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혼백, 망령, 그리고 엉망진창
※ 오리캐×설양(그럴 리가!) BL 호러물입니다. 잔혹한 묘사 있습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나는 불을 끈 방안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커다란 쿠션, 감자 맛 과자봉지가 굴러다녔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차가운 캔 맥주는 테이블에 올라가 있었다. 이미 캔 하나를 해치운 직후라 배가 살짝 거북했다. 그 더부룩한 느낌에 맥주가 아니라 탄산음료를 마실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출근을 제대로 하려면 몇 시에 잠자리에 들면 좋을지를 생각하며 리모컨 버튼을 만지작댔다.
보고 있는 텔레비전 영화가 너무 재미가 없었다.
특수효과에 정성을 들여 난무하는 피보라가 어색하진 않았다만, 어리고 약해보이는 여자가 녹색을 띈 검은 즙을 토하고 쓰러지는 모습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엑스트라 쟤 지금 뭘 토한 거야? 설마, 녹즙이야? 빨간 물감도 아니고 녹즙? 저건 진짜 에바쎄바잖아.
카메라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쓰러진 여인을 클로즈업하여 잡아냈다.
배우의 얼굴은 희고 창백했다. 강남 미용센터에서 비용을 들여 점을 전부 빼버린 듯한 하얀색이었다.
자고로 피부가 고우면 인물이 사는 법이다. 코가 조금만 더 오뚝하면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조연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쳐요, 도망치라고요! 빨리 달아나!’
쓰러진 여자 뒤에서 허리 부분에 넓은 요대를 두른 한 장 차림새의 남자가 악을 써댔다.
남자는 부러진 검을 들고 있었다. 보고 있는 영화가 아무래도 중국 무협물인 모양이다. 그가 잇, 잇, 기합 소리를 내며 엑스 자 방향으로 부러진 검을 휘둘렀다. 동작이 힘든지 피가 쏠린 얼굴이 새빨갰다.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감자 맛 과자를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재미없다. 얼굴이 잘 알려진 유명 배우는 보이지도 않고 전부 엑스트라다.
얇게 기름에 튀겨진 감자가 경쾌한 파삭 소리를 내며 입안에서 부스러졌다.
‘내보내줘, 여기서 내보내줘~!!’
수십의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려가 대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런데 음향효과 감독이 그 장면에서 모든 소음을 소거했다.
두드리는 동작에 쾅쾅 소리가 빠지니 소금 간이 빠진 맹탕 국이었다. 쯧, 혀를 차고 다른 드라마를 보기 위해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어라. 안 되잖아. 건전지가 다 되었나.”
반복해서 눌러도 채널이 바뀌지를 않았다.
일어나서 직접 텔레비전을 조작해야 하나.., 귀찮은데. 먹통인 리모컨을 소파 위로 던져버리고 쿠션에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누웠다.
장면이 바뀌어 피눈물을 흘리는 괴물이 등장했다.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분장 담당자는 배우의 눈가에 붉은 물감을 바르는 것만으로는 인상적인 장면 연출이 어렵다고 여겼던지 코와 입가에도 붉게 칠을 했다. 없느니만 못했다. 코피가 주룩 흘러내리는데 무섭다는 느낌 이전에 바보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싸움 중 코피가 터지면 패배자라는 인식이 있어서다.
“제대로 좀 해라, 귀장군.”
누군가 타박을 했고, 분장한 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괴물이라고 단정 짓기엔 체구가 너무 왜소했다. 바짝 말라 어린애처럼 보였다. 기껏해야 10대 초반 정도나 될까, 감독 취향 정말 고약하다. 제대로 된 악당 캐릭터를 구축하려면 덩치가 큰 근육질의 배우를 썼어야지. 그런 면에서 배트맨에 나온 톰 하디는 최고야.
하품을 참고 있는데 롱 테이크 기법으로 10분 이상 살육의 장면이 이어졌다.
‘줄거리를 영 모르겠군. 누가 악당이고 누가 착한 사람이지? 아예 내 편, 네 편이 없는 거야?’
화면 속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어린 괴물이 잡혔다. 괴물의 어깨를 잡은 건 하얀 특수렌즈를 낀 엑스트라였다.
좀비? 중국 무협 영화인데 좀비? 여하간 도끼날 번쩍였고 아이의 목덜미와 어깨가 두 번 찍혔다.
충격을 받고 괴물이 쓰러졌다. 목덜미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야 하는데 제작진이 검열에 걸리는 걸 염려했는지 입고 있는 옷이 피로 흠뻑 젖어가는 모습으로 대체되었다.
그렇다고 환호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그저 겁에 질려 구르고, 뛰고, 담벼락에 매달렸다.
‘제발 그만해! 그만하라고!’
애원하는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하얀 특수렌즈의 엑스트라가 소년의 이마 한 가운데를 향해 다시 도끼질했다.
뇌수가 튀면서 소년이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담벼락에 매달려 있던 남자도 같이 풀썩 넘어갔다.
아니, 왜? 머리가 깨진 건 저쪽인데?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남자의 얼굴이 한쪽으로 툭 돌아갔다. 슬며시 벌어진 입술 틈새로 아까처럼 짙은 색의 녹즙이 줄줄 샜다.
설마, 녹즙 회사가 스폰서로 붙어서 그런 거야? 질감과 색채 묘사에 질겁했다.
‘□□□ □□□□□!’
어. 이 대사는 못 알아들었다.
‘당연히 못 알아듣지. 저건 중국어잖아. 그런데 왜 자막이 없어?’
고개를 갸웃하며 맥주를 한 모금 입안에 담았다.
‘응? 잠깐만... 방금 전까지 대사 다 알아들었는데?’
내가 언제 중국어를 할 줄 알았던가? 놀라워하며 입안에 물고 있던 맥주를 꿀꺽 삼켰다.
‘이릉노조야! 이릉노조가 분명해! 이릉노조가 부활했다!’
이 영화 메인 빌런 이름이 이릉노조인가? 녹즙 토하며 쓰러지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릉노조의 이름을 외쳤다.
“정말 이릉노조를 몰라?”
누군가 나에게 질문했다.
“이릉 난장강에서 사마외도로 이름을 드높인 그 자를 모른다고?”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이릉에 가본 적도 없다고. 그리고 소산은 작은 동네야.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소식이 전달되기까지 오래 걸릴 수밖에 없어.”
“기산 온씨는 알고? 사일지정 진짜 몰라?”
“모른다니까. 배추를 배달하던 애가 뭘 알아. 세상 어지러운 건 일부러 나서서 알고 싶지도 않고, 마을 어귀에 방이 붙어도 글자를 읽을 줄 모르거든. 한문 싫어. 한문 몰라. 나라말쏘아미 듕귁에달아 문쪼아와로 서르 소아모앗디 아니호알쏘아이.”
“까막눈이었어? 종이를 보면 매번 열심히 들여다봐서 글을 아는 줄 알았는데.”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그 정도는 알지.”
“그래선 전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지... 까막눈 맞네.”
그런데 댁은 뉘슈. 내가 지금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대화 내용도 이상하다. 소산? 배추 배달? 우리 회사에서 포장용기가 아니라 채소를 취급했다고? 언제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업무 과중에 의한 스트레스가 컸었나 보다.
피식 웃으며 벽에 걸린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일요일이라고 늦게까지 뒹굴고 놀면 월요일 아침이 지옥이 되어버린다. 발주 신청서 검토도 해야 하니 씻고 일찍 잠자리에... 어라, 시계 어딨어.
본가에서 대학생 시절부터 쓰던 벽시계가 없어졌다.
벽지에는 둥근 모양새로 변색된 얼룩이 남아 있었는데 걸려 있던 시계만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도둑이 든 건 아닐 테다. 싸구려였고, 디자인도 촌스러웠다.
그렇다고 해도 직접 재활용장에 버린 기억은 없으니 남의 손을 탔다는 느낌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람, 중얼거리며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풀썩 쓰러졌다.
‘응?’
무릎 아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예리한 날에 잘린 뼈가 제대로 힘을 낼 리가 없었다.
나는 머리를 산발한 채 바닥을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미역줄기처럼 흔들거리는 머리를 들었을 적에 공포에 질린 여자의 창백할 얼굴이 보였다.
“귀신아!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여자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실례잖아. 나는 귀신이 아니다. 직장인이다. 월요일 아침이 되면 만석 광역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다.
손가락이 죄다 잘려나가 엄지와 중지만 겨우 남은 손을 뻗어 여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씩씩하고 후끈거리는 건강한 기운이 여자의 몸에서 빠져나와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으아악~!!! 저것이 혼백을 먹었어! 혼백을 먹었다고!”
먹어? 혼백을? 그게 뭔 소리야.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건 편의점에서 산 파울라너야. 넌 맥주도 못 먹어 봤냐.
“도로 뱉어내! 뱉어내라고!”
끝이 갈라진 쇠고랑으로 남자가 내 몸통을 찍었다.
무쇠로 만든 쇠고랑은 크고 무거워 물리의 힘으로 내 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찢었다.
나는 이게 저예산 스플래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없었다.
왜냐면 고통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픔은 찌른 쪽에서 느낀 것 같았다.
사내의 눈이 확 벌어졌다. 그리고 헐떡이며 자기 가슴을 눌렀다.
또다. 이번에도 따뜻한 기운이 남자로부터 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남자의 입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검은 색조의 녹즙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사내는 숨이 곧 끊어졌고, 컬커덩 소리를 내며 쇠고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