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듬성듬성 연결되는 망측한 꿈을 꾸는 중이었다.
낡은 버스를 타고 달리는 중 손을 들어 신호하여 도중에 내렸는데 아뿔싸, 세상은 건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하늘은 당장에라도 방사능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형광 빛 진한 연녹색이었다.
어디서 핵폭탄이라도 떨어졌던가. 아님 적대적 관계의 외계인 우주선이 지구를 향해 유해한 광선을 발사했는가.
어딘가에 있을 생존자를 찾아 마른세수를 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오른쪽 신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좌우 발높이가 틀리다는 위화감에 눈썹을 찡그리며 내려다보니 양말에 구멍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보였다.
까딱까딱 움직이자 벌어진 틈새로 발가락이 머리를 내밀고 튀어나오려 했다.
음... 그렇다면 일단 바느질을 하여 양말을 꿰매야할 것이다.
그런데 마이클은 요술처럼 쨘, 하고 튀어나온 반짓고리 상자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는 대신 커다란 가위를 골라 엄지발가락을 자르려 했다.

안 돼, 안 돼. 내가 지금 뭘 하려는 거지. 내 발가락은 소중하다고.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

『미키, 깼어? 일어나봐. 밖에 누가 왔어. 아까부터 계속 노크하고 있다고.』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누군가 그의 발가락을 오락기 버튼처럼 붙잡고는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미키. 일어나. 아홉 시간이나 잤음 충분하잖아.』
아직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미키! 마이클!』
그러나 여전히 남자는 비몽사몽이다. 신음하며 이불 속에서 뒤척일 뿐, 잔뜩 찌푸린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려 했다.
 
『쳇. 시체구먼.』
하는 수 없이 정신 못 차리고 잠에 취한 집주인을 대신하여 시아라가 문을 열기로 했다.
『알았어요, 나갈게요. 그러니 그만 좀 두드려요.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항의한다고.』
물론 체인을 걸어 안전장치를 해두는 걸 잊지 않았다. 이 근방은 치안이 좋지 않은 편이라 피자를 배달하는 척하며 강도짓을 하는 일이 제법 흔하다. 배달원이 쓰는 빨간 모자만 보고 무심코 문을 활짝 열었다간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그 즉시 셔츠를 찢게 된다. 여기서 더 나쁜 건, 빈집털이범은 금품만 노리지만 배달원을 위장하는 녀석들은 무심코 문을 열어준 여자들에게 몹쓸 짓을 하기를 즐긴다는 거다.
시아라는 올해 열 두 살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자였기에 강간의 위협에서 그다지 크게 자유롭지 못했다.

『어...? 그게. 이상하네. 선배는 미혼이라고 했는데.』
좁게 벌려진 틈새로 경찰관 제복을 입근 키가 큰 젊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생각지 않게 등장한 시아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매우 낮은 눈높이로 보이는 어린이의 정수리를 볼 거라고 생각을 못했기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저어, 있잖아. 내가 지금 마이클 윈저 씨를 찾고 있는데 실수로 건물 호수를 착각한 걸까? 아가씨.』
『착각하지 않았어요. 집은 잘 찾아 왔어요.』
그 첫 번째 감상. 이 남자, 치아 미백했다.
『그리고 나는 아가씨가 아니에요.』
두 번째 감상. 열 두 살 여자아이를 습관적으로 꼬시려 한다. 바람둥이다.

범죄율이 높은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녀는 피부로 학습한 그대로 행동했다. 그러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낯선 방문자를 경계했다. 사실은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이 동네 분은 아니군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쪽은 누구시죠?』
『저런, 그렇게 쏘아보면 슬퍼지는데.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귀여운 꼬마 아가씨. 내 이름은 리처드 그레이슨이고 괜찮다면 딕이라고 불러주렴. 마이클 선배와 같은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단다. 마이클 선배가 안에 있으면 불러줄 수 있겠니?』
그러면서 경찰 배지를 무슨 고양이 장난감인양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이거 보렴. 멋지지? 이거 진짜란다.』
글쎄다, 장난감 권총을 가지고 노는 다섯 살 소년들은 좋아하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하여 세 번째 감상. 이 남자, 재수 없다. 얼굴은 엄청 미남이어도.

『이번 주는 야간 근무에요. 출근 시간은 아직 멀었고 미키는 여전히 자고 있어요, 경찰 아저씨.』
『딕이라고 부르래도.』
『죄송하지만 처음 뵙는 분을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개방적인 성격이 아니라서요, 제가.』
하도 흔들어 제대로 관찰하기 어려웠던 경찰 배지에서 시선을 뗀 소녀는 차갑게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썩 좋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오, 나도 알아. 하지만 급한 일이라서. 선배의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을 방해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급한 일이라는 게 뭐죠. 혹시 빌린 돈 받으러 온 거에요?』
『응? 빌린 돈? 전혀 아닌데.』
『그렇담 다행이네요. 우리 미키는 기억력이 나빠서 돈이나 물건을 빌려도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그러니 미키가 헤헤 웃으며 손바닥을 벌리면 그레이슨 씨는 그 즉시 귓구멍을 막도록 해요.』
남자는 떫떠름하게 웃었다.
『어... 그래. 충고 고맙다.』
『별 말씀을. 그럼 용건은 끝나신 거죠? 자, 그럼 안녕히. 만나서 반가웠어요.』
『뭐?! 기다려! 아니야, 아가씨. 아직 문 닫지 말라고. 어이! 뭐가 용건이 끝났다는 거니!』
이게 아니다 싶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이마를 찌푸렸다.

『두 사람 다 시끄러. 내 집인데 어째서 내 집에서 마음대로 쉴 수가 없는 거야!』
비번인 날엔 작정하고 침대에 누워 이불 밖으로 꼼짝하지 않는 게으른 사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 게야... 아아. 내 이불, 내 베개.』
관속에 드러누워 30년 정도 죽어있었음 좋겠다.
그러든 말든, 이름이 산드라인지 샌디인지 하는 어린 계집애는 허락도 없이 이불을 걷어 반으로 접었다.
낙원 박탈.
것보다 열쇠도 없이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그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4층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산드라인지 샌드라인지 하는 이 어린 소녀는 정체가 메타휴먼이라 콘크리트 벽을 간단히 통과할 수 있는 건가? 메타휴먼이라서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의 냉장고를 열고, 그가 돈을 주고 구입한 생수병의 뚜껑을 따고, 식탁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드는 걸까?
남의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마치 자기 집인양 행동해도 그닥 개의치 않게 여기곤 했지만 언젠가 그런 일이 가능하게끔 만든 재주에 대해 작정하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산드라.』
『내 이름은 산드라가 아니야.』
『알았어, 샌디.』
『시아라다! 이 멍청아!』

그들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리처드 그레이슨이 손바닥을 짝 쳤다.
『그렇군. 이제 알겠다. 저 소녀는 선배님의 여동생이었군요.』
『아닌데.』
『응?』
『얘랑 나는 완전 남남.』
마이클은 냉장고 문을 열고 있는 시아라와 자신을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턱이 빠져라 하품도 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웃사촌 비슷한 거야. 쟤는 이 건물 2층에 살고 있지. 아님 도둑이거나... 어, 산드라. 그 피자 조각은 내가 먹으려고 남겨뒀던 거야. 너무하잖... 야! 베어 물었던 걸 도로 접시에 뱉지 말랬지! 어휴, 저 말썽꾸러기 지지배!』
버럭 고함지르다가 이게 아니라 생각이 들었던지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아냐, 아냐. 이게 아니지. 지금 우리가 저 망할 꼬맹이 얘기를 한가롭게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잖나. 것보다 무슨 일이야? 신참. 허락도 없이 우리 집에 제복 차림새로 쳐들어오고... 내가 사전에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휴일근무는 지옥에나 가라. 추가 근무? 엿 드셔. 시간외 수당은 시의 재정 상황을 악화시킨다. 그러니 딕 그레이슨 순경 나리, 난 지금 매우 궁금하다네. 지금 자네는 무슨 까닭으로 평소 내 신념과 철학을 물 말아 잡수시라 하고 있는 건가?』
구석에서 딱딱하게 굳은 피자 조각을 우물거리던 시아라가 추임새를 넣었다.
『같잖은 신념과 철학.』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양반다리로 앉은 마이클은 목에 핏줄을 세웠다.
『이거 왜 이래! 조물주도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쉬셨단 말이다!』
그래봤자 범죄자들에겐 남의 일이다. 그들은 휴식이라는 걸 모른다.

TV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켜기가 무섭게 요란한 경광등 소리가 배경음으로 들려나왔다. 움찔 귀를 접은 마이클은 음량 조절 버튼을 재빠르게 세 번 연속 눌러 녹색의 바가 거의 바닥으로 내려오도록 만들었다.
흥분한 남성 리포터가 어디서 전쟁이라도 났다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하단부에 자막으로 상세 설명이 흘러나왔기에 그닥 상관없었다.
『뭐시여, 내셔널 밴코프 은행에 무장 강도? 거 참...』
그리고는 침대에서조차 풀고 있지 않았던 싸구려 손목시계로 눈을 내리깔았다.
4월 20일. 오후 4시 50분.
순전히 버릇이다. 생활 기스가 잔뜩 생긴 투명한 유리판을 손톱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 시계 초침이 한층 정교하게 움직이게 되리라고 믿는 것처럼.

『인질이 무려 스물 여섯이래요.』
『그래서 뭐. 아직 근무시간도 아닌데.』
『선배...!!』
리처드 그레이슨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를 나무랐지만 마이클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놔, 썅.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네놈이 원래 굴러다니던 블뤼드헤이븐에선 분위기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스타 시티라고. 우리 같은 말단은 은행 강도가 헬기를 요구하며 인질극을 벌이든, 엉덩이를 까고 고추장 쌈장 춤을 추든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이다. 기껏 지원 나가봤자 도로 통제가 하는 일의 전부인데... 쳇.』

- 그리고 어차피 이쪽에서 힘을 쓰기도 전에 히어로가 알아서 다 해결해줄텐데 뭐.

속말을 삭히며 굴러다니는 셔츠 안으로 팔을 꿰었다.
옷에서 꿉꿉한 냄새가 났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다. 게으름병이 도저 빨래를 사흘 가까이 하질 못했다.

단추를 채우고 있는데 소매 끝자락에 묻은 검붉은 얼룩이 보였다.
토마토 소스 얼룩일 거라 여기며 손바닥으로 얼룩을 문질렀다.
그러자 녹슨 쇠 냄새를 풍기는 가루가 자극을 받고 아래로 떨어졌다.


*** 애니 영저스티스를 너무 재밌게 봤엉용.
1,2화 통합. 1회 분량을 한글로 1페이지로 잡았는데 너무 짧군요.

Posted by 미야

2016/05/30 16:57 2016/05/30 16:57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12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244 : 245 : 246 : 247 : 248 : 249 : 250 : 251 : 252 : ... 1972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88904
Today:
132
Yesterday:
106

Calendar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