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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애쉬 가라사대, 퍼스트 네임, 미들 네임, 죄다 불명이고 나이 및 거주지 역시 불명. 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이 시대 최고의 뱀퍼라 했다.
누가 뭐래도 자타가 공인하는? 이쯤해서 딘은 로드 하우스로 전화를 걸어「네놈이 사람을 추천하는 기준은 실력이 아니라 젖가슴 사이즈냐!」따지고 싶어졌다. 그러나 체면상 사람을 면전에 세워두고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애써 참으며 리에게 반대편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제기랄, 이놈의 망할 여자는 옷을 입은게 아니라 입다 말았다. 그것도 허겁지겁 벗어던진 걸 다시 허겁지겁 주워 입었다. 그쪽으로는 눈치가 젬병인 샘도 단번에 알아차리고 안색이 변했다. 남자와 밤새도록 뒹굴고는 머리도 빗지 않고 그대로 뛰쳐나온 꼬락서니다. 서둘다 팬티를 뒤집어 입지는 않았을까. 그럴 가능성 많다. 브래지어는 무작정 손에 쥐고 있다가 핸드백에 꾸셔 넣었을지도. 스타킹의 스타일을 망친 얼룩의 성분이 과즙이 아닐 거라는 짐작에 그저 착잡할 따름이다.
젖꼭지가 훤히 보이는 셔츠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기를 쓰며 평정심을 가장했다.
「어쩐지 애쉬와는 죽이 착착 맞을 것 같군.」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셔츠를 새로 갈아입고 깨끗하게 면도까지 끝낸 이쪽만 바보가 된 셈이다.

『미안, 미안. 이런 모습이라. 주로 밤에 움직이는 체질이라 아침엔 영 정신을 못 차려.』
그게 꼭 체질 탓만은 아닐 터인데? 딘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곤 있지도 않은 청바지의 보푸라기를 잡아뜯었다. 일부러 대꾸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자! 그러지 말고 일단은 좀 먹자. 난 배가 고파 죽겠어. 이 가게에선 뭘 시키는게 좋아?』
샘이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에그 토스트가 맛있어요.』
『양이 적잖아.』
나름대로 신경써서 추천해준 메뉴를 일언지하로 묵살한 리는 고개를 길게 빼고 다른 사람들의 식탁을 염탐했다. 무심하게 인쇄된 메뉴판 글씨보단 아무래도 식사 중인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더 생생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법이다. 왼편으로 보이는 40대의 머리숱 적은 남자는 콘 샐러드와 구운 소시지를 주문했다. 씹는 속도가 현저히 느린 걸 봐선... 에이.『저건 맛 없겠어.』그 반대편에선 마트 계산원인 듯한 여자가 크림 스프와 버터 바른 빵을 음미 중이었다.『70점.』화장실 입구 가까이로 진공 청소기처럼 음식을 흡입하고 있는 트럭 운전사가 보였다.『완벽해. 난 저 사람과 같은 걸 먹을 거야.』날씬한 몸매와는 별도로 리에겐 식탐이 있는 듯했다. 입술 위로 맑은 군침이 - 생기가 돌았다.

『어제 저녁엔 죄송했어요, 리.』
절대로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음에도 샘은 사과부터 했다. 아침나절부터 형으로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단단히 다짐을 받은데다 어쨌든 얼토당토한 오해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눈치가 없어서 그쪽이 헌터라곤 생각을 못 했어요.』
별 거 아니라며 리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고개 숙일 필요 없어. 오해 받게끔 분위기를 조장한 내 잘못도 없잖아 있으니까.』
분위기만 조장한게 아니라 정말로 그쪽인 거 아냐? - 입만 열지 않았을 뿐이지 그 생각을 굴뚝처럼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손톱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만지작대는 샘의 눈빛은 더할나위없이 냉랭했다. 모두가 찬양해 마지않던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는 진작에 치워졌다. 대신 진열장을 앞켠을 차지한 건 언제 녹을지 추정이 불가능한 히말라야의 만년설이었다. 혀를 델 만큼 뜨겁고 진한 커피가 서빙되어 나왔음에도 덕분에 샘의 주변 온도는 계속해서 영하권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쪽은 전갈좌?』
질문의 내용으로 보자면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딘도 마찬가지다. 기가 드세거나, 성격이 더럽거나, 남자를 깔고 앉을 것처럼 생긴 여자 -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의 마누라인 크산티페 같은 여자는 무조건《전갈좌》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선입관으로 잡지에 나온 심심풀이용 별자리 점괘보다 질이 더 나빴다.
『응? 나는 사수좌인데.』
틀림없이 맞을 줄 알았는데 왜 아니라는 거지 - 하면서 딘이 머리를 만졌다.
『그거 이상하네. 분명히 전갈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튼 흐트러진 옷무새로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여자는 질색이었다.
「한 가지 좋은 점도 있네.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형은 저 여자에겐 작업을 걸지 않겠군.」
샘의 입술 끝부분이 살짝 올라갔다. 숯덩이처럼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을 넘어갔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취미가 아닌 듯했다. 촉촉이 젖은 데니쉬롤을 큼직히 찢어 덩어리째 입에 넣으면서 리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 애쉬의 말로는 뱀파이어에게 노림을 당하고 있다고 하던데.』
아침 식사를 즐기는 일반인들에 대한 배려는 요만큼도 없는 행동이었다. 딘은 신음했다.
『여긴 식당 한 가운데야, 리. 부탁이니 다른 사람들 귀를 생각해.』
『흥! 괜한 걱정이야. 누가 우리에게 관심이나 둘 것 같어?』
『뭘 모르시는 말씀. 이미 충분히 시선을 받고 있다고. 저쪽에 앉은 트럭 운전사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당신 옷을 열 번은 넘게 벗겼다는 건 아시는감?』
『알다마다. 하지만 그가 열심히 훔쳐보는 건 내 몸뚱이지 여기는 아니니까 괜찮아.』
그러면서 리는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런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말부터 해둘게. 내가 너희들을 나흘 남짓 미행을 해봤는데 특별히 수상하다 싶은 징조는 전혀 없었거든?』
그건 윈체스터 형제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고도 남는 폭탄 발언이었다. 나흘 남짓 미행을 했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휘둥글 떠보였다. 녹색의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로 투명한 모르스 부호가 총알처럼 날아다녔다.
「맙소사, 샘. 무슨 낌새를 느꼈던 적 있어?」
「없어.」
「저쪽에서 미행을 했다잖아.」
「전혀 눈치 못 챘어.」
「이런 일이 가능하긴 한 거야?!」
헌터로서의 자존심과 긍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딘은 상처 입은 목소리로 외쳤다.
『거짓말!』
『어머? 진짜야. 수상한 거 없었대도.』
『그게 아니라 우릴 미행했다는 거 말이야. 우린 전혀 몰랐는데.』
『바보 같은 소리! 손이라도 흔들면서「지금부터 미행을 하려 합니다. 각오를 해주세요. 화장실에 가면서 방구를 뀌면 이미지가 구겨질지도 몰라요.」이랬어야 했다는 거야? 상대방 몰래 뒤를 밟는게 미행의 사전적 의미야. 알아차리게 미행하는 건 미행이 아니지.』
이런 걸 가리켜 확인 사살이라 한다. 심각한 균열이 발생한 벽돌을 향해 쇠망치를 깡깡 내리친 뒤에 사방에 널린 파편은 무시해도 그만이라며 다시 먹는 일에 열중했다. 잘게 찢은 계란에다 토마토를 얹고는 당근과 같이 하여 맛있게도 냠냠. 걸신 들렸다. 구운 감자를 절반으로 토막내곤 한 입에 꿀꺽이다. 그러고도 성이 차질 않아 다음으론 베이컨을 공략했다.

『다만 뱀파이어들은 인간과는 다른 시간적 개념 속에서 살고 있지. 녀석들 수명이 인간보다 세 배 가까이 기니까. 그런 연유로 기껏해야 사나흘 가지고「습격의 징조는 없음」이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게. 달력에 3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어서 석 달 뒤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3년 뒤에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 식의 이야기도 가능하거든. 기본적으로 뱀파이어 녀석들은 조급한 편이지만 영리한 놈들은 기다림의 미덕이 뭔지를 아주 잘 알아.』
여기까지 말한 리는 계란에다 깨 소스를 더 뿌렸다.
『어쩌면 3년이 아닐 수도 있어. 길게는 30년도 가능하지. 그들은 한 번 노린 멋익감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거든. 이건 너희들에겐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닐 거야. 현장에서 뼈가 굵은지 30년이나 흘러 은퇴를 결정하고 태평하게 낚시질이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등뒤에서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거야.「거기 누구쇼?」하고 돌아다 보았더니 하얗게 빛나는 엄니가「바로 납니다」라고 대답하는 걸 상상할 수 있겠어?』
딘은 묵직한 한숨과 함께 튀긴 생선 조각을 접시 밖으로 치웠다.
『상상하게 하지 마. 입맛 떨어져.』

사실 어렵게 상상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그렇게 당한 사람 하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니엘 젱킨스.』
제대로 먹은 것도 없으면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샘이 그 불운한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젊은 시절엔 뱀파이어 헌터로 제법 유명했다고 들었어요. 은퇴 후엔 콜로라도 주 매닝에서 은거했고요. 하지만 평온한 노후는 아니었어요. 곰에게 맞아 죽은 것처럼 해서 자기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죠. 거기 경찰들은 미치광이 강도의 소행이라 추정했지만 범인은 여지껏 못 찾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영감님을 살해한 건 사람이 아니였으니까요. 루더라는 자가 리더로 있던 뱀파이어 무리가 바로 그를 죽인 범인이었어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어. 바보 같은 젱킨스... 늙다보니 만사가 게을러져서 냄새 지우는 일을 까맣게 잊은 거야. 일주일에 한 번 목욕하는 건 빼먹어도 괜찮지만 그건 잊어선 결코 안 되는 거였어.』
두 장째 베이컨을 포크로 찍으면서 그녀가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냄새요?』
『뱀파이어의 코는 개의 후각의 꼭 다섯 배야. 냄새로 개체를 구분하지. 거기다 한 번 맡은 냄새는 절대 잊지 않아. 그들의 능력으로는 8,800㎢ 면적을 자랑하는 광활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 딱 한 사람만 찝어 찾아낼 수도 있어. 우리처럼 GPS 기술을 빌릴 필요도 없지. 마음만 먹으면 네브라스카에서 뉴햄프셔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올 걸. 때문에 우리들 뱀파이어 헌터들은 냄새를 추적당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있어.』
『아.』
그러고보니 생각난다. 존도 비슷한 얘기를 꺼내면서 그 부분을 걱정했더랬다.
『우리 아버지는 뱀파이어가 우리들 냄새를 못 맡게 하려고 썩은 짐승의 가죽을 태웠죠.』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리의 표정이 나빠졌다. 자동차에 깔려 죽은 개라도 봤다는 식이다.
『겍! 뭘 태웠다고라? 싫다... 머리 정수리를 민둥산이로 밀어댄 18세기 승려들이나 그랬을 거다. 고리짝 시절의 속설을 믿고 스컹크 냄새를 풍겼다는 거니?』
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긴 해도 냄새가 아주 나쁘긴 했어요.』
『그리고 장담하는데 그리 썩 좋은 효과도 못 봤을 거다. 세상에, 그런 멍청한 방법이라니.』
「멍청하다」라는 표현에 샘은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은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정확히 아는 것과, 알고자 노력하는 건 아무래도 차이가 컸다. 많은 책을 읽고 정보를 구했어도 그것이 꼭 옳은 것들이었다곤 할 수 없다.
「18세기 승려들이나 쓰는 방법이었대요, 아빠.」
딘도 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뜻 보기에 그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왠지 그 시선 만큼은 굉장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샘은 하던 곁눈질을 멈추고 얼른 형의 팔꿈치를 찔러 필요하지도 않은 소금병을 집어달라고 부탁했다.

『좀 있다 내가 냄새를 감추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가르쳐줄게. 필요한 재료들이니 혼합 방법이니 하는 것이 제법 복잡하니까 필기를 해둘 노트가 필요할 거야. 식당에서 나가면서 적당한 사이즈의 수첩을 하나 사도록 해라. 그건 그렇고 너희들, 젱킨스를 죽인 뱀파이어를 추적했구나. 그와는 절친한 친구였었나 보지?』
『아뇨. 아버지의 지인이었어요.』
그 대답에 쓴웃음 비슷한 것이 리의 입가로 올라왔다.
『호오, 이거 놀랍다. 동료도, 친구도, 혈연 관계도 아닌, 그냥 아버지가 아는 사람이었는데 얽혀 들어갔다 이 말이니? 이거 의리가 보통이 아니시구먼.』
『비꼬는 건가요.』
샘이 예민하게 반응하자 리는 살짝 색을 바꿨다.
『그냥 감탄하는 거라고 하자, 샘 윈체스터. 정식 뱀파이어 헌터도 아니면서 젱킨스의 복수를 하려 했다는 건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아무튼 거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긴 나중으로 하고... 중요한 것부터 질문할게. 젱킨스를 습격한 무리의 리더가 루더라고 했지?』
『예.』
『오케이. 그의 조무래기를 몇 건드린 모양이군. 루더가 너희들을 노리고 있나.』
『아뇨. 루더는 죽었어요. 우릴 노리는 건 그의 가족이라 들었습니다.』
『흐음. 그거 대단한걸. 그럼 루더의 목은 둘 중에 누가 베었지.』
『아무도요. 아버지가 콜트로 그를 쏘았...』
『뭐얏?!』
갑자기 리의 안색이 돌변했다. 얼굴색만 바뀌었던가. 펄쩍 뛰며 테이블 앞으로 몸을 던졌다.
『지금 콜트라고 했어?!』
끓는 기름에 물이 부어졌다. 아니면 염산에 구리 조각이 떨어졌다. 반응이 지나치게 격렬했다.
자글자글 소리를 내는 리의 눈빛 앞에서 샘은 어쩐지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무심코 털어놓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Posted by 미야

2007/06/09 21:28 2007/06/0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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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어려선 동생을 끌고 축구를 해보는게 소원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아버지 존은 짓궂게 질문했다.
「어떠냐, 딘. 우리 새미가 헛발질 않고 공을 멋지게 찰 수 있을 것 같니?」
무리한 주문이었다. 그 전에 걸음마부터 가르치는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렇게나 기다려 마침내 샘이 제대로 축구를 할 수 있게끔 되자 딘은 11명의 사나이들이 곤죽이 되도록 풀밭을 뛰어다니는 운동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 대신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 딘의 관심은 자동차와 여자, 효과적인 여드름 치료제, 그리고 맥주로 온통 쏠려버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축구 말고「동생과 같이 하는 온 동네 술집 투어」가 딘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나란히 섹시한 아가씨도 꼬시고, 코가 비뚫어지게 마시고, 경찰을 피해 달아나고.「방탕의 하룻밤」이라는 제목으로 못된 계획을 짜면서 속으로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제기랄. 동생은 겨우 맥주 한 잔에 혀가 꼬이는 족속이었다.

『쳇! 재미가 없어, 재미가. 그놈의 약해빠진 주량은 도대체 누굴 닮았나 몰라.』
존은 사나이답게 마시는 타입이었다. 작정하고 폭음을 하면 무서웠다. 그가 절제를 아는 사람이라는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술이 사람을 잡았을 것이다.
엄마는 적당히 즐기는 수준이었고... 아빠의 말로는 할머니가 술에 약했다고 한다. 포도주 한 잔에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신부가 그대로 뻗는 바람에 할아버지가 대단히 난감해 했다는 것이다. 결혼식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신랑은 신부에게 맹세의 입맞춤을 하는 대신 술 깨는 약부터 찾아 먹여야 했다. 뭘 모르고 축하주를 권한 친구는 잔치에서 쫓겨났다.
『어휴. 이런게 바로 격세유전이라는 건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동생의 얼굴을 가볍게 토닥거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선 평생을 기다려도 고주망태가 된 두 사람이 도로변에 나란히 서서 사이좋게 오줌을 싸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원하던 오붓한 추억 만들기는 정녕 꿈이다.

차갑게 쏘아붙이는 소리가 그래서 나왔다.
『잘 마시지도 못 하는 주제에 술집엔 왜 가! 다음부턴 오락실에나 가, 오락실에.』
형의 잔소리에 샘은 어쩐지 불만에 찬 표정이었다.
『오락실은 어린애들이나 가는 거잖아.』
『이게 어디서 쉰 소리 하고 자빠졌어. 넌 여전히 어린애야.』
『뭐? 어린애? 누가 어린애야. 키도 형보다 훨씬 크단 말이야. 나는 어른이야!』
『그래서 그걸 증명하려고 연거푸 데킬라를 두 잔이나 삼켰냐. 눈에서 불은 안 나오든?』
『눈에서 불은 안 나왔어. 하지만 입에서 욕은 나왔어.』
『호오. 그랬어요? 뭐라고 욕했는데.』
『Fuck.』
같잖은 말로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것부터가 비정상이다.
딘은 실없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샘의 등을 툭툭 때렸다.
『오냐, 대견하구나. 이 형은 네가 자랑스러워. 그러니 이제 그만 기절이라는 걸 해라. 응?』

딘이 그대로 엉덩이를 들려 하자 샘은 초조해졌다. 이대로 퍼질러 누워 눈이나 붙이라고? 이 세상엔 술의 힘을 빌어서만 표면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이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동안 그가 뾰족한 철쑤세미 덩어리를 목구멍 속으로 삼키고 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딘은 알아야 했다.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놈의 망할 철쑤세미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해야 옳았다.
허겁지겁 형의 팔을 붙잡은 샘은 간절함을 담아 낑낑 소리를 냈다.
딘은「얼씨구?」하는 표정이었지만 간만에 접한 동생의 어리광에 일단은 어쩔 수 없이 하자는 대로 했다. 동생의 눈이 만화에 나오는 미키마우스처럼 반짝거렸다. 나이가 스물 여덟이나 되었는데도 딘은 미키마우스가 여전히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샘의 헛소리를 들어줄 가치는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있잖아. 형이 내 옷을 버리면서 꿈에서 아버지가 오냐 그랬거든. 나는 끝까지 기다렸는데 내다보질 않아서 가방이 무진장 무거웠어. 얼마나 질질 끌리던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봐요. 차라리 잘 가세요. 본심은 아닌 거지? 그래서 난 눈물이 났어. 맨날 형이 날 말렸잖아. 돌아보면서 숫자를 세었는데 아무도 안 나타나는 거야. 그게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제시카가 옷을 사줬어.』
으이그, 미키마우스 좋아한다는 거 취소.
단어는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무작위로 얻어맞은 딘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공중 전화 박스에서 파란 팬티의 수퍼맨이 뛰어나왔어도 이보단 덜 황당했을 거다. 세상에! 그 머리 좋은 샘이 치약을 한 통이나 삼킨 고양이처럼 말하고 있다! 기가 막혀서 한참을 쳐다봤다. 동생의 뺨이 차츰 홍조를 띄기 시작하더니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딘은 확신했다. 장난꾸러기 고양이가 치약은 물론이고 구강 청결제까지 죄다 맛을 봤다.

『여보세요? 실례합니다. 지금 영어 하고 있는 거 맞아요? 샘 윈체스터 씨.』
『뭐야. 그럼 내가 과테말라어를 하고 있다는 거야?』
『어... 쿠바 아니었냐.』
『쿠바나 과테말라나 다 스페인어를 써.』
『옳커니. 내가 하고픈 말이 바로 그거야, 샘. 난 스페인어는 몰라. 영어로 하라고, 영어로.』
『귀에 염증 생겼어? 방금 전에 난 영어로 말했어.』
『틀려, 샘. 단언하는데 그건 바벨탑이 무너지기 전의 사람들이 쓰던 국적 불명의 언어였어. 이 불쌍한 중생이 만능 통역기라는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손 모으고 부탁할테니 영어로 말해줘.』
『우우... 답답하긴. 왜 모르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요점은 내 겨울 윗도리야! 쓰레기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난 의심하고 있어. 형은 귀찮아졌고 빨리 인연을 끊어버려야지 손바닥을 툭툭 털고 버렸어. 반복해서 그 꿈을 꾸고 나는 마음이 심란했어.』

여전히 뭔 소린지 종잡을 수가 없다.
가라는 강으로는 갈 생각도 않고 형편 없는 사공 탓에 배는 자꾸만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귀에 들어오는 단어는 있었다. 옷, 쓰레기통, 형이 버리다.
다 듣고 딘의 눈썹이 꿈틀 튀었다. 목소리도 커졌다.
『지랄한다. 네 옷을 내가 버렸다고? 멋대로 개꿈 꿔놓고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냐? 야!』
어리둥절해하며「어랍쇼, 이게 아닌데」라고 속삭였던 건 너무도 소리가 작았다. 당연히 딘은 샘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고, 2월의 하늘처럼 새파랗게 화가 치밀어 동생의 뺨을 마구 꼬집어댔다.
『아파!』
『아프라고 꼬집은 거야, 샘. 이게 어디다 대고 생트집이야. 하여간 넌 툭하면 자기 물건을 내가 어디다 치웠다고 그러더라. 저번에는 나더러 네 노트북을 만졌다고 펄펄 뛰더니, 이번엔 옷이냐?!』
대화는 이걸로 끝.
단호한 태도로 이불을 동생의 머리 꼭대기까지 올려 씌웠다.

『자다 물 마시고 싶으면 얘기 해. 그거 외엔 어떠한 말도 하지 마. 네 녀석 머리가 도로 맑아지기 전까진 나는 너랑은 어떠한 내용으로도 대화하지 않을 거야.』
『그건 곤란해, 형!』
대단히 곤란하고 말고. 그는 펄쩍 뛰었다. 술이 깬 상태에서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인디애나 존스의 모험 이상으로 위험한 법이다. 바닥이 뻥 뚫린 동굴에서 브레이크 장치 고장난 탈 것을 타고 아찔한 속도로 레일 위를 미끌어져 가는 것과 똑같다.
바짝 마른 혀가 쏘는 것처럼 아파왔다.
샘은 좁은 동굴을 가득 메운 채 굴러오는 둥그런 바위를 상상했다. 그는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난다. 뛰어라 인디애나 존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천둥이 치는 듯한 우르릉 소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부지런히 뒤를 곁눈질한다. 사망의 권세가 코앞이다. 마침내 가엾은 인디애나 존스는 종이처럼 납작해진다. 사람을 가뿐하게 즈려밟고도 바위는 아무 일 없었다며 계속해서 전진한다.
『왜 몰라주는 거야. 나중은 없어. 나중엔 말 못해! 못 한다고!』
머리가 맑아지고 나면 다시 얘기를 하자고?
맙소사. 그건 죽이겠다며 굴러오는 바위를 똑바로 쳐다보라 주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샘은 재차 낑낑 소리를 내는 것으로 형의 동정심을 자극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새 면역이 생겼는지 속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였을 수도. 남부 오지의 닭 우는 노래를 3개월간 듣고, 튀긴 닭요리를 6개월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은 사람처럼 화를 내는 걸 봐선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컸다.
『아악! 냉큼 입 다물엇! 난 네 소지품 안 건드렸어! 이 망할 자식! 경고하는데 물 달라는 거 말고 다른 소리를 지껄여봐. 죽도록 후회한다는게 뭔지 깨닫게 될테니까. 알아 들었냐!』
딘은 자신이 한 경고를 곧바로 실천에 옮길 사람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샘은 풀 죽은 목소리로「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진짜로 물 달라는 말 외엔 입 뻥끗도 하지 않았다.

『사춘기 다음에 내가 모르는 오춘기, 육춘기라는 것도 있는 건가.』
샤워기 아래로 서서 몸을 깨끗하게 씻어내리면서 딘은 이를 악물었다.
한참을 노력했음에도 우거지상을 짓고 있는 동생의 얼굴이 머리에서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몽정한 걸 들키고 창피해 죽으려 했을 적에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떨어지는 물줄기에 몸을 맏기면서 무거운 신음 소리를 삼켰다.
달짝지근한 럭키참스에 우유를 말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했던 시절이 그리울 뿐이다. 지금은 최고급 스테이크를 내밀어도 그렇게 빨리 기분이 풀리거나 하지 않는다. 감정 기복이 심해진 동생을 달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했다.
무거운 가방 셋, 겨울 옷, 쓰레기통.
으아, 나더러 뭘 어쩌라고? 샘은 그에게 기억도 나지 않는 일 - 옷을 버린 걸 추궁하고 있다.
『쓰벌. 차라리 남극 오존층의 구멍이 커지는 걸 내 탓으로 돌릴 것이지.』
비누로 겨드랑이를 문지르며 걸걸한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이 더욱 세게 나오게 조절했다. 순간 찬물이 쏟아져 나왔고 몸속에 박힌 철근들이 빳빳이 고개를 들고 곤두서려 했다. 질겁하고 다시 스위치를 반대 반향으로 돌렸다.

『샘! 어물거리지 말고 너도 빨리 세수해. 우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젖은 수건을 던지며 샘을 다그쳤다.
죄 지은 사람마냥 구석에서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샘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이렇게 일찍? 오늘은 앨런 아줌마가 보낸 자료를 찾으러 우체국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샘의 질문에 그는 부랴부랴 머리를 저었다.
『예정이 바뀌었어. 우린 아침 식사를 하면서 리를 만날 거야.』
『리? 그러니까... 애쉬가 소개해준다던 그 뱀파이어 헌터 말이야? 언제 연락이 온 거야?』
셔츠에 팔을 꿰다 말고 딘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거 왜 이러시나. 단기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셨나. 너도 어제 만났잖아. 왜 딴 소리야.』
『딴 소리를 하려는게 아니라 만난 적이 없대도.』
『어이쿠! 역시 단기 기억상실증인가 보다. 그렇다고 해도 병원에 들려 머리 MRI 사진을 찍을 짬은 없으니까 리를 만나면 뭐라고 사과할지부터 생각해둬. 샘? 넌 어제 그녀를 매춘부 취급했어.』

힐난을 듣기가 무섭게 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온하기 짝이 없던 뭉게구름이 갑자기 시커먼 폭풍으로 변했고, 그 폭풍이 비료를 싣고 가던 트럭을 멋지게 날려보내는 걸 직접 목격했다는 식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우레가 쳤다. 넌 어제 그녀를 매춘부 취급했어. 샛노란 불꽃이 일렁이자마자 거꾸로 뒤집힌 트럭이 폭발했다.
『거짓말!』
『다행으로 생각하렴. 리는 네가 가한 끔찍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화를 내진 않았어.』
『어제 찾아왔던 그 여자가... 맙소사! 뱀퍼였다고?!』
『그래.』
『그거 나 놀리려고 하는 농담이지.』
『네 생각은 어떻냐. 형이 너 재밌으라고 농담하는 거 같니?』
전기 면도기로 수염을 정리하다말고 딘은 쾌활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거울 너머로 샘을 관찰하면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슥슥 뺨을 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6/06 13:45 2007/06/0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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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책이라던가, 작가라던가 하던 것들은 죄다 허구입니다. 사실 조사는 모조리 패스, 논문 쓰는 것도 아닌데 공부하긴 싫더군요. ※


1시간 가까이 기다렸어도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딘은 턱을 치켜들어 높에 걸린 벽시계를 쳐다보는 것으로 지금이 몇 시인지를 확인했다. 꼭 마흔 다섯 번째 시도였다.

이제 샘은 코흘리개 어린애가 아니다. 행여라도 몹쓸 사람이 잡아갔을까봐 전전긍긍해할 필요는 없다. 동생은 남들보다 키도 곱절로 크고 체격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샘을 잡으려면 사자 조련사 정도의 강단이 필요하다. 칼이나 총 같은 무기를 들고 위협하는 것도 쉽지 않다. 기백에서 일단 밀리는데다 아무런 예고 없이 어둠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상대방의 권총을 어렵잖게 잡아채곤 하기 때문이다.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한 흉악 강도가 거꾸로 당한다. 고도로 훈련된 특수 기동대 대원을 맨손으로 제압하고 입고 있던 제복을 벗겨낸 실력자이니 동네 깡패 다루는 것쯤이야 식은죽 먹기다.

따라서 딘이 초조한 표정으로 납치, 봉변, 성추행,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 등등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객관적으로 샘은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라 미래에서 전송되어 온 터미네이터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딘이 보기엔 샘은 여전히 귀여운 동생이었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소중히 지켜줘야만 하는 작은 강아지였다.
꼬리치며 천진난만하게 웃는「바보」를 떠올린 딘은 근심에 젖었다.
나쁜 놈이 혹시라도 내 동생 건드렸음 어쩌지.
손톱여물을 썰어대며 시계를 쳐다보는 건 그리하여 이제 마흔 여섯 번째가 되었다.
『핸드폰 전원도 꺼버리고 말이야.』
돌아오기만 해봐라. 궁딩이 팡팡을 해버릴테다.

마음이 심란해진 우리네 아버지들이 거실에서 신문을 들춰보는 건 다 까닭이 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객관적으로 설명한 글자들로 한참을 눈을 돌리다보면 모든게 남의 일인양 멀게 느껴지는 법이다. 텍사스의 기록적인 가뭄, 블랙베리 같은 휴대용 E메일 장치를 사용하느라 엄지손가락이 아픈 이들을 위한 엄지 특별 마사지법, 무장한 은행 강도, 힐러리 클린턴의 대권 출마, 다 남의 일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말다툼 끝에 부인이 집어던진 스탠드마저 남의 일인양 느껴지게 된다. 마침내 두근거리던 심장이 식고 가파르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신문을 접고 깨어진 스탠드의 파편을 봐도 감정적으로 아무런 느낌도 없음에 안도한다. 이제 청소기를 돌릴 시간이다.

마찬가지의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딘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기 위해 그간 닥치는대로 끌어모은 각종 자료들로 눈을 내리깔았다. 게중에서 아무거나 잡고 제목을 확인해봤다.「동유럽 지역의 민간설화 - 무덤에서 부활한 조상들」이었다. 잘도 부활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딘은 혀를 내둘렀다. 진짜지 샘이 어디서 이런 걸 구해왔는지 모르겠다. 근방 대학 교수의 연구실을 털었나? 언뜻 봐도 아무나 들락거리는 도서관에서 일반인이「일주일간 빌려주세요」라고 얘기를 꺼낼 종류는 절대 아니었다. 무려 1910년대에 인쇄된 책이다. 코를 가까이 들이대자 특유의 산성지 냄새가 났다.
글쎄다. 잘은 몰라도 이걸 헌책방에 팔려고 내놓으면 책방 주인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 첫째, 장물로 의심하고 붉은색 긴급 부저를 누른다. 그 둘째, 이게 왠 떡이냐 만세를 부른 뒤에 단골 호사가들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힌 수첩을 쥐곤 부지런히「여보세요? 거기 아무개 씨 댁이죠? 댁이 관심을 가질 멋진 책이 나왔어요」라고 외친다.
아쉽다고 한다면 먼젓번 책 임자가 뒷장으로「이건 내 소유물」이라는 의미로 손수 이니셜을 남겼다는 거다. 옆으로 뉘여 쓴 글자《B.B.》는 대단히 예쁘장하고 꼼꼼해 보였다. 딘은 즉흥적으로「베스」라는 여자 이름을 떠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책 읽는 취향은 썩 좋은 편이라 할 수 없구려. 차라리「고담시의 위대한 영웅 배트맨」에 심취하는게 낫지.

그래도 머리에 베고 누우니 책의 두께가 일부러 자를 대고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았다. 완벽한 베개다. 그 안락함에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와 깜짝 놀랐다.
미안해, 베스. 얼굴도 모르는 책 주인에게 사과한 딘은 똑바로 누운 자세 그대로에서 손을 이마 위로 얹었다.

골치가 아프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배트맨에 열광하는 것 이상으로 흡혈귀에 빠져들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처녀의 피를 갈구하는 백작에게서 - 작위를 정식으로 받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운 남자에게서 매력을 느낀 것이다. 맛이 살짝 간 오늘날의 처녀들이「외계인이여, 어서 날 납치하여 주세요」라고 떠들어대듯, 불과 수 십년 전엔「흡혈귀여, 빨리 나의 목을 물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1902년엔 목덜미에 가짜로 점 두 개를 찍고 다니는게 대 유행이기도 했다. 빈혈 환자인양 뺨은 하얗게 분칠을 하고 일부러 시든 장미꽃을 골라 드레스를 장식했다. 뿐만 아니라 자정 무렵에 모여 레드 와인을 홀짝거리며 피를 마시는 척했다. 게중 일부는 용감무쌍하게도 진짜 피를 마시기도 했고, 소화되지 않는 철분에 위장이 뒤틀려 고생했다. 아편에 취해 진짜로 피를 마셨다고 착각한 나머지 고해성사를 들어줄 신부를 불러달라며 소동을 부린 남자도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웃기는 사람들은 많았다.
『꼴통들. 나 원, 한심스러워서... 그러다 진짜가 숨어들어 오기라도 하는 날엔 몰살이라고.』
다행히 진짜 뱀파이어들에게도 이런 풍습은 대단히 꼴사나웠던 모양이다. 사교 파티 도중의 대량 실혈사(失血死)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선 말이다. 하긴, 아무리 뻔뻔한 성격이라도 화장하고 돌아다니는 가짜들 틈새에서 피를 빨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긴 어려웠을 거다. 말 그대로 입맛이 떨어졌을 터.

어쨌든 여기서의 문제는 수 많은 소설과 시, 그리고 영화에서 어둠에서 창백한 하얀 손을 내미는 이 사악한 존재를 미화시켰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놈의 미화 작업은 필연적으로 사실을 왜곡시켰다. 뭐가 사실인지 아닌지, 죄다 섞여버린 것이다.
딘은 가만히 박자를 맞추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뱀파이어는 박쥐로 변신하지 않는다. 당연한 거지만 영국인이 애용하는 박쥐 우산으로도 변신하지 않는다. 햇빛을 보는 날엔 잿더미가 된다는 주장도 거짓이다. 화상을 입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십자가와 마늘이 유일한 대항 무기라는 속설 또한 완전히 날조된 거짓이다. 애쉬의 말로는 은으로 만든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며 무려 10년에 걸쳐 수녀 노릇을 한 뱀파이어도 있었다고 한다. 무기를 소지한 채 수녀들을 욕보이겠다고 성당으로 난입한 소련군 여섯을 물어뜯어 죽이고 그대로 도주, 여지껏 생사불명이라니 무섭다. 그래가지고 성수에 과연 반응은 하기는 할련지... 남자 망신 다 시킨 소련군 여섯이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질렀다는 건 딘의 관심 밖이었다. 은십자가가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은총알로도 처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가 생각하는 건 오로지 그게 전부였다.

다시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고 상식적인 선에서「무기」라고 짐작되는 것들을 나열해 보았다.
십자가, 은총알, 나무말뚝, 양파, 마늘, 성수, 자외선, 성스러운 빵, 로즈마리...
깔깔대며 자지러져라 웃는 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농담하는 거 맞지? 뱀파이어들의 후각이 예민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양파와 마늘에 질색하겠어? 개에게 레몬즙을 뿌리면 기겁하지만 죽지는 않는다고.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건 뭐야. 성스러운 빵이라니? 뱀퍼인 나도 그런 건 처음 듣는데.」
본인에게 묻지 말도록. 성스러운 빵 어쩌고는 순전히 바비 아저씨의 추측이니까.
사실 성만찬에 쓰는, 누룩 없이 구워낸 떡의 효과에 대해선 사실 그도 매우 궁금해하던 참이다. 아울러 고백하자면 언젠가 한 번 시험해봐야지 하고 몰래...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기겁했다.
『샘?!』
모르는 사이에 살짝 졸았던게 분명하다. 동생이 언제 돌아왔는지 전혀 몰랐으니까.
뿐만 아니다. 샘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침대에 누운 딘과 눈높이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코앞으로 동생 얼굴이 불쑥 전진해오자 딘은 당황했다.
심장에 안 좋다, 이런 건. 놀란 나머지 몸을 벌떡 세우려 했다.
『와, 왔으면 말을 할 것이지.』
그보다 0.5초 더 빨랐다.「그냥 그대로 있어」라고 작게 속삭인 샘은 손바닥으로 딘의 가슴을 눌러 일어나려던 움직임을 제지했다.

『왜.』
『이게 더 좋아.』
『하아?』
『우리 얘기 좀 해.』
『앉아서도 얘기는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샘. 난 이러는 거... 조금 불편하거든?』
샘과의 거리는 불과 한 뼘 남짓. 어쩐지 한 침대에 둘이 나란히 누워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상당히 거북했다. 농담이 아니다. 그래서 딘은 이대로가 더 좋다는 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일어나 앉으려 했다.

그래봤자 샘은 또 다시 손으로 딘의 몸을 꾸욱 눌러대며「안돼」라고 했다.
강하게 힘주어 누르는 동작에 기가 막혔다. 이게 뭔 짓인고?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것으로「치워주지 않을래?」라고 물었다. 하지만 샘은 딘이 취한 제스츄어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신 질릴 지경으로 똑바로 눈을 맞춰오면서 딘이 반항을 포기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누워있어야 했고, 샘이 원하는 건 오로지 그 사실 하나밖엔 없는 듯했다.

녀석이 또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딘은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구나, 이 형은.』
『묻고 싶은게 있어.』
『내가 그 여자와 섹스를 했는지, 안 했는지? 이 바보, 척 보면 모르겠냐. 난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샤워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어떤 남자가 여자와의 정사 끝에 책을 베고 누워 졸겠니. 그것도 제목이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도 겁나게 먼「무덤에서 부활한 조상들」이라고.』
외출했다 돌아온 주인 상태를 확인하는 개냐. 딘은 착잡한 심정으로 벌릉거리고 움직이는 샘의 코를 노려봤다. 녀석은 긴장하여 냄새를 맡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았을 여자의 냄새를, 정액의 냄새를 찾으면서 킁킁 소리를 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비명이라도 질러대고 싶었다.

『계속 그러면 한 대 맞는다.』
『우... 형한테서 땀 냄새 나.』
『쳇! 그거 참 대단히 미안하게 됐수다.』
딘은 발끈했다. 하여간 이놈의 자식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데 천재적이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말이 뭐냐. 나더러 목욕 좀 하고 살라고?』
『아니.』
『아님 겨드랑이에 데오도란트라도 바르라고 충고하고 싶어?』
『그게 아니라...』

샘의 표정이 잡작스럽게 어두워졌다.
그걸 본 순간 차갑고 끈적거리는 젤리 느낌의 무언가가 천천히 딘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뱉을 수 있다면 뱉고 싶다. 왠지 불길하다. 정체 모를 한기가 뒷맛 나빴다. 저런 표정을 짓는 동생은 무지 오랜만이다. 천사 나부랭이를 믿는다고 나불거리던 그를 향해 다음엔 하느님께 기도도 드리겠구나 하고 빈정거렸더니 샘은「난 지금도 매일 기도하고 있어」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떨궜다. 아이고 맙소사, 그때의 얼굴이다. 철렁 소리를 내며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어째서야... 어째서 딘은 나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어?』
『뭐?』
『왜 밖을 내다보지 않았느냐고.』
딘은 최대한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야 네가 총알처럼 빠르게 뛰쳐나갔으니까. 붙잡고 자시고 할 틈을 전혀 안 줬잖아.』
속상해하며 샘이 부정했다.
『거짓말이야. 난 가방을 세 개나 들고 있었어. 그게 얼마나 무겁던지 걷는 것조차 버거웠다고. 뛸 수 없었어. 딘의 표현대로 총알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단 말이야.』
『가방? 그것도 세 개씩이나?』
이상하다. 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딘은 뭔가가 어귀가 살짝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무슨 소리야. 넌 가방을 들고 있지 않았어. 샘? 너 지금 취했니?』

정곡을 찔렸다. 눈에 띄게 당황한 샘이 화들짝 뛰었다.
『아, 아, 안 취했어!』
『뒤로 느낌표가 붙는게 영 수상하군. 게다가 말을 더듬기까지. 으이그!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두 잔? 석 잔?』
『마, 맛만 봤어. 진짜야.』
『이놈아! 특허법 위반이야. 그건 딘 윈체스터가 여차하면 요긴히 써먹던 변명이잖아.』
동생이 취했음을 확신한 딘은 주먹으로 동생의 머리를 따악 소리가 나게끔 때렸다. 알콜 냄새가 안 난다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하는 행동으로 보아 일찌감치 짐작했어야 옳았다.
『이 술주정뱅이!』

슬슬 동생을 재워야 할 시간이었다.
『대화는 맨 정신일 때 계속하자. 너는 지금 바로 눈을 붙이는게 좋겠어.』
『안 졸려, 딘. 하나도 안 졸리다고.』
『그러셔요? 어서 이리 와서 누우세요. 자빠져 누우라고요.』
『싫어. 난 알고 싶단 말이야... 계속 생각했어. 술집에서도 그것만 계속 생각했다고.』
『셔츠는 벗자. 아가? 만세를 부르렴.』
『왜 날 붙잡지 않았느냐니까... 내가 묻고 있잖아.』
『알았어, 말리지 않을테니 바지고 뭐고 전부 입고 자.』
『딘.』
『자꾸 반항하고 그러면 찬물 틀어놓고 샤워기 앞에 널 그냥 세워버릴 거야.』
 경고를 담아 말을 일단 끊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 진짜지... 알콜에 약한 동생이 너무나 싫었다.

Posted by 미야

2007/06/02 22:29 2007/06/02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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