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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자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캐머런 건은 사람을 골라 사귀었다.
철저히 이득관계를 따졌고, 인격의 흠결 유무에 엄격했다.
그런 면에서 캐머런 건과 제임스 무어가 일정 수준의 친분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는 점은 의외였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무어의 아버지 로널드 무어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정확하게는 정년은퇴를 코앞에 두고 예산감축을 이유로 잘려나간 기간제 계약 근로자였다.
미국 중산층 몰락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읽고 싶다면 로널드 무어를 표본으로 삼으면 되었다.
교육수준이 높았고, 뒷마당이 있는 집을 보유했고, 신용카드 신용점수가 높았지만 실직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생활이 점차 궁핍해지면서 각종 공과금이 체납되기 시작하고, 의료보험이 취소되었고, 차를 팔아야 했다. 미국 중산층 42%가 앞서 걸어간 길이었다.
싸구려 여성용 거들과 팬티를 팔아 연명하던 10년 고난의 역사를 뒤로하자 그 끝은 자살인지 사고인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제임스는 아버지의 사망사고 합의금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낭떠러지에서 지푸라기 몇 가닥 붙잡는 것과 비슷했다. 시대는 암울했고 대학 졸업장은 청년들에게 더 이상 낙관적인 미래를 약속해주지 못했다.
마른하늘의 단비 같던 보험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졸업학기 무렵 제임스는 도서관 입구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구걸했다고 한다.

노숙자처럼 보였을 남학생과 고가의 경호 안드로이드를 대령하고 다니던 콧대 높은 여학생의 교차점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조지는 제임스가 매우 잘 생겼던 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
전설의 미남모델 션 오프라인처럼 생겼다면 사흘간 머리를 감지 않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더라도 캐머런은 아이고 오빠 이러면서 난리쳤을 것이다.

그녀는 후후 웃었다.
『잘 생긴 얼굴과는 거리가 있지. 멀건 밀가루 반죽에 새카만 콩 두 개 올라간 그런 얼굴이야. 강의실에 앉아있으면 파묻혀서 잘 보이지도 않았어.』
『그럼 체격이 훌륭했다거나.』
『구걸한 닭 가슴살 샌드위치로 잘도 몸짱이 되었겠다.』
『목소리가 좋았거나.』
『걔, 혀를 안으로 집어넣고 웅앵거리는 나쁜 버릇 있다?』
『그럼 어떤 점이 좋았는데요?』
『하나도.』
캐머런은 1초도 걸리지 않고 「하나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임스 무어와 캐머런 건이 친구가 되었나.
캐머런은 이렇다 할 대답 대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고, 곤란한 것 같기도 했다. 눈썹을 찌푸린 채 브랜디 한 모금을 입에 담고 124층 건물 유리창 밖으로 뇌우가 치는 걸 지켜봤다.
헤라에게 바가지를 긁힌 제우스신이 화풀이 겸 사방으로 천둥을 날리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니까 직접 고른 선물을 보내시려는 거 아닙니까?』
아마존 열대림이 바짝 말라비틀어진 이 시대에 양장본 종이책은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다.
상태가 좋은 건 당연히 값도 나갔다.
조지는 주인의 지시에 따라「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포장박스에 담은 뒤, 잊지 않고 메시지 카드도 끼어 넣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글자가 큼직하게 인쇄된 카드는 특수한 기능이 있어 하단부의 하트 부분을 누르면 2분 30초 정도 길이로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캐머런은 진정성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로 happy birthday to you 노래를 불렀다. 그나마 귀찮았던지 반절만 불렀다.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캐머런 님.』
『괜찮아. 어차피 난 걔 생일이 정확히 언제인지도 몰라. 그러니 적어준 주소로 얼른 보내버려.』
브랜디와 얼음을 더 가져다줄 것을 요구하며 캐머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차피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던 애한테 일부러 생일축하 선물을 보내는 건데 뭐.』
나는 정말이지 못된 여자야! – 크리스털 유리잔을 높게 들어 보이며 그녀가 외쳤다.
동시에 우르릉 쾅쾅 천둥이 쳤다.

제임스의 책장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 책을 발견했을 적에 조지는 미친 것 같던 그 날의 바깥 날씨와 브랜디 향이 섞인 캐머런의 입 냄새를 떠올렸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던 자에게 보내어진 생일선물.
제임스는 소포로 받은 양장본, 무려 600 페이지에 달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책장의 제일 위 칸에 무슨 크로켓 경기 우승 트로피처럼 올려놓았다.
꺼내려면 까치발을 해야 했다.
무릇 책이라 함은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하는 법이건만,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의미다.

이들은 과연 친구 관계가 맞는가.

캐머런이 주최한 칵테일 파티에 제임스가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애초에 초대받은 적이 없으니 나타날 일이 없다.
그녀의 남편은 제임스 무어라는 이름도 몰랐다. 대학생 시절에 잠깐 데이트 하던 사내, 혹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추종자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서에게 일임하지 않고 남의 생일선물을 본인이 직접 챙긴 건 「허클베리 핀의 모험」 양장본이 유일하다.

『입가에 눌린 자국 생겼어. 와... 금방 붓는다. 피부가 약하구나?』
마이클이 얼굴에 난 자국을 신기해하며 사과했다.
그렇다, 사과였다. 숨도 쉬지 못하게 손으로 눌러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저거였다.
본인은 제5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경비가 쏜 총에 맞은 후유증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마이클의 말투는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캐머런 님이 재밌게 여겨 그냥 내버려둔 게 잘못이지. 분명 소프트웨어 오류야.」
잘못된 사과를 바로잡기 위해 조지가 대신 나섰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이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제5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자력으로 탈출하고 나서 캐머런 님께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11월 10일 체포되신 이후 어디에 계신지 행방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음.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곳곳에 무장한 군인이 지키고 있으니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걸리는 순간 머리에 총알구멍이 뚫릴 터였다.
캐머런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도 없었다. 안드로이드의 무선망 접속이 원천봉쇄 된 탓이었다.
게다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마이클이 복부에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중요부품의 손상은 비켜갔지만 티리움 손실이 커서 자가 수복 속도가 바닥이었다.
뛸 수 있겠느냐 묻자 마이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리움이 필요해.」
「홀딱 벗고 할 소리야, 그게? 우리 둘, 지금 알몸이라고.」
티리움이 필요한 건 정작 자신이었으면서 비아냥거리고 보는 마이클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12 14:13 2020/06/1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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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쌍둥이 형제처럼 보였다.

여기서 부연설명을 좀 해야겠다. 일부 일란성 쌍둥이들은 부모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이 생겼는데 사실 이런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경우이고 대다수의 일란성 쌍둥이들은 미묘한 차이를 보여 개인 구분이 가능하다. 동생 쪽 눈썹이 더 처졌다던가, 형 쪽의 입술 아래로 점이 있다는 식이다. 턱에 살이 더 붙은 것만으로도 인상이 달라진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을 뿐인데 웃는 모습이 다르다. 보조개 위치가 정 반대인 경우도 있고, 입가 주름 깊이가 차이 나기도 한다.

『우리 둘은 같은 모델입니다. WS-GL645 시리즈입니다.』
도넛 모양의 LED 링이 파랗게 반짝반짝 빛났다.

여기서 제임스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같은 모델의 안드로이드들은 붕어빵 틀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생겼다. 실제로 그들은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종류였고 따라서 나름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주근깨의 위치까지도 전부 똑같았다. 설정 변경으로 머리카락 색에 변화를 주고 긴 생머리를 정수리까지 올려 묶는 식으로 차이를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스티커를 표면에 붙여봤자 대량생산된 물건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모델명이 같은 안드로이드는 개체 구분이 안 된다.

이 둘은?
구분이 잘되었다.

홈디포 철물점 로고는 보다 얼굴선이 둥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콧대가 뾰족하고 눈매가 도톰해서 말 안 듣는 고양이 인상이었다. 단지 입맛에 맞지 않은 간식을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종아리에 시뻘건 오선지를 마구 그려대는 얄미운 고양이 말이다.
뻗어버린 제임스의 뺨을 찰싹 쳤던 쪽, 그러니까 어린 동생의 옷을 억지로 빌려 입은 쪽은 광대뼈가 더 도드라졌다. 눈매도 깊어서 음영이 또렷했다. 아주, 진짜, 진짜, 조금의 차이였지만, 그런 사소한 차이가 한데 모여 남의 옷 빌려 입은 쪽이 더 억센 인상이었다.

안면 커스텀은 어디까지나 불법이 아니다.
자동차를 튜닝하듯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성형해도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는다.
단, 안드로이드의 외모는 저작권 등록을 모두 마친 상태라 개인 취향에 맞게 코나 입을 고치려면 일단 제조사인 사이버라이프사의 동의부터 먼저 구해야 했다. 이를 다시 풀어 적자면 귀찮은 법적 전자문서 작업과 그에 따른 변호사 고용 같은 부가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저 얼굴을 약간 손보는 일에 말이다.
돈이 남아돌다 못해 썩을 지경의 부자들이 돈 지랄의 의미로 안드로이드 안면 성형을 잠깐 유행시켰지만... 북극해에 작은 인공 섬을 띄우고 그 위에 땅콩 별장을 짓는 것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유행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그 북극해 별장 만들기도 지금은 인기가 식어 우주관광 산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달의 분화구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야 한다며 다들 난리다.
이 마당에 같은 모델이면서 인상이 다른 얼굴을 가진 안드로이드 두 대라니.

남의 옷 주워 입은 쪽이 자기소개를 했다.
『조지입니다.』
뒤편에서 철물점 로고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마이클.』
맨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제임스가 웅앵댔다.
『제임스 무어입니다.』
희극이 따로 없었다.

『거실 유리창이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보안에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벽을 타고 기어 올라와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입장에서 할 말이던가.
제임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음에도 조지는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많은 분들이 높이가 있으면 침입이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만, 피지컬이 좋은 도둑들은 경이로운 절도행각을 종종 보여주곤 하지요. 12층 높이까지 가스배관을 타고 기어 올라간 경우도 있으니 앞으로는 외출 시 창문의 걸쇠를 잠그고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무단침입을 감지하는 센서를 별도로 설치하여...』
『잠깐만요.』
『전자기적 장치인 만큼 해킹의 위험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현재 거주지의 보안환경을 고려하자면 몇 가지 안전용품을 추가 설치할 것을 권고....』
『저기요?』
『아, 그렇군. 사과하겠습니다.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군요. 아무래도 찬 바닥에 오래 누워있으면 몸에 부담이 되지요. 늦게 알아채서 미안합니다.』
『일으켜달라는 게 아니라... 저기, 갑자기 팔을 그렇게 잡아당기면! 아악!』
『어지럽습니까? 그렇다면 의자에 앉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마이클? 가서 식탁의자를 가져와.』
혼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의자에 앉으니 느낌이 더 안 좋았다.
안드로이드 마이클과 조지는 제임스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다. 그 상황에서 키 작은 사람이 의자에 앉은 채 위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머리를 박박 민 조직 폭력배가 교도소에서 새긴 해골 문신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걸 억지로 지켜본다는 그런 느낌... 형님, 문신이 현대 예술이네요 입 발린 칭찬을 하며 다른 한편으론 도망칠 구멍을 찾아 눈동자를 도록 굴리는 풋내기가 되어 의자에서 주춤주춤 엉덩이를 움직였다.

말로 합시다.
제가 가장 못 하는 일이 말 하는 거긴 합니다만.


『변명이 아니고, 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둔감합니다. 안드로이드의 인권이나 이번 해방운동에 대해 이렇다 할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 벌어진 사건에 보탤 제 개인 의견이 없습니다. 존엄성과 권리, 희망 이런 거 필요하시면 마음대로 가져가시고, 부탁이니 그냥 돌아가 주셨으면.』
진짜 싫었지만 무릎 꿇고 빌 의향도 있었다.
『아니면 제가 가방 들고 나가겠습니다. 처음부터 나갈 작정이었고요. 그러니 두 분은 여기 그냥 계시지요.』
천박하게 웃기도 했다.
『안드로이드를 노예처럼 부린 적 없습니다. 제가 직접 공과금 납부하고, 청소하고, 세탁합니다. 안드로이드는 쓰지 않습니다.』

횡설수설하는 와중에 마이클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그런 것 같더라. 개수대 주변이 엄청 지저분했어.』
아무래도 마이클의 주인은 안드로이드의 말투를 「양아치」로 세팅한 듯하다.
『당신이 제 머그컵을 만졌군요.』
『맞아. 처음엔 내버려둘까 했는데 거슬려서 그냥 닦았어.』
『꼭 그러지 않았어도 됐어요. 집에 돌아와서 치우려고 했습니다.』
『바퀴벌레 생겨.』

처음부터 지금까지 대화의 초점이 자꾸 비켜간다는 느낌이다.
제임스는 양아치로부터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조지를 쳐다보았다.
『저는 안드로이드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혹시... 누군가 저더러 안드로이드를 때린다고 주장하던가요? 그래서 확인 차 찾아오신 건가요? 그랬다면 모함입니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조지의 대답에 제임스는 충격을 받고 헐떡거렸다.
『예?! 제가 안드로이드를 때렸다고요? 아닌데요!』
『오, 그게 아니라.』
조지가 입매를 끌어올렸다.
『당신은 안드로이드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죠. 당신은 안드로이드를 일종의 야생순록처럼 대하는 사람이라고 캐머런 님으로부터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순간 사레가 들었다.
『켁. 뭐요?! 캐머런?!』

Posted by 미야

2020/06/11 13:47 2020/06/1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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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을 무렵, 결심이 섰다.

도시를 떠나자.

그렇게 하자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제임스는 서랍장을 열어 여분의 속옷과 깨끗한 양말을 챙겼다. 짐을 싸본 적이 하도 오래되어 순서가 어색했지만 많이 가져가면 가져갈수록 좋은 것이 속옷과 양말이라고 배웠다. 그는 총 일곱 개의 양말과 여덟 장의 팬티를 꺼내 차곡차곡 접었다.

다음으로는 거실로 가서 종이로 된 책을 책장에서 꺼내들었다. 제목이 맥베스였다.

「마음속에서 슬픔의 뿌리를 캐고 기억에서 뿌리 깊은 근심을 캐낼 수는 없는가. 상쾌한 망각의 약을 써서 마음을 짓누르는 독소를 일시에 제거하란 말이다.」

겉표지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속지에 책의 맛보기 구절이 그럴 듯한 로마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종이는 오래되어 누랬고 좀약 비슷한 냄새가 났다. 좋은 말로도 상태가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필수 교양서적들 중 하나여서 뒤편에는 열람카드를 꼽는 봉투가 풀을 발라 덧붙여진 상태였다. 전자도서로 대체되면서 대량으로 폐기되던 걸 청소업무 근로자를 꼬드겨 몰래 하나 빼내왔다. 덕분에 구닥다리 방식의 열람카드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카드의 맨 아랫줄에는 어린아이가 힘을 줘서 정자체로 쓴 제임스 모어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은 파기 예정이던 책을 빼돌린 뒤에 썼다. 이렇게 해두면 책을 훔친 게 아니고 영구 대여중 상태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 제임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열람카드를 빼냈다. 책은 제자리에 돌려뒀다. 아쉽지만 책은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이다.

열람카드를 일종의 메모지처럼 사용하여 하단부에 글자를 적었다.

나는 떠납니다.

지나치게 간결하여 어쩐지 유서 같은 느낌이 풀풀 풍겼지만 제임스는 여기서 더 길게 쓰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갈 거라는 목적지를 적으려니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고, 주변관계가 형편없는 탓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 대신 갚아달라는 부탁을 할 것도 없었다.
카드 표면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제임스는 그걸 식탁 위에 잘 보이도록 올려두었다.

주방으로 간 김에 냉동고 칸을 열어 아이스크림 통을 꺼냈다.
두 개 중 하나는 바로 해체했다. 비닐로 싼 현금뭉치 내용물은 꺼내어 네 뭉치로 나눴다. 몇 장의 지폐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 양말 속에 넣었다. 나머지는 적당히 바지나 점퍼 안주머니에 숨길 작정이었다. 용도를 끝마친 아이스크림 포장용기는 잘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보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다른 아이스크림 통은 박스테이프로 꼼꼼하게 둘러 감았다.
강물에 빠지더라도 한 방울의 물도 통 안으로 들어가선 안 되었다. 여러 번 감고 나선 손톱으로도 긁어보고 문질러도 보았다. 그렇게 여러 번 확인을 한 뒤에야 비로소 만족하고 여행용 배낭에 집어넣었다.

바지와 셔츠는 하나씩.
군청색 카고 바지와 라운드 넥의 회색 티셔츠를 꺼내기 위해 붙박이장 앞에 섰다. 가슴팍에 오렌지 주스 얼룩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다소 흉한 모양새지만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맨 앞에 걸려있던 엉뚱한 분홍색 꽃무늬 셔츠를 옆으로 밀고 회색의 옷을 잡으려고 팔을 죽 뻗었-

『...............!!!!!』

어릴 적 벽장 너머에 부기맨이 숨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산타클로스가 있다면 부기맨 또한 존재할 것이다.
부기맨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제임스가 부기맨의 생김새를 궁금해 했을 적에 그의 어머니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라 조언했었고, 구글은 15세 연령제한을 이유로 이미지를 차단해버렸으니까.
나이를 먹고부터 더 이상 부기맨의 생김새가 궁금하지 않게 되었건만...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부기맨의 손가락은 길었고, 하얬으며, 피아노를 오래 친 사람처럼 관절이 도드라져서 보기에는 좋았다.
다만 그 손가락 다섯 개를 전부 사용하여 사람 입을 틀어막았다는 점에선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았다. 숨도 쉬지 못하게 콧구멍까지 덮어 막았다는 부분은 매우 유감이기도 했고.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되고 난 뒤부터 30초가 지나면 절반은 미친다. 이후로 3분까지는 잔여산소를 태워가며 충분히 버틸 수 있으나 실상은 1분만 넘어가도 꼴딱 넘어간다. 돌고래 유전자를 가진 숨 오래참기 세계기록 보유자들이 아닌 이상 발악, 발광, 발버둥의 단계를 거쳐 착실히 정신줄을 놓는다.

제임스는 얼굴의 반을 덮은 손가락을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상할 정도로 미끄럽고, 기이할 정도로 온기가 없는 부기맨의 손가락은 그러면 그럴수록 제임스의 얼굴에 철썩 들러붙었다.
들숨과 날숨이 겨우 두 번 생략되었을 뿐인데 공기를 필요로 하는 폐가 속수무책으로 짜부라 들었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났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검은색 셔츠가 보였다. 정확하게는 검은색 바탕 위로 인쇄된 로고가 보였다. 홈디포. 흔하게 볼 수 있는 체인 철물점 가게 이름이었다. 「당신이 할 수 있으면 우리는 도울 수 있다.」글귀도 있었다.

『마이클, 그가 숨 쉬기 어려워하고 있어.』
또 다른 누군가가 부기맨을 만류했고, 부기맨은 짧게 아 소리를 내며 수긍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제임스가 숨을 몰아쉬기 위해 허겁지겁 입을 벌리자 잠시 떨어졌던 손가락이 언제 그랬냐며 코와 입을 도로 틀어막았다.
비명 지르는 건 꿈도 못 꾸고 그저 숨만 쉴 생각이었던 제임스는 마냥 억울할 뿐이었다.

『마이클, 그러다 그 사람 죽어.』
사람 죽이는 걸 말리는 것치고는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엄살은. 사람은 이 정도로 질식사하지 않아.』
『심장박동수가 높아. 분당 100회 수준까지 올라갔어.』
『위험한 수준까지는 아니네.』
『그만둬. 그에게 상해를 입히려는 게 우리의 목표는 아니야.』
『뭐, 그렇기는 하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반 기절상황에 빠진 제임스를 바닥에 눕혔다.
홈디포 철물점 가게 로고가 들어간 셔츠를 입은 쪽이 물러서자 다른 쪽이 몸을 수그려 쓰러진 제임스의 안색을 살폈다.
굿윌 헌옷가게에 들러 아무거나 집어온 게 분명한 – 소매가 터무니없이 짧은 탓에 손목이 드러났다 – 체형과 맞지 않는 후드티를 입은 그가 눈 감고 있던 제임스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숨 막히게 하고, 얼굴 때리고.
제임스는 화가 났다.
『제발, 그냥 아무 거나 가져가세요.』
이에 「거 봐 내가 뭐랬어, 멀쩡하잖아.」철물점 로고가 한 마디 거들었고,
얼굴을 톡톡 때리던 쪽은 「눈 떠보세요.」요구하며 제임스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Posted by 미야

2020/06/09 13:31 2020/06/0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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