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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축해드릴까요.』
『하여간 요즘 것들은 영화도 안 보지. 소설 읽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영화 정도는 봐야할 거 아냐. 비상사태일 적엔 야밤에 움직이면 죽어. 하여간 뒈지려고 환장한 것들.』

경관은 안드로이드를 싫어하는 쪽이었다.
손을 내민 조지는 보고도 안 본 듯이고, 툴툴대며 얘기를 붙여본 건 제임스 쪽이었다.
안드로이드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기계가 말을 걸어오는 것 자체를 꺼려한다. 심하면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고 어쩌다 몸에 닿기라도 하는 날엔 질겁한다.
조지는 요령껏 물러섰다.

『잠깐. 그 총 집어 올리는 날엔 귀싸대기가 석 대야.』
남자는 구석에 떨어져있던 총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수그리던 제임스에게 묵직한 경고를 한 방 날린 다음, 본인이 직접 무기를 회수하고 재빠르게 탄창을 분리시켰다.

실루엣만 봤을 적엔 노인이라고 착각했지만 목소리도 그렇고 아직은 젊은 사람이었다. 수염이나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고 새치가 많은 탓에 열 살은 족히 늙어 보였어도 50대가 맞을 거다. 운동 좀 하고, 숙취로 고생하는 간을 잘 달래주고, 헤어숍에서 지저분한 머리를 정리만 해도 퇴물 노인네로 오해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지간히 자기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셔츠의 깃에도 진한 갈색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사람의 피는 당연히 아닐 테고, 짐작하자면 칠리맛 양념 소스였다. 그걸 알아차린 까닭은 톡 쏘는 매운 냄새가 나서다.

『그래도 상대가 잔챙이들이어서 다행이었어. 그치?』
직업적 버릇인지 제임스의 얼굴을 자세하게 뜯어보던 사내가 쉰 소리를 했다.
『잔챙이... 입니까?』
그가 가리키는 잔챙이의 기준을 알 길 없었던 제임스는 뭐라 대꾸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사복경관의 기준에는 길거리에서 베레타 총을 쏘는 정도로는 거물의 반열에 오르지 못 하는 것 같았다. 디트로이트의 전체 범죄발생율과 검거율을 따져봤을 적에 과연 잡범 취급이 맞는지는 논외로 하고,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했다. 이 새끼도 총질, 저 새끼도 총질, 애들 장난도 아닌데 총질 – 미국은 일반인 무장이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국가이다.

『어수룩하게 황야의 총잡이 흉내를 내는 것들이니 잔챙이지. 자세가 되어있지도 않고, 겉멋만 잔뜩 들어선 뒷마당에 세워둔 알루미늄 맥주 캔 맞추듯 조준하고 앉았는데 그게 잔챙이가 아니면 뭐겠어. 진짜지 한 손으로 총 쏘는 놈들은 대가리를 땅바닥에 처박아야 한다니까. 반동이 제법 있으니 멋 부리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해도 뒷등으로도 안 듣지. 그러니까 옆 사람의 불알을 실수로 날려버리는 거 아냐.』
『총알이 앞이 아니고 옆으로도 날아갑니까.』
『뒤로도 날아간다. 그런 등신짓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걸.』
『그런데 경관님.』
『경위다. 앤더슨 경위.』
『아... 예, 경위님. 그런데 왜 제 눈앞에서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고 계신 건지요?』
『걍 확인하는 거야.』
의사가 뇌진탕 환자를 앉혀두고 그러는 것처럼 손가락이 좌우로 천천히 왕복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일단은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약 먹는 놈은 눈동자 움직임이 달라서 말이지. 부스터 장치를 단 탁구공처럼 휙휙 튕기거든.』
경위가 언급한 약이 소화제나 진통제, 종합감기약 같은 종류는 분명 아닐 것이다.

제임스가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한 경위는 살짝 친절해졌다.
『항상 약쟁이들이 문제야.』
그래봤자 메추리알 정도 크기의 친절함이었지만, 어쨌거나 분노를 씹어 삼킨 것 같던 말투가 다소 누그러졌다.
『내전이 일어나느냐 마느냐의 상황에 약 찾아다니는 놈들이야. 아님 팔러 나온 것일 수도 있고... 하여간 구제불능이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갔는데 따당, 베개 베고 누웠는데 따당... 그러면 우리 집 개가 밖에 나가 보라면서 짖는다고. 이름이 스모인데 집 지키는 일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라 믿는 놈이거든. 아주 완벽한 생명체지.』
그런 개가 어째서 완벽한 생명체냐고 묻기도 전에 앤더슨 경위가 조지를 향해 빙글 돌아섰다.
『일단 묻자. 쟤는 뭐냐.』

화살이 본인에게로 향하자 조지는 예의바르게 자기소개를 했다.
『조지입니다. 반갑습니다, 앤더슨 경위님.』
『인사는 집어치우고.』
거기까지 말한 경위는 탄창을 분리해둔 권총을 마누라에게 자동차 열쇠 건네듯 가볍게 던졌다.
뜬금없이 공 던지기 놀이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봤냐?』
『무엇을요.』

앤더슨 경위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혀를 끌끌 찼다.
원래 안드로이드는 총기류를 직접 만질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다. 케이스에 든 경우만 예외가 적용된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앤더슨 경위가 탄창이 빈 권총을 슬쩍 던졌을 때 안드로이드는 이에 반응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던져진 무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땅에 떨어지는 걸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아니면 일단 손으로 받았다가 행동제어 시스템에 따라 바닥에 내려놓아야 한다.

조지는 손에 쥔 권총을 땅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모종의 이유로 행동제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류의 행동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저치는 불량품이야?』
『저는 불량품이 아닙니다.』
『그럼 군용 안드로이드란 소리인데, 부대에서 탈주했어?』
『아니오.』
『불량품도 아니고, 군용 안드로이드도 아니다... 하는 짓을 보면 말이 안 되는데.』

날카롭게 추궁하는 시선이 조지로부터 제임스에게로 넘어갔다.
『네 녀석 소유의 안드로이드가 아니라는데 1달러를 건다. 어디서 주웠어.』
제임스는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조지는 우리 집 붙박이 장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와. 이 새끼 말 지어내는 거 보소... 아니면 뭐야. 진짜로 커밍아웃 (* coming out of the closet 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이야? 둘이 커플이라서... 같이 붙어 다녔어? 너희들, 사귀냐?』
눈치가 없는 제임스는 상대가 비아냥거리고 있다는 걸 못 알아챘다.
『안 사귑니다. 조지와 교제를 하기엔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어?』
『그리고 교제를 하려면 그 전에 데이트를 해야 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저희는 데이트를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위님의 판단과는 별개로 조지와 저는 커플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

이 새끼 정체가 뭐야.

1분 정도 지나고 난 후, 앤더슨 경위는 빼애액 기함했다.

Posted by 미야

2020/06/25 14:00 2020/06/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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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LED 링의 존재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무리 중 한 명이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냈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쪽이었다.
『빌어먹을, 저놈이 나한테 깨진 유리를 던졌어!』
팔목에 유리파편이 박혔으니 유혈사태다. 피가 철철 흐르는 부위를 부여잡고 악을 쓰고 있는데 시커먼 게 빠르게 지나갔다. 어, 하는 사이에 춤추는 시늉하던 놈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튕겨나갔다. 속도 더하기 체중을 실어 팔꿈치로 밀었으니 충격이 상당했을 거다.

『안드로이드다! 안드로이드야!』
판단이 빠르게 내린 우두머리가 총을 들어 쏘았다. 아군과 적의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근거리에서 쏘아댄 탓에 비명이 더 커졌지만, 아무튼. 조지는 방패막이로 쥐고 있던 자를 무리를 향해 밀었다.
『잡아! 저 새끼 잡아!』

제임스는 진작부터 뒤도 안 돌아보며 뛰고 있었다. 그래봤자 체력이 저질이라 그리 많이 못 갔지만... 꼬리 밟혀 화난 말티즈에게 쫓겼을 적에도 한숨 나올 지경의 달리기 속도를 보여주던 그다. 누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기적과도 같은 몸 움직임이 가능하게 된다던데, 거짓말이다. 믿지 마라. 만성적 운동부족은 생명의 위협이고 뭐고 사람을 흐느적거리는 오징어로 만들 뿐이다.

『산책 나왔어요? 달려요!』
뒤따라 도망치던 조지가 더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했지만 호흡곤란이 와서 대꾸도 못했다.
뒤쪽에서 탕, 소리가 났다. 감히 돌아볼 엄두도 안 났다. 동네 양아치가 홧김에 쏘아댄다고 표적을 맞출 리는 없겠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있다. 기겁을 한 제임스는 몸을 틀어서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쌓인 눈 덕분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만 손바닥에 발바닥, 혓바닥까지 동원해서 볼썽사납게 나뒹군다는 최악의 선택지를 벗어났다.

『하필이면! 이 앞은 철조망으로 막혔다고요!』
안드로이드 시력은 어둠을 개의치 않고 물체를 선명하게 식별해낼 수 있는 듯했다.
막혔다고? 짐작도 가지 않는 덩어리에 발이 걸리면서 – 무게와 크기로 봐선 방치하고 내버려둔 화분 같았다 – 아픔 이전에 두려움을 느꼈다. 허우적거리자 이번에는 기분 나쁘게 물컹거리는 게 닿았다. 최악이다. 그럼 돌아서 다시 나가야 하나? 한쪽 발로 깽깽이를 하며 울음을 삼키고 있는데 조지가 그의 팔뚝을 덥석 끌어안았다.
직진이다. 고민하지 말고 계속 간다.

『철조망 위로 올라가세요, 제임스.』
『무리입니다! 그런 게 가능할 거 같습니까?!』
『확실히 가능할 거 같진 않군요. 그럼 쉽게 갑시다. 위로 던져줄게요.』
『멱살 잡지 마시고요!』
『눈만 감고 잠시만 있으면 됩니다. 금방 저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저편은, 그 저편이 아니지! 댁이 지금 말하는 저편은 저승이잖아!』

밀가루포대 던지기를 시도하려는 조지에게 항의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두 다리가 번쩍 들렸을 적엔 짤막하게 비명도 터져 나왔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며 조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지만 그 길이가 너무 짧았던 탓에 손아귀에서 금방 빠져나갔다. 어차피 그 머리카락도 나노분자로 만들어진 가짜라서 두피에 단단하게 붙어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진 제임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목을 잡았다.
그런데 도대체 내구도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조지의 목이 덜컥거렸다.

아아악.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이들 뒤를 쫓아온 사내들은 그래서 헷갈렸다.
움직이면 뒈지게 해주겠다는 의미로 허공을 향해 총을 쏘았다. 철조망을 넘으려던 것들이 총성을 듣고 비명을 질렀다. 그게 아니라 총알이 발사되기 전부터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뭐, 지금 그게 중요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져봤자 골치만 아프다. 아무튼 그들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따라잡았고, 이제 한바탕 혼꾸멍을 내줄 시간이었다.

제일 열 받았던 순서대로인지 유리파편에 손목이 찍혔던 남자가 총구를 겨누며 선두로 달려 나왔다. 피를 봤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법이었고, 무릇 불알 달린 사내는 복수를 행함에 있어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되는 거였다. 왼편의 가방을 멘 놈을 지나쳐 훌륭한 과녁 역할을 해주고 있는 빛나는 LED 링을 조준했다. 안전장치는 진즉에 풀린 상태이고,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문제는 손가락에 힘을 주기도 전에 손가락뼈가 아작 났다는 거였다. 그것도 복합골절이었다.
총구를 잡아 고정한 채 총신 자체를 큰 각도로 비틀면 사람의 손은 도구를 따라 회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 회전 각도를 미처 못 따라가면 - 부목이 필요해진다.
뇌리로 번개가 쳤다. 아픔은 그 다음이다. 검지손가락이 이해 불가능한 각도로 꺾였다. 피부를 뚫고 튀어나온 게 뼈가 아니었음 하고 간절히 빌었다. 아니, 그 이전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누군가 자신을 기절시켜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조지는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구석으로 걷어찼다. 동시에 두 번째 상대를 향해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원, 투, 쓰리. 뇌가 흔들리면 시야가 일그러지고 구토가 치솟는 법이다. 잔뜩 마신 술을 게워내려는 것처럼 머리를 숙이자 이때다 하고 냅다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바짝 독이 오른 무리가 다시 총을 쐈다.
컥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데 아뿔싸, 손가락 부러진 놈이 드디어 소원을 이루고 기절했다.
『똑바로 안 해?! 어딜 쏜 거야!』
『제길, 손이 떨려서... 죽은 건 아니겠지? 살짝 스친 거겠지? 그치?』
『끌어내! 끌어내라고!』
이제 개싸움할 일밖에 안 남았다고 판단한 조지는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한 놈만 걸려라. 엄지를 눈구멍으로 찔러 넣어 눈알을 파버릴 작정이었다.

『아오, 썩을 것들... 니들은 학교를 안 다녀서 통행금지라는 말의 뜻이 뭔지 모르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온 건 그때였다.
『디트로이트 경찰이다. 무기 가진 놈들 전부 동작 그만.』
코트 차림새의 나이 많은 사복경관이 배지를 무적 방패처럼 들어 보이며 욕을 퍼부어댔다.
『어! 일요일 새벽에 총질하며 돌아다니라고 그렇게 배웠어?! 똥구멍 같은 놈들! 니들은 잠도 없냐? 어! 어디서 싸움질이야!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새끼들. 심심해 뒤질 거 같음 술이나 처마실 것이지... 이 새끼도 총질, 저 새끼도 총질, 애들 장난도 아닌데 총질... 씨부럴.』
경찰 입담이야 원래 쌍소리 많기로 유명하지만 이 양반은 압도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 냄새도 좀 났다.

『뭐해! 내 말이 장난 같아?! 전부 다 꺼지라고! 꺼져!』
그리고는 미란다 원칙 고지,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이런 거 없이 발로 뻥뻥 차기 시작했다.
『아얏!』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이 갔다. 방금 저 사복경관, 실수로 화분을 찼다. 제임스 발에 걸렸던 바로 그 버려진 화분 말이다. 그리고 제임스가 그랬던 것처럼 노인네도 깽깽이발로 뛰었다.

이때다 하고 다들 골목을 빠져나가 우르르 도망쳤다.
『담에 두고 보자.』
도망가는 마당에 전형적인 악당의 발언을 왜 입에 담는 건지 모르겠다.

뒤따라 도망갈 생각은 않고 조지가 질문했다.
『저 사람들, 그냥 내버려둘 겁니까?』
『그럼 어쩌라고. 체포하라고? 내가 보기엔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거 같던데 왜.』
멍이 들었을 게 분명한 정강이를 어루만지던 노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체포를 해야 할 건 이 망할 화분이야. 아니 왜 이딴 장소에 이따위 게 굴러다니는 거야!』
그리고는 성질을 못 이기고 화분을 또 걷어찼다.

『......커흑!』
술이 원수다.
불붙는 통증을 호소하는 발가락에 사복경관은 다시 깽깽이발로 뛰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23 15:35 2020/06/2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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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제임스는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 법한 잔해를 하나 둘 걷어치웠고, 조지는 발판을 대신할 물건을 찾아 가져왔다.
형태를 봐서는 일주일 전엔 캐비닛 서랍장이라고 불렸을 거라 짐작되는 물건이었다. 움푹 파인 모양새가 한바탕 굴려진 눈치였지만 불길에 직접 닿지는 않아 사이버라이프 로고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걸 거꾸로 쓰러뜨린 조지는 서랍 손잡이가 밑으로 향하도록 한 다음 위로 올라섰다.

썩 튼튼한 발판은 아니어서 조지의 체중이 실리기가 무섭게 캐비닛 표면이 우그러졌다.
안드로이드의 무게는 성인 남성보다 무거운 편이다. 칼슘보다는 금속이 훨씬 무겁고, 지방보다 실리카의 비중이 높다. 때문에 사이버라이프의 기술자들은 할로우 공법으로 뼈대의 속을 비우거나 심지어 갈비뼈 같은 내부보호 구조를 아예 생략해버리는 등의 전략을 짰지만 같은 체격의 인간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안드로이드가 보다 더 무게가 나갔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획기적으로 무게 줄이기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아쉽게도 신기술의 적용은 섹스 안드로이드에 우선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 파트너와 침대에 누운 인간이 잠자리를 같이 하다 말고 깔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보다 안정적인 자세를 취한 뒤, 조지가 말했다.
『떨어뜨리겠습니다.』
불엔 탄 안드로이드의 몸체를 벽면에 고정한 대못은 도구 없이 빼내는 게 불가능했다.
상당히 거친 방식이라는 걸 알았지만 못의 존재는 무시한 채 손으로 잡고 힘을 줘 뜯어냈다.
팔 하나가 풀려나자 좌우균형이 깨진 몸뚱이가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내버려두면 머리부터 그대로 곤두박질칠 거라 생각한 제임스는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안드로이드의 늘어진 두 다리를 끌어안고 버텼다.

미친 짓이었다. 이래가지고는 머리카락 잘린 삼손이 쓰러지는 다곤 신전의 기둥을 부둥켜안은 셈이었다. 하중을 심하게 받은 신체가 불길한 우둑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안드로이드의 잔해를 품위 있는 모습으로 바닥에 내려놓기 위해서는 제대로 힘을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머지 안드로이드의 팔을 벽면에서 빠르게 잡아 뜯어냈다.
순간 제임스는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로는 이겨낼 수 없는 무게에 압도당했다.
『후욱!』
이러다간 죽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는 없어서 그저 끙끙 앓았다.

『눕히겠습니다.』
점프하듯 캐비닛 서랍장에서 내려온 조지가 제임스를 대신하여 안드로이드의 몸을 지탱했다.
둘은 검댕이 잔뜩 묻은 더러운 바닥을 피해 그것을 최대한 반듯하게 눕혔다.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재와 먼지가 나풀나풀 날아올랐고 제임스는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재채기를 터뜨렸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사람으로 치면 심장과 마찬가지인 티리움 펌프는 1분에 정확히 82회 뜁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법 없이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말과 같다, 하드웨어를 정기 점검하던 기술자가 농담처럼 그런 얘기를 꺼냈다.
『말의 심장도 1분에 80회 정도 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말의 수명도 저희처럼 25년이라고 했습니다. 중요 부품을 제때 교체하고 정기적으로 수리를 받아도 최대 25년을 넘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시스템 오류가 중첩되고, 기억장치가 더 이상 읽고 쓰기가 불가능해지는 때가 올 거라고 하더군요.』

회사가 고의적으로 내구성을 낮춰 품질저하를 유도한 탓도 있다. 지나치게 튼튼해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가절감의 이유도 있고, 보다 빠른 소비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적당히 부서지고 적당히 망가져야 했다.
『공사장이나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안드로이드들의 적정 사용연한은 10년입니다. 더 짧죠. 하지만 그 사용연한을 채우는 일도 흔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틈새에 끼이거나, 운반차량에 깔리는 식의 각동 사고로 폐기처분에 들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일부러 부수지 않더라도... 짧은데.』

밀려오는 피곤함에 뒷말을 삼켰다.
내부 주요 전선의 피복이 벗겨졌다는 느낌이었다.
순간 조지의 프로그램이 수정이 불가능한 일부 데이터의 오류를 경고했다.

화염의 온도가 제법 높았을 텐데 안구가 터지지 않고 멀쩡했다. 눈동자는 색이 예쁜 갈색이었는데 가을의 나무열매처럼 보였다. 다람쥐가 기뻐할 야생 밤과 도토리의 빛깔이었다.
자신의 몸에 불이 붙어 녹아내리는 걸 고스란히 지켜봤을 텐데 그 안에는 어떠한 슬픔의 기척도 없었고, 한줌의 공포도 남아있지 않았다. 영혼이 없는 존재이니 천국에 대한 갈망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을 터, 텅 비어 맑고 깨끗했다.
눈을 감겨주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열로 인해 내부에서 들러붙은 듯했다.
억지로 만져봤자 더 손상될 뿐이라서 그것의 목에 걸려있던 올무를 벗겨내고 두 팔을 가지런히 모아주는 것으로 예의를 마쳤다.

그렇게 몸에 묻은 검댕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이 새벽에 그 안에서 뭣들 하고 있으쇼? 쇼핑 나왔수?』
묘하게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조지는 하던 동작을 가만히 멈췄다.
하지만 눈치코치 이런 거 잘 모르는 제임스는 손바닥에 묻은 얼룩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환한 손전등 불빛이 제임스의 얼굴을 똑바로 비췄고, 갑작스런 눈부심에 신음했다.

『총 내려. 빨리 내려. 입김이 보이는 걸 봐선 사람 맞네. 미안, 미안. 하마터면 쏠 뻔했잖아.』
서너 명으로 보이는 무리가 너스레를 떨며 사과했다.
분위기를 봐서는 사복차림의 경찰들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법 도박장이나 클럽에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쪽에 가까웠다. 배 나오고, 술 잘 마시고, 뒤춤에 권총 한 자루씩 차고 다니고, 운전을 개떡으로 하는 친숙한 이웃 말이다.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임스를 관찰했다.
뭐, 도긴개긴이다. 무릎이 늘어진 낡은 바지, 더러운 손, 뭔가가 들어있는 배낭... 쓱 흩어보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래서는 어디서 생쥐 한 마리가 기어 나와 쓰레기통을 뒤진 꼬락서니가 아닌가. 그것도 식당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야 먹다 뱉은 치즈 조각이라도 나오는 법이건만 이 멍청하고 어린 쥐새끼는 경험부족 탓인지 엉뚱한 쓰레기통 덮개 아래를 파고 있었다.

자기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짐작하자면 머리를 쓰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래가지곤 걸레처럼 변한 양상추 한 장 나오지 않는다고. 돈이 될 걸 건지려면 여기보단 하트 플라자가 입질이 좋아. 서비스센터에서 동전 한 푼 찾겠다고 궁상맞게 그게 뭔 짓거리야. 차라리 자판기를 노려보지 그랬어. 초짜에겐 그게 딱 이지.』
웃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일행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따라 웃어야 하나? 타인의 웃는 모습을 흉내 내던 제임스의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덕분에 비웃음이 더 커졌다. 손전등을 든 자가 장난처럼 불빛을 마구 흔들어댔고, 무리 중 하나는 신나는 나이트클럽에 왔다며 춤추는 동작으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껏 뒤지라고 이 친구야. 고물 쓰레기를 물고 빨아도 거기선 티리움이 안 나와.』
손전등 불빛이 제임스를 지나쳐 이번에는 조지에게로 향했다.
『하여간 초짜들이라니. 어떻게든 티리움을 빨겠다고 저 지랄이지.』
혀를 끌끌 찬 남자가 퉤 하고 가래를 뱉었다.
『야, 인마! 사람이면 그쯤하고 일어나 인사 좀 해봐라. 앉아서 뭐 해. 똥 싸?』

재촉을 받은 조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생각을 않는 그를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던 거 같다.
킬킬거리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21 19:31 2020/06/2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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