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대학생이냐?」라는 속마음을 고스란히 읽어내린게 분명하다. 한쪽 눈썹을 갈매기처럼 휘게 만든 고든은 두툼한 서류뭉치로 핸릭슨의 어깨를 쳤다. 시선은 노랗게 불이 켜진 승강기 버튼으로 고정시킨 채 말이다.
『이보게, 고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그러니까 머리통이 아닌 어깨를 쳤지.』
입 모양만으로「잘 해봐」말을 덧붙인 그는 땡 소리를 내며 멈춘 승강기 안으로 서둘러 몸을 구겨 넣었다. 자판기가 있는 2층으로 가기 위해서다. 꼭두새벽에 가까운 시간이기도 하거나와 일거리가 폭발을 일으킨 오늘 같은 날이면 햄버거 가게로 줄 서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때가 되면 배꼽시계가 어김 없이 난리를 치는 법이고, 시끄러운 알람을 끄기 위해 고든은 2층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내 것도 부탁함세! 콜라 하나랑 땅콩 초콜릿 둘~』
다시 작동을 시작한 승강기 안에서「지랄한다」답변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핸릭슨은 쓰게 웃었다.
『오래 있게 해서 미안합니다.』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안절부절해 하던 청년이 핸릭슨의 인사치레에 고개를 들었다.
『예.』
이 어중간한 답변은 실제로 그가 이 건물 안에 오래 머물렀다는 의미다. 새벽을 꼬박 달려 피곤하기도 하겠거니와 이곳의 의자는 영 불편하다. 체력이 받쳐주는 젊은 대학생 신분으로도 눈자위 밑이 꺼지는 건 피할 수가 없다. 거기다 심리적 불안감까지 더해져 안색이 나빴다.
말이 좋아 참고인 자격이지「최초 발견자는 유력한 용의자다」법칙에 따라 임시로 억류된 상태다.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을 적에 괜히 손을 씻는 척하며 따라붙는 사람까지 있으니 그리 즐거운 기분은 아닐 터, 핸릭슨은 그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투로 운동선수 스타일로 짧게 다듬은 뒷통수를 문질렀다.
『좀 그렇지?』
청년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뭐랄까... 이상해요.』
『뭐, 그렇겠지. 행방불명된 사람을 폐가에서 발견한다는 경험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니까.』
순간 대학생 청년이 핸릭슨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방금 전의 말이 비꼬는 식으로 들렸던 걸까? 그래서 화가 났나?
약간은 달랐다. 딱 꼬집어 이거다, 하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묘한 뉘앙스가 있었다. 여섯 살 어린아이가 미적분에 관한 책을 읽고 있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우아한 귀부인이 우산도 없이 걸어가고, 토끼가 회중시계를 쳐다보며 파티에 늦었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핸릭슨은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샘 윈체스터.』
『아니오. 저기... 뭐가 잘못되었다는게 아니고요. 이런 일은 아무래도 처음이라.』
말을 얼버무리며 청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은밀히 숨기는게 있는 사람 특유의 미소였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네.』
곤란한 화제에서 안전한 화제로 적절하게 말을 바꿨다. 직구를 던질 때가 있는가 하면, 커브를 던져야 할 때가 있다. 처음부터 바짝 긴장하게 만들어 입을 다물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는 건 나중으로 하고... 핸릭슨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 분은 괜찮다고 하던가요?』
『몸 상태가 안정되어 이젠 안심해도 된다더군. 후두부에 상처가 있지만 의사 말로는 그리 심각하진 않다고 했네. 탈수증이 약간 있고...』
『그거 다행이군요.』
『뻑치기를 당한 것치곤 운이 좋았지.』
『뻑치기?』
『둔기로 머리를 쳐서 순식간에 기절시킨 다음에 피해자의 금품을 훔쳐 달아나는 걸세. 아마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지갑을 노렸던 모양이야. 노숙자나 뭐, 대충 그렇고 그런 자들의 소행이겠지.』
대학생이나 되어서 뻑치기가 뭔지도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또다. 젊은이는 엄숙한 장례식장에서 빨간색 구두를 신은 문상객과 마주쳤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범인이 노숙자라고 그 여자 분이 말하던가요.』
『아니. 우리 입장에선 우라질인데 자신을 폭행한 사람을 전혀 못 봤다고 했네. 갑자기 불꽃이 팍 튀면서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고 하더군. 날아오는 돌에 정통으로 맞은 것 같다나. 정확하게는「하늘에서 운석이 추락했다」표현했지만.』
『그렇담 누군가 악의적으로 돌을 던져...』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어두운 밤에 물매로 돌을 던져 걸어가는 여자를 명중시켰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 이상의 업적일테지. 우연이라는 걸 아주 배재할 수는 없겠으나 날아오는 돌에 당한 건 절대로 아니야. 가까이 접근해서는 이렇게, 이렇게-』
두 팔을 들어 야구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제스츄어를 취하던 핸릭슨은 입으로 기합을 넣는 이엽, 소리도 냈다. 말이 좋아 야구 방망이지 전적으로 두더쥐 잡는 시늉이었지만 유명 대학교 재학 중이라던 예의바른 청년은 입을 꾹 다물고 이렇다 참견은 하지 않았다.
『힘도 없는 여자를 때리다니, 진짜지 나쁜 놈이야. 가지고 있는 거 전부 내놔 위협만 해도 지갑을 얌전히 건내줬을텐데. 그런데도 일부러 때렸단 말이야.』
『처음부터 죽일 의도였다는 말씀인가요.』
『글세... 사실은 그게 좀 복잡하네.』
운전하던 차에 기름이 떨어졌다.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들고 여자가 차 밖으로 나간다. 부근에서 히치하이크를 하던 거렁뱅이가 그런 그녀를 보곤 이게 웬 떡이냐 조용히 다가간다. 그리고는 몽둥이를 높게 들어-
『여기까지는 그럴 듯하지?』
핸릭슨은 검지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영 말이 되질 않아.』
시간이 지나 기절했던 여자가 눈을 뜬다. 타는 듯한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갈증도 느낀다.
『그런데 무슨 하느님의 기적처럼 코앞으로 생수병이 있었다더군. 보통 편의점에서 파는 1리터짜리 생수병 말일세.』
『물병?』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라 마시면 위험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더군. 뚜껑을 따서 절반은 바닥에 흘리고 절반은 어떻게 마셨다고 했네. 그리고는 다시 기절했고.』
『머리에 입은 상처 때문에...』
『아니. 약물 때문이었네.』
『예?』
『물에 수면제가 들어가 있었어. 범인이 사전에 준비해뒀던 거지. 여자를 때려눕히고, 으슥한 폐가로 옮겨놓곤, 여자 앞으로 약을 탄 생수병을 놓아두었어. 깨어나면 마실 수 있도록.』
돈을 노린 범행이 아니다. 남의 지갑만 원하는 노숙자는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를 쓰지 않는다.
『범인이 왜 그랬을 것 같나?』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전혀 모르겠네, 샘 윈체스터. 정말이지 답답해 죽겠어. 단순한 의견이라도 좋으니 머리 나쁜 경찰들을 위해 추측을 한 번 해보지 않겠나.』
『.......... 강간을 하기 위해?』
『좋아. 그건 꽤 그럴 듯하군. 피해자에게 강간당한 흔적이 없다는 점만 빼면.』
거의 눕다시피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핸릭슨은 가볍게 끙 소리를 냈다. 기름칠이 덜 된 관절에서 귀에 거슬리는 삐그덕 소리가 났다.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녹슬기 시작한다. 때문에 다리를 외로 꼬는 작은 동작에도 다소의 무리가 따르게 된다. 결혼도 하지 못한 핸릭슨은 그 점이 슬펐다.
『브렌켄릿지에 있는 그 폐가엔 무슨 일로 가게 된 거지?』
샘의 안색은 처음보다 더 나빠졌다.
『우연입니다.』
『우연이라고?』
한밤중에, 차편도 없이,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장소에, 그것도 혼자서.
핸릭슨의 표정에서 호의가 지워졌다.
『처음에도 이렇게 말했지. 동행인 남자와 차를 타고 가다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차에서 내렸다. 무작정 길을 걸었고, 어쩌다보니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집 앞에 이르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집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쓰러진 여자를 발견했다.』
『맞습니다.』
『그 싸웠다는 자의 성함은?』
『이름은 딘이라고 합니다. 성은 모릅니다.』
『그 사람과는 어떤 관계인가.』
『관계라고 할 것도 없는 사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왜 싸운 거지? 샘 윈체스터.』
이쯤해서 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거군요.』
핸릭슨은 시치미를 뚝 잡아뗐다.
『자네가 범인인가?』
샘은 이를 악물었다.
『범인이 아닙니다.』
『그렇군. 그럼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지. 왜 싸움이 벌어졌지?』
『그냥요! 그냥 말다툼이 벌어진 거예요! 제기랄, 지금 제가 취조를 받는 건가요?』
『취조는 무슨. 절차상의 사전 조사일세.』
『아무리 봐도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싫으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나중에「매우 수상했음」메모를 붙여놓을 거잖아요!』
『메모는 안 붙여놓네. 다만 전화를 걸어대지.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소중한 세금으로 다른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게 내 일이라서. 자, 그래서? 왜 싸웠던 거지? 마약인가? 아님 노름 빚?』
질린다는 시늉을 해보이며 두 팔을 벌렸다.
『그냥 싸웠다는 부분에만 집중하면 안 될까요. 형사님.』
『말하기 곤란한가.』
『곤란하고 자시고를 떠나 개인적인 거라서요.』
『그 여자를 죽이자, 말자, 그러고 의견이 틀어져 싸웠던 건 아니고?』
『당연히 아니죠! 난 그 여자가 누군지 알지도 못해요! 기가 막혀서.』
『좋아요... 댁은 차에서 내렸어. 그런데 왜 하필 브렌켄릿지로 갔나. 거긴 외진 곳인데다 인가가 없는 곳이라고. 밤에는 불빛이 전혀 안 보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댁은 그쪽으로 걸어갔어. 게다가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된 다리까지 건너면서.』
『알게 뭡니까. 어차피 부근 지리에 대해 아는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다리에 붙은 표지판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고요! 무작정 걷고, 또 걸었을 뿐입니다. 화도 났고, 판단력도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여자의 흐느끼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겁니다!』
『귀신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나. 나라면 무서워 한걸음에 달아났을 거야.』
『겁에 질려 달아나질 않은게 그럼 제 잘못이라는 거예요?!』
팔짱을 낀 청년이 죽을 힘을 다해 핸릭슨을 쏘아보았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