자 매뉴얼은 다시「피에 굶주린 식인 상어를 피해 해변가까지 무사히 헤엄칠 수 있는 법」으로 넘어갔다. 그럼 응원해보자. 죠스의 BGM, 빠밤, 빠밤, 빠밤빠밤 빠라바~ 가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샘은「네가 겪을 고통이 결코 길지 않기를 바래」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옴마! 그런 장난은 치지 않아요.》
잘 했어, 애쉬! 일단 발뺌부터 하는 거야.
《난 그저 조에게 당신 별명이「딩딩」이라 말한 것밖엔...》
그렇다고 지뢰를 밟으면 십중팔구 수족이 잘리게 되지, 이 얼간아.

샘은 본능적으로 두 귀를 막았다.
그렇게 하길 참 잘 했다. 가까운 곳에서 벼락이 쳤고, 지붕이 들썩거렸다. 압정을 밟은 사자는 마구 날뛰었고, 피 냄새를 머금은 가시 덩굴이 사방으로 자라났다. 무섭게 표정이 일그러진 딘은 코앞에 당사자가 있다는 식으로 마구 삿대질을 해댔다. 그러고도 성이 차질 않았던지 붕붕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휘둘러댔다.
『죽고 싶은 거지. 응? 죽고 싶은 거야. 조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고? 하하하, 유쾌하군. 대단히 즐거워. 그러니까 애쉬? 유서는 다 썼어?』
샘은 멀찍이 떨어져 이놈의 성가신 폭풍이 빨리 지나가기만 기도했다.
《지, 진정혀요, 형씨!》
『내가 지금 진정하면 딘 윈체스터가 아니야. 기다려. 금방 달려갈게. 그러니 목을 씻고 몸통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갈 준비나 해.』
《으햣?! 나, 나를 죽이면 당신이 원하는「뱀퍼」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다니까~!!》
『시끄럿! 지금 뱀퍼가 문제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꺼림직스러웠던 모양이다. 높았던 목소리가 살짝 내려갔다.
『그런데... 뱀퍼가 뭐지.』
수화기 저편에서 애쉬가 휘우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슬아슬하게 소행성이 지구를 비켜갔다. 아차했다간 최소한 10억명의 인류가 사망하고 현대 문명이 완전 붕괴되었을 거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재앙은 유보되었다.

《뱀퍼는「뱀파이어 헌터」의 약어라오. 감옥에서 10년 썩고 나왔수? 그런 것도 모르고.》
『닥치고 주둥이 정돈한다.』
《씨씨. 내가 죄인이오, 내가 죄인이라니까.》
애쉬는 답지않게 비굴 모드로 굽신거렸다.
여기서 샘은 한 가지 사실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애쉬는 형이 질겁을 하는 딩딩이라는 별명을 조에게만 불어댄 것이 아니다. 협박을 더 하면 그 별명을 알고 있는 자의 명단이 줄줄 흘러나올 거다. 그 맨 첫줄에는 앨런이 있고, 그 다음 줄로는 바비 아저씨가 있고, 그 다음 줄로는... 상상하기가 끔찍하다. 동업자들이 그들 형제를 보고 아는 척을 하면서「어이, 딩딩~!」이라 인사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랬다간 대형 유혈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엔 뱀퍼들 숫자가 그리 않지 않다오. 뱀파이어들이 싸그리 멸종했다는 소문도 있고 그러니까. 고든이란 자가 유명하긴 한데 댁들과는 악연이라지? 그래서 고든과 연관이 있는 뱀퍼들까지 빼니까 남는게 하나도 없지 뭐유. 하지만 내가 누구요. 천재 소년 애쉬 아니겠수?》
『그만 지랄해라. 지겨워지려 하고 있다.』
《오메, 무셔... 겁나서 오줌 싸겠수.》
『진짜로 질질 싸게 만들어줄까. 빨리 이름이나 불어!』
《쳇! 알았수. 똑바로 받아 적으슈.「리」라고 하는 자요. 퍼스트 네임, 미들 네임, 죄다 불명이고 나이 및 거주지 역시 불명. 하지만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뱀퍼예요. 게다가 여럿이선 안 움직이고 단독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 댁들관 아마 잘 맞을 게요. 형씨를 위해 내가 리의 우편 사서함으로 이미 전보를 넣었지. 조만간 그쪽에서 은밀히 만나자고 연락을 취해올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왜 댁들이 뱀퍼의 도움을 필요로 하...》
『끊자!』

딘은 애쉬의 질문을 싸늘하게 자르며 짜증나는 핸드폰을 침대로 던졌다.
그리고는 얼렐레. 생각해보니 미처 캐묻질 못 했다.
『씨잉. 그럼. 장난 전화질은 누가 했다는 거야?!』
그런 딘을 향해 장례식장에 어떤 꽃을 보낼 거냐며 샘이 전화번호부 책을 들이밀었다.


리는 이번 에피소드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Posted by 미야

2007/04/19 20:05 2007/04/1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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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불펌 및 무단 링크는 사양합니다. 비공개 카페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툴툴... ※


화가 치밀어 그렇게 말은 하긴 했다만 곧 후회했다.
딘의 얼굴로 두려움이 떠올랐다. 헤프게 웃으며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형도 끔찍하지만 저것이야말로 샘이 가장 싫어하는 표정이다. 극도의 경계심을 띄우고 주춤거리는 딘을 볼 적마다 웅웅거리는 전기톱을 사람들을 향해 아무렇게나 휘둘러대는 사이코 연쇄 살인마라도 된 기분이 되어버린다. 평소처럼 몹쓸 강아지 예뻐하는 눈빛이 아니다. 뼈로 만든 왕관을 쓰고 붉은 카펫 대신 피바다 위를 걷고 있는 악마 대왕과 마주쳤다는 식이다. 뱉은 말을 도로 주워담는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밖으로 밀쳐내려는 동작과 같이 하여「저건 내 동생 샘이 아니라 몬스터다, 악마다, 귀신이다!」따위의 염불을 외우고 있는 딘은 진짜지 끔찍하다.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봤자 소용 없을 거라며 엉덩이에 힘을 팍 주고 있는 모양은 또 어떻고. 이대로 의자에 달라붙고 싶다는 소원을 램프의 요정 지니에게 빌고 있다. 완력으로는 샘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해볼 작정인가 보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테이블 모서리를 붙잡았다.「절대로 네놈에게 붙들려 화장실로 끌려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굳은 의지가 읽혀지는 행동이었다.

대화의 주제를 슬슬 바꿔볼 필요가 있었다. 찡그리며 자기 몫의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긴장 풀어. 그러고 있으니까 꼭 악성 치질에 걸려 의자에 앉아있기가 대단히 곤란한 환자처럼 보여. 웃기는 행동은 그만하고 전화나 받아. 그거 알아? 아까부터 형의 핸드폰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고.』
『아항~ 안 속아, 샘. 그거 속임수지. 형을 너무 만만하게 봤어.』
『뭐? 이게 전부 페인트라고? 그러니까 일단 전화로 관심을 돌리게 한 다음에, 형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다 싶으면 바로 지금이다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 거라 생각한다는 거야?』
『응.』
『맙소사, 딘. 어떻게 거기서 정색하며「응」이라 대답할 수가 있어! 형과 얘기를 하다보면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라도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번쩍 집어드는 짓은 하지 않아. 프로레슬링 놀이는 10년 전에 졸업했다고. 딘이 상상하는 그런 흉악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테니 마음 푹 놓고 전화나 받아.』
진짜로 그랬다간 지역 신문으로「식당에서 곰이 식사 중인 사람을 습격하다」라는 기사가 실리게 된다. 재작년 러시아 전역에 회자되었던「백곰이 모피를 벗어던지고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다」뉴스 타이틀 다음으로 우스꽝스러울 거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 제목이「술 취한 백곰이 모피를 벗었다가 음란물 공연죄로 당국에 체포당하다」였던 것도 같다. 어느 쪽인지는 살짝 헷갈린다.

요구만 한다면 보이스카웃 선서라도 하겠다며 가슴을 똑바로 폈다.
『맹세라도 해줘?』
『못 믿겠는데. 너, 뒤로 손가락 꼬고 있지.』
행여 곰이 앞발을 들지는 않을까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딘은 아침 밥을 오물거렸다.
『딘. 제발 살려줘.』
『하지만 벨소리도 안 울렸는 걸.』
『진동 모드로 바꿔놓은 거 아니었어? 그치만 진짜야. 전화가 왔다고.』

샘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그제서야 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내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말이네. 그런데 왜 벨이 안 울리냐. 게다가 발신자 정보 없음? 뭐야, 이거. 고장났나.』
땅바닥에 떨어뜨렸다거나, 실수로 변기에 풍덩 빠뜨린 기억은 없다. 그래도 침대에 훌쩍 던진 적은 있으니 납땜이 부실한 부품 하나가 제 자리를 잃었다는 가설에 힘이 쏠린다.
딘은 손바닥으로 애꿎은 기계를 탁탁 때려 말썽을 부리는 핸드폰이 저절로 고쳐지길 희망했다.
무식하다고? 설마. 듣자하니 최근 유행하고 있는 사이언톨로지 관계자들은 오작동을 일으킨 전자렌지를 기도 하나로 원래대로 복구시켰다고 주장하며 신도를 모집하고 있는 판국이다. 이게 진짜냐고? 진짜니까 문제다.
<오늘은 환상적인 날이었다. 커피를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커피 기계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손을 뻗어 기계 주위로 손을 움직여, 광선을 발사시켜 반사되게 했다. 그 결과 미립자가 흐르는 위치를 통해서 고장난 기계 부위를 정확히 알아냈다. 그 부위의 분자 구조를 바로잡아 윙윙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얼마 후에 내 방의 에어컨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기에 어찌된 이유인지 알아내어 바로잡았다.>
거기에 비하면 지직거리는 텔레비전을 앞뒤로 마구 흔들어 기어코 미식 축구 중계방송이 나오게끔 만드는 우리들 아버지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나 다름 없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무리 기다려도 들려오는 대꾸는 없고.
어깨를 으쓱이며 귀찮다는 듯이「종료」버튼을 눌렀다.
『이상하네. 요즘들어 자주 이런다니까. 아무래도 핸드폰을 새로 사던가 해야 할까봐. 통화가 연결되었는데도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릴 때가 종종 생겨. 그것도 두 번, 세 번씩 꼭 그런다니까.』
『누가 장난치는 건 아니고?』
『그럼「하아, 하아」숨소리라도 들려야 하잖아.』
『아무 소리도 안 나?』
『전혀. 꼭 물속에서 잠수복 입고 전화 받는 기분이야.』
『음... 그렇담 혹시 받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닐까.』
『네 말대로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군. 그럼... 옛다.』
딘은 두말할 것 없다며 자신의 핸드폰을 동생에게 훌쩍 던졌다.

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목소리도 커졌다.
『뭐야, 지금 그 발언은! 형이 아니라 내가 받으면 상대방이「하아, 하아」할 거라는 거야?!』
『응.』
『딘! 나도 남자야!』
『그랬어? 그거야말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엄청난 소식이군. 그러니까 새미? 변태 자식이 숨을 헐떡이며 네 팬티 색깔이 뭐냐고 물으면 심플한 파랑이라 대답을 해주는 거다.』
『형!』
『아님 레이스 달린 섹시한 검정이라고 거짓말 하든지. 후후후.』

홧김에 식탁을 거꾸로 뒤집기 전, 다시 착신을 알리는 알람이 켜졌다.
샘은 손가락을 하나 들어「좀 있다 보자!」라는 뜻을 분명한 뒤에 형을 대신하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행이다. 변태는 샘을 여자로 착각하지 않았다. 하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음에 노골적으로 안도해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대방은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의 색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기분 나쁜 - 이걸 도대체 무어라 해야 한단 말인가 - 엄청난 무게의 침묵이 전파를 타고 대량으로 흘러 들어왔다.

재차 확인해 보았다.
『잘못 거신 것이 아니라면... 여보세요.』
『어때, 새미. 저쪽에서 네 속옷 상표가 뭐냐고 물어보니?』
『쉿!』
수영장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량의 흙을 일시에 거꾸로 들이붓는 듯한 박력의 고요함이었다. 샘은 축축한 무덤가를 떠올렸고, 썩은 흙을 파먹는 벌레, 그리고 비루먹은 검은 말을 탄 해골의 기사가 등장하는 타로트의 열 세번째 카드를 생각해냈다. 기사는 왕관이 벗겨진 교황과 수치를 입은 여왕을 밟아대며 언덕 꼭대기로 정복자의 깃발을 꽂는다. 전쟁의 마지막을 알리는 환호성은 울려퍼지지 않는다. 대신 들판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침묵이다.
생명을 창조한, 태초의 말씀이 선포되기 이전의 대지.
그곳엔 그림자조차 깨끗하게 말살된 유령만이 하릴 없이 떠돌고 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직업적 직감이라는게 경고를 보내왔다.
『이봐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기계 결함으로 인한 단순한 오류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그 무엇인가가 신경을 긁었다. 샘은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어두운 방안에서 의자와 같은 사물을 피해 돌아다닐 적의 요령으로 집중했다.
동생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딘도 시덥잖은 장난을 관뒀다.
『샘?』
『모르겠어.』
그래봤자 가벼운 기침 소리도 나지 않았다.
1분 정도 뒤에 전화는 저절로 끊겼다.

『쳇! 가뜩이나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 핸드폰까지 말썽이야.』
딘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단말기 고장, 전파 방해, 수신지역을 벗어남, 아니면 대단히 수줍음이 많은 (나에게 반한) 아가씨, 기타등등의 가능성을 저울질했다. 특히나 마지막 가능성에 입술이 둥글게 구부러졌다. 예쁜 금발의 여자에게라면 스토킹 당하는 것도 괜찮다. 별자리를 물어봐서 기피 대상인 전갈좌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이 되면「물 위의 하룻밤」이 아니라「물 침대에서의 하룻밤」소설을 즉석에서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딘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동생이 방해 공작 및 훼방을 놓을 것이 분명하긴 하지만,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딘은 보들보들한 여자의 가슴을 상상하며 손바닥으로 살갗을 쓸어내리는 동작을 해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눈을 생각하쇼 - 단단히 주의를 주며 변태 형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이거, 어쩐지 오싹하지 않아?』
『응. 오싹해.』
『딘? 내가 지금 말하는 건 즐겁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그런 오싹함이 아니야.』
『음... 그랬니. 하여간 이 형은 잘 모르겠는데.』
딘은 별 일 아니라며 마지막 남은 팬 케이크 조각을 남김 없이 주워다 입안에 털어 넣었다.

허나 형의 말대로 정말로 별 일 아니라 생각하면 샘 윈체스터가 아니다.
8시간 뒤, 고된 육체 노동을 마무리하고 모텔로 돌아온 딘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온 건 커다란 헤드 셋을 쓰고 노트북 앞에 앉은 샘의 거대한 등짝이었다.
다녀 왔느냐는 인사도 빼먹었다. 대신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등을 둥글게 구부리고는 마우스를 바쁘게 딸각거렸다.
『헤이.』
헤드 셋 때문에 귀는 닫혔다고 치자. 그래도 코는 열려져 있을 터이니 최소한 딘이 싸들고 온 햄버거의 맛있는 냄새는 맡았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얄밉게 고개 한 번 안 돌린다.
깡그리 무시당한 것 같아 약이 올랐다. 먼지를 뒤집어 쓴 겉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지면서 다시 한 번 힘 주어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샘! 임마! 못난아!』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저놈의 망할 음악 CD를 발로 밟아 깨버릴테다.
『헤이! 아가씨!』
그제야 샘이 눈빛을 험악하게 치켜뜨며 딘을 돌아다 보았다.
『지금 누구더러 아가씨라 하는 거야.』
『바로 너. 그러니까 들리면 들리는 척을 하란 말이다.』
『미안. 일 하는 중이었어.』
『일? 무슨 일. 워터게이트*?』

노트북 화면에 가득 나타난 물결 무늬와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표현된 각각의 나무 막대 그래프를 눈여겨 본 딘이 이마를 찡그렸다. 머리가 깡통인지라 화면 속의 그림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진 모른다. 그래도 눈치껏 샘이 머리에 쓰고 있는 헤드 셋과 조합하여「불법 도청」이라는 단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동생이 다시 마우스를 움직이자 노란색 막대 그래프가 천장까지 닿으려 했다. 딘은 그것이 대단히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뭘 하고 있는 건데. 이참에 헌터 일은 관두고「뭉크」로 직업을 바꾸려고?』
『응?』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샘이 속눈썹을 깜빡였다. 동생은「탐정 뭉크」드라마를 잘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샘은 대학에 다녔던 시절에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서양 미술사 강의를 떠올렸고,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인 에드바르드 뭉크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설마, 딘이 말하는게 이건가. 샘은 뭉크의 대표작인「절규」를 흉내내며 손바닥으로 두 뺨을 감쌌다.
그래봤자 세기말 히스테릭한 절규가 아니라「나홀로 집에」의 매컬리 컬킨이었다. 덩치 커다란 곰이 사람의 바보 짓을 따라하는 것만큼 귀여운 건 없다. 딘은 가볍게 실소했다.
『올라온다.』
『뭉크라며.』
『장난하나.』
『이걸 말하려던게 아니었어?』
『아픈 다리가 아니라 엉뚱한 다리를 잘랐어. 거액의 의료 소송을 각오하도록 해.』
딘의 핀잔에 멎적게 머리를 긁던 샘은 귀에서 헤드 셋을 떼어냈다.

『딘? 혹시 사람의 가청 영역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손바닥을 비비며 조심스런 태도로 물어오는 말에 딘은 세차게 도리질했다.
『몰라.』
『20Hz에서 대략 16KHz 정도야.』
『그래서 뭐.』
『개는 그보다 더 높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 50KHz까지 듣거든. 그래서 개를 훈련시키는 피리를 아무리 불어도 사람은 듣지 못해. 돌고래나 고래가 내는 소리도 마찬가지고.』
『그렇구나. 가르쳐줘서 고마워. 좋은 이야기였어. 그런데 지금 네가 말하고픈 요점이 뭐니. 동물의 왕국, 내지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냐.』
『그게 아냐. 그러니까 내 말은... 이게「우리 일(our job)」이라는 거야.』
샘은 심각한 표정으로 형에게 들고 있던 헤드 셋을 내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4/17 15:40 2007/04/1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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