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06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 오리캐×설양(아님!)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소설을 먼저 읽고 드라마 진정령 정주행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시간대 설정이 충돌합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검은색 깃발은 비를 잔뜩 맞은 잎사귀처럼 무겁게 축 늘어져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깃발 모서리를 잡고 잡아 올리자 모피 코트에 버금가는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수상한 건 절대 만지지 말라는 옛 어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표면을 문질러봤다.
소산에서 접하기엔 천의 재질이 매우 고급스러웠다. 촘촘하고 매끄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그 비싼 천에 마찬가지로 값비싼 붉은 염료로 그림을 그려... 잠깐.
깃발을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림이 아니고 글씨다. 한 획으로 끊어짐 없이 구불거리며 내려온 선의 모양새는 글자 ‘마(魔)’ 다. 중간 중간 기호를 덧붙이고 꼬리털을 붙였지만 분명히 글자였다.
코를 킁킁거리자 천에서 오래된 절간 냄새가 났다. 초피나무 추출물에 소금과 약재를 섞은 방부향이다.

“보아하니 부적이 맞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커. 크면 클수록 영험한 건가?”
선동요 사람들이 마물의 침입을 막으려고 부적을 잔뜩 써서 붙여놓았다더니 이쪽은 물량공세 대신 크기로 밀어붙이려는 듯했다. 깃발의 크기는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청룡기 정도 되었다. 우승고교 교장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폐막식에서 흔들어대는 그 우승기 말이다.

혹시라도 구김이 간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고 – 섣불리 만져 효력이 떨어졌다는 오해를 받는 건 사절이다 – 조용히 뒷걸음질을 쳐 깃발로부터 멀어졌다.
그렇게 일곱 여덟 걸음 떨어졌을 적에 등 뒤로 단단한 나무가 닿았다.
돌아서자 단단한 나무는 어느새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억!”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눈앞의 몸뚱이를 밀었다.
하지만 사내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꼼짝하지 않았고, 꼴사납게 그 반작용으로 내가 자빠졌다.
별이 뜨지 않은 시각임에도 눈앞에서 하얀색 점이 왔다갔다 움직였다.

하지만 끙끙 앓는 소리를 낼 때가 아니었다.
나무처럼 단단한 가슴이 설양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벌렁 누웠던 모양을 무릎으로 기는 자세로 바꿨다.
그는 자신의 몸에 누가 손을 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이몽룡의 하인 방자가 되어 비굴하게 마주 모은 두 손을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꼬리가 달렸다면 흔들었을 것이고, 없어도 흔들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싸구려처럼 보이는 미소를 짓는 게 아니라 서리처럼 차가운 낯을 했다.
시선은 오른쪽을 향해 있었고, 그 방향 끝자락에는 상복처럼 하얀 옷을 입은 인영이 있었다.
거리가 제법 멀어 오감을 수양하지 않은 내게는 상대방의 눈코입이 안 보였다.
그래도 한 점 때 묻지 않은 눈부신 하얀 색만으로도 나는 그 사람이 누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소 남씨의 문하생이었다.

“따라올 거라 짐작했다.”
“아니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사가 물 흐르는 고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래.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거구나. 그거 참 다행이네.”

나는 가끔 천하의 무뢰배인 설양이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라는 걸 종종 잊어먹곤 했다.
아무래도 중학생도 아닌 조폭 두목이 버스요금 시비 붙는 건 이상하다. 객잔에서 소란을 피우며 밥그릇을 깨고 대나무 광주리를 뒤엎는 사내가 몸속에 금단을 맺어 검을 사용한다? 그건 설정 오류다.
하지만 설양은 말단 조직원 같은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패검을 쓰는 자다.
그가 가진 검의 이름은 강재. 재앙을 내린다는 의미다.

쨍, 하고 맑은 소리가 들렸다.
갑갑한 검집을 탈출한 금속이 환호성을 내지르자 공기가 푸르게 떨렸다.
뒤를 따라 쨍, 소리가 더 들려왔다. 설영이 검을 뽑자 흰옷의 선사도 따라서 발검했다.
여인이 쓰기엔 검신의 길이도 길고 무게도 제법 있어 보였다. 하지만 커다란 검을 쥔 팔은 올곧았고 떨림이 없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검기가 실려 이마를 묶은 띠가 나풀나풀 솟구쳤다.

선사가 태세를 취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깃발은 마를 쫓는 부적이 아니에요. 그것은 흑풍기입니다. 일정 범위 안의 음령과 원혼을 불러들이고 사령을 한 지점으로 몰려들게 만들죠. 당장 없애지 않음 사악한 것들이 마을로 몰려가 사람을 공격할 겁니다.”
“알아. 그러라고 꽂은 건데 뭐.”
“지금 뭐라고 했죠.”
“짜증나게... 아줌마는 귀가 어떻게 되었어? 그러라고 꽂았다고.”
말을 마친 설영은 왼손으로 쥔 검집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겁니까. 공자.”
“재밌는 일.”
“장난치지 마세요! 배추를 운반하는 저 아이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제게 저 아이가 사악한 술법으로 만들어진 활시니 마을의 안전을 위해 서둘러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빨리 죽이자 여러 번 종용했죠. 하지만 저 아이는 활시가 아니었어요. 동자(※성관계 경험이 없는)이면서 이상하게 양기가 아닌 음기가 서린 몸이지만... 그렇다고 공자의 주장대로 죽여 없애야 할 존재는 아닙니다.”
“아줌마는 흑풍기 기척에 사로잡혀 길에서 벗어나는 아이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공자가 일부러 저 아이의 몸에 음기를 불어넣었을 수도 있죠.”
“아냐, 아냐. 그건 절대 아님. 못 믿겠음 맹세라도 할까?”
“장난치지 마십시오, 공자.”
잠시 말을 끊은 수사가 눈을 부릅뜨고 서슬 퍼런 검을 똑바로 들어 설양을 조준했다.
“난릉 금씨의 객원이라 하여 나이는 어려도 산하의 명사일 거라 여겼건만! 마를 물리친다는 깃발은 흑풍기이고, 사술의 증거라던 동자는 증거가 아니구나! 어이하여 내게 거짓을 알린 거냐! 목적이 무어냐!”
“목적 같은 건 없어.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고, 하고 싶지 않으니 하지 않는 것일 뿐.”

설렁설렁 대꾸한 설양은 검에 영력을 실었다. 그리고 그걸로 내 배를 푹 찔렀다.

아니, 이보세요. 선사님과 싸우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나를 왜 찔러?!!!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던지 머리에 타는 숯불이라도 올라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럼 재깍 기절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정신 줄 놓는 일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좌우 시야가 확 넓어졌다. 어깨 뒤의 풍경도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게 왜 이런가 곱씹어보니 참호 안에서 포탄 맞은 병사처럼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중이었다.
밭은 숨이 쉬어졌다. 헐떡거리며 배에 꽂힌 검날을 내려다보았다. 찰나와도 같은 시간에 끊임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어쩌지? 이걸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하지만 뽑으면 바로 사망 각이다. 중요 혈관을 건드린 상태라면 복부에 박힌 검날이 마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뽑는 순간 과다출혈로 이어져 1분 만에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다신 깨어나지 못한다.
어금니가 갈리며 까드득 소리가 났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어려웠다.
뭐야 이거, 이대로라면 앞으로 3분 남았다. 폐가 수축과 이완을 못하고 있다.

“공자! 지금 무슨 짓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흑흑! 악독한 년 같으니. 도를 닦은 몸으로 어린애의 몸에 검을 꽂다니!”
“뭐라고?!”
“이 아이는 활시가 아니란 말이다! 그냥 배추가게 머슴이라고! 너에겐 측은지심도 없는가!”
설양이 서럽게 우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우리 아걸 불쌍해서 어쩌노, 이러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미, 미쳤어?! 그대가 찔렀잖아!”
“내가? 내가 얠 찔렀다고? 누가 그래? 증인 데려와봐.”

자기가 안 그랬다고 입으로 잡아떼던 설양이 내 배에 꽂힌 자신의 패검 강재를 뽑아냈다.
순간 잔뜩 잡아당겨진 줄이 명료하게 튕기는 ‘텅’ 소리가 머리 안쪽에서 울렸다.
‘끝났군.’
살아남는 건 가망 없는 일이긴 했다만 맥이 탁 풀렸다.

인생의 주마등 그런 건 안 보였다. 꽃밭에서 날 반기며 손 흔드는 조상님, 이런 것도 없었다.
죽음이 임박하자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고 온몸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챙, 채앵, 굉음을 내며 설영의 검과 선사의 검이 충돌하며 폭발해도 그 소리가 아득히 멀었다. 파도치며 멀어졌다가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검의 궤적이 흐려지는 눈에 약간의 잔상을 남겼다. 빛나고 있다 – 검광은 낮에도 저리도 화사하게 빛이 나는 거였던가.
심장이 마지막 기력을 다 해 뛰었고, 한줌의 생명력이 눈꺼풀을 절반쯤 감게 만들었다.

“아아악!”
선사가 비명을 질렀다.
짐작컨대 저쪽도 끝을 본 모양이었다.
설양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내 작고도 여린 심장이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었다.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끝.

Posted by 미야

2021/10/22 17:03 2021/10/2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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