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혼백, 망령, 그리고 엉망진창
※ 오리캐×설양(아님!) BL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게임 오버 화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주위는 그저 검고, 까맣고, 시커멓고, 어두웠다.
죽음에 이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여전히 당혹감에 빠져 어찌할 바 몰라 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빛의 사다리가 내려온다던가, 좁고 어두운 동굴을 지나 사바나 초원이 펼쳐진다던가, 아니면 저승사자가 나타나 수첩을 펼치고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본다던데 내게는 해당 없는 일이었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다 ‘아무나 계십니까?’ 크게 외쳐봤다.
목구멍 밖으로 나온 외침은 물 먹은 느낌이었고 별 반응이 없었다.
크게 낙담하며 제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남들도 그런 거야, 아님 나만 이런 거야. 다음은 드레곤이 돌아다니고, 영주가 있고, 이름이 알렉스나 카일이 되는 영어권 세계로 떨어지는 거 아냐? 아... 진짜 다음번엔 언어패치 제대로 해줘야 하는데.’
쓸데없는 희망사항을 중얼거리며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검에 찔린 자리는 적자색의 상흔으로 남아있었다. 날이 날카로웠던 탓에 뼈를 가르고 상처는 가슴에서 거의 등까지 닿아 있었다.
순간 열이 확 올라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을 다시 쳐다봤다.
지학(※15세)의 나이도 되지 않은 어린애를, 여자 손목도 붙잡아보지 않은 애를 이렇게 죽이면 과잉살상 아니냐고.
바람구멍이 난 옷깃을 단정히 여미며 쓰게 웃었다. 전생 시절 할머니 말씀으로는 사람이 큰 상처를 입고 죽으면 환생해도 그 자리에 좋지 않은 큰 반점이 생긴다고 했다. 사람은 곱게 죽어야 한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목에 있는 붉은 반점을 보여주시곤 했다. 이제 앞으로 내가 그 말을 하게 생겼다. 다시 태어나면 분명 가슴에 큰 흉이 있을 테니.
‘설양, 이 개새끼. 이럴 줄 알았으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걷어 차주는 건데.’
비통하다는 감정 이전에 약이 바짝 올랐다.
‘아 진짜. 그 새끼 딱 한 번만 때려봤음 좋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죽었는데. 숨이 끊어지기까지 고통이 짧았다는 점에 위로를 얻는 수밖에.
그만하면 충분히 쉬었다는 판단을 하고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넋 놓고 있다 그대로 먼지가 되어버리면 곤란하니 여기서 나갈 길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적에 써먹기 좋은 대처법 – 손바닥에 침을 뱉곤 손가락으로 튕겼다.
동서남북도 확실하지 않은 장소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으나, 저승에서 조난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침방울이 날아간 방향을 확인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기요... 여기 누구 없어요?!”
저승사자가 파업 중인가.
아니면 그간 이름 없이 살아온 여파인가.
평소 내 이름으로 불리던 ‘걸람’은 거지를 먹 냄새 나도록 부른 것에 불과해서 저승사자 명부에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저기요? 여보세요?’ 마구 외쳤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오류를 바로잡는 업데이트가 계속 지연되고 있는 건지 저승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나타난 건 흰옷 차림새의 망자였다.
가슴이 먹먹했다.
‘비명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선사도 나와 같이 죽었구나.’
하얀 옷엔 핏자국이 낭자했고 올려 묶은 머리는 풀어헤쳐져 산발이었다.
엎드린 자세였기에 내 쪽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 쥔 모양과 몸을 떠는 모습만으로도 품고 있는 분노와 좌절감이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하여 고통도 심해보였다. 신음하며 오른손을 뻗어 바닥을 세게 긁었는데 손등으로 검게 변한 핏줄이 도드라지게 솟아나온 게 보였다. 부풀어 오른 혈관은 금방에라도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터지면 새빨간 선혈이 아닌 먹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게다가 손만 저런 상태인 게 아닌 것 같아.’
숙이고 있는 목덜미에도 나무뿌리가 지나간 것 같은 검은 선이 보였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내 기척을 알아차린 건지 선사가 아, 아, 이러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가만히 도망갈 태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선사는 죽어 악령이 된 듯했다.
지금이다.
하지만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는 내 동작보다 선사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녀의 두 팔이 몸체에서 뚝 떨어져 나오더니 무슨 로켓처럼 날아와 도망치던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잠깐만! 잠깐만요! 선사님, 살살! 제발 살살!!”
어깨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애걸에도 아랑곳없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팔은 날 어디론가 끌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한참을 끌려가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졌을 적에 나는 거의 반 기절 상태였다.
산 사람도 아니고 망자였는데도 정신이 반쯤 날아갈 정도니 심각하게 빠른 속도였다.
환상통처럼 멀미가 났고 엎드려 구역질했다.
귀신이 된 주제에 이게 다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웩웩거렸고 초항성 워프를 마친 엔터프라이즈호 선원이라도 된 느낌을 원 없이 만끽했다. 두통에 어지럼증은 부록처럼 따라붙었다.
“택무군! 사령입니다! 사령이 여기까지!”
“조용히 하거라. 운심부지처에선 소란 금지다.”
“하지만 사령이!!”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오래된 큰 절간 같은 곳으로 장소가 달라져 있었다.
열린 창밖으로는 푸른 나무가 빼곡했고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머금은 공기는 서늘했다.
눈꺼풀을 깜빡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시야가 약간 더 밝아졌다.
건물 안쪽 문방사구를 놓은 서안 앞으로 꽤 젊어 보이는 청년이 앉아있었는데 용모가 따뜻하고 우아했다. 평소에도 예의바르고 점잖을 것 같은 사내였는데 나의 갑작스런 등장에 감정적으로 동요를 한 탓인지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다.
입구에는 개개인의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비슷한 흰옷을 차려입은 소년들이 서너 명 모여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일제히 손가락질하는 중이었는데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의 준수한 외모로 인해 그 삼감 없는 태도가 무례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잘 생기고 볼 일이다.
그나저나 어쩐다. 어쩌다보니 대치 상황이 되어버렸다.
밖으로 나가려니 입구에 선 소년들이 쉽게 길을 내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남의 집안까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날아들었지만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천천히 서책이 가득한 책장이 있는 쪽으로 물러섰다. 여차하면 책을 들어 던질 작정이었다.
간소하게 꾸민 방안에선 던질만한 물건이라곤 책밖에 없었다.
구석에 자리한 네발 향로는 크기나 무게로나 무기로 써먹기에 적합했지만 부숴먹기엔 고가품이었다.
양심이 있지, 정교하게 조각된 향로는 박물관에서 볼 법한 물건이었다.
“이럴 수가. 결계를 깨고 사령이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사령이 움직입니다!”
“택무군! 어떻게 하죠?! 공격할까요?”
애들이 더 난리가 났다.
그리고 나도 덩달아 난리가 났다. 금방 죽어 영체가 된 몸인데 책을 집어들 수 있을 리가.
“숙부님은 어디에 계시지. 명당에 누가 있느냐.”
서안에 앉아있던 자가 침착하게 운을 떼며 책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향해 강하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귀신인데 매우 잘 보이는 눈치다. 더듬거리며 책의 표지를 만졌을 적에 표정이 매우 나빴고, 손을 떼자 올라갔던 눈썹이 도로 내려온 걸 봐선 보이는 게 맞았다.
“저 사령은 초혼으로 불려나온 것이 아닙니다. 명당에는 지금 아무도 없습니다, 택무군. 선생님은 운심부지처 밖으로 외출 중이세요.”
그리고 바로 그때 낮은 탁자에 놓여있던 고금이 디링, 딩 소리를 내며 저절로 울렸다.
자리에 있던 사람과 귀신이 모두 놀랐다.
소년들에게 택무군이라고 불리운 사내가 내 쪽을 향해 다시 시선을 주었다. 마치 ‘자네가 그런 건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걸람도 그러했고, 나는 악기를 다루는 일에 매우 서툴렀다. 유일하게 잘 썼던 악기가 탬버린이니 말 다했다. 그나마 박자감이 떨어져 노래방에서 신나게 탬버린을 흔들다보면 부장님이 ‘곱게 말할 적에 내려놔!’ 호통을 치곤했다. 그런 내가 금을 뜯었겠냐고.
“방금 전, 그 소리! 문령이었나요?!”
소년 중 하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렇다.”
심각한 표정을 한 택무군이 금에서 난 소리가 문령이 맞다고 확인해줬다.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사부님’ 이라고...”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때까지도 내 어깨를 잡아당기고 있던 여인의 하얀 팔이, 투명하게 빛나던 선사의 조각난 몸이, 고운 고루가 되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걸 보았다.
스스로 혼백을 두 동강 내어 ‘사부님’ 이라 단 한 마디만 겨우 외치고.
더 이상의 힘은 남아있지 않다며 거품처럼 공기 중에 녹아내렸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