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큰 실타래가 코앞에 있다. 크기만 한게 아니라 잔뜩 꼬였다. 전부 풀어 제대로 감아야지 마음을 먹었으나 엄두가 나지 않는 일에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차라리 가위로 싹뚝 잘라버렸음 좋겠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고 먼지 묻은 손바닥을 툭툭 털어버리는게 현명할지도.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어, 딘.』
『어...』
『와이퍼를 작동시키는게 낫지 않을까?』
돼지처럼 꾸역꾸역 점심밥을 먹고 나서 4시간 10분이 지나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사실 이건 대화도 아니다. 어, 그래, 응, 이런 종류로만 이루어진 대화라는게 세상에 존재한다면 별거에 들어간 남편과 아내가 전문 상담원에게「대화의 부재」라는 걸 하소연할 리가 없다. 대화라는 건 보다 많은 단어와, 보다 풍부한 손짓 발짓이 요구된다. 유리창에 가느다란 빗방울이 내려앉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며「하루종일 흐리기만 한다더니 일기예보가 틀렸잖아」따위의 혼잣말을 중얼거려선 쓸모 없다. 최소한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기라도 해야 할 거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딘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주장하며 핸들을 조작했다. 쉽게 말해 초보 딱지를 붙이고 처음으로 도로로 나온 사람처럼 정면만 주시했다.
샘은 낡은 면바지에 생긴 보푸라기를 잡아뜯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화를 내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쉽다.
주먹으로 몇 대 얻어맞고 끝날 수만 있다면 진작에 치기 좋은 각도로 얼굴을 내밀었다.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에 깔려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샘은 다음으로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를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평범하게 해야 한다. 평범하게. 마침 비가 내리니까 노란색 우산에 대한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어떨까. 공동묘지를 파는 도중에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로 흙탕물에 휩쓸려 죽을 뻔했던 경험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시신도 떠내려가고, 삽도 떠내려가고... 재수가 없으려니까 손전등까지 잃어버렸다. 거의 헤엄을 치다시피 해서 - 발버둥에 더 가까웠지만 - 기슭에 닿았을 적엔 운동화도 벗겨져 있었다. 딘은 그보다 상황이 나빠 바지도 벗겨졌다. 기록적인 폭우였다. 하루 190mm까지 쏟아졌던 뉴저지에선 가옥이 침수되고 주민 대피령도 내려졌다.
『있잖아...』
모르겠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간다. 이제는 다 잊어버렸다. 평범한 대화의 시작은 어떤 거지?
『앞으로 비가 계속 내릴까? 딘 생각에는 어떨 거 같아?』
동생의 노력도 모르고 딘은 짧게 대꾸했다.
『글쎄.』
그것으로 예의 불편한 침묵의 연속으로 돌아가버렸다.
일상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때가 되면 졸음이 쏟아졌다. 그러면 형제들은 식당에 들려 밥을 먹었고, 후미진 곳으로 차를 세우고 적당히 눈을 붙였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냐는 질문이 있었고, 누가 신문을 사러 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지만 녹색의 혀를 가진 끔찍한 괴물이 옷장을 박차고 튀어나올까봐 함부로 시선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괴물을 잡는게 그들의 직업이라지만 때로는 은탄환이나 소금으로 죽일 수 없는 종류도 있기 마련이다. 평소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주눅이 든 딘은 수동적 태도로 옷장 문이 열리는 일 없기를 그저 바라는 눈치였다.
초록색 괴물은 외칠 것이다.
딘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징징거리느라 정신 없잖아.
약해 빠졌어.
엎친데 덮친다고 눈치도 없게 루비가 전화를 걸어왔다.
샘은 언제나처럼 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전화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치만 샘이 어떤한 움직임을 취하기도 전에 선수를 친 딘이 옷가지를 들고 복도로 나가버렸다.
핑계는 있었다. 냉장고에 맥주가 떨어졌다. 그때가 새벽 2시라는 점만 빼면 그럴 듯했다.
샘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던 걸 가까스로 참아넘겼다.
『다 풀어졌다고 했잖아. 사과했잖아.』
타인이 되어가는 방법.
이렇게나 간단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