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널의 개입으로 은행 무장 점거와 인질극은 극적으로 막을 내렸으나 사건 자체가 종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할 일이 산더미였다.
현장을 수습하고, 증거를 채집하고, 피해 상황을 집계하고, 목격자들의 진술을 받고, 벌써부터 난리법석을 떨어대는 보험사 손해사정사들의 수사 방해를 사전에 차단하고, 개떼처럼 짖어대는 언론을 구슬리며 적당히 응수해주고...
거기다 아스널은 모든 용의자를 때려눕히지도 않았다. 난리 중 방어선을 뚫고 도망한 범인은 적어도 둘.
CCTV 화면을 분석하며 도주로를 파악하느라 다들 눈이 벌갰다.
밤이 짧았다.
『위층에서 커다랗게 폭음이 들리더군요. 강도들이 시키는대로 엉덩이를 깔고 바닥에 앉아있었는데 건물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을 정도였어요. 다들 놀라서 말도 못하고 침통하게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지요. 이젠 죽었구나 싶으니까 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빚진 닭 한 마리 갚아달라는 유언이라도 남겼는데 전 아무 말도 못 남기는 거잖아요. 소파 쿠션 안에 50달러 비상금 숨겨둔 건 영원히 비밀로 남겠구나, 젠장. 이러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더군요. 분위기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기둥에 깔려죽는 게 아니라 총에 맞아 죽을 거 같았으니까요. 뭐, 범인들도 심각하더군요. 진압부대가 들어왔다며 몇 명이 무기를 들고 허겁지겁 계단으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그 중에 하나는 이왕 망한 김에 다 같이 죽자며 우리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협박했어요.』
마이클 윈저는 인질로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방금 전 50대 여성의 간단한 인터뷰를 막 마쳤고, 지금은 학자금 융자를 상담하러 갔다가 벼락을 맞은 청년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형식에 맞게 이름과 거주지 주소, 연락처와 생년월일, 머리카락 색과 체격, 피부색 등의 신체적 특징을 먼저 적었고 그 다음으로는 은행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를 적었다.
볼펜으로 빈 칸을 채우는 일을 잠시 멈추고 청년에게 질문했다.
『혹시 범인들 얼굴을 보셨습니까?』
『까만 빛깔의 스키마스크를 쓰고 있었어요. 이 날씨에는 덥겠다... 잠시 그런 생각을 했죠.』
『모두 몇 명이던가요?』
『안 세어봤어요.』
청년은 손바닥으로 버석한 피부를 문지르며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그래도 다섯 보다는 많았을 거에요.』
앞서 진술을 마친 여성은 손가락을 깍지 낀 자세로 딱 잘라 일곱 명이었다고 대답했다.
『좋아요, 그 다음에는요?』
『에... 총을 든 자가 제 옆에서 훌쩍훌쩍 울던 여자의 멱살을 잡았어요. 죽이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단순히 울음을 그치게 만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겁하게도 전 멱살이 잡힌 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순간 여자가 애원하는 시선으로 내 쪽을 쳐다보더군요. 그런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요. 겁도 많아요. 싸움 같은 건 전혀 못 해요. 여자를 놓아주고 대신 남자인 날 붙잡으라는 말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부탁하고 싶어도 입술에 풀이 발려진 것처럼 딱 붙어서 움직이지도 않더구먼요.』
남자의 뺨이 수척해졌다.
『그래서 눈을 감았어요.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넥타이를 매고 있지 않았음에도 숨이 막힌다며 매듭을 푸는 시늉을 했다.
『쾅 소리가 나자 그 여성분이 총에 맞아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천만 다행스럽게도 굉음의 정체는 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아니고 천장으로 반경 1미터의 둥그런 구멍이 뚫리는 소리였다.
깨진 벽돌조각과 같은 부산물들과 같이 레이저로 도려내진 구멍을 통해 아래로 떨어져 내린 아스널은 왼쪽 무릎을 구부린 자세 그대로 활시위에 화살을 세 개를 끼워 넣고는 조준도 채 하지 않고 성급히 활을 당겼다.
『와우! 적어도 제 눈엔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눈 깜짝하는 사이에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쓴 자들이 쓰러졌다.
『무슨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나 봐요. 뭔 놈의 화살이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도 날아갑디다.』
청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평범한 사람이고, 싸움은 쥐뿔도 모르고, 겁이 많다면서 그 와중에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 다 보고 있었단다.
『옆에서 억, 억, 억! 이러고 쓰러지니까 총을 든 범인이 여자를 방패처럼 세우고 기둥 뒤로 숨으려 했어요.』
천장에서 뛰어내렸던 아스널이 자세를 바로잡고는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찰떡이 벽에 붙는 찰진 소리가 났어요.』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화살은 C자형으로 휘어 날아가 범인의 이마 한 가운데를 정확히 명중시켰다.
「일반적인 화살촉이었음 머리가 둘로 쪼개어졌을 거야. 뇌수와 파편이 수박 찌꺼기처럼 사방에 날렸겠지. 실리콘 코팅 덕분에 두개골 골절로 끝났지만... 뭔 놈의 영웅이.」
장단을 맞춰주며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지만 속으로는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가던 범인을 동정했다.
아무리 여자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지만 꼭 이마를 노렸어야만 했을까.
「나라면 손을 노렸을텐데. 손가락을 전부 날려버리면 방아쇠도 다신 못 당길 것이고...」
겉으로는 뻥긋도 하지 않았지만 마이클은 잠시 그런 생각을 품었다.
작성하던 서류를 대충 정리하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자정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품을 참으며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스크레칭을 했다.
오늘 하루는 충분히 월급 값을 했어. 착한 일 했네.
책상 서랍을 열쇠로 잠구고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늘 하던 버릇대로 흠집투성이의 시계 유리판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언제부터 경찰서 옥상이 흡연구역 역할을 떠맡게 되었는지는 불명이다. 4~5년 전에는 화장실이 흡연 장소로 애용되었지만 몇 명의 금연 성공자들이「너구리 소굴이 아닌 장소에서 시원하게 똥을 쌀 권리」를 주장하면서 장소가 변경되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사실 경찰서 건물 자체가 시민의 보건과 위생 안전에 관한 어쩌고의 규정에 의거하여 법적으로 금연 건물이었다. 따라서 실내 흡연은 엄연히 금지되어 있다.
가장 한가한 시간이었음에도 붉게 점멸하는 작은 점이 몇 개 시야에 들어왔다. 부근으로 조명이 거의 없었기에 어둠에 잠긴 그들의 얼굴 생김새를 알아보기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간절한 연기 한 모금을 썩어가는 폐 안쪽으로 집어넣던 경찰관들은 서로에게 굳이 신경을 쓰지 않고 각자의 룰 위반 행위에 몰두했다.
마이클 윈저 또한 목례나 손 흔들기와 같은 행위를 생략한 채 적당한 간격으로 그 속에 스며들어갔다.
멀리서 누군가가 지은 죄를 자복하며 가래 끓는 소리로 콜록 기침을 터뜨렸다.
솔직히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한때 해비 스모커였던 시절이 분명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담배를 멀리하게 되었다. 특별히 금연을 하게 된 계기는 없었다. 귀찮아서 - 이유를 들자면 그 정도였다. 손가락 끝이 누렇게 색이 변하는게 싫었다던가, 잇몸이 약해졌다던가, 구강 악취가 심해졌다는 식의 현실적인 이유를 내걸지 않을 까닭도 없었으나... 담배를 피우려면 의자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세워 옥상까지 가야 한다는 점이 너무나 귀찮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담배를 끊고 난 다음에도 그의 옥상 출입은 여전했다는 부분이다.
「뭐, 여기선 눈치 안 보고 적당히 농땡이를 칠 수 있으니까.」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츄파춥스를 꺼낸 마이클은 흡족한 표정으로 막대 사탕을 입에 물었다.
바람은 시원했고 도로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배기가스 냄새가 맡아졌다.
뺨을 안으로 오므려 쪽쪽 소리가 나도록 단맛 강렬한 사탕을 빨면서 난간에 두 팔을 걸쳤다.
『아유, 이제 좀 살 것 같다.』
모처럼 쌍꺼풀 없는 그의 눈매가 예쁜 곡선을 그리며 구부러졌다.
그의 몫으로 떨어진 서류 작업은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은행 강도의 침입과 동시에 신속하게 비상벨을 울렸던 보안요원이 강도들에게 보복을 당해 흠신 두드려 맞은 탓에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쇄골과 코뼈가 부러졌고 왼쪽 안구의 출혈이 심각했다. 특히 눈 상태가 나빴다. 하필이면 범인이 내리꽂은 주먹이 보안요원의 눈두덩을 정확히 명중시킨 탓이다. 의사는 며칠 경과를 두고 봐야 실명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의료진들은 운이 나쁘면 영구적으로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며 그의 불운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겠노라 약조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너무 성실하게 굴어도 문제라니까.」
쫍, 소리가 나게끔 사탕을 입 밖으로 빼냈다가 그걸 다시 혀로 살살 굴렸다.
「가족들에겐 이미 연락이 갔을 거고...」
진정제를 투여 받고 침대에 누워있을 환자에게 사건 정황을 따져 묻는 건 강력범죄 전단반에서 할 일이다.
일개 경관인 마이클이 해야 할 일은 사소한 것으로, 범죄 피해자에 대한 치료비를 일차적으로 시에서 부담을 하고 있기에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예를 들어 의사의 진단서라던가, 피해 당사자의 동의서 같은 거 말이다.
여기서 동의서라 함은 치료비를 지원받음으로 시를 상대로 고소하지 않겠다 약속을 받아내는 걸 의미한다.
물론 그가 근무처인 내셔널 밴코프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건 자유다. 직접적으로 주먹질을 한 범인을 확정하면 놈을 상대로 민사소송도 가능하다. 대상이 시청이나 경찰과 같은 공공기관만 아니면 되었다. 도주한 용의자 체포와는 별개로 경찰국장은 이 부분에도 매우 신경을 썼다.
「어디 보자... 이제 자정이 막 지났군. 시간이 시간이지만 응급실은 문 열려 있겠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손목시계를 다시 흘끔거렸다.
야간근로를 끝마친 뒤 퇴근길에 겸사겸사 병원을 방문한다는 계획은 아예 머릿속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이러라고 꼬봉을 두는 게지. 흐흐...」
마이클은 리처드 그레이슨을 살살 꼬드겨서 이용해먹을 작정이었다.
양심의 가책? 그런 건 100년 전 곰팡내 나는 중고 서적들과 같이 하여 헐값으로 팔아치워 버렸다.
기분전환, 기분전환.
어깨를 활짝 편 채로 운동부족으로 뻣뻣해진 몸통을 좌우방향으로 휘휘 돌렸다.
어느새 물고 있던 츕파춥스 캔디가 절반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럼 나머지는 짝퉁 딕에게 던지고, 나는 슬슬 사복으로 갈아입고 퇴근 준비나... 음? 잠깐만.」
어째서인지 길 건너편 건물 고가수조 위에 똑바로 서있는, 사람임이 거의 확실한 인영이 보였다.
고가수조? 담배를 피우기에는 영 적당하지 않은 장소다.
허깨비인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더 자세히 보고자 마이클의 콧잔등으로 잔뜩 주름이 졌다. 자살 희망자인가. 글쎄다. 한밤중인데다 거리가 제법 있는 만큼 맨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었다.
지금으로서는 남자라는 거, 그리고 인상적이게도 머리에 붉은색 헬멧을 쓰고 있다는 것 정도의 단편적 지식밖에는 알 수 없었다.
Posted by 미야