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Happy Birthday 05

소 유님을 만났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다.
슬비는 그 날 내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나간 줄 안다. 더운데 어디를 가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냥, 이라 대답했고, 헤진 운동화 대신 굽 낮은 갈색 에나멜 단화를 신었을 뿐인데 그렇게 착각했다. 물론 나는 이를 바로잡을 마음이 없어서 열심히 하고 오겠다는 의미로 방긋 웃어주었다.

아마도 내 어머니 – 소 유의 사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 가의 피를 이었음에도 아무런 능력이 발현되지 않은 까닭에 오래 전에 밖으로 내친 딸이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을 해오더군요, 지금에 와서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난감하게 되었지 뭐에요, 난잡하게 몸을 굴린 나머지 급하게 임신 중절 비용이 필요해진 건 아닐 거라 믿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수다를 떨진 않았을 거다.
가문의 수치, 혈통의 배반.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일체 입을 열지 않는 그녀다.
개인비서에게 스케줄을 조정하라 지시하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을 것이다.

여기서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연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소 가 내부에 몰래 심복이라도 심어놨나.」
10대 가문들끼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은 예전부터 유명해서 운전기사나 집사 같은 고용인을 포섭하여 정보를 빼내는 일은 제법 흔하다.
「하지만 요금 같은 시대에 세작은 너무 고전적이지... 어쩌면 CCTV를 해킹했을지도.」
포섭 상대가 이중첩자의 가능성도 있는 만큼 요즘엔 사람이 아닌 첨단장비의 힘을 빌린다.
공공장소 CCTV 해킹이 불법행위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면 인공위성도 띄우는 마당에. 그만한 재력과 권력이 있는데 수단을 마다하는 게 이상하다.

「그래봤자 소 가는 아픈 손가락이잖아.」
열 손가락 중에 깨물면 가장 많이 아파하는 손가락이 소 가라는 우스개 얘기가 있다.
3대를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절부터 피가 옅어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불륜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던 젊은 후계자가 자동차 전복 사고로 사망한 게 기폭제였다. 상상력이 오지게 훌륭한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명망 높은 집안의 후계자 죽음은 어느새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 자살로 둔갑했고, 가쉽지 기자들은 그가 왜 자살했는지를 두고 쉬지 않고 똥을 배설해냈다.
그 많고 많은 똥 중의 똥, 숙변 중의 숙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게 혈통의 약화다.
대한민국의 내놔라 하는 열 손가락 가문에 들기엔 저들의 피가 옅어졌고, 이에 견딜 수 없는 압력에 시달리던 소 가의 후계자가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며 방황을 하다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나야 간통을 저지르던 여배우가 헤어짐의 대가로 알토란같은 골프장 소유권을 요구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자동차가 급발진 하도록 조작을 했다는 쪽이지만, 알게 뭐람. 어느 쪽이든 구린내가 진동하는 건 마찬가지다.

여하튼 가볍게 콜록 기침했다.
『누구에게 들었어? 내가 소 유 님을 만났다고.』
『들었다기 보다는 봤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민이 천장을 향해 짐짓 손가락질 했다. 그러니까 가게 안에 설치된 CCTV 화면을 봤다는 얘기다.
범죄라는 걸 알면서도 진짜 당당하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봤는데.』
『음...... 어쩌다보니?』
인마 너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아 대한민국이 이 모양 이 꼴이다.

뺨에 바람을 집어넣고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민이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진짜로 돈 문제? 앞으로 다신 귀찮게 구는 일 없을 테니 돈을 주세요, 이런 거야?』
『알겠어요, 댁의 아드님과 헤어져 드릴게요, 거기서 내가 그랬을 거 같냐?』
『나야 모르지.』
이쯤해서 나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진짜 뭘까, 얘는. 표정으로 보면 단순 재미로 이러는 것도 아니다. 아침 드라마에 푹 빠져서 다음 줄거리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시청자라면 이보다는 조금 더 흥분한 모습이어야 한다. 민은 반대로 법률 조언이 필요해 변호사 사무실을 노크한 사람 같았다. 즉,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엔 돈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민.』
『하루 5천만 원 호텔 투숙비에 벌벌 떠는 네 주제에 100억을 불렀을 거 같지가 않아. 기껏해야 10억 정도겠지. 근데 10억이면 솔직히 말해 푼돈이나 마찬가지거든. 그 걸론 강남 아파트 한 채 못 사잖아. 그런데 그 푼돈 요구에 듣고 있던 소 유 님 반응이... 뭐랄까.』
극적인 효과를 내고자 함인지 한 박자 쉬고 말했다.
『30cm 칼날의 흉기로 배가 쑤셔진 거 같더군.』

나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입은 웃었다.
직업 배우 앞에서 나 같은 민간인이 가짜 웃음을 지어봤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무척이나 당황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우와... 진짜 오랜만에 보네, 데드맨 스마일.』
말로는 감탄하는 것 같지만 행동은 정 반대다. 민은 검지와 엄지를 잘게 구부려 좁쌀을 묘사했다. 콩도 아니고 좁쌀이었다. 아니면 그보다 훨씬 작은 겨자씨던가.
『그런데 무지 형편없어. 동공이 그렇게 커지는데 누가 속아.』
민은 티끌을 묘사하는 손가락을 눈앞으로 훅 들이밀었다.
『딱 요~ 만큼.』
그리고 후, 입김을 불어 있지도 않은 먼지를 날려버렸다.
『이 정도라고.』

나는 속으로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소 유 님을 만나서 뭐라고 했어? 나기.』
나에게는 교감신경을 조정하는 능력 같은 건 없다. 얇은 가면처럼 덧씌운 얼굴이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웃었다. 그리고 삼 곱하기 팔은 이십 사.
『네가 왜 그걸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어, 민.』
『응, 계속해.』
『사생활이라고. 사. 생. 활.』
『그래서 소 유 님에게 뭐라고 했다고?』
『아... 진짜! 시덥지않은 얘기만 했어. 날씨라던가, 더위라던가... 자외선 차단제라던가.』
『과연.』
『진학에 대해서도 얘기했어. 그럴 필요를 못 느껴 대학교에는 가지 않겠노라 말씀드렸지. 공부를 잘 했던 것도 아니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아직 없고 하니까.』
『그리고?』
『에어컨 냉방병과 레지오넬라균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또.』
『허리 아픈 사람의 수면 자세와,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해로운 비타민 세 종류...』
『시시하군.』

말꼬리를 자르며 민이 혀로 쯧 소리를 냈다.
『나기. 내 판단에 의하면 너는 머지않아 곧 죽을 목숨이야. 네가 무슨 엉뚱한 사고를 쳐서 명줄이 짧아지게 되었는지, 솔직히 나는 그리 알고 싶지 않아. 하지만 물비린내 진동하는 우중충 네 친구들은 나와는 사정이 달라서 그 이유를 반드시 알고 싶어 할 거다. 어째서냐고, 무엇 때문이냐고.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하게 될 거야, 나기. 허리 아픈 사람의 수면 자세와,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해로운 비타민 세 종류 탓이라고.』
『...』
『그럼 그 두 사람 반응은 어떨까. 상상을 해봐, 나기.』
민의 목소리가 사막의 그것처럼 건조해졌다.
『그 중에서도 슬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을 해보라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슬비느ㄴ.』
여기까지 제법 심각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목소리가 끊겼다.

Posted by 미야

2019/01/15 13:33 2019/01/15 13:3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7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165 : 166 : 167 : 168 : 169 : 170 : 171 : 172 : 173 : ... 1947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52378
Today:
0
Yesterday:
30

Calendar

«   2022/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