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09

제2장 혼백, 망령, 그리고 엉망진창

※ 오리캐×설양(아님!) BL 호러물입니다. 잔혹한 묘사 있습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돈 단위, 먹는 반찬, 풍습 이런 것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버려진 산적들의 요새 같은 장소에서 빠져나와 방향도 모르고 뛰고 보니 방향을 잃었다.
절도 중도 안 보이는 주변엔 모르는 산기슭에 평생 본적 없는 구릉이 펼쳐졌다. 이정표는커녕 제대로 닦여진 길도 안 보였다. 어쩌면 여기는 소산이 아닐 수도 있다.
제자리 뛰기를 하며 머리 위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해의 기울기가 신시(※오후3시~오후5시) 막바지라는 느낌이었지만 매일 보던 풍경이 아니니 확신은 가지 않았다. 이러면 동쪽과 서쪽 구분도 애매했다.

Y자로 갈라진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수맥 탐지봉처럼 들었다. 그리고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인 나뭇가지가 저절로 움직여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기를 기다려......는 개뿔.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휙 던져버리고 일단 설양의 망자지옥 아지트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채소가게로 돌아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일단 내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시변한 건 확실하니 어쩌면 외모도 흉측하게 변했을지 모른다.
살을 만졌을 적에 시체처럼 딱딱한 느낌은 아니었다만 설양의 말대로라면 죽은 지 이미 열흘이었다.
숨이 끊어지고 단 3시간만 지나도 피부색이 바뀐다. 박테리아의 활동으로 인해 가스가 차기 시작하면서 몸이 부푼다. 일반적으로 열흘이면 안구는 다 녹아버린 뒤고 항문과 입을 통해 내장 녹아내린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주술인지 뭔지 하는 것의 힘으로 부패의 진행이 멈췄다고 해도 눈의 총기는 잃었을 거다. 돌아다니는 주시들 전부가 눈깔이 허연 빛깔이었다.

‘마을 한 가운데서 검은자위가 사라진 눈을 치켜뜨고 있음 보나마나 사람들이 도사님을 불러 날 없애려 하겠지. 게다가 배추배달 도중에 실종되었으니 화가 단단히 난 송씨 부인이 직접 날 불살라 없애버리려 할 거야. 우리 배추 값 물어내, 소리도 지르고. 먹고 재워준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욕도 하고.’

주먹으로 이마를 치다가 이번엔 방향을 바꿔 구릉을 타고 넘어가기 시작했다.
허리 위까지 길게 자란 풀들이 파도치며 훼방했다. 그러든 말든 수풀을 헤치며 움직이는 속도는 줄지 않았다. 해가 지면 이동하는 일도 쉽지 않다. 등불도 없이 산속을 헤맨다는 건 ‘나 죽여 줍쇼’ 하는 말과 같은 뜻이다.
‘뭐, 이미 죽었지만.’
승냥이 같은 들짐승이 주시를 먹으려 할지 잘 모르겠다. 썩은 고기도 마다않는 애들이면 훌륭한 잔칫상이겠지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죽은 사람이면서 몸은 피곤하고 목이 말랐다. 배도 고파 따끈한 탕에 고소한 누릉지가 먹고 싶어졌다. 꾸르륵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탄식하며 밥과 물을 달라고 난리치는 뱃가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래선 마치 죽어본 적 없는 사람 같잖아.’
언제 죽은 적 있느냐는 식으로 몸이 반응했지만 딱 한 가지만은 달랐다.
펑펑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나왔다.

물을 찾아 인적이 끊긴 외진 길가에 위치한 우물가에 당도했을 적엔 두 명의 선객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행색으로 추측하자면 한 사람은 덫을 놓아 꿩이나 토끼를 잡는 사냥꾼처럼 보였고, 한 사람은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바느질 도구나 연지 같은 화장품을 파는 방물장수인 것 같았다.
나이가 많아 머리가 하얗게 센 방물장수는 대나무 보퉁이를 가까운 바닥에 내려놓은 채 품질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연초를 입에 물었고, 그 아들뻘 나이인 머리 지저분한 사냥꾼은 허리를 숙여 끈 떨어진 신을 임시로 수리하고 있었다.
나는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최대한 기척을 줄였다.

“당분간 이 짓도 못해먹을 거 같수다. 어찌된 게 사람이 없어, 사람이.”
사냥꾼이 투덜거렸다. 방물장사로부터 얻은 색끈으로 매듭을 묶어보지만 그게 영 신통찮은 눈치였다. 여자들이 머리를 묶을 적에나 쓰는 끈은 약해빠져서 힘을 줘서 묶으려 하면 할수록 올이 풀리고 찢어지려 했다. 사냥꾼은 이내 짜증을 내며 망가진 자신의 신발을 패대기쳤다.

“형씨도 그러하오? 나도 장사를 시원하게 말아 잡쉈지. 연지 하나 못 팔았소.”
“어휴... 어쩌겠수. 선동요에서 먼저 난리가 나더니 소산도 난리가 났다던데. 뿐만 아니라 수행자가 요술에 걸려 시변을 했다며 멀쩡한 대낮에도 시장에 사람이 안 돌아다녀요.”
“뭐요? 그게 참말이오? 수행자가 시변을 했다고? 그게 가능한가? 내가 알기로는 도를 닦는 분들은 거 뭐라더라... 안혼례를 치러 악귀로 변할 일이 없다 했는데?”
“노인장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네. 그거야 높으신 분들 이야기고. 듣자하니 밑바닥부터 고생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선자(※여성 수행자를 일컫는 말)라던데. 그럼 뻔한 거 아니겠소.”
“쯧쯧... 안혼례와는 거리가 멀었겠군. 예전에 내 귓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소. 안혼례 비용을 치르려면 집안 기둥 하나는 부순다고 하더군.”
“기둥 하나가 아니라 셋이오, 셋!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는 것보다 몇 곱절 더 들어간다오. 게다가 일곱 살이 넘으면 제 아무리 큰돈을 써봤자 안혼례도 효과 없다던데 차라리 그 돈으로 시귀를 막아주는 부적을 사고 말지.”

방물장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궁금해 했다.
“시귀를 막는 부적이 있소?”
“내가 어찌 알아!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그래도 부적인데 없는 것보단 좋을 거 아니오. 자, 이거 받으슈. 선동요에서 얻은 부적이오. 한 장에 열닷 푼! 엄청 싸다! 주시가 들러붙는 걸 막아준다고 하더이다.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해서 시변한 것들에게 딱 붙이면!!!”
“붙이면?”
“얌전해져서 움직임을 멈춘다고 합니다. 노인장, 하나 드려요?”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지 않는 곳까지 멀어졌다.
부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다음으로 이어진 내용이 섬뜩해서다.

“수행자까지 시변했으니 드디어 상씨 세가가 나서겠구먼. 지금까지는 그 정도의 일은 알아서 하라 분위기였지만 이젠 모르는 척할 수가 없겠지.”
“노인장 말씀이 옳아요. 시변한 수행자가 어디 보통 일인가요.”
“그럼 야렵은 언제쯤...”
“글쎄요. 이 근방 주민들이 겁을 집어먹고 밭일까지 포기한 채 죄다 문을 걸어 잠갔으니 늦어도 일주일 뒤엔 해결을 보겠지요. 오래 시간을 끌면 농사를 망칠 테니까요.”

이 세상에는 4대 현문세력이 운몽, 난릉, 고소, 청하 각 지방을 지배하고 있고, 이 망할 놈의 땅이 워낙에 광활한 탓에 여러 군소 토착세력이 틈새를 비집고 존재하고 있다.
저 사람들이 말한 상씨는 약양에서 세를 펼치고 있는 지방 토착세력이라 할 수 있다.
내 이해 방식대로라면 그들은 봉토를 가진 영주 대행쯤 된다. 잘 훈련된 사병을 데리고 있고 소출에 대한 세금도 가져간다. 그래서 주민들이 밭일을 거부하고 외출을 삼간다는 소식에 반응하는 거다.
문제는 저들이 검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전신갑옷을 입은 서양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행군하며 스켈레톤 해골병사를 썰어버리는 걸 상상해봤다.
큰일이다. 상씨가 주시들을 토벌하러 나오면 나도 모가지가 썩둑 잘린다.

우물에서 물 마시는 걸 포기하고 능선을 따라 높이가 낮은 산을 여럿 넘어갔다.
멀리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고, 짐승의 이빨소리 비슷한 신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쉬지 않고 걸었더니 어느새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었다. 저물어가는 노을이 야산에 붉게 불을 지르는 걸 지켜보며 뭉친 종아리를 주물렀다. 배달로 단련된 종아리가 적당히 하라며 난리였다.
이정표라도 보이면 오죽 좋으련만. GPS와 구글 없는 세계가 원망스럽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길을 찾아 산자락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큰 길로 나가면 장사치와 여행자들을 위한 표지석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희망사항이라면 부생이나 곡여라는 글자가 보였음 했다. 곡여는 소산을 기준으로 삼았을 적에 선동요보다 거리가 더 먼 마을이었다.

“이게 뭐야. 전에 봤던 우물이잖아.”
그렇게 헤매고 돌아다녔는데 원위치.
거짓말처럼 한 바퀴를 돌아와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사냥꾼이 집어던진 헤어진 신발 끈이었다.
넋이 증발할 것 같은 기분에 방물장수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있던 체력, 없던 체력 쥐어짜서 산을 몇 개나 넘었는데 제자리.
“귀신에게 홀렸나.”
불가능했다. 내가 지금까지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걸었던 게 아니다. 태양을 기준으로 삼아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구는 둥그니까 일직선으로 걸으면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온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미치겠네. 이러다가 아예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거 아냐?”
근심하며 먼지를 털고 일어나 1시진 가량을 더 걸었다.

“......”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로 되돌아왔다.
산적들이 집 짓고 살다 버리고 간 모양새의 산채 앞에서 말을 잃었다.
절반은 무너진 입구 앞에서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서있던 설양은 ‘산책은 즐거웠어?’ 손을 흔들며 물어왔다.
이러니 줄곧 추적하는 기척이 없었던 거다. 처음부터 내 신세는 어장 속 물고기였다.

“설 공자. 나는...”
목이 갈라져 피가 날 것만 같았다.
“됐다. 말 하지 마렴.”
내 앞에서 그가 풀피리를 입에 물었다.
피리릭 풀피리 음색이 울려퍼지자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모를 일백의 주시가 나를 포위하며 몰려들었다.

Posted by 미야

2021/10/27 13:02 2021/10/27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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