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198 : 199 : 200 : 201 : 202 : 203 : 204 : 205 : 206 : ... 233 : Next »

[S☆N-fanfic] ...

※ Alice님의 팬픽을 읽고 덩달아 슝슝... 급조한 탓에 제목도 없고 엉망입니다. ※


아무래도 사람인데 시선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 동네 도서관을 찾은 새내기 대학생 리처드는《G-008》번 서가 앞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멈칫거렸다.
예쁘장한 얼굴에 포동포동한 뺨, 화사한 금발, 콱 깨물어주고 싶은 고사리 손... 더하기 더러운 콧물, 플러스 왕방울 눈물.
엄마 치마 폭에 싸여《마이크와 붕붕 꼬마 자동차》동화책을 읽으면 딱일 법한 코흘리개 꼬맹이가 새카맣게 변한 더러운 주먹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홀로 짊어진 꼬마 예수는 훌쩍훌쩍 숨을 삼켜가며 무지 서럽게 울고 있는 중이었다.
분주한 쇼핑 센터도 아닌데 어린애가 보호자를 잃어버렸다? 그런 멍청한 일이.

대출을 하고자 옆구리에 꿰고 있던《19세기 서양 미술사》책을 잠시 내려놓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슬픔에 잠긴 아이와 얌전히 눈을 맞췄다.
『곤란에 처한 모양이구나. 무슨 일이지? 꼬맹아.』
『나는 꼬맹이가 아니예요.』
당돌하다. 게다가 아이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모르는 사람이 사탕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 - 아이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음에 리처드는 한층 더 깊은 수수께끼를 느꼈다. 이런 아이들은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리처드는 선의로 손을 내밀어도 주의 깊은 이 아이가 자신의 팔을 결코 잡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건 나름대로 대단히 섭섭한 일이었지만, 아동 성추행범이 우굴거리는 오늘날의 미국을 생각한다면 올바른 선택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네 이름은 뭐지?』
『샘.』
『좋아, 샘.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건 알고 있지?』
『네.』
『그런데 넌 책을 읽으러 온 것처럼은 안 보이는구나. 왜 여기서 혼자 훌쩍거리고 있는 거지?』
순간 아이가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구 맙소사, 리처드는 재빨리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으앙~!』
아니나 다를까, 참았던 울음보가 터졌다.

샘은 결코 크지 않은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가며 흐느꼈다.
『형을 잃어버렸어요. 우, 우리 형은 말예요. 수퍼맨이예요. 뭐든지 잘 하구요. 진짜, 진짜, 멋진 형이예요. 그, 그런데 없어졌어요!』
그렇군. 리처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형과 같이 도서관에 놀러왔는데 화장실에 간다거나 해서 서로 길이 엇갈린 모양이다. 그래서 놀랐고, 당황했고, 어쩔 줄 몰라 울음이 터진 것이리라.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리처드는 환히 웃기부터 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책을 정리 중인 할아버지 사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랬구나. 형이 없어졌구나. 잘 알았다. 그러니 울지 말고 내 얘기를 잘 들어보렴. 그렇다면 저기 있는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어떻겠니. 네가 부탁을 하면 기꺼이 같이 형을 찾아주겠다고 할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이 도서관 대장이란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훤히 꿰고 있지. 그러니까 아마 네 형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자, 어떻게 생각하니?』
나름대로 멋진 제안이었다. 25년 경력의 유능한 사서이자 지역 도서관 자원 봉사자인 노먼 영감님은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억력 하나는 젊은이 못지않게 짱짱하다. 영감님이라면 이 꼬맹이와 동행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재빨리 기억해내곤「파란 셔츠에 뉴욕 양키즈 모자 쓴 인간, 빨리 와서 잃어버린 애새끼 데려가!」라며 방송 마이크에 대고 마구 호통을 칠 것이다. 그리고 놀란 아버지가 헐레벌레 달려오면 엉덩이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리라. 잡지의 책갈피를 일부러 찢은 상식 이하의 여고생을 상대로「터미네이터 - 심판의 날」영화를 찍은 분이다. 노먼 영감님은 믿을 수 있었다.
『어떠냐, 샘. 나랑 같이 저분에게 가서 도와달라고 그럴까?』

리처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참 떨어져 공상과학 소설을 읽던 한 소년이 읽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끔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그래, 내가 없어졌구나, 새미. 나도 미처 몰랐던 걸 가르쳐주어 대단히 고맙다! 흥!』
머리를 짧게 다듬은 소년은 눈물 투성이의 꼬마를 무섭게 쏘아본 뒤, 볼멘 표정으로《불타올라라, 불타올라라, 미래 영웅 마틴!》책을 머리 꼭대기까지 들어 올렸다.

얼랍쇼. 이건 또 무슨 전개란 말입니까.
설마, 이 꼬맹이의... 형?
그러고보니 둘 다 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같은 분위기에 비슷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요모조모 뜯어보지 않아도 한 핏줄이다.

확인을 위해 여전히 울고 있는 꼬맹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 동생이니?』
『yea.』
『하지만 이 녀석은 형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그래요? 흐음... 그럼 없어졌나 보죠.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동생이 없어졌거든요. 내 동생은 말예요, 어른 말을 잘 듣고, 얌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고, 씩씩하고, 영리한 녀석이예요. 그런데 갑자기 투명 인간이 되서 없어졌어요.』
심드렁하게 그렇게 말한 소년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읽던 책의 낱장을 넘겼다.
『그러니까 피장파장인 거죠.』

그 말에 징징 울던 샘이 발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없어지지 않았어! 딘!』
『그러냐.』
『투명 인간도 되지 않았어!』
『그래. 내 눈에도 잘 보이니 투명 인간은 되지 않았구나, 새미 보이. 하지만 대신 나쁜 말썽쟁이가 되었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난 나쁘지 않아!』
『도서관에선 조용히 책만 읽는 거야, 이 바보야. 너처럼 소리를 지르는 건 나쁜 얘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러니까 넌 나쁜 아이이고, 말썽쟁이인 거야.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덧붙여 머리 나쁜 바보도 되는 것이고. 어디 보자. 그러니까 말썽쟁이에, 바보에, 훌쩍거리는 계집애까지 되겠군.』
『우욱!』
『내 말이 틀려?』
『틀려!』
『좋아, 동생아. 기회를 주지. 지금부터 숫자를 1부터 10까지 셀테니 나에게 뭐가 틀렸는지를 설명해봐. 하나, 둘, 셋...』
『딘은 바보!』
『그걸 설명이라고 하고 앉았냐. 지나가는 새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땅바닥에 떨어지겠다.』

말다툼이 한창인 형제들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 사실은 어린애들이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말다툼을 하는게 너무나 재밌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다. 애들 싸움은 코미디 시트콤이다.
리처드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하고는 정의로운 심판관 내지는 관중이 되어 한 발 뒤로 뺐다. 사태가 훨씬 악화되면 그때 가서 끼어들어도 큰 무리는 없을 터, 지금은 두 아이들이 왜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 족하다.
하여 어디 계속 해보라는 시늉을 하며 팔짱을 꼈다.
뭐가 문제지? 너희 둘.

『샘, 네가 링컨 대통령이라고 해도 내가 학교에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어. 싫든 좋든 나이가 들면 학교에서 공부라는 걸 해야만 해. 너랑 하루종일 놀아주지 못 해서 나 또한 유감이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게 규칙이야.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 나나 아빠나 곤란하기만 할 뿐이야. 넌 네가 규칙을 무시해서 아빠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만 해.』
『알게 뭐야! 그런 규칙은 난 몰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형이 나랑 같이 있어줬음 좋겠어. 학교에 가지 말아. 아님 나도 딘과 같이 학교에 갈래!』
『나이가 좀 더 들면 싫다고 해도 억지로 끌려가게 되어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냐! 나도 학교에 갈 수 있어! 나이 들었어!』
『충분하진 않아. 엊그제 밤에도 천둥 친다면서 내 침대로 몰래 기어들어 왔잖아. 넌 아기야.』
『아기가 아니야! 이젠 혼자서 머리도 감을 수 있어! 아빠가 이제 우리 막내가 다 컸구나,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난 글자도 읽을 줄 알고, 산수도 할 줄 알아. 난 아기가 아니야.』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백 더하기 다섯이 몇이지?』
『우욱!』
『그래. 거기서 죽도록 손가락이랑 발가락을 헤아려라. 그런다고 답이 나오겠냐. 한심해서...』

조금 차갑다 싶게 쏘아붙인 소년은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읽던 책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미래 영웅인 마틴이 충견 스파르탄과 같이 어두컴컴한 지하도로 내려가는 장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악당들이 지하철 역에 폭탄을 설치했다. 마틴이 나서 멀잖아 발생할 끔찍한 참사를 막아야 했다.
한참 흥미진진한 부분이다. 어려서 그 책을 읽어봤던 리처드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소년은 줄거리에 푹 빠져 동생을 무시했다.

그것이 대단히 분했던 것 같다. 어린애의 목소리가 곱절로 날카로워졌다.
『딘은 우리 형이 아니야! 우리 형은 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다 들어줘! 학교 같은 곳에 가지 말고 나랑 놀라달라고 하면 놀아줄 거라고! 딘은 내 형이 아니야! 아니야!』
지지 않고 소년이 고함을 쳤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네 형이 아니야. 그리고 덧붙이자면 너도 내 동생이 아니야.』

꼬맹이는 펄쩍 뛰었다.
듣고 있던 리처드도 약간 놀랐다.
『뭐?』
『정확하게는 내 동생이 아니게 될 거야. 왜냐하면 저번 겨울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답장을 받았거든. 마음에 들지 않는 남동생은 북극으로 데려가고 대신 귀여운 여동생을 주마 약속받았어. 난 좋아서 고맙다고 인사했고, 산타클로스는 내가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잘 들어둬. 나의 새 여동생 이름은 샌디가 될 거야.』

그것은 잔인하다 싶은 거짓말이었다.
리처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줄 필요성을 느꼈다. 샘의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놀란 까닭도 있지만 공포감이 더욱 큰 원인이었다. 꼬마는 북극으로 끌려갈 수 없다며 얼른 자리에 납짝 주저앉았다. 안색도 새파랬다.

『저, 전화 했어?』
묻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응.』
『나, 나쁜 놈!』
『잘 가, 샘. 북극에서 새 친구를 많이 사귀기 바라. 펭귄이랑 북극곰을 자주 볼 수 있을 거야.』
『우, 우욱! 우욱...!』
『왜 울어? 넌 펭귄 좋아하잖아.』
『응...』
『북극곰도 좋아하잖아.』
『좋아해...』
『그런데 왜 울어?』
『그치만... 딘이 더 좋아. 펭귄보다, 북극곰보다 훨씬, 훨씬, 좋아...!!』
『어랍쇼? 나는 네 형이 아닌데?』
『아냐! 우리 형이야!』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른 꼬마는 한걸음에 달려가 형을 붙잡았다. 뺨을 비비고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누가 뭐래도 나는 초강력 접착제다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다시 전화해. 응? 전화 다시 해! 전화할 거지! 그렇지!』
『흐응. 네가 고집을 안 부린다면 생각해보지. 어떠냐, 샘. 형이 학교에 가도 안 울거냐?』
『우!』
『안 운다고 약속할 거야?』
못 이기고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울게.』
『오케이. 그럼 당장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여동생 샌디는 필요 없다고 해야겠다. 그건 그렇고... 으이그! 누구 동생 얼굴이 이렇게 더러운 거야. 화장실 가자, 화장실!』
능숙한 태도로 소년이 동생의 손을 잡았다.

『대출 기간은 일주일이다, 리처드.』
『예.』
『공부는 잘 되고 있니?』
『힘들어 죽겠어요.』
『젊은 놈이 늙은이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노먼 영감님이 카드에 도장을 찍는 동안 반대편 유리창 밖으로 아는 얼굴 둘이 지나갔다.
고개를 길게 빼고 보니 예의 아이들이었다.
언제는 산타클로스에게 공짜로 줘버린다더니.
꼭 붙들고 있는 모양이 누군가 동생을 달라고 하면 이빨로 물어뜯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저번에 빌려간 책은 반납을 아직 안 했구나.』
『앗차!』
『잘 되었다. 애들이 볼 새 책을 사게 연체료 두둑히 내놔. 특별히 과태료 10배로 해주마.』
『으악! 그런게 어딨어요!』
『그럼 주말에 여기서 서가 정리를 할텨?』

너무 울어대서 졸린 모양이었다.
꼬맹이가 두꺼워진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하품을 했다.
소년이 그런 동생을 등에 엎었다.

『낙찰~ 잘 되었다. 요즘 내가 허리가 영 신통치 않아서...』
『할아버짓!』
『딱 5시간만 봉사 혀. 그럼 합의 본 거다?』
당황하여 머리를 긁는 짧은 사이에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 딱 3시간만...』
거기까지 약속했음에도 리처드는 지갑을 열고 있었다.

《불타올라라, 불타올라라, 미래 영웅 마틴!》시리즈의 2권은 배경이 달 기지다. 정말 흥미롭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릴이 있다. 아쉽게도 이곳 도서관엔 들어와 있지 않다. 뭐, 당장 점심 먹을 돈이 궁진해도 애들 동화책 한 권 정도야... 어깨를 으쓱이며 리처드는 도서 기증 프로그램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 이름을 적어 올렸다. 그리고 종이 여백으로《딘과 울보 꼬마, 그리고 북극에서 계속 살게 된 불쌍한 샌디를 위해》라고 가볍게 웃으며 메모했다.

Posted by 미야

2007/05/04 22:52 2007/05/04 22:52
Response
No Trackback , a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405

Comments List

  1. 미야*쥰쥰 2007/05/05 05:38 # M/D Reply Permalink

    그리고 샘은 아빠에게 <아빠, 산타클로스를 사냥해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성묘 다녀올게요.
    저두 울 아빠 만나고 옵니다. ^^

Leave a comment

※ 근로자의 날이라는 건 좋군요. 랄라라라~ 러브리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기분이 대단히 언짢은 것이 분명한 가죽 재킷의 청년이「캐빈 쉐퍼드 씨?」라고 이름을 묻는 것과 동시에 경찰 신분증을 덥썩 내밀었다. 서류뭉치를 품에 안고 거래처를 향해 걷던 캐빈은「지난 주에 발급받은 신호위반 범칙금을 여지껏 납부를 안 했던가?」생각하며 걱정스런 표정부터 지었다. 동시에 그놈의 범칙금 때문에 일부러 사복 경찰이 직접 얼굴을 들이밀었다는 점에 저항감을 느꼈다.
미친 공무원 새끼. 전화부터 하면 어디가 덧 나냐. 나는 대단히 바쁜 사람이란 말이다.
그래도 선량한 시민인 캐빈 쉐퍼드는 공권력에 기꺼이 협조하며「무슨 일로 절 찾으시는 건가요, 보이든 형사님」이라고 공손히 되물었다. 평소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버릇 탓에 업체와의 미팅 시간까지는 아직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고, 그까짓 망할 범칙금따윈 당장 처리할 의사가 있었다.
째깍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가운데 시계를 쳐다봤다. 자진 납부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설교를 들어야 한다면 대략 2분이면 충분할게다. 저 사내의 성격이「단칼」이 아니라면 최장 5분...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 미팅엔 늦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급해도 다음부터 내가 과속 비슷한 걸 하나 봐라.
일주일 전에도 같은 맹세를 했다는 건 까마득히 잊어먹고 가슴을 쳤다.

순간 로버트 보이든 형사가 떫은 감을 통째로 씹은 표정을 했다.
와이프가 그를 향해「사탄」운운한 것이 가장 큰 원흉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는 캐빈은 바쁘다는 투로 시계를 내려다보던 동작이 그의 심기를 상하게 만들었는가 보다 추측을 해볼 뿐이었다.
실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예의바르지 않게 굴었다. 그래서 캐빈은 서둘러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잠시나마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를 못 듣는 척했다.
그걸 신호로 남자가 수첩을 꺼내들고 안에 적은 메모를 주욱 흝어내렸다.

『음, 그러니까... 선생이 세를 놓은 집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건 알고 계시죠?』
『무슨 문제요. 뿌리가 썩은 나무가 지붕을 덮친 것 말씀입니까? 그게 큰 일이었다는 건 압니다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된 것 아닌가요.』
『지붕 얘기가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처럼 젊은 형사 나으리의 질문은 과속딱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2분 안에 과연 모든 대화가 마무리될 수 있을까? 근심하며 이마를 접었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부득이하게...」라는 식의 대화를 꺼내는 일 없으면 좋으련만.
불현듯 갑자기 궁금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걸까. 망가진 집의 수리는 얼마 전에 끝마쳤다. 업자와의 트러블은 없었다. 물론 견적서와 틀리게 나온 가격을 놓고 실랑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거야 엄마가 나이 어린 딸을 향해「그놈의 흉측한 빨간 셔츠는 그만 입거라!」라고 호통치는 것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마지막엔 분명히 신사답게 악수도 나눴다.
캐빈은 차분히 손가락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아내와 같이 집을 둘러보던 기억을 되살렸다. 하수관에서 오물이 누출되는 기미도 없었고, 지반이 내려앉거나 하지도 않았고, 흰개미가 벽장 선반을 맛있게 먹어치운 것도 아니고... 고개를 흔들었다. 까놓고 말해 부부 공동명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집세 이외엔 별 관심이 없던 터였다.
이어진 질문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그의 상상력 수준이 어떠하다는 걸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저어, 못된 애들이 장난이랍시고 담벼락에 페인트로 낙서라도 해놓은 건가요. 아니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부수었다던가...』
『그보다 훨씬 더 고약한 건데요, 쉐퍼드 씨. 거실 일부가 멋지게 주저 앉았어요.』
『어이쿠!』
부릅뜬 눈과 벌어진 입,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보아 정말로 놀란 눈치다. 주먹으로 배를 한 방 맞았다는 투다. 손에 힘이 풀려 서류뭉치가 아래로 굴러떨어지려 했다. 보이든 형사가 그것을 지적했고, 간발의 차이로 미끌어지던 물건을 도로 끌어당겼다. 이것이 연기라면 그는 당장 브로드웨이 무대로 진출이 가능한 대단한 실력자다.

형사가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렸다.
『어라. 여지껏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바로 어제 일인데요.』
『그런가요. 그러고보니 뭔가 전화가 온 것은 같았는데... 하지만 집사람은 제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출근하면서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한게 전부입니다.』
헤에, 이상하다. 뭔가 핀트가 잘 맞지 않았다. 아내가 말을 안 해서 전혀 몰랐다고? 보이든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계속 해보라는 투로 두 팔을 벌렸다.
캐빈은 다시 몸을 가누고, 침을 꼴깍 삼킨 뒤에 다시 말했다.
『부동산 쪽의 재정 관리는 아내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어요. 심지어 찰스턴로 23번지에 있는 2층집의 소유자는 제가 아니라 재니스입니다. 그런데 진짭니까, 형사님. 거실이 폭싹 내려 앉았다고요?』
『음? 소유자가... 아내라고요.』
형사는 쥐고 있던 수첩을 반으로 접어 품속에 도로 집어 넣었다.
『예. 집사람이 어려서 태어나 자란 집입니다. 외동딸이었던 재니스가 장인 어른으로부터 집을 물려받았지만 저와 결혼하고 나서도 그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망가진 집에 대해 근심하며 질문했다.
『그런데 거기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거실이 무너졌다니, 말로만 들어선 엄청 심각한 것 같은데... 요즘 진짜 왜 이러냐. 가스 폭발이라도 있었나요?』
가스 폭발은 무슨. 잔뜩 화가 나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자 섬세하게 생긴 얼굴이 열 살은 더 어리게 보였다.
『제가 거기서 발을 쿵쿵 굴렀어요. 그랬더니 푹 꺼집디다.』
『예?』
『왜 놀라슈. 당연히 농담인데.』

사내는 시치미를 뚝 잡아떼곤「부근으로 수상한 사람이 어슬렁거린 일은 없었느냐, 손해 보험에는 가입이 되어 있느냐, 임대료 같은 것으로 언성을 높이고 싸운 사람이 있느냐」며 경찰이 해봄직한 형식적인 질문을 몇 개 던졌다. 캐빈은 기억나는 것 전부를 성실하게 대답을 해주면서「얼마 전에 자동차를 후진하면서 접촉 사고를 냈어요. 음... 혹시 그 사람이 제게 원한을 가지고 해코지를 하는 걸까요?」라며 걱정했다.
『사고라고요. 그때 많이 다투셨나요, 쉐퍼드 씨. 아님 사람이 크게 다쳤다거나...』
『미등만 깨졌는데요.』
지랄염병하고 있네. 미등 갖고 살인 나디.
겉으로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젊은 법집행관의 표정은 걸작이었다.
『쯧쯧. 그럼 기껏해봐야 삿대질만 했겠네요. 그 정도론 원한을 가질 리가 없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마지막으로 캐빈은 또다시 비용을 들여 집을 수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넌더리를 내며「이참에 용한 무당을 불러 액땜이라도 해야겠어요」라고 불평했다.

늦은 점심 식사를 거의 끝마칠 즈음에야 딘이 건들건들 팔을 흔들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브로콜리가 몇 개 남은 더러운 접시를 옆으로 치운 샘은 따뜻한 동료애 - 내지는 가족애를 느끼며 환영의 의미로 함박 미소를 지었다.
『기다렸어. 어서와, 딘.』
그래봤자 답으로 돌아오는 웃음은 없었다. 그의 형은 배고파 죽겠다는 얼굴로 쓰러지듯 해서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동시에 달각 스위치가 켜지면서 대략 18년 전에 녹음된 소리가 육만하고 삼천 일흔 다섯 번째로 재생되었다.
『야채는 왜 남겨, 이놈아.』
그가 웃어주지 않은 까닭이 아마도 야채 때문이었나 보다. 동생이 남긴 브로콜리를 손가락으로 집어올려 싹싹 해치우면서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야단을 쳤다.
『음식을 가리고 먹으면 키가 안 큰다고 그랬잖아.』
눈앞이 아찔해지는 내용이었다. 샘은 신음했다.
『딘. 여기서 키가 더 크면 똑바로 허리를 펴고 출입구를 지날 수 없게 되어버려.』
『그래서 일부러 남겼다고? 변명은 집어치워. 다음부턴 남기지 말고 전부 먹도록 해. 대답은?』
『.......... 응.』
다섯 살짜리 어린애 취급에 발끈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아예 걸리버 여행기를 쓰지 그러냐」라는 이죽거림은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죽도록 배고파 하는 딘과 그깟 브로콜리를 두고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신 샘은 친절하게 메뉴판을 건내주며 자신이 먹은「스페샬 런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양도 푸짐하고 맛도 괜찮다. 가격도 적당했다.
『여기요?』
딘의 표정에서 긍정을 읽은 샘은 얼른 손을 들어 형을 위해 음식을 주문했다.

날아가는 동작으로 받아쓰기를 마친 웨이츄리스가 주방쪽으로 사라지기가 무섭게 샘은 손깍지를 끼고 딘과 눈을 맞췄다. 그게 꼭 강아지가 간식을 달라고 졸라대는 것 같아 딘은 가볍게 실소했다.
『어때. 뭐 건진 건 있어?』
딘은 기꺼이 자신이 알아낸 것 전부를 동생에게 알려줬다.
『캐빈이 아니었어. 그는 그 집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더라. 차를 거칠게 몰고 다니는 나쁜 버릇만 빼면 너와 비슷한 수준의 바른 생활 사나이더구나. 털면 약간의 먼지는 나오겠지. 그치만 피 묻은 칼이라던가, 권총이라던가 하는 건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야. 거실 바닥이 꺼져 숨겨둔 진실이 드러났다는 내 말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니까. 꼭 자동차 전조등 불빛을 정면으로 받은 멍청한 사슴 같더군.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 꼼짝도 않고 1분간 내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더라. 난 그가 일순간이나마 그가 영어를 못 하는 거라 믿을 뻔했어. 그래서 말했지. 실례합니다. 당신, 영어 할 줄 아세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킬킬 소리내어 웃다말고 샘이 고개를 끄덕였다.
『쉐퍼드 부부의 공동 소유도 아니었어. 주인은 재니스였어. 그렇지?』
『그래.』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재니스가 일곱 살이 되었을 적에 가족 전부가 이사를 나왔어. 재니스 쉐퍼드의 처녀적 성은 애링턴이고 그들이 거기서 나온 건 1976년이야.』
『흐응, 어디서 많이 듣던 거잖아. 일곱 살... 그게 자꾸 맘에 걸리네.』
목이 말랐는지 딘이 물을 마셨다.
일부러 따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샘도 덩달아 갈증을 느끼고 목을 축였다.

『애링턴 부부는 어땠어? 샘.』
컵을 나란히 내려놓고 샘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말이지... 잘 모르겠어. 짐 애링턴은 61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어. 아내인 로지 애링턴은 그보다 두 해 전에 암으로 죽었고.』
『그건 너무 평범하잖아.』
『미안해. 평범한 죽음이라.』
『이상한 놈. 그걸 왜 네가 사과하니. 어쨌든 좋아. 그럼 애링턴 부부가 1976년 이후부터 살지 않았으면서 그 집을 팔지 않은 까닭이 뭔지는 알아냈어?』
『짐 애링턴은 눈에 띄는 갑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재산가였어. 특별히 무슨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투자라고 생각하고 팔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야. 주식, 채권, 양도성 예금증서, 골프 클럽 회원권... 거기에 문제의 주택도 끼어 있었던 거지.』

팔을 번쩍 들었다. 이어지는 건 자신의 능력 부족을 한탄하는 기다란 탄식이다.
『욕해도 좋아, 딘. 완전히 막혔어.』
『뭐야, 결국은 이거다 싶은 건 전혀 없었다는 거냐?』
『하늘에서 계시라도 내려왔음 좋겠다니까. 오전까지 내가 조사한 건 모조리 허탕이었어. 아, 나왔다. 식사는 이쪽이예요. 고마워요, 아가씨.』
맛있어 뵈는 프라이드 치킨을 딘 앞으로 밀어주면서 샘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재니스에게 다른 형제는 없었나 알아봤는데 그것도 꽝. 애링턴 부부가 주술이나 마법에 심취했다는 증거도 없어. 짐 애링턴은 무신론자였고, 로지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 많은 봉사활동을 했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봐선 햇빛 하나 안 들어오는 지하실에 아이 방을 만들 괴짜는 아니야.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엔 아무래도 단서가 많이 부족해.』

접시로 눈을 내리깔고 미친 듯이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음식을 탐하던 딘이 흘끔 고개를 들었다.
『바비 아저씨께 조언은 구했고?』
『악마로부터 보호의 의미를 담은 문장이라는 건 아저씨도 동의했어, 딘.』
『그러니까 뭐시냐... 보호만?』
『부탁이니 먹는 도중에 포크를 들고 사람을 가리키지 말아줘.』
동생의 간절한 소원을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감자를 찍어 입안으로 넣으면서 딘은 도로 먹는 일에 열중했다. 버터를 바른 롤빵도 맛있다. 콩 볶은 요리도 먹을 만하다. 파슬리는 별로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에 넣었다. 시장이 반찬이었는데다, 원래 그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다응 의미응 업데?』
『입에 음식을 가득 넣고 말하는 건 실례야.』
『아우튼!』
『바비 아저씨는 이게 회색 마법의 한 종류래.』
『우?』
『자신이나 타인에게 육체적 혹은 비육체적인 도움을 줄 목적으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마법으로 오늘날 서양과학이 이해 못 하는 수단을 사용하여 의지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예술이며 과학이다 - 책에 나온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래.』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긍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단, 바비 아저씨가 이 말을 덧붙였어.「안이냐 밖이냐의 차이가 여기선 매우 중요하다」라고.』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샘.』
『권투 글러브는 권투 선수의 손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야. 그렇지? 동시에 상대방 선수를 때리기 위한 도구가 되는 거야. 아저씨가 말한 안과 밖의 차이라는 거, 이제 이해가 가?』
거기까지 말한 샘은 너무 빨리 음식을 삼켜 호흡곤란까지 일으키게 된 딘에게 서둘러 물컵을 내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5/01 21:58 2007/05/01 21:58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398

Leave a comment

※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죄송합니다. 고딕풍 내장 파이 이야기가 될 거라는 쥰쥰의 예고는 순전히 허풍이었습니다. 아직도 피가 안 나오고 있음! 찢어진 뱃가죽도, 말뚝 박힌 머리도, 잘려진 젖꼭지도 없음! ※


이후로도 침묵으로 사람 목을 윽죄이는 전화가 세 번 정도 왔다.
그때마다 딘은 땅을 쳐다봤고, 하늘을 두리번거렸고, 제발 참으라 애원하는 샘의 눈빛을 씹어 뭉개며, 마침내 스팀이 올라「이따위로 종용하지 않아도 이 엄.마.는. 무지 노력하고 있어!」라고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크악!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직 장가도 못 간 남자에게 이게 무슨 행패야?! 사람 귀로는 들리지도 않는 돌고래의 목소리로「엄마, 엄마」노래를 불러대는 건 짜증 난단 말이야!』
딘의 얼굴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촛불 조명을 턱 아래로 놓은 것처럼 변했다.
핸드폰을 길바닥에 팽개쳐 박살을 내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그가 무시무시한 결심을 한 것을 눈치챈 샘은 과자가게 아저씨가 던져주는 사탕을 두손으로 공손히 받아내는 동작을 취했다.
비싼 물건에 화풀이는 하지 말아주세요. 정 던지고 싶다면 이리로.
다행이다. 묘한 뉘앙스로 뺨 근육을 실룩거리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제정신을 찾은 그의 형은 이 마당에 캐치볼 놀이는 사절이라는 걸 분명히 하며 귀신 붙은 핸드폰을 호주머니 속에 도로 넣었다.
『여기서 샐샐 웃기만 해봐. 정강이를 걷어차줄테다. 닥치고 공구 박스나 챙겨, 샘.』
『네, 엄마.』
『지금... 무시라?』
『알았으니 그만 노려봐. 무서워서 심장마비 걸리겠다.』
『조심해, 샘. 형에게 자꾸 기어오르면 네놈 명줄이 획기적으로 확 줄어들 수 있어.』
유선방송 서비스 센터 직원의 유니폼을 쫙 빼입은 딘은 유명 케이블 회사의 로고가 박힌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깊이 눌러썼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의 복장을 입은 동생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화가 끝까지 치민 것이 확실한 딘의 날카로운 눈빛에 위축된 샘은 어린 강아지에게 명령하는 듯한 형의 동작에 이번만큼은 별 군소리 없이 따랐다.

날씨가 맑았다. 봄 같지 않게 더워서 아스팔트 지면에서 아지랑이가 활활 피어올랐다. 남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 망치며 드라이버 같은 걸 잔뜩 집어넣은「가짜」공구 박스를 오른손에 든 샘은 두꺼운 자켓을 걸친 등이 덥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가방에 집어 넣은 듯했다. 그래서 불평하며 자꾸만 미끌어지는 손잡이를 힘주어 고쳐 쥐었다.
『딘. 여기에 커다란 돌이라도 넣었어?』
『그렇게 무겁냐. 하여간 우리 동생은 보기와는 달리 몸이 허약해서... 형이 대신 들어줘?』
『됐어.』
잘라 말하며 괜찮은 분위기의 2층 벽토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을 방문하기에 앞서 이들 형제는 이미 사전 탐색이라는 걸 해치운 뒤다.
담장을 따라 고장난 케이블 선을 수리하는 척하며 두 명의 주부와 대화를 나눠봤다.

「캐빈 쉐퍼드 씨요? 무슨 세일즈를 하는 사람 같던데... 하여간 괜찮은 이웃이예요. 댁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케이블을 몰래 연결해서 도둑 시청을 하는 몰염치한 사람은 절대로 아녜요.」
「그 집엔 디즈니 아동 채널은 안 필요할 거예요. 그는 부인과 단 둘이 살아요.」
「잘 모르겠군요. 우린 만난 적이 없어요. 그 집 부부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거든요.」
「우린 툭하면 잔소리 하랴, 싸우랴, 누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줄 거냐 다투느라 늘 시끄러운데 그 집 부부는 소리를 내는 적이 없어요. 하하하, 얼마나 조용한지 밤에도 소리를 일절 안 내더군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죠?」

알다마다요. 딘은 능글맞게 맞장구치며 웃어주었다.
잘 생긴 서비스 센터 직원과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떠는게 즐거웠던지 여자들은 까르르 소리를 내었다. 반대로 샘에겐 영화 채널이 더 많은 서비스에 가입을 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느냐고 질문을 던져 그의 혼을 절반은 빼놓았다.「저는 진짜 직원이 아니라서 그런 것까진 몰라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적당히 둘러대는데 애를 먹었다. 다행히 여자는「그런 것도 모르고... 진짜 케이블 방송국에서 나온 거 맞아요?」라며 꼬치꼬치 묻는 대신, 같이 자리한 딘에게 추파를 던지는 쪽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녀는 간소하게나마 커피를 대접하고 싶으니 같이 집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딘은 깊이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감사하다고 낼름 말했고, 샘은 이를 말리느라 형의 발을 세게 밟아야 했다.

『차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샘.』
발잔등에 하얗게 찍힌 신발자국에 식겁하며 딘이 투덜거렸다.
『미안하게 되었군요, 카사노바 씨.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일 하는 중이야.』
『커피 마시는게 두 시간이 걸리겠니, 세 시간이 걸리겠니. 넌 너무 여유가 없어.』
『아이와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야. 딘? 그만 불평하고 초인종을 눌러.』
『쳇... 오키토키.』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걸까 초인종을 누르기에 앞서 딘이 헛기침을 했다.
케빈 쉐퍼드는 이미 직장으로 출근하고 집에 있진 않을 것이다. 차고 문은 굳게 내려져 있었고, 현관문으로는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이집 식구들은 사생활이 겉으로 드러나는게 싫은가 보다. 전반적으로 붕대로 꼭꼭 싸맨 분위기다. 1층 유리창은 한 장도 빼지 않고 모조리 불투명 효과를 넣어 뿌연 우유색이었다. 누가 망원경으로 안을 살펴보기라도 한다는 건가. 이 정도라면 거의 헐리우드 유명 배우의「파파라치따윈 질색이야~!!」수준의 알레르기 반응이다.

샘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창문 너머를 기웃거리다말고 다리를 떨었다.
『인기척이 없네. 부인도 어디 외출한 건 아닐까.』
『2층 창문이 열려져 있어, 샘. 안에 사람이 있다는 얘기야.』
『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조용한 걸. 이거, 이거...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터뷰처럼 전형적이다 싶지 않아? 얌전하고, 보수적이고, 남의 눈에 안 띄고... 그거 알아? 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도 동네에서 이웃 사람들과 다정하게 살았대. 퍼스트 레이디인 로잘린 카터와 같이 사진을 찍을 정도로 민주당 열혈 후원자여서 그의 체포 소식에 지미 카터도 까무라쳤지. 사업가적 기질도 있었는데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평판까지 들은 사내였어. 직접 광대 분장을 하고 병원을 찾아다니며 아픈 아이들을 상대로 자선 공연까지 했다는 거야. 그런데 알고봤더니 33명이나 죽인 새디스트였더라, 라는 결론이었지.』
『그래, 네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이 형은 잘 알겠어. 이 세상의 모든 광대는 박멸해야 마땅한 존재라는 거지?』
광대라면 질색인 동생의 습성을 잘 아는 딘은 엉뚱하게 응수하고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렀다.

사실 누구보다 선량하다 생각했던 조용한 이웃이 알고 봤더니 연쇄 살인마였다는 얘기는 신문에 종종 나오곤 한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외톨이고, 존재감이 희미하다. 도무지 피비린내 나는 참극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뚜껑을 열어봤더니 이건 완전 개자식이다. 냉장고에서 잘려진 사람 팔뚝이 나왔더라 식의 흉악한 뉴스를 접한 이웃들은 그제야 눈이 휘둥글 벌어진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린 그런 사람이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눈치도 못 챘고요.」
이것을 일컬어「착하고, 평범한」이웃집 연쇄살인범의 법칙이라고 한다.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하는 건 은밀한 곳에서라는 얘기다. 밖으로 보이는 지킬 박사는 신사적이고, 학구적이며, 예의바르다. 안색이 파리하다는 것만 빼면 모든게 지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악수를 청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눠야 할 우리의 이웃이다.

『무슨 일이시죠.』
재니스 쉐퍼드는 깡마른 체구의 여자였다. 금방에라도 반으로 뚝 부러질 것처럼 말라서 샘은 그녀가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가 방금 전에 회복된 것으로 여겼다. 눈빛도 어두웠고 무척이나 허무해 보이는 여자였다. 조금이라도 빛을 쬐면 드라이아이스처럼 녹아서 송두리째 사라질지 모른다. 존재감이 약해서 여러 사람들 틈새에 서있으면 아예 없는 것처럼 무시당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색도 엹고 그림자도 엹다. 피부색이 너무나 하애서 뒤쪽에 있는 벽이 그대로 비칠 지경이었다.
『신고를 받았어요. 댁의 TV는 잘 나오나요? 근방으로 노이즈 현상이 극심하다고 해서 확인차 점검을 나왔어요. 괜찮으시다면 이 집의 케이블 선의 정상 유무를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산 덕분에 거침 없이 지어낸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재니스는 그런 딘을 멍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어딘지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그녀는 따스한 바깥 날씨에도 불구하고 겨울에나 어울릴법한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저어, 뭔가 잘못된 것 같군요. 우린 신고를 하지 않았는데요.』
『예, 그러시겠죠. 사실은 서비스 불량 원인을 몰라 여러 곳을 확인하는 중이예요.』
『그렇담 다른 집을 살펴보세요. 우린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요.』
딘은 깜짝 놀랐다.
『에?』
『TV는 바보 상자예요. 그렇지 않나요.』
한 방 멋지게 맞았다.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라고? 텔레비전을 하나도 안 봐? 당신 미국인 맞아? 미국인이 아니라 원시인 아냐?
그렇다고 해도 차마 생각한 그대로를 입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 당황했을 적의 버릇 그대로 콧망울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거... 농담이죠? 뉴스도 안 본단 말예요?』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뉴스는 신문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이만 실례했으면 하는데요.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아님 제가 계속 방해받아야 할 까닭이라도 있을까요?』

더 무어라 하면 경찰을 부를 기세다. 딘은 비우호적인 분위기를 읽고 재빨리 발을 뺐다.
『실례 많았습니다, 부인. 저희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던게 아니었음 좋겠...』
채 말을 끝맺지 못한 까닭은 눈치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어랍쇼 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샘이 눈빛으로만「누구야?」라고 물어왔다.
글쎄올시다. 딘은 궁금해하는 동생에게 무어라 해줄 말이 없었다.
발신자 번호 없음.
나쁜 예감에 얼굴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귓가로 바짝 가져갔다.
순간 세 명의 안색이 싹 달라지고도 남을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년을 죽여버려.......... 저 흉악한 년의 각을 떠버려..........》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박쥐의 노래가 아닌, 엉망으로 늘어진 테이프에서 억지로 재생시킨 듯한 괴상한 목소리였다. 싸구려 공포 영화에서 악마가 내는 목소리라며 영화 관계자가 특수 효과로 지어낸 것 같았다. 유괴범이 돈 내놓으라 사람을 협박할 적에 써먹는 변조 장치를 사용한 모양이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빴다.
딘은 눈을 부릅뜨고「당신 누구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재니스도 찢어져라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악마! 내 집에서 당장 나갓! 사라져!』
당황한 샘이 잠깐만 기다리라 애원하기도 전에 벼락이 떨어졌다.
『주여! 아버지! 사탄으로부터 우릴 구원하소서! 아멘, 아멘!』
졸지에 지옥에서 온 사자가 되어버린 형제들을 향해 십자가 성호가 그어졌다.
『이, 이건 진짜 아니야! 오해예요~!!』
그래봤자 재니스는 흉흉한 눈빛으로 샘을 노려보며 현관문을 쾅 닫아버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닫겨진 문 저편에서 큰 목소리로 주기도문이 암송되고 있다는 건 딘도 잘 알 수 있었다.
살인범으로 누명도 뒤집어 썼고, 사기꾼 취급에, 재수 없는 악당으로 오해도 받아봤다. 그치만 사탄 취급은... 이미 끊겨버린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딘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우리더러 왜 사탄이라는 거야! 아줌마! 억울해! 억울하다고! 다시 나와봐요! 아줌마!』
그런다고 재니스가 딘의 요구에 응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환장하겠네.
딘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개미의 행렬을 구경했다.

『재수 없어!』
이번만큼은 샘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형은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 부숴뜨렸다.

Posted by 미야

2007/04/29 16:08 2007/04/29 16:08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395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198 : 199 : 200 : 201 : 202 : 203 : 204 : 205 : 206 : ... 233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4039
Today:
2
Yesterday:
207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