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Happy Birthday 07

똑바로 누워 배꼽 위를 손바닥으로 덮은 채 넓은 들판을 상상했다.
들이마시고, 내뱉고. 긴장을 풀고 호흡의 간격을 길게 만든다.

들판에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분다. 주위로는 이름 모를 꽃들이 드문드문 피어있다.
공기의 냄새를 상상하고, 눈에 보이는 꽃의 모양을 상상하고, 발바닥에 닿는 풀의 부드러운 감촉을 상상한다.
나는 맨발로 들판을 걷고 있고, 이곳은 갈증도 배고픔도 없는 세계이다.
이 평온함은 마치 저승을 연상시킨다. 호흡에 맞춰 다시 한 걸음 천천히 내딛는다.

「그거 전생요법 아니냐? 최면에 빠져들어 전생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아니오. 마철 선생님. 이것은 잠이 잘 오는 비법입니다.」

나는 전생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만약 전생이 실제하고, 전생의 업보가 현생에 닿아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먼 과거의 내가 아닌 나는 착한 일과는 거리가 먼, 임금님의 수랏상에 몰래 독을 올린 대역죄인 정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죄 없는 기미상궁이 임금님 대신 덜컥 죽어버린 거지.」
「정말로 전생을 보고 온 것처럼 얘기하네.」
「응. 들판의 끝까지 걷다 보니 마침내 내 전생이 나오더라. 나는 궁궐에서 일하는 소주방 나인이었고 주상전하가 잡수실 쌀을 고무장갑도 없이 씻었지.」
「뭐야, 나기. 아까는 잠이 잘 오는 비법이라며.」

물론 대충 꾸며낸 얘기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전생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전생이 있었다고 믿는 순간 비참해지니까.
따라서 아무도 없는 들판을 나 홀로 헤맨다. 내가 꾸는 꿈속의 그곳에는 곤충도 없고, 새도 없으며, 날짐승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이며, 그리하기에 그곳은 낙원이다.
심호흡을 반복하며 두 팔을 벌린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어쩐 일인지 코를 간질이는 꽃향기가 인공적인 그것으로 더욱 강해졌다.
이럴 리가 없다. 잠결에 코가 실룩실룩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졌다.
누가 내 낙원에 페브리즈 뿌렸어. 그것도 한통 다 뿌렸어.

얕게 잠들었다가 덕분에 도로 깨어났다.
『어...』
잠들기 전까지는 나 혼자였는데 잠에서 깨고 보니 혼자가 아니다.
뇌 속의 전기배선이 아직 혼선을 일으키고 있는 와중에 내가 자취방 문을 잠그는 걸 잊어버렸나 잠시 생각해본다.
잘 모르겠다.

『이 슬비?』
목이 잠겨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 나이 먹은 노인네들이 자리끼를 끼고 잠자리에 드는 건가 보다.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슬비야. 너 여기서 뭐 해.』

나에게서는 옅게 땀 냄새가 나고 있는데 녀석에게서는 진한 바디워시 냄새가 났다.
속으로 아이고 맙소사 신음했다.
남자친구와 격렬하게 살을 섞고는, 흔적이 남지 않도록 꼼꼼하게 샤워를 한 뒤에, 한밤중에 옷을 다시 입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소꿉친구 자취방으로 이동하여 그 옆으로 슬그머니 몸을 누인다... 정상 아니라고!!

『마철은 어쩌고.』
『몰라.』
이 지지배가! 보통 남녀가 거사를 치루면 아침까지 같이 있어주는 게 상대방에 대한 의리 아니야?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섹스 했으니 바이바이, 이러는 게 세상 천지에 어딨노.
센터에서야 남녀가 유별하니 한 방에 있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지만 우린 이제 다 컸잖아.
애기 만들기 했음 그냥 그 자리에서 자라고! 좀 자라고! 그런다고 아무도 안 혼내.
『아님 혹시 너희 둘 싸웠어?』
『안 싸웠는데.』
잔뜩 갈라져 졸음이 묻어나오는 내 목소리와는 달리 슬비의 목소리는 쌩쌩했다.

팔을 위로 뻗어 1.5V 건전지로 작동하는 중국산 자명종 시계를 붙잡았다. 초록색 형광물질이 칠해진 시계의 바늘은 새벽 4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못해도 4시 전후는 되었다는 뜻, 메이드 인 차이나라서 칼처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진 않는다. 아무튼 밖은 아직 컴컴하다.
나는 배게 위로 도로 머리를 파묻었다.
다시 푸르른 들판으로 날 보내주오.

『출근은 어쩌려고.』
『시간 되면 갈 게.』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이야... 다음에는 여기로 오지 말고 집으로 바로 가.』

대학교에 진학한 마철과 달리 슬비는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작은 디자인 계열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빈둥거리는 나야 방바닥 장판인양 들러붙어도 크게 상관없지만 그녀는 정해진 시간이면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고 반드시 지하철에 올라야 한다.

「힘들 텐데.」
이런 식의 자기학대는 미래를 망칠 뿐이다.
그렇다. 자기학대다.
멀쩡한 집 놔두고 방황이라니.
뿐만 아니라 꼬박 밤을 새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슬비가 슬며시 몸을 붙여왔다.
『나기... 괜찮으면 주말에 같이 가구를 사러 가지 않을래?』
『가구? 뜬금없게... 화장대라도 사려고?』
『화장대라니. 나기는 립스틱도 안 바르면서 화장대가 필요해?』
뭔가 서로 말하는 게 어긋나는 느낌이다.
『당연히 필요 없지. 지금도 좁아 죽겠는데 어딜. 밥상을 놓을 공간도 없구먼.』
『그럼 냉장고를 치우면 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화장대를 놓기 위해 냉장고를 버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기가 막혀서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새카만 어둠 속에 눈코입도 알아볼 수 없는 인영이 내 옆에 바짝 붙어있다.
그 모습이 꼭 괴담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져 약간은 무서워졌다.

혹시 꿈인가?

불안해져서 검게 보이는 살덩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봤다.
말캉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것이 허깨비라는 의심은 채 가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슬비?』
강요하듯 잡아당겨져 어느새 내 손바닥은 여인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자 느리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늦가을 한기처럼 서늘한 체온과 더불어 나에게로 흘러 들어왔고, 나는 두려움에 참지 못하고 밭은 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Posted by 미야

2019/01/29 15:37 2019/01/2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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