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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게임 자체가 몇 주에 걸쳐 일어날 일을 하루에 다 처리해버립니다.
큰 가지는 평화루트 줄거리를 따라갑니다. 마커스는 평화행진을 했고, 불량품이 된 코너는 행크와 절친이 되었고, 카라와 앨리스, 루터는 버스가 아닌 배를 타고 캐나다 밀입국을 시도했습니다. 게임의 주축을 담당했던 셋을 주인공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을지도...


『마빈에게로 그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동료를 혼자 두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녀석의 이름은 마빈이 아니고 마이클입니다. 걱정을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마이클은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이가 아니니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할 겁니다.』
졸졸 따라오지 말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더니 조지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캐나다로 입국하기 위해 강을 건너려 해도 따라오려나, 싱거운 생각을 하며 쌓인 눈을 피해 걸었다. 예상 밖으로 도로가 미끄러웠다. 운동신경이 둔한 제임스는 균형을 잃고 몇 번 비틀거렸다.

『하지만 손상이 심해 보였는데요.』
『겉 표면에 절상이나 열상, 자상과 같은 손상이 발생하면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아무래도 대단히 치명적인 것처럼 보이죠. 그렇게 보여도 사이버라이프 기술자의 전문적인 처치가 절실하게 필요한 수준은 아닙니다.』
『총에 맞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22구경 대인용으로 쏘더군요.』
『그게 아니라... 총에 맞았는데 괜찮다고 할 수 있는지 물은 건데요.』
『예. 그래서 22구경 대인용이었다고 답변 드린 겁니다.』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제임스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가만히 생각에 잠겼고, 아주 한참 뒤에야 그 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원 샷 원 킬의 무지막지한 화력을 가진 놈이 아니라 따당 따당 쏘는 인간 제압용 권총에 맞았다는 거였다. 경갑무장한 군인이 안드로이드 수용소의 통제권을 전부 가져가기 전까지, 시간으로 따지면 약 4시간 정도 민간 사설업체 용역직원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탄약을 사용했는데 창고 털어가는 도둑을 막기 위해 쓰는 그런 종류였다.

『운이 따랐군요.』
『뭐라고요?』
생각을 너무 길게 한 탓에 둘 사이의 박자가 맞지 않았다.
조지는 고개를 들어 상가 전면에 낙서된 구호를 보고 있었고, 22구경 대인용 총알에 대한 건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한참 입 다물고 있다가 뜬금없게 운이 좋았다고 입을 뗀 제임스가 미친 사람처럼 여겨졌다.

자유!
어둠속에서도 푸르게 발광하는 특수 전자도료로 적혀진, 사이버라이프 기본 그래픽체 형식의 글자는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지나치게 반듯해서 광고판의 문구 중 하나처럼 보였다. 공중으로 번쩍 날아오른 프로 농구선수의 사진 뒤로 「자유!」라고 적으면 고가의 브랜드 운동화 광고가 된다.
하지만 저 글자가 운동화 광고가 아니라는 건 조지도 알고 제임스도 알았다.
불량품 안드로이드가 자신들을 인류와 동등한 생명체로 존중해 달라면서 구호를 새겨놓았다.

이쯤해서 조지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자유!」라는 구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푸르게 발광하는 자유라는 글자 위로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다음의 낙서가 덧칠되어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죽여라!

줄줄 흘러내린 안료가 핏자국처럼 보였다. 글자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문제는 바닥으로 진짜 피도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짐짓 자세를 낮춘 조지는 웅덩이를 이루다 빠르게 증발한 푸른 피의 흔적을 보았다. 벽면에는 고속으로 튄 점 모양의 자국도 남아 있었다. 티리움이 흩뿌려진 모양으로 봐선 누군가 이 장소에서 처형식으로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날렸다. 무릎을 꿇린 뒤 가까이에 대고 두 발을 쐈다.
안드로이드는 벽을 바라본 채로 최후를 맞이했는데 가엾게도 생애 마지막으로 두 눈에 담았을 것이 「자유!」였다는 점에서... 뭐랄까.
안드로이드를 죽여라! 붉은 페인트로 벽을 덮은 건 처형을 마친 뒤다.

미친 슬로건이다.
저들은 안드로이드들을 생명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그 발악을 떨고 있던 게 아니었나.
그러면서 안드로이드를 죽이자 선동을 한다?
어째서 저들은 파괴하라, 또는 없애자, 그것도 아니라면 부수자, 이런 표현 대신 죽이자는 말을 고른 건가. 애초에 생명체가 아닌 걸 죽일 수는 있는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폭도들은 작동이 중지된 안드로이드를 밧줄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질질 끌고 갔다.
여러 명의 발자국에 뒤섞여 끌린 흔적이 주행도로 한 가운데로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조지는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여론은 안드로이드가 펼친 평화적 시위에 그럭저럭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가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다.
파괴적 목소리를 낸 대표적인 사람으로 강성 기독교 우파 파벌에 속한 로버트 휴이 목사를 꼽을 수 있다. 목사는 케이블 방송에서 악마, 불지옥, 예수의 이름으로 심판, 안드로이드는 지옥으로 갈 지어다 아멘 아멘을 외쳤다.
설교에 동조한 이들은 붉게 칠해진 십자가 장신구를 목에 걸었다. 몇은 「우리는 주의 십자가 군단병」 이라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네킹 사지에 밧줄을 걸어 질질 끌고 다니는 야만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를 수호할 최후의 전사라고 주장했다.
끌려 다닌 마네킹의 팔다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갈 적마다 환호가 터졌다.
오체분시 된 마네킹 잔해가 던진 메시지는 너무나 선명해서 이들의 집회 장면을 뉴스로 내보내던 방송국은 화면을 전부 뿌옇게 모자이크 처리했다.

조지는 끌린 흔적을 쫓아 빠르게 달렸다.
가서 어쩌려고.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없잖아. 굳이 눈으로 확인하면 뭐가 달라지나.
그런데도 뛰는 속도가 느려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면서 제임스도 따라 달렸다. 사실 달린다고 하기엔 뭔가 애매한 수준이었지만 어쨌거나 뛰었다.
이 앞으로 뭐가 있더라, 미친 듯이 숨을 헐떡거리며 아는 걸 곱씹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편의점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코인 세탁방, 패스트푸드 음식점이 차례로 기억났다.
햄버거 가게 주인은 40대 남자였는데 더운 계절이 오면 간이 판매대를 세우고 과일 맛 얼음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위생 점검을 나온 공무원이 벌금을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아이고, 선생님!!」 우는 시늉을 했다. 여기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꼭 가벼운 배앓이를 했던 제임스는 이 햄버거 가게를 싫어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인쿠폰은 반드시 모아뒀었다.
지나치면서 보니 가게는 판자로 입구와 유리창이 모두 막혀 있었다.
안드로이드 시위가 시작되면서 당분간 영업을 포기한 눈치다.
입구를 막은 판자 위로 방금 전 봤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죽이자!

그로부터 두 블록을 더 지나쳐 조지와 제임스는 3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사이버라이프 서비스 센터.
누군가 자동차로 매장 안까지 돌진이라도 한 모양새다. 출입구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부는 천장까지 주저앉았고 거기에 불까지 질러서 검게 그을린 외벽에 노란색 접근금지 테이프가 빙 둘러졌다.
그리고 아마도 간판이 있었을 자리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린 안드로이드가 매달려 있었다. 목에는 올무가 걸렸고, 공구를 사용해 손바닥에 대못을 박았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던지 몸통은 거의 녹아내렸다.
『씨발!』
보다 못한 조지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19 11:47 2020/06/1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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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차서 입김이 나왔다. 귀를 덮는 모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 생각하며 방향을 가늠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소는 강 건너편의 캐나다 윈저, 그리고 크랜브룩 대피소이다.
문제는 지도를 바닥에 내려놓고 큰 직선을 그렸을 적에 윈저와 크랜브룩은 각각의 끝점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수중에 동전이 있었다면 앞면과 뒷면을 골라 결정을 내렸겠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고 하면 없는 법이라고 가진 건 지폐 몇 장이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손바닥에 침을 뱉은 뒤, 검지와 중지로 이를 튀어 방향을 점치는 고전 방식도 있다.
그리스의 게오르기네스 장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격하면서 이 방법으로 적병의 매복을 점쳤다. 장군은 직진하는 길이 아닌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고...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병사들은 산중턱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주먹돌에 얻어맞으면서 게오르기네스 장군의 침이 주술사의 농간으로 오염된 게 분명하다며 화를 냈다.

손바닥에 침을 뱉으려다 관두고 오른쪽 신발을 벗었다.
어릴 적에도 지저분하다 여겨 하지 않던 짓을 구태여 나이 먹어 할 필요는 없다.
신발을 수직으로 던진 후, 바닥에 떨어진 신발코가 향하는 방향으로 가 보기로 결정을 봤다.

『제임스!』
영험한 수작을 부린 신발을 도로 주섬주섬 신고 있는데 조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임스는 말간 얼굴을 들어 조지를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주름진 그의 이마를 보았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명령을 받는 존재로 설계되었다. 스스로 판단하여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이에 따른 극심한 프로그램 과부하가 생긴다. 생산된 지 오래된 저성능 모델일수록 눈에 띄게 긴장 상태에 빠진다고 들었다. 스트레스는 다시 프로그램 과부하를 일으키고, 안정성 저하는 다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악순환이다.

『정 뭐하면 3층으로 올라가 있으세요. 거긴 오랫동안 빈집이었습니다. 수도가 끊겼고 난방도 되지 않지만 안드로이드 둘이 지내는데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인기척이 나면 창문을 통해 2층인 제 집으로 내려가 몸을 피하세요. 벽을 타고 올라왔으니 벽을 타고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겠죠.』
안드로이드를 빼앗기지 않겠다며 공갈 산탄총까지 쥐었다던 캐머런이 저 둘을 본체만체할 리 없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들을 찾고 있을 터이고, 그동안 조지와 마이클은 안전한 장소에 숨어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렵지 않게 그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그게 아니라 방금 전 단말기요. 텍스트 채팅을 하던.』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기보호 개념으로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보통 큰 보폭으로 발걸음을 두 번 떼는 정도의 거리이고, 서로에게 팔을 내밀면 악수를 나누기 알맞다.
조지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그 거리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채 제임스에게로 훅 접근해왔다.
『네트워크에 접속이 된 거 맞죠? 그걸 저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내용은 요청이지만 표정이나 몸짓은 강압에 가까웠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습니까.』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느낀 제임스가 짐짓 피하자 작정하고 더 들이댔다.
『그 단말기를 꼭 써봐야겠습니다.』
이 안드로이드는 으쓱한 골목길에서 어깨에 힘 줘가며 애들 푼돈 떼먹은 경험이 매우 풍부한 것 같았다. 최소한 제임스가 판단하기에는 그러했다.

소용없을 텐데 작게 혼잣말하며 가방을 열어 텍스트 단말기를 꺼냈다.
기대감을 가지고 쳐다보기에 검지로 화면을 밀어 전원이 켜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제3자가 만지는 순간 화면은 다시 검게 변하고 그 어떤 명령에도 응답하지 않는다. 동영상 재생이라던가, 영상통화, 캐주얼 게임 같은 기능은 일절 없고 오로지 텍스트 채팅을 위해 만들어진 구닥다리 물건임에도 탑재된 생체인식 보안기능은 요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보안만큼은 훨씬 더 뛰어난 것 같기도 하다. 닉네임 스타스키와허치의 말로는 실리콘으로 엄지손가락 본을 떠서 보안인식을 뚫어보려 한 적이 있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문을 뜰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실리콘 가짜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는 부분은 더 의외였다. 진짜 지문과 가짜 지문을 정확하게 구분해낼 정도가 되려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판독 기술이 필요하다. 10년 전인 2028년에도 이미 그러한 기술이 구현되어 있기는 했으나... 웨인주립대학교 의문의 재학생이 심심풀이로 만들었다던 텍스트 단말기였다. 방수기능도 없는 전자 손목시계에 뜬금없이 나사의 우주공학 계산기가 달려있는 셈이라서 그 괴리감에 다들 어리둥절해한 기억이 있다.

조지의 손이 닿자 역시나 화면이 검게 변했다.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도와달라고 해도 설정 변경 이런 건 할 줄 모른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조지는 간단한 턱짓만으로 양해를 구한 뒤, 중앙처리장치가 있을법한 부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티리움으로 구현한 피부색이 서서히 지워지는 걸 보고 제임스는 그동안 몰랐던 소소한 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안드로이드 손가락에는 손톱이 없었다.
조지가 가만히 눈을 감자 순간 텍스트 단말기 화면으로 무지개 색 노이즈가 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스라치며 단말기에서 손을 뗐고, 그 즉시 화면에서 무지개 색 노이즈가 사라졌다. 조지는 놀라서 자신의 손가락 끝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쥐었다. 그것의 방호벽을 건드렸을 때, 그가 느꼈던 건 분명히 따끔거림이었다. 통각을 모르는 신체가 반응했다.

『거부당했습니다.』
『원래 그런 물건입니다. 그것과 똑같은 걸 캐머런도 가지고 있을 텐데요.』
『그렇기는 한데.』
침실 협탁 아래서 두 번째 서랍이 정해진 자리였다. 캐머런이 그걸 소파 테이블에 올려둔 채 방치해두면 잊지 않고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조지의 할 일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하루에도 여러 번 만져봤다는 얘기다. 물론 중앙처리장치에 지금처럼 강제 접근한 적은 없지만.

조지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엔니나르(eninaR) 라는 로고를 봤습니다.』
『그게 이름입니다.』
『이름도 있습니까?』
문단속이나 할 줄 아는 지능형 홈 네트워크에도 애칭을 붙이는 마당에 엉뚱한 소리였다.
『말레이폴리네시아어로 엔니나는 여섯을 의미합니다.』
『예?』
『다만 뒤에 대문자 R을 붙인 건 무슨 까닭에서인지 거기에 대하여 들은 내용이 없습니다.』
지금껏 대문자 R의 의미를 궁금하다 여긴 적 없다.
다만, 말레이폴리네시아어로 엔니나가 여섯을 의미한다는 얘기를 해주면서 노먼 조교수는 풋내기 대학생 제임스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대문자 R을 썼다.
간질간질한 그 촉감을 간직하기 위해 제임스는 오랫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
식중독에 걸려 뒤질 작정이냐 꾸지람을 들었지만, 원래 호르몬 과잉으로 고통 받는 20대의 남자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친 짓을 저지르는 법이다. 자위한 손으로 밥을 먹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막판에 이르러 기숙사 룸메이트 릭 도슨이 투덜거렸다.

단말기를 돌려받은 제임스는 배낭을 고쳐 메고 큰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 옥신각신하느라 원래 신발코가 가리켰던 방향이 아닌 엉뚱한 쪽으로 걷게 되었다는 건 지금의 그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리스의 장군 게오르기네스도 진짜가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었고, 제임스를 인도하는 진짜 길잡이는 충동이었으니까.

Posted by 미야

2020/06/17 16:21 2020/06/1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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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물점에 몰래 들어가 훔친 수도관 테이프를 붕대처럼 사용해 응급조치를 마치자 날이 밝았다.
가게를 떠나기 전, 조지는「홈디포의 역사 since 1978」명패가 붙은 유리장식장에서 골동품으로 보이는 셔츠를 꺼내 마이클에게 입혔다.
플라스틱 표면의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셔츠만 걸친 마이클은 담당자의 실수로 옷이 갈아입혀지다 만 마네킹처럼 보였다. 양손에 톱과 망치를 손에 쥐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철물점 입간판 장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강제로 집에서 끌려나와 안드로이드 수용소로 이송된 이후 처음으로 웃음이 터졌다.
「그래, 웃어라.」
마이클은 투덜거리며 15달러짜리 쇠지레를 챙겼다.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 정도 크기를 가진 이 단순한 도구는 사람을 때리기에도 적합하고 문짝을 뜯는 일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몸을 가릴 옷을 수중에 넣는 일에는 꼬박 하루가 낭비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도둑질에 진땀을 빼는 사이 돌아가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악화되어서 도심 한 가운데로 탱크가 등장했다.
방향을 잃었을 적엔 무조건 직진이라 큰소리치던 마이클도 탱크 앞에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지상에서의 탱크는 무적이다.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다.

쇠지레로 맨홀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간 둘은 머리를 쥐어 싸맸다.
통신망 터널을 기어서라도 라파옛 애비뉴까지 가보자고 마이클이 주장했다. 하지만 통로를 기어가기엔 내부가 지나치게 좁았다. 통신망 통로는 직경이 60cm에 불과했다. 몸통에서 두 팔을 모두 떼어내면 통과가 가능하겠지만 대신 기어가는 동작이 무리일 터다. 설령 무리를 해서 기어갔다고 쳐도 지상으로 올라가는 순간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고급 주택단지 인근은 약탈에 대비하여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을 것이고, 감시용 무인드론이 쉴 틈 없이 날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운 좋게 감시망을 뚫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캐머런 님을 다시 뵐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저희가 강제 회수되면서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건 이마가 바닥에 닿은 상태에서 두 팔을 등 뒤로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순찰경찰이 와서 캐머런 님께 수갑을 채웠습니다.』
『아니, 왜...』
『장식용 산탄총을 꺼내 와서 모두 다 꺼지라며 위협했거든요.』
『그니까, 왜...』
『공이가 빠진 장식용 물건이라고 순찰경찰에게 설명 드렸지만 좇만한 놈들이라 욕한 것만으로도 공권력에 대항하는 행위라며 얘기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뭐...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좇만한 놈들이라는 것보다 표현이 훨씬 거칠긴 했습니다.』

제임스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캐머런이 모욕죄로 연행되었다는 겁니까?』
『그보단 명령 불이행이죠. 아마도?』
자신 없어하며 조지가 말했다. 산탄총으로 경찰을 위협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장전된 납탄은 당연히 없었고 공이가 빠진 물건이니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살면서 음주운전 딱지를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니 이 얘기를 듣고 마음 너그러운 판사가 아량을 베풀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고.
캐머런이 체포되었고,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탈출했고, 통행금지 명령이 떨어졌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옷장에 숨었고, 옷장 문이 벌컥 열리니까 얼떨결에 사람 입을 틀어막았고 –
항의를 퍼붓기 위해 숨부터 들이마셨다. 그런데 혀가 뻣뻣했다. 답답한 마음에 콧김을 내뿜었지만 단어들이 한데 엉켜 제대로 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와중에 마이클은 주인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옷장에서 연회색 맨투맨 티셔츠를 꺼내들고 품에 대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느냐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힐끔거렸다.
튀어나온 못에 걸려 옆구리 부근으로 작은 구멍이 난 뒤로 잘 입지 않던 옷이었다. 헐렁하게 입는 종류이니 크기는 잘 맞을 것이다. -
이게 아니라.

『캐머런의 일은 유감이지만 그 셔츠는 빌려드릴 겁니다. 변호사가 알아서 잘 처리했을 것이고, 월급을 받았다면 솔직한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지 않습니다.』  
서둘렀더니 대참사였다.
『애초부터 적합한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능력 없는 이에게 부탁을 하면 민폐가 되어 청바지의 기장이 맞지 않을 겁니다.』
흥분했더니 더 꼬였다.
『경찰에게 물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네, 그 청바지는 당신이 입기엔 길이가 짧습니다. 아니, 경찰에게 물어보자는 의미가 아니라, 아니. 물어보자는 의미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캐머런을 찾아 제 옷장에 숨어서는 안 되었던 겁니다. 제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조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오.』
머리를 움켜쥔 제임스는 어딘가에 있을 막연한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퍼부어댔다.

비상조처 71조에 따라 안드로이드를 회수하겠다며 경찰관이 들이닥치자 캐머런은 공이가 빠진 장식용 산탄총을 겨누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다행히 경관 살해위협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욕설을 퍼부은 게 문제가 되어 체포되었다.
분쇄하기 위해 수용소로 보내어진 캐머런의 안드로이드는 자력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캐머런에게 돌아가고 싶어 했으나 거리에서 탱크를 목격하곤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 대신 남에게 도움을 구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평소 캐머런에게 좋은 직장을 가진 부자 친구들이 많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조지는 도움을 구할 대상으로 실업자, 패배자, 낙오자, 제임스를 골랐다. 왜냐하면 제임스 무어는 안드로이드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캐머런이 평소 입방정을 떨어댔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집으로 소포를 보낸 적이 있는 조지는 주소를 암기하고 그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좋아, 정리 되었어.

그러나 내용만 정리되었을 뿐으로 옷장에서 튀어나온 안드로이드가 갑자기 허공으로 증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굉장한 골칫덩이를,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을 떠안게 되었음을 깨달은 제임스는 천장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혹자는 말했다.
감당할 수 없다면 피하라.

마이클이 셔츠자락을 젖꼭지 부근까지 들어보였다.
『저기, 총알자국 보여줄까?』
분위기 파악하는 능력이 제로이거나, 아니면 프로그램이 고장난 게 분명한 안드로이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휴대용 단말기를 꺼내들어 엔니나르에 접속했다.
늦은 시간이라 다들 잠자리에 들었는지 대화방 참여자는 닉네임 응급실당번은너, 곰이재주를부린다 두 명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사람다운 대화는 진작에 끊긴 눈치이고 하품하는 테디베어의 애니메이션 클립이 떠억 올라와 있었다. 사실상 파장 분위기였다.

《레트로타자기 : 명예의전당-행크그린버그의 분실물 2점 발견하였습니다. 집. 연락요망.》

짤막하게 내용을 남기고 배낭을 들쳐 메었다.
캐머런이면 보석금을 내고 금방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엔니나르에 남겨진 이 메시지를 읽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본인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식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온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그동안 안드로이드들은 고장 난 괘종시계 흉내를 내어가며 그의 집안에 숨어있으면 되었다.

입만 열면 재앙이었기에 고개만 끄덕여 작별인사를 했다.
마이클과 조지가 눈에 띄게 동요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이제 진짜로 떠날 시간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15 16:51 2020/06/1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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