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Happy Birthday 06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혀 짧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목소리로 동요가 울려 퍼졌다.
들려온 노랫가락은 순전히 환청이겠지만 – 다 큰 성인 남자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곰 세 마리 동요를 부르면 정신 나간 사람이다 – 두 발로 우뚝 일어선 곰이 팔을 뻗어 한손으로 농구공을 움켜쥔 모습만큼은 분명 환각이 아니었다.
여기서 잠깐. 민의 머리통을 농구공에 비유하는 건 사이즈 면에서 실례다. 배구공으로 고치겠다.

아빠 곰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슬비가 뭐.』
그리고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다 튀어나오도록 꾹 힘을 주었다.

수박 통이 작살나면서 붉은 속살이 사방으로 퍼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다만 여기서 박살나는 쪽은 어디까지나 민이 아니다. 영화를 봐도 이런 경우 토벌을 당하는 편은 인간이 아닌 괴수다. 킹콩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추락한다고 대본에 적혀져 있다.
그러니 녀석도 아는 거다. 실제로 곰에게 머리를 통째로 잡힌 민은 불쾌한 감정에 눈썹을 꿈틀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위협은 못 느껴도 조여진 머리는 꽤 아플 텐데, 순간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야, 마철이 형. 정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합격했다고 들었어. 입학 축하해.』
『나 지금 2학년인데.』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시간 참 빠르네. 미안.』
『괜찮아. 그런 것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암튼 축해줘서 고맙다. 그러고 보니 너도 헐리웃에 진출해서 메이저급 영화 찍게 됐다며. 잘 됐다, 인마. 무릇 사나이라면 좁은 땅덩어리에서 성공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세계로 나가야지.』
『형은 연예계 뉴스는 전혀 안 보는구나. 배역이 FBI에게 총 맞아 죽는 조연급 악당이라고 해서 두고 볼 것도 없이 취소시켰는데. 그것도 6개월 전에. 진짜지 미국 놈들 이중성은 쩔어. 인종차별은 안 된다면서 동양인 취급은 거지야.』
『영화 디렉터를 욕할 일이 아닌 것 같구나, 민아. 네 이미지로는 수사관 역이 안 어울려요.』
『이미지를 따지면 형도 유도나 레슬링 계열이지 정치외교학과는 아니야. 고릴라가 정치라니. 학점 따는데 안 어려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덕담 비슷한 걸 나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이다.

어쩌라고.
나는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먹은 음식이라고는 설탕이 들어간 커피와 유통기한을 하루 넘긴 편의점 에그 샌드위치가 전부다. 그러니 일단 밥부터.
『마철아. 쟤 머리에 힘 줘서 헤어 스타일링 했는데 그럼 왁스 묻어. 손 떼라고.』
『윽!』
『민아. 널 따라온 극성팬들이 아까부터 와이파이 찾고 있더라. SNS에 사진 올릴 것 같은데 내버려둘 거니?』
『젠장.』
뜨거운 주전자를 만졌다며 마철이 손을 떼어냈고, 동시에 눌린 머리가 된 민이 겁대가리 상실한 무수리를 잡고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어, 이것으로 게임 끝. 도망치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고 그럭저럭 뷔페식으로 차려진 테이블 위의 음식은 한눈에 봐도 죄다 인스턴트였다. 튀김만두, 냉동잡채, 스낵과자, 도넛, 콜라, 뼈 없는 팝콘치킨... 애들 입맛이었다. 쌀밥과 잘 끓인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며 전자렌지로 해동시킨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이쑤시개처럼 입에 물었다.
김밥도 있기는 했다. 맛이 없어 보여서 문제지.
극혐으로 김밥 안에 길게 썬 오이가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아우성을 치던 위장이 도로 얌전해지려 했다. 나는 식빵 속의 건포도만큼이나 오이가 싫다.
『죽어라, 오이.』
그렇게 욕을 하며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써서 김밥 안의 오이라는 녀석을 푹푹 찔러 테러하고 있는데 누군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뜯어 말렸다.
『먹을 거에 화풀이 하면 못 써.』

나는 여전히 그날 아침 내리던 비의 냄새를 기억한다.
작은 체구, 하얀 원피스.
붉게 손자국이 남은 마른 허벅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무언가를 간절하게 호소하던 소녀.

『아우러우음.』
『입에 음식 넣고 말하는 거 아냐.』
『아움.』
『어휴, 진짜. 못 말린다니까.』

슬비는 나와 달리 입과 눈이 항상 같이 웃는다. 그래서 가짜라는 느낌이 없다.
슬비가 웃으면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행복해서 웃은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 미소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초록 가득한 정원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 송이 작은 국화와도 같아서 모르는 새 손에 쥐어 문질러 짓이기는 일 없도록 나는 늘 신경을 쓴다.

『화풀이 같은 게 아냐. 이건 편식이라고.』
『오이 비누는 곧잘 썼잖아. 나기는 오이가 싫어?』
슬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욕실에서 맡던 비누 냄새가 떠오른 모양이다.
『이 경우 냄새가 아니라 맛이 문제지, 슬비. 오이는 쓰잖아. 그리고 비누도 굳이 좋아서 골랐던 건 아니야. 오이 비누 가격이 가장 저렴하다고. 장미향이나 라벤더향보다 30% 더 싸.』
돈이 웬수다 – 라고 후렴구를 외치려는데 손목이 잡아당겨졌다.

민은 여전히 가게 안을 방황 중이었다. 시중들던 무수리들을 일종의 창병처럼 세우고 – 여자니까 물리적으로 밀쳐지는 일은 없을 거라 판단한 듯하다 -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다가오려 했다.
그런데 의외로 디펜스가 만만치 않았다.
마철은 여자애들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대신 꾀를 냈다.
『유명배우 싸인 받아가세요. 이런 기회는 두 번 없어요. 감사합니다. 오늘 제 생일이에요.』
카페의 문을 활짝 열고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소란이 일었다.
민을 알아본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가게 바깥으로부터 꾸역꾸역 달려들었다.
생고기를 발견한 좀비 떼의 움직임이다. 몽둥이로 격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길 지경이다.

『일단은 피하자.』
슬비가 속삭였다.
작고, 연약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자의 입술이 귀에 닿았다.
귀 안이 따뜻하게 데워진 습기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민이 시비를 거는 것 같더라.』
『쟤가 나에게 시비 거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신경 꺼, 신경 꺼.』

기둥 뒤편에 숨은 채 좀비 떼에게 휩쓸려가는 인기배우의 최후를 지켜봤다.
내 시선을 느낀 민이 표정으로 욕하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려보였다.
손가락에는 손가락이다.
나는 엿 드시라며 가운데손가락을 들어보였다.

Posted by 미야

2019/01/21 11:20 2019/01/2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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