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Detroit: Become Human 팬픽입니다. 오리지널 성향이 많습니다.

별 거 아니라고, 단순한 착각일 뿐이라고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건 긍정적인 거고, 뼈 핥아먹는 야생동물로부터 멀어지듯 뒤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마침내 거실 벽으로 바싹 붙어 텔레비전을 등지고 서게 되었을 적에 제임스는 서부의 총잡이처럼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911 번호를 찍었다.

《긴급조치 71조 발령 이후 디트로이트 IT 종합 통신망 운영이 전면 중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긴급을 요하는 전화연결이 신속히 되고 있지 않으니 이점 양지하여 주시고,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다음의 안내에 따라 연락할 전화번호를 선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디트로이트 소방서 313-555-》

미리 저장된 안내멘트에 마시지도 않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이다.
제임스는 허겁지겁 종료버튼을 눌렀다.
911에 연락해서 우리 집 머그컵에 발이 달렸습니다, 라고 말할 작정이었나. 그건 아니지.
침착함을 되찾고자 노력하며 집안을 다시 살폈다.

최근 들어 주택가 좀도둑질이 극성이다. 상점을 털다간 군인에게 총 맞기 딱 좋게 생긴지라 상대적으로 만만한 이웃집에 들어가 치약이나 휴지 같은 생필품을 훔치는 거다. 어디까지나 생존이 목적이기 때문에 비폭력주의를 표방했고, 도둑들은 피난 등의 이유로 거주자가 모두 떠난 빈집을 주 목표물로 삼았다.

글쎄다, 모든 물품이 제자리에 반듯하게 정리된 그의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라도 어질러져 있었다면 그럭저럭 인간미가 느껴졌을 터인데 쿠션이나 그림액자 따위의 인테리어 가재도구 숫자가 부족한 탓에 전반적으로 냉랭한 느낌이었다. 일단 보통 잘 보이는 장소로 가족사진을 걸어놓는 법인데 그의 집에는 액자가 전혀 없었다. 청소를 마치고 임대로 내놓은 집 같았다.
이러니 좀도둑이 들어왔다면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 생각하고 다짜고짜 냉장고 문부터 열었을 것 같다. 냉장고의 정상 작동을 확인시켜줄 목적으로 임대업자들이 콜라나 맥주 따위를 한 두 개쯤 미리 넣어두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제임스는 냉장고 문을 얼었다.
생수가 든 PET 용기와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진공 포장 오렌지 주스 팩이 열중차렷 자세로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한 박자 쉬고 이번에는 냉동고 문을 열었다.
역시나 두 개의 바닐라 아이스크림 통이 남의 손을 타지 않고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제임스는 유통기간이 2030년 1월 2일자로 찍힌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속에는 유통기한을 8년이나 넘긴 식중독균 아이스크림 대신 비닐로 돌돌 만 현금이 들어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고 아이스크림 뚜껑을 도로 닫았다.
좀도둑이 아이스크림 통을 놓치고 머그컵만 들고 달아났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 머그컵이 러시아 황실에서 쓰던 1890년대 금장식 임페리얼 로마노소프 티팟 세트였다면 또 모를까 – 옹이눈이 아닌 이상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도자기와 2달러짜리 싸구려를 구분 못할 리가 없다.
식탁의자에 주저앉은 그는 주먹으로 이마를 통통 때렸다.
무의식중에 그릇세척을 하고 제자리에 돌려놓은 걸 잊은 거다. 그럴 것이다.
고질적으로 앓아온 신경증이 재발한 건 결코 아니다.
오늘은 2038년 11월 13일 토요일, 그는 날짜를 정확하게 세었고 무슨 요일인지를 기억했다.
이제 다섯 시간 정도 뒤면 14일, 일요일이다.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제임스는 평일과 마찬가지인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워렌버핏의손자 : 상원이 표결 거부함. 월요일에 다시 보자고 말하고 자리 박차고 나감.》
《바나나를털어라 : 당연하지. 최고급 플라스틱 진공청소기에 인권이 뭔 말이냐.》
《곰이재주를부린다 : 그 플라스틱 진공청소기가 키스를 할 줄 알든? 미친놈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안드로이드들도 인간의 감정을 가진 존재야. 진공청소기가 아니고.》
《바나나를털어라 : 난 인정 못 해. 고작 키스에 *플라스틱과 시민의 권리선언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Plastic (원래는 Man) and of the Citizen 을 채택하라고? 나는 반댈세. 로베스 피에르가 길로틴에 내 목을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해도 플라스틱은 인간이 될 수 없어.》
《곰이재주를부린다 : 으이그, 그 대머리 캔터기주 상원의원과 똑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워렌버핏의손자 : 재산권과 자유거주권 이런 건 괜찮잖아. 투표권만 안 주면 되지 않아?》
《바나나를털어라 : 아는 게 없으니 그딴 소리를 하지. 안드로이드에게 인간과 같은 기본권을 준다는 건, 앞으로 무단횡단 하는 플라스틱과 자율주행 자동차가 마주치면 플라스틱을 치지 않기 위해 자동차가 인도에 선 사람을 향해 돌진할 수 있단 얘기야.》
《곰이재주를부린다 : 그건 너무 극단적인 예잖아. 걍 차가 멈추면 되는데!》
《바나나를털어라 : 선셍님. 혹시 관성의 법칙이라고 들어보셨쎄요? 움직이는 것은 그 운동을 계속한다는 운동의 제일 법칙입지요. 중등학교는 나오신 건 맞죠?》
《곰이재주를부린다 : 씨발아! 내가 너랑 같은 날 졸업장을 받았어!》

텍스트 단말기 화면을 검지로 밀어 올리자 아침나절에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글자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정부의 긴급조처로 모든 통신회로가 마비되자 죄다 이쪽으로 들러붙은 눈치다.
스크롤을 이리저리 움직여 현재 대화방 참여자로 누가 있는지 살폈다.
화면은 닉네임 곰이재주를부린다와 바나나를털어라가 서로 의견충돌을 보이며 뱉어놓은 글자들로 어지럽게 도배가 되어 있어 기존의 대화방 참여자들은 불가피하게 잠수를 탄 눈치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단추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터치에 초록색으로 색이 바뀌면서 어렵지 않게 대화방 참여가 가능해졌다.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손가락을 움직였다.

《레트로타자기 : 외출하고 돌아오니 현관 자물쇠는 그대로인데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워렌버핏의손자 : 아이쿠! 레트로타자기 님 오셨어요. 오랜만인데도 제3자 소설체 말투는 그대로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음?》
《곰이재주를부린다 : 도둑?》
《바나나를털어라 : 스탠드 갓 더듬어봐. 도청장치 달렸음 FBI 다녀간 거임. 껄껄.》


진지하지 않은 친구들 반응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짜증이 치솟았다.
동시에 자기혐오가 휘몰아쳤다.
스탠드 갓을 더듬으라는 장난 같은 말에 정말로 더듬었으니까.

《레트로타자기 : 도청장치로 의심되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곰이재주를부린다 : 뭐야... 썰렁해. 춥다고. 얼어 죽겠어.》

한 번 타박을 하더니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냉큼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버렸다.

《워렌버핏의손자 : 재산권을 인정해준다면 앞으로 안드로이드들도 세금을 내야 하겠지?》
《곰이재주를부린다 : 그렇지.》
《워렌버핏의손자 : 의외로 경제가 활성화될 거 같지 않아? 경제활동 인구가 하루만에 1억 2천만이 증가하는 거야.》
《곰이재주를부린다 : 어-이. 초를 뿌리게 되서 미리 미안하다 사과하마. 안드로이드가 인간처럼 밥을 먹기를 해, 잠을 자기를 해. 애초부터 의식주가 필수가 아닌 것들이라서 우리처럼 경제활동을 할 일이 없다고.》
《워렌버핏의손자 : 뭔 소리야. 정기점검을 받아야 하잖아. 부품도 갈아야 하고. 너넨 안드로이드 부품이 얼마나 고가인지 모르지? 전갈독이 리터당 400달러면 안드로이드의 블루 블러드는 650달러가 넘어. 아무래도 내 생각으로는 폭락하고 있는 사이버라이프 주식을 사둬야 할 것 같다.》

예전부터 깍두기 취급을 받던 제임스다.
끼워주는 것도 아니고, 끼워주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심지어 반갑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던지는 이가 없다.

《레트로타자기 : 다들 반가워.》

입술을 깨문 채 무난한 끝 문장을 입력했다.
그래봤자 아는 체 해주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지만... 새삼스러운 거 없는 일이다.

손가락을 좌우로 밀어 단말기를 대기모드로 전환시켰다.

Posted by 미야

2020/06/08 14:08 2020/06/0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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