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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크앙... 3시즌이 고프다. 엘리스님이 올려주는 팬픽 번역이 없었다면 진작에 시체됐을 거예요. ※


홧김에 뛰어나왔으나 그 다음부터가 막막했다. 아침부터 내린 가느다란 빗줄기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다 수중엔 우산조차 없다. 이래선 꼭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숲속을 방황하는 헨델과 그레텔이 된 기분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멍한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대로라면 미아가 되어버리는 건 기정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식인 마녀의 끔찍한 함정일지언정 과자로 만든 집이 코앞으로 나타나면 반색하고 들어가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버릴지도 모른다.
보슬비에 목덜미가 흠뻑 젖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몸을 차갑게 하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 벌써부터 어깨가 덜덜 떨렸다.
샘은 모텔에서 500m가량 떨어진 곳까지 팔을 흔들며 걸어오고 난 뒤에야 아무런 준비 체조 없이 강으로 뛰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멱을 감으려면 최소한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감정을 앞세워 무작정 달려나온 건 실수였다.
그렇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더 챙겨들고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는 수 없었다. 옷깃을 바짝 세우고 불빛이 많은 방향을 향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영화나 보러 가? 팝콘을 먹으면서 1시간 30분짜리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럭저럭 시간을 맞출 수 있다. 단, 예약도 없이 아무 때나 입장이 가능한 영화관은 호환마마나 전쟁보다 훨씬 더 무서운 필름을 돌리고 있는 경우가 다수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스펙타클한 액션 영화나 특수효과 죽여주는 오락 영화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게 좋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살색의 제전이다. 이렇다 할 대사도 없고, 줄거리도 없는... 그걸 깨닫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싹 달아났다.
그럼 무얼 하는게 좋을까.
아니, 그보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걸까.
가슴 안쪽이 새파랗게 식어갔다.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추위를 떨쳐버리기 위해 가벼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어서 겨 들어와!》
전화를 걸어봤자 받지 않을 거라 짐작한 딘이 핸드폰으로 문자를 날렸다.
이를 무시하고 뛰는 속도를 올렸다.
《이눔이 형이 하는 말 안 들을겨?!》
짜증이 치밀어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어째서일까.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날 밤이 생각난다.
「나는 아버지 부하가 아니예요! 날 언제까지고 맘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명령을 내리면 로봇처럼「그러겠습니다」대답하는게 자식의 도리라는 건가요? 그건 절대로 아니예요. 저도 생각이 있고, 판단도 할 줄 알아요. 그런데도 아빠는 나를 무슨 부품인양 다루려 하죠. 어둠에 숨어있는 존재를 사냥하기 위한 요긴한 부품 말예요. 샷건이나 사냥용 나이프와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반들반들 닦여 있어야 하고, 기회가 오면 우릴 휘둘러 그들을 죽이는데 사용해요. 평소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시는 적도 없죠. 의견을 제시하면 깨끗이 묵살하고요.」
그것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대단한 싸움이었다.
「질문을 할게요, 아버지. 당신의 둘째 아들이 사냥을 싫어한다는 건 아세요? 꿈이나 장래희망이 뭔지는 알고 계시냐고요!」
죽을 각오를 하고 시작한만큼 쌓아두고 하지 않던 말을 이때다 하고 퍼부어댔다.
「하나도 모르죠. 아빠는 나에 대해 하나도 몰라요. 뿐만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그럴 필요도 못 느끼고요! 그거 알아요? 당신은 이기적이야!」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손을 가위표로 흔들며 선언했다.
「이젠 지긋지긋해. 모두 관둬요. 끝내요! 차라리 생판 모르는 남남으로 사는게 낫겠어요!」

원시적인 주먹다짐이 오고가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존은 사랑스런 아들을 두둘겨 패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냉정함을 유지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는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걸 기억해라, 새뮤얼.」
「주워담을 필요 없어요, 아버지. 난 떠날 거예요.」
「어디로 간다는 거냐.」
「상관 마세요. 오늘부터 난 당신 아들이 아니니까.」
그때 샘은 뭔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효과 좋은 접착제로도 다시 이어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삽시간에 두동강이 나버렸다. 정확히 무엇이 망가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무어라 명칭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하느님께 빌어도 한 번 부숴진 건 절대로 복구되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소중한 거였는데... 영원히 잃어버렸다.

한심스럽게 에취 재채기가 나왔다.
비가 내리는 밤은 어느 때보다 어둡다. 쌉쌀한 느낌의 코를 문지르며 쓰게 웃었다.
나는 오늘부터 당신 아들이 아니야.
아아, 어쩌면 좋아.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원래 철새처럼 떠돌며 살던 그들이었다. 가지고 있던 개인 물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옷가지와 책, 그리고 약간의 소지품을 전부 모아봤자 가방 3개 분량이 전부였다. 제일 비싼 물건이 중국제 워크맨이었다. 샘은 누르고 또 눌러서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겨울 외투와 신발 두 개는 과감히 쓰레기통에 던졌다. 계절이 바뀌면 나름대로 아쉬워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일단 버리기로 결정하자 냉정하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결심이 서자 그 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큰 가방 두 개는 어깨에 걸치고 나머지 하나를 손에 들었다. 기세 좋게 나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았다. 굳은 표정의 젊은이가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다른 사람처럼 보여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섰다. 그래도 샘은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그저 달각 소리가 나면서 닫기던 현관문의 촉감만을 기억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결코 미련을 두지 말자고. 이것은 평소 그가 꿈 꾸던 새 인생, 새 삶으로의 첫 걸음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예식장으로 들어가는 새신랑처럼 크게 호흡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비록 아무도 축복해주지 않았을지언정.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하루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기억 속에... 샘은 불현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딘이 없었다.
아빠와 샘이 싸운다 싶으면 항상 중재자의 입장으로 두 사람을 뜯어말리던 딘이다. 그래서 언젠가 농담처럼 딘이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너무 자주 끼어들다보니 권투 경기의 심판이 되어「이제부터 싸울 시간입니다. 시작~!」선언하는 기분이 된다고.
농담만 한게 아니라 짓궂게 장난도 쳤다. 입으로 땡 울리는 종소리를 흉내내고는「새뮤얼 윈체스터, 경기 시작하자마자 독설을 퍼붓습니다~! 아아, 존 윈체스터, 반격을 시도합니다! 순식간에 코너로 몰리는 새뮤얼 윈체스터! 시작은 좋았지만 언제나처럼 형편없군요.」이러고 중계 방송을 했다.
동생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거였다면 그건 대박의 성공이었다.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샘은 그 이후로 약 두 달간 실어증 환자의 증상을 흉내내며 살았으니까. 그때가 윈체스터 가문 역사상 가장 고요했던 두 달이었다. 옆구리를 세게 꼬집혀「이게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라고 샘이 버럭 고함을 지르기 전까지 그곳은 침묵의 수도원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이후로 냄비가 펄펄 끓어 넘치지 않도록 가스 불을 조절하는데엔 입은 그다지 쓸모 없다는 걸 딘이 깨달았다는 거다. 그래서 실없는 소리를 꺼내는 대신 샘의 팔을 잡고 강제로 그의 방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언성이 조금만 높아진다 싶으면 얼른 대기하고 서서 흥분한 곰을 포획할 태세를 갖추었다. 뛰어난 재주꾼인 딘은 그가 나서야 할 타이밍이 언제라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그 타이밍이라는 걸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딘은 일절 두 사람의 다툼에 관여하지 않았다.
모습을 감추고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일 때문에 어디 멀리 떠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고장난 TV 안테나를 고쳐보겠다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실수로 사다리를 걷어차 오작가작 못 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하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딘은 샘이 가방을 꾸리든 말든 일절 모르는 척했다.
떠나지 말아달라 애원할 거라 생각했는데.
화를 내며 들고 있던 가방을 빼앗을 거라 상상했는데.
침묵했다.

대학에 갈 거라고 딘에게 미리 언질을 준 적도 있다. 집을 나가겠다는 결심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언제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말린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샘이 아니었다. 딘이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며 팔을 잡으려 들었다면 단번에 뿌리쳤을 거다.
그런 주제에... 얼굴을 보이지 않은 딘에게 심한 배반감을 느꼈다.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데도 형은 내다보지도 않았어. 딘은... 날 안 봤어!」
샘이 그들을 버린 거다. 존과 딘을 그곳에 버리고 떠나왔다.
정말로 그런가.
샘은 동요했다.
어쩌면 그 반대가 아닐까.
소리를 내고 뚝 끊어져버린 그 무엇...
딘은 떠나는 동생을 향해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으로 오고 나서도 샘은 행복하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악몽에 시달렸다.
그 내용은 늘 똑같았다. 쓰레기통에 겨울 외투와 신발 두 켤레를 버린다. 손바닥을 탁탁 털고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샘은 그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본다. 물건을 버린 사람은 그가 아니라 딘이다. 그리고 형은 뒤돌아 태평스런 목소리로 존에게 질문한다.「이거 말고 더 버릴 건 없나요? 아버지.」그때마다 샘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벌떡 깨어났다. 뿐만 아니라「싫어! 그러지 마! 왜 버리는 거야!」라고 소리도 질러댔다. 제시카의 증언이다.
「어떤 건지 몰라도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 외투였었나봐, 자기.」
그래서 제시카가 마음을 담아 샘에게 선물한 첫 번째 물건이 바로 겨울 코트였다.

2년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딘이 전화도 걸지 않았다.
혹시라도 은행을 턴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의 수상한 돈뭉치를 들고 직접 나타나기 전까지, 샘은 딘이 동생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말살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어, 얼간이. 어디서 귀신이라도 봤냐. 하얗게 질려가지곤.」
전혀 짐작 못 했다. 뜬금없이 나타나 그는 웃었다. 거칠거칠하게 수염이 돋아난 뺨을 긁으면서 바보처럼 미소를 지었다.
「왜 나타났어, 딘. 여긴 뭐하러 온 거야?」
2년만에 얼굴을 본 형이 반갑기는커녕 당장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샘은 그제야 자신이 마음속 깊이 상처 입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꺼져.」
「알았어.」
딘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담백했다.
「돈도 도로 가져가.」
「아니. 이건 여기다 두고 갈게. 정 필요 없음 버려.」

송두리째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사실은 바다 만큼 남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샘은 술을 마셨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 싶도록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주정했다.
「나쁜 놈. 필요 없음 버리라고 딱 잘라 말 하다니.」
마음이 너무나 아파 길거리 한 복판에 엎드려 누워 엉엉 울었다.
일주일 뒤에 딘이 안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샘은 그대로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속상해서,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아서 죽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딘은 태도를 돌연 바꿔 전화를 여러 번 걸어왔다. 메시지도 남겼다. 안녕, 잘 있니, 시험은 잘 봤니, 아빠는 건강하셔, 나도 잘 있어... 그 답게 가끔은 철자도 틀렸다.
물론 샘은 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형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으면 그토록 고생하며 일궈낸「평범한 일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임을 그는 잘 알았다. 그래서 무시했다. 더 이상 버려진 외투와 신발 두 켤레의 악몽을 꾸지 않음에 만족하고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았다...

샘은 걸음을 멈추고 모텔이 있는 쪽을 돌아다 보았다.
이젠 너무 멀어서 간판의 불빛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모든게 혼란스럽다. 가슴을 윽죄는 애절함에 목이 매였다.
『이 바보 멍청아아아아~!!』
고통 섞인 울부짖음에 근방을 지나가던 운전자가 급 브레이크라도 밟은 모양이었다. 끼익 하고 타이어가 지면을 긁어대는 소음이 희미하게 빗방울 속에 녹아들었다.

Posted by 미야

2007/05/31 01:24 2007/05/3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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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이번 글은 전반적으로 성인 취향입니다. 그리고 무지 길어질 것 같습니다.「난 그런 건 딱 질색이야」라는 분들은 모쪼록 피해주세요. ※


이런 늦은 시간대에 대관절 왜... 아니, 그보다 누가.
알아서 할테니 방 청소는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사전에 신신당부했다. 형제 좋아하시네. 젊은 남자 둘이서 만리장성을 쌓겠거니 생각한 모텔 관리인은 선뜻 그러라고 대답했다. 이런 경우는 질리도록 봤다며 비밀을 공유하는 듯한 은밀한 표정으로 방 열쇠를 건네주었다. (터무니 없는 그의 오해에 샘은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딘이 귀찮아하며 그 사실을 정정하려 하지 않음에 많이 속상했다) 그러니 야밤에 휴지통을 치워주겠다고 문을 두드리는 건 절대로 아닐 터.
거기다 모텔 관리인은 나이 지긋한 남자다. 그런데 지금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목소리는 젊은 여성이다. 머리 허연 60대 초반의 사내가 뛰어난 성대 묘사의 재주를 부리고 있다는 줄거리를 일찌감치 문서 세단기에 넣어 곱게 갈아버린 샘은 근심에 젖었다.

발 뒷굼치를 들고 문가로 걸어가 도어미러로 밖을 살펴봤다.
《미스터 마호고프 씨?》
굵게 웨이브진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다. 껌을 짝짝 씹으며 뾰족하게 생긴 입술을 오물거렸다. 보라색 아이섀도우를 짙게 바른 눈이 시원 큼직했다. 속눈썹도 길었다. 퍽 예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만하면 개성적인 외모다. 더하여 가슴 계곡이 훤히 드러난 V-라인의 현란한 꽃무늬 셔츠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말 그대로 양귀비 꽃밭이었다.
여자는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먹쥔 손으로 다시 문을 두드렸다.
《미스터 마호고프 씨! 이봐요?》
두드리는 동작과 같이하여 위아래로 출렁이는 가슴의 움직임이 문 반대편까지 전달되었다.

이놈의지랄맞은형이프런트에가서아가씨를불러달라고그랬어!

지평선 너머로 지름 500m의 운석이 시속 6만7천km의 속도로 날아갔다. 하지만 하늘을 직각으로 날아가는 불덩이만 무서운게 아니다. 지상에서도 세인트 헬레나 산의 분화구에서 시커먼 유황 연기가 솟구쳤다. 멸망의 징조다. 딘은 양동이로 퍼붓게 될 마그마와 화산재를 두려워하며 목을 움츠렸다. 듣자하니 1902년 서인도제도로 재앙이 닥쳤을 적에 지하감옥에 갇혔던 사형수가 운좋게 살아 남았다고 하던데. 허나 지금의 그에겐 두꺼운 콘크리트 덮개는 물론이고 머리를 가릴 얇은 이불 한 장 없었다. 어찌된게 사형수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

황소가 콧김을 뿜었다. 날카로운 뿔로 들이받기 전, 딘은 테이블 뒤로 얼른 도망쳤다.
『앨런이 남긴 메시지를 찾으러 프런트에 갔다고? 이 거짓말쟁이!』
『내가 왜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난 아가씨를 부르지 않았어, 샘.』
『그거 참 이상하군. 죄를 짓지 않았다면 왜 내 나를 슬슬 피하는건데.』
『그야 지금 내 눈에는 네가「13일의 금요일」에 나온 제이슨으로 보이고 있으니까.』
『하! 크리스탈 캠프장에서 난리를 친 살인귀는 제이슨이 아니라 제이슨의 엄마잖아.』
『그건 1편이고. 요즘 갠 우주로까지 진출했다고.』
『제이슨이 우주로 갔든, 프레디와 맞장을 뜨든 말든, 관심 없어! 지금의 내 관심거리는 형이 여자를 이리로 불렀다는 거야! 세상에... 이 엉덩이 가벼운 인간아. 그렇게나 그 짓을 하고 싶었던 거야?!』
『샘? 나는 너와 다르게 남자야. 언제라도 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니. 하지만 안 불렀어. 정말이야. 맹세해.』

딘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심장 부위를 눌러가며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건 꽤나 설득력 있어뵈는 동작이었다. 그 뒤로 쓸데없는 말만 덧붙이지 않았다면 샘은 그가 얼룩 한 점 없이 진실을 말했다고 설득당했을 거다.
『그런데 새미? 밖에 있는 여자 얼굴이 어떻든. 예쁘냐?』

거기서 어떻게 베시시 웃을 수가 있니.
이쯤되면 사람의 목을 맨손으로 마구 졸라대고 싶어지는 법이다. 기분이 상했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샘은「홧김에 가까이 있던 스탠드를 집어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영화속 범인들의 참회가 결코 꾸며낸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어떻게 저지를 수 있냐고 반문해선 안 되는 거였다. 정말로 화가 나면, 그러니까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키면 인간은 소크라테스라고 해도 스탠드를 들고 야구방망이처럼 휘둘러대게 되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주세요.
코피를 멎게 하는 동작을 흉내내며 - 고개를 뒤로 바짝 젖힌 채 콧잔등을 세게 눌렀다 - 천천히 숨을 고르던 샘은 천천히 하나부터 열까지 숫자를 헤아렸다.
효과가 있었다. 부리로 사람 머리를 피 나게 쪼아대던 새가 마침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록 이마가 철철 흐르는 피로 뒤범벅이었지만 샘은 힘줄이 돋아나도록 힘주어 붙잡은 스탠드를 도로 제자리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주여, 감사합니다. 시험에 통과했어요」짧게 기도했다.

어쨌든 듣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노크 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자를 방 안에 들일 의사가 전혀 없는 샘을 대신하여 딘이 문을 열었다.
『짜증나서 혼났네. 왜 이렇게 밖에 오래 세워두는 거예요.』
대단히 멎적어하는 딘의 얼굴이 나타나자마자 여자가 대놓고 툴툴거렸다.
『미안... 그런데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아가씨가 찾는게 211호가 맞나요?』
딘의 질문에 여자는 킁 콧소리를 내며 엉덩이로 손을 올렸다.
『이거 왜 이러시나. 지금 와서 뒤로 빼긴. 마누라가 사설 탐정이라도 고용했대요?』
그리고는 샘을 다시금 폭발하게 만드는 문제성 발언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미스터 마호고프 씨. 그쪽이 두 명이라는 건 미리 얘기를 하지 않았잖아요.』

딘이 여자의 엉덩이를 거머쥔다. 여자가 샘의 허리를 안는다. 망할.
딸각 소리를 내고 스위치가 켜졌다. 싸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지면서 사방으로 붉은 색 경고등이 번쩍거렸다. 샘은 빗방울에 젖어 축축해진 겉옷을 챙겨들고 성큼 걸음으로 방안을 가로질렀다. 여자와 대화하기 위해 입구를 가로막고 선 딘을 옆으로 밀쳤다.
시선만으로 살인이 가능하다면 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혐오와 미움으로 잔뜩 흐려진 녹색의 눈동자가 딘의 뺨을 후려갈겼다.

『샘? 샘!』
『밖에 나갔다 올게. 1시간이면 충분하지?』
『야!』
『그거 알아? 형은 변태야.』
뒤돌아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가는 동생을 딘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 화가 나 있었고, 앞뒤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손가락으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경을 치게 생겼다. 하도 공기가 살벌해서 딘은 감히 모험이라는 걸 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그는 샘이 피를 나눈 형제라는 사실을 잊고 그의 넓적다리를 향해 부엌칼을 휘둘러댈까봐 무서웠다.
『난 형과 나란히 한 여자랑 즐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어. 그러니 잘 해봐!』
싱글 베드 두 개짜리 방에서 성인 세 명이 어떻게 옷을 벗고 같이 뒹굴 수 있느냐는 소박한 의문따윈 머리에서 진작에 달아났다. 샘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녹색과 암청색, 그리고 새카만 빛깔의 화염이었다. 이게 만화였다면 뒤로 이런 의성어가 적혀졌을 거다. 활활.
『유황불 지옥으로 떨어져버렷!』
샘이 아는 한 그것은 최고 수준의 욕설이었다. 이윽고 분노로 가득찬 샘의 몸은 뻥 터져버렸다.

그 파편을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뒤집어쓴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딘은 절망했다. 지옥이라는 장소가 단순한 상징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리로 가라고 말 하다니. 슬퍼져 온몸의 기운이 죄다 빠져버렸다.
반면 여자는 이 모든게 대단히 흥미로운 듯했다. 어쩐지 교활해 보이는 미소가 입가로 슬그머니 떠올랐다. 그녀는 씹던 껌을 뱉어 손가락으로 돌돌 말면서 이렇게 말했다.
『와우! 오싹오싹하네. 바람 난 부인이라도 봤다는 식이군.』
딘은 눈에 힘을 주고 여자를 쏘아봤다.
『알았어. 정정하지. 바람난「남.편.」이라도 봤다는 식이군.』
여자는 서둘러 바꿔 말하고 갖고 있던 껌을 은근슬쩍 구석으로 버렸다.

이상하다. 샘이 사라지자마자 어느새 말투마저 달라졌다. 아니, 분위기 자체가 돌변했다. 혹시라도 샘이 다시 돌아와 지금의 이 여자를 본다면「섹스」라는 단어를 연상하고 화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일이다. 천박한 느낌을 주던 색조 화장마저 지금은 평범하게만 보였다. 너구리가 다섯 바퀴 재주를 굴러 사람으로 변신했다.

여자가 엄지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봤어? 자동소총으로 날 쏘고 싶다는 표정. 한 순간에 머리 가죽 날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되던데. 1997년 뒤셀도르프에서의 사냥 이후 이렇게 긴장한 건 오랜만이야.』
딘은 이마를 찌푸렸다. 뒤셀도르프... 사냥?
『아아, 이거 진짜지 자꾸 왜 이러시나. 내가 창부가 아니라는 건 문을 열었을 때부터 곧바로 알아차렸잖아, 딘 윈체스터.』
그의 본명을 부르고는 재빨리 눈짓하며 부탁했다.
『허리춤에 찔러둔 권총에서 이제 그만 슬슬 손을 떼지 않겠어? 덕분에 나까지 긴장하게 되잖아. 난 총이라면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사실이다. 냄새만 맡고도 딘은 그녀가 길거리 여자가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경험이 부족한 동생은 빨갛게 칠한 입술만 보고 잘도 속아 넘어간 것 같다만, 딘은 그쪽으론 눈치가 백만광년은 빨랐다. 블라우스 밖으로 훤히 비치는 검정색 브래지어와 비슷하다. 보고 싶지 않아도 그냥 보이는 걸 어쩌라고.

『어머나! 그거, 실례야. 여자를 면전에 두고「냄새」운운 하는 건. 그렇게 말하면 나한테서 땀 냄새나 겨드랑이 냄새가 나는 것 같잖아.』
『그럼 뭐라고 해야 해?』
『댁은 어휘력이 형편 없군. 매춘부는 보석으로 만든 비싼 귀걸이를 하지 않지 -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잖아. 실제로 내가 지금 한 귀걸이는 티파니 진품이고 말이야.』
그러면서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합성 사파이어가 박힌 포스트 타입의 귀걸이를 보여주었다. 악세서리엔 문외한이지만 확실히 비싼 장신구다. 세련되고 정갈했다. 길거리 여자들이 아니라 잘 나가는 대기업 사무원에게나 어울릴법한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딘은 여전히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탁이 있었지만 여차하면 뽑아들 수 있도록 총 위로 살짝 얹은 손은 계속해서 그 위치를 지켰다.
『그런데 왜 매춘부인척 한 거지?』
『왜냐니? 그야 그편이 훨씬 재밌을 것 같아서지.』
여자는 당연한 걸 묻는다며 살짝 윙크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의미에서 그쪽 반응이 어떤지 보고 싶었어. 뭐, 애쉬가 설명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일단은 마음이 놓였다고나 할까. 무턱대고「어서옵쇼, 아가씨!」이랬으면 난 정말 실망했을 거야. 헌터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증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동생 쪽은 살짝 실망이야. 아직 순진해서 그런가, 아님 시력이 나쁜가. 그런 형편 없는 눈썰미로 사람들 속에 숨은 뱀파이어를 무슨 재주로 알아차릴 거래?』

여기까지 말한 뒤, 오른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서두가 길었군. 이쯤하고 정식으로 인사하지. 만나서 반갑다, 딘 윈체스터. 내 이름은 리야. 그게 성이냐 이름이냐는 따지지 말아주기 바라. 다들「뱀퍼 리」라고 부르니까 리라고 불러.』
『리? 당신이?』
뱀퍼... 딘은 뱀파이어 헌터를 통칭 뱀퍼라고 부른다는 애쉬의 말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리가 최고의 뱀퍼라는 것도 떠올렸다.
『에엑?! 그런데 남자가 아니었어?!』
성차별 하고 지랄한다.
리의 한쪽 눈썹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거기다 악수를 하자고 했더니 무례하게 여성의 가슴 부위를 손가락질 하고 있다.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선 리는「이게 어딜 기어오르고 있어」라는 표정을 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5/27 09:48 2007/05/2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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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연속극화에 박차를...;; 샘은 화가 난 상태이고, 이들 형제는 감정적인 싸움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이번 이야기의 핵심이고, 결말은 결코 달콩하지 않을 겁니다. ※


모카 라떼 커피 2인분을 사가지고 모텔로 돌아오면서 샘은 계속해서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빗물이 스며들어 어느새 질척해진 땅이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하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검고, 지저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고쳐볼 재주가 없다. 일기예보에 의하자면 비는 앞으로도 계속 내릴 것이고, 여러 사람이 집중적으로 밟아댄 진흙탕은 기껏 세탁한 옷을 삽시간에 망쳐놓기에 딱인 상태였다. 모든게 엉망진창. 여기다 퀴퀴한 흙 썩은 냄새까지 더해져 완전히 끝장이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 한올이 눈을 찔렀다. 샘은 위로 푸푸 입김을 불어 성가신 머리카락을 치웠다. 그러다 실수로 물 웅덩이를 밟았다. 철퍽 소리가 나면서 바짓단에 좁쌀 크기로 진흙이 튀었다. 암흑의 칼날이 시야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도록 처참해졌다. 신발 밑창으로 물기가 스며들어 불쾌감은 곱절이 되었다. 아, 진짜지... 이런 상황에선 성품이 착한 사람들도 갑자기 돌변해 죄 없는 개구리를 마구 짓밟아 내장이 터져 죽게 만드는 법이다. 밟아 죽일 개구리가 필요했다. 딱 한 마리만. 딱 한 마리만 눈앞에 나타났으면.

램프의 요정 지니가 샘의 마음을 읽고 개구리를 붙잡아 데려왔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이슬비를 뒤집어쓴 채 모텔방 앞으로 주차되어 있던 임팔라를 위아래로 흘겨보던 샘은 폭발 일보직전의 감정을 담아 뒷바퀴를 걷어찼다.

이건 완전히 정신 나간 짓이다. 영혼도 없는 차가운 쇳덩이를 상대로 분풀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더 환장할 일은 여기서 한술 더 떠서 임팔라를 분해 - 토막살인 -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는 거였다. 실제로 그는 밤이면 밤마다 망치를 들고 임팔라의 엔진을 부수는 꿈을 꾸었고, 눈을 뜨고 나서는 호수 밑바닥으로 수장시키는 상상을 했고, 변기에 앉아서는 차체를 소금에 버무려 불질러 버린다는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작성하기도 했다. 그럴 적마다 샘은 성냥을 그으면서 잔인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화장실 거울 너머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강철을 핥고 올라가면서 마침내 쾌감은 절정을 이룬다. 하아, 숨을 토해내고 휴지를 붙잡는다.

「난 미친 거야」
그런 생각을 해봤다는 사실이 혐오감을 부추겨 샘을 한층 더 좌절하게 내몰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그의 마음은 또다시 67년형 쉐비 임팔라를 처치하는데 온통 쏠려 있었다.
쇠몽둥이를 들고, 내지는 도끼를 들고 자동차를 퍽퍽.

형의 마음을 휘어잡은.
괘씸한 녀석.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다시금 타이어를 걷어찼다.

『다녀왔어.』
그래도 딘 앞에서 맛이 간 살인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아무 일도 없었다며 평정심을 가장하고 포장된 커피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아마도 그의 형은 화장실에 들어간 모양이다. 축축해진 겉옷을 재빨리 벗으며 변기의 물을 내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딘? 커피 사가지고 왔다니까.』
돌아오는 답변이 없는 걸 봐선 어쩌면 밖으로 나간 걸지도 모른다.
이마를 찌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저녁 8시가 좀 넘었다. 술집에 들려 죽어보자 폭음을 하기엔 시각이 어중간하다. 그렇다면 먹을 걸 사러? 글쎄다. 냉장고에 맥주 캔이 몇 개 굴러다니던게 생각났다. 단순히 안주용 육포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커피를 사러 나간다는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시켰지, 일부러 다리품을 팔아가며 귀찮은 짓을 할 딘이 아니다. 게다가 산탄총에 맞은 허벅지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았다. 안쪽 살갗으로 항생제가 들어간 연고를 바르면서 후후 숨을 불어댔던게 아침 나절 이야기다. 겉으로 아프다는 내색을 안 하고 있을 뿐, 자동차를 두고 먼 거리를 걸어다니기엔 몸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샘은 초조감을 담아 손바닥을 비볐다.

『말도 없이 어딜 간 거야... 이 바보는.』
불안감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샘은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들고 형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동시에 방안 곳곳으로 시선을 던져 딘의 가방, 옷가지, 양말, 기타등등의 위치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의자에 멋대로 걸쳐놓은 더러운 셔츠가 지랄맞게 반갑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샘은 형이 그 셔츠를 그다지 아끼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상표도 없는 중국제 싸구려 옷이다. 여차하면 버리면 그만인 소모품이다.
「버린다」라는 단어에 반응하여 어깨가 꿈틀 튀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겁이 났다.

『여어~』
바로 그때, 시끄럽게 빽빽 울어대는 핸드폰을 높게 들어보이며 딘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사탕을 한꺼번에 여러 개를 물고 있는지 한쪽 볼이 톡 튀어나왔다. 쪽쪽 침을 빠는 소리도 났다.
휙 소리가 나게끔 고개를 돌린 샘은 누가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 하도록 허겁지겁 출입구부터 걸어 잠궜다.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 건 별도다. 샘은 또 화가 났다.
『어디 갔었어!』
『에? 프런트에.』
동생의 신경질에 눈을 동그랗게 뜬 딘은「저놈이 또 이상한 걸 주워먹었어」라며 슬슬 피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최근들어 이런 상황이 줄기차게 반복되고 있다. 샘은 예민했고, 완전히 사춘기 소녀가 되어버렸다. 음식이 짜도 화를 냈고, 싱거워도 화를 냈다. 딘은 차라리 그가 굶어야 한다고 믿고 싶을 지경었다. 모든게 - 심지어 숨쉬는 것까지 - 동생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무지하게 역겨운 생선 비린내를 맡은 것도 아닌데 여차하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딘의 짤막한 지식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임신.

「너 지금 입덧하는 거지. 내 추측이 맞지!」
샘의 성별이 여자였다면 당장 손목을 붙잡고 산부인과로 데려갔다. 어떤 놈팽이와 침대에서 데굴렁 굴렀는지를 알아내는 건 두 번째다. 그 놈팽이의 모가지를 분지르는 건 세 번째다. 그리고 목에 두꺼운 기브스를 한 놈팽이와 배 부른 동생을 나란히 신부님 앞으로 데려가는게 네 번째,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도록 잘 살겠다고 맹세하는 부부 앞에서 손수건을 씹어가며 펑펑 우는게 다섯 번째... 드라마는 나중에 찍자. 딘은 몸 가득 숨을 들이마시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왜 그래, 샘. 난 그저 미스터 마호고프 앞으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러 간 것뿐이야.』
그리고는 프런트에 있던 사탕 바구니에서 덥썩 집어가지고 온 콩사탕을 증거물이랍시고 내밀었다.
『모텔 관리인이 그러는데 우리가 친애해 마지 않는 마호고프 씨 앞으로 앨런이 자료를 보냈대. 우편 사서함 번호를 남겼으니까 내일 찾으러 가자.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샘! 너 지금 그 아까운 콩사탕을 휴지통에 집어던진 것 맞니?! 야!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막 버려!』

딘은 까탈스런 동생을 어떻게 처치하면 좋을지를 잠시 궁리했다.
엎드려 뻗쳐를 시킨다. 팔을 위로 올리고 30분동안 서 있으라고 한다. 텔레비전 시청을 일주일간 금지시킨다.
아니다. 더 강하게 나가는게 좋겠다. 머리를 날려버린다. 비닐봉지에 넣는다. 야산에 파묻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일 우체국에 들리기 전에 서점을 먼저 찾아「말 진짜 안 듣는 자녀를 다루는 법」이란 제목의 책을 구입하는 거다. 책을 쓸 정도로 많이 배운 사람들이니 딘이 생각해낸「야산에 걍 파묻는다」방법 대신 훨씬 훌륭한 대처법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을 뒤져 도로 사탕을 꺼내면서 생각했다. 진짜지 그 책에「음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아이에겐 이렇게 하십시오」라는 내용이 꼭 들어가 있으면 좋겠다. 덧붙여「할 말이 잔뜩 있는 얼굴을 하고도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 아동에겐 이 방법이 최곱니다」라는 구절도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딘은 기회가 있을 적마다 여러 번 물어봤다. 그럼에도 샘은 왜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덕분에 딘은 지금까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자료? 무슨 자료.』
그가 더러운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뭐긴. 뱀파이어에 대한 자료겠지.』
개의치 않고 콩사탕을 입에 하나 집어넣은 딘은 사방에 깔린 책들과 복사물을 손가락질 했다.
『저런 것들 말이다.』

그들은 최근 열성으로(?) 공부 중이다. 아니, 공부라고 하면 어감이 좀 안 맞고... 하여간 흡혈귀에 대한 자료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대느라 바빴다. 그들 형제들이 하지 않은 거라고는 드라큘라 백작의 성을 답사하러 루마니아로 날아가지 않았다는 점 정도일까.
『그야, 형은 비행기를 탈 수 없으니까.』
『닥쳐.』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데... 배는 탈 수 있어?』
『시끄러.』
아무튼 소설책 종류만 빼고 흡혈귀에 대한 것들을 죄다 끌어모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 대다수는 쓰레기야.』
도서관에서 빌려온「드라큘라, 왈라키아의 위대한 왕자」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던지면서 샘이 불평을 퍼부어댔다. 씨기쇼아라에서 태어난 블러드 체페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로는 흥미로울지는 몰라도 윈체스터 형제들에겐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않았다. 꼬챙이로 포로를 잔인하게 죽인 트란실바니아의 영주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사람들 피를 빨았던가? 상징적 의미에서 피를 빨았을지는 몰라도 그는 현존하는 뱀파이어들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샘은 그 책을 절반만 읽다 말았다.

『그래도 이건 썩 재미 있었어.』
딘은 눈치도 없이「반헬싱 교수에게 물어보세요」라는 제목의 책을 들어보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샘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건 만화잖아!』
『그냥 글자보다 그림이 더 많은 책이라고 하자, 샘.』
『어쨌든 쓰레기잖아!』
『왜 이러시나. 난 좋기만 하던데.』
『마늘 목걸이에 십자가 타령만 나오는데 좋긴 뭐가 좋아. 게다가 우린 이미 그 두 가지가 뱀파이어에게 전혀 효과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왜 형이 아까운 시간을 들여 이런 걸 들춰보는 건지 이해가 안 가. 혹시... 섹시하게 묘사된 미나가 나오는 거야?』
『...』
『으이그! 뻔한 질문을 던진 내가 바보지. 이리 내.』
『아앗?! 뭔 짓이야, 샘! 아직 덜 봤어!』
『아냐. 이제 다 본 거야.』
불만을 표현하는 딘에게서 만화책을 강제로 빼앗은 샘은 밀림 빨랫감이라도 되는 양 그걸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제발 앨런이 괜찮은 자료를 보내주었기를.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언급한 책들은 숫자가 많았다. 그치만 대다수가 틀렸다. 은탄환, 십자가, 마늘, 성수, 햇빛, 죽은 자의 피, 나무 말뚝... 아버지 존은 일찍이 이 모든 것들이 영화 산업이 이룩한 환상이라 못을 박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을 믿었다간 큰 코 다칠 거라 단단히 경고했다.

『아아... 목을 베어라 - 정말 그 방법밖엔 없는 건가.』
『란체스터 대성당의 은십자가를 녹여서 만든 탄환을 써서 흡혈귀를 죽였다는 얘기도 있더군.』
『우엑! 그럼 성당에 가서 십자가부터 훔쳐야 하는 거야?!』
『진정해, 샘. 그런 얘기가 있다는 거야, 그런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도 아직 몰라.』
『만약 사실이면?!』
『걱정 붙들어 매둬, 샘. 내가 가서 훔쳐올게.』
『참 잘도 걱정이 안 되겠다!』

아무튼 요점은 유언비어가 너무 많다는게 문제였다. 일주일간 눈이 아파오도록 글자만 읽어댔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자료를 뒤졌음에도 이거다 싶은 건 찾지 못했다. 더욱이 아직 읽어보지 않은 자료들 다수가 쓰레기일 거라는 예감에 벌써부터 기운이 빠졌다.
『100년 전만 해도 뱀파이어 헌터들이 제법 있었다며. 그런데 그들은 현역에서 은퇴하고 나서 책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질 않았나봐.』
『기록은 꼼꼼히 했는데 출판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자비 출판은 돈이 들어가니까.』
『편집증에 걸린 미친 놈의 헛소리라고 오해받았을 수도 있고.』
『뭐... 그랬을 수도. 솔직히 남들 눈에 이게 정상으로 보이겠냐. 뱀파이어가 실제한다고 떠들기만 해도 다들 배꼽을 쥐고 웃으려 들거야.』
그리고 그 망할 뱀파이어에게 살해 위협을 받는다고 해보자. 누구랄 것 없이 웃는 낯으로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돌리리라.

『억울해. 그치만 사실인데.』
『푸념은 그만하고 커피나 이리 다오, 샘. 오늘도 늦게까지 자료를 살펴봐야 할 거야. 루더의 가족이 우리를 노린다고 했으니 언제 위험에 빠지게 될지 알 수 없어. 그 전에 너랑 나는 뱀파이어에 대해 최대한 많은 걸 알아두어야만 해.』

딘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똑똑.
《미스터 마호고프?》
누군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노크했다.

Posted by 미야

2007/05/24 20:53 2007/05/24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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