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물점에 몰래 들어가 훔친 수도관 테이프를 붕대처럼 사용해 응급조치를 마치자 날이 밝았다.
가게를 떠나기 전, 조지는「홈디포의 역사 since 1978」명패가 붙은 유리장식장에서 골동품으로 보이는 셔츠를 꺼내 마이클에게 입혔다.
플라스틱 표면의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셔츠만 걸친 마이클은 담당자의 실수로 옷이 갈아입혀지다 만 마네킹처럼 보였다. 양손에 톱과 망치를 손에 쥐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철물점 입간판 장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강제로 집에서 끌려나와 안드로이드 수용소로 이송된 이후 처음으로 웃음이 터졌다.
「그래, 웃어라.」
마이클은 투덜거리며 15달러짜리 쇠지레를 챙겼다.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 정도 크기를 가진 이 단순한 도구는 사람을 때리기에도 적합하고 문짝을 뜯는 일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몸을 가릴 옷을 수중에 넣는 일에는 꼬박 하루가 낭비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도둑질에 진땀을 빼는 사이 돌아가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악화되어서 도심 한 가운데로 탱크가 등장했다.
방향을 잃었을 적엔 무조건 직진이라 큰소리치던 마이클도 탱크 앞에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지상에서의 탱크는 무적이다.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다.
쇠지레로 맨홀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간 둘은 머리를 쥐어 싸맸다.
통신망 터널을 기어서라도 라파옛 애비뉴까지 가보자고 마이클이 주장했다. 하지만 통로를 기어가기엔 내부가 지나치게 좁았다. 통신망 통로는 직경이 60cm에 불과했다. 몸통에서 두 팔을 모두 떼어내면 통과가 가능하겠지만 대신 기어가는 동작이 무리일 터다. 설령 무리를 해서 기어갔다고 쳐도 지상으로 올라가는 순간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고급 주택단지 인근은 약탈에 대비하여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을 것이고, 감시용 무인드론이 쉴 틈 없이 날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운 좋게 감시망을 뚫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캐머런 님을 다시 뵐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저희가 강제 회수되면서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건 이마가 바닥에 닿은 상태에서 두 팔을 등 뒤로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순찰경찰이 와서 캐머런 님께 수갑을 채웠습니다.』
『아니, 왜...』
『장식용 산탄총을 꺼내 와서 모두 다 꺼지라며 위협했거든요.』
『그니까, 왜...』
『공이가 빠진 장식용 물건이라고 순찰경찰에게 설명 드렸지만 좇만한 놈들이라 욕한 것만으로도 공권력에 대항하는 행위라며 얘기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뭐...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좇만한 놈들이라는 것보다 표현이 훨씬 거칠긴 했습니다.』
제임스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캐머런이 모욕죄로 연행되었다는 겁니까?』
『그보단 명령 불이행이죠. 아마도?』
자신 없어하며 조지가 말했다. 산탄총으로 경찰을 위협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장전된 납탄은 당연히 없었고 공이가 빠진 물건이니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살면서 음주운전 딱지를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니 이 얘기를 듣고 마음 너그러운 판사가 아량을 베풀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고.
캐머런이 체포되었고,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탈출했고, 통행금지 명령이 떨어졌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옷장에 숨었고, 옷장 문이 벌컥 열리니까 얼떨결에 사람 입을 틀어막았고 –
항의를 퍼붓기 위해 숨부터 들이마셨다. 그런데 혀가 뻣뻣했다. 답답한 마음에 콧김을 내뿜었지만 단어들이 한데 엉켜 제대로 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와중에 마이클은 주인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옷장에서 연회색 맨투맨 티셔츠를 꺼내들고 품에 대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느냐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힐끔거렸다.
튀어나온 못에 걸려 옆구리 부근으로 작은 구멍이 난 뒤로 잘 입지 않던 옷이었다. 헐렁하게 입는 종류이니 크기는 잘 맞을 것이다. - 이게 아니라.
『캐머런의 일은 유감이지만 그 셔츠는 빌려드릴 겁니다. 변호사가 알아서 잘 처리했을 것이고, 월급을 받았다면 솔직한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지 않습니다.』
서둘렀더니 대참사였다.
『애초부터 적합한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능력 없는 이에게 부탁을 하면 민폐가 되어 청바지의 기장이 맞지 않을 겁니다.』
흥분했더니 더 꼬였다.
『경찰에게 물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네, 그 청바지는 당신이 입기엔 길이가 짧습니다. 아니, 경찰에게 물어보자는 의미가 아니라, 아니. 물어보자는 의미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캐머런을 찾아 제 옷장에 숨어서는 안 되었던 겁니다. 제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조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오.』
머리를 움켜쥔 제임스는 어딘가에 있을 막연한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퍼부어댔다.
비상조처 71조에 따라 안드로이드를 회수하겠다며 경찰관이 들이닥치자 캐머런은 공이가 빠진 장식용 산탄총을 겨누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다행히 경관 살해위협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욕설을 퍼부은 게 문제가 되어 체포되었다.
분쇄하기 위해 수용소로 보내어진 캐머런의 안드로이드는 자력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캐머런에게 돌아가고 싶어 했으나 거리에서 탱크를 목격하곤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 대신 남에게 도움을 구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평소 캐머런에게 좋은 직장을 가진 부자 친구들이 많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조지는 도움을 구할 대상으로 실업자, 패배자, 낙오자, 제임스를 골랐다. 왜냐하면 제임스 무어는 안드로이드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캐머런이 평소 입방정을 떨어댔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집으로 소포를 보낸 적이 있는 조지는 주소를 암기하고 그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좋아, 정리 되었어.
그러나 내용만 정리되었을 뿐으로 옷장에서 튀어나온 안드로이드가 갑자기 허공으로 증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굉장한 골칫덩이를,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을 떠안게 되었음을 깨달은 제임스는 천장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혹자는 말했다.
감당할 수 없다면 피하라.
마이클이 셔츠자락을 젖꼭지 부근까지 들어보였다.
『저기, 총알자국 보여줄까?』
분위기 파악하는 능력이 제로이거나, 아니면 프로그램이 고장난 게 분명한 안드로이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휴대용 단말기를 꺼내들어 엔니나르에 접속했다.
늦은 시간이라 다들 잠자리에 들었는지 대화방 참여자는 닉네임 응급실당번은너, 곰이재주를부린다 두 명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사람다운 대화는 진작에 끊긴 눈치이고 하품하는 테디베어의 애니메이션 클립이 떠억 올라와 있었다. 사실상 파장 분위기였다.
《레트로타자기 : 명예의전당-행크그린버그의 분실물 2점 발견하였습니다. 집. 연락요망.》
짤막하게 내용을 남기고 배낭을 들쳐 메었다.
캐머런이면 보석금을 내고 금방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엔니나르에 남겨진 이 메시지를 읽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본인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식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온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그동안 안드로이드들은 고장 난 괘종시계 흉내를 내어가며 그의 집안에 숨어있으면 되었다.
입만 열면 재앙이었기에 고개만 끄덕여 작별인사를 했다.
마이클과 조지가 눈에 띄게 동요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이제 진짜로 떠날 시간이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